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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지게의 우수한 과학성을 알고 있습니다.
경제 발전과 이동 수단의 변화로 세월이 변해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지게의 과학성은 외국 사람들도 연구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 창의성을 가진 우리 민족은 언제인가 세계 제일의 명품 배낭을 만들어 지게의 우월성과 과학성을 뛰어 넘는 멋진 날이 오길 기대해 보면서 두서없는 낙서좀 합니다.....
사람마다 신체적인 차이...반응의 차이,,,느낌의 차이...등등~~
개개인의 차이와 이해도는 같을 수 없습니다.
운동기구중 탁구 라켓..배드멘턴 라켓 등등~`의 세계 제일의 스포츠 사에서 만든 제품도 사람마다 느낌의 편차가 심해 각기각자 사용하는 제품이 틀립니다.
좋은 글립감을 만들기 위에 탁구 손잡이를 칼로 깍고 배드맨턴 손잡이를 덧되어 테이핑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자동차 또한 어떤 사람은 승용차를 선호하고 언떤 사람은 RV차를 선호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전륜구동을 좋아하고 후륜구동인 자동차를 선호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드라이빙 승차감을 마치 전문가이양 들먹이지만
각종 편의 장치사양과 제원을 알고 엔진 성능까지 알고 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왜? 일까요...................
좋은것, 맛있는것은 입소문에 호기심을 자극하고 마음을 편승하면 감성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은 제품은 그져 명품이 아닐것입니다.
회사의 노하우나 기술력이 수많은 고객들의 감성에 감동을 주어야만 명품이란 제품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고향이 오지중에 오지 깡촌에 살면서 초등하교 5학년때 고무신을 신고 처음으로 해발 1000고지를 올랐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의 감흥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설레임으로 다가 옵니다.
철없던 어린 시절 고무신을 신고 올랐던 산을 ㅎㅎㅎㅎ
몇해전 싸구려 배낭을 가지고 지리 대화(화대) 종주를 한 기억이 남니다.
종주를 무사이 마치고 집에 오자말자 가위를 가지고 배낭을 작살 내었습니다.
그때 배낭의 일부분인 버클과 클립,D고리 등등 ....소모품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네요...혹~` 써먹을때가 있지 않겠나 싶어서..ㅎ
저가 그 배낭을 가위로 난도질한 이유는 위태로움이었습니다.
산행중 몸이 불편하면 쉬엄쉬엄 쉬어 가는 체질과 성격입니다.
배낭이 몸이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깨끈과 배낭을 크로스하는 바느질 접합부분이 불안해서 거의 반쯤은 뜯겨
겨우 어깨웨빙끈이 지탱하여 종주한 경험이 있습니다.
장비는 좋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안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좋고 안전하고 가격이 저렴하면 금상첨화지만..........
잘 아는 지인 한분이 남들이 선호하는 메이져급 배낭을 거금을 주고 구입하고 산행 하루만에 방출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도 본인 체형에 맞지 않으면 사용하질 못합니다.
기존 제품에 길들어져서 새로운 제품에 적응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아님 신체적인 조합이나 체질 성격등이 제품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지 않을까요.
몸을 옷에 마추어 입는것보다 옷을 몸에 맞쳐 입는게 더 효율적이듯
배낭 또한 자기 신체 조건에 알맞게 궁합이 맞아야 멋진 즐거움을 누릴수 있다는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보네요.
저 아래 어떤분이 말했듯이 무슨 어떠한 배낭이라도 명확한 답이 없을것 같습니다.
아이폰...안드로이드폰이 어느것이 좋은가? 무엇이 틀린가?
저는 삼성 S2를 사용합니다만 어느것이 좋은지 답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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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황혼길 굽은 노인이 지고 가는 지게엔 행복이 묻어났었다.
지게는 그 집의 장정이 몇 명이나 있는 지 알 수 있는 척도였던 시절이 있다. 장정 한 명 당 하나의 지게가 꼭 있었던 시절, 새벽장을 나가는 아버지의 등에 진 지게에 달려 올 사탕봉지나 주전부리가 욕심 나 먼 길 동구밖까지 어둑해지는 황혼길이면 마중을 나가던 아이들이 산촌마을에서 5일마다 만날 수 있던 빛 바랜 사진 속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지금이야 개량형의 지게가 도시를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번잡한 도시보다 산촌에서 더 필요한 운송수단이고 도구였다.
소 먹일 꼴을 베고, 퇴비를 만들 풀을 베거나 땔감을 해도 이 지게로 져날라야 했고, 밭에 두엄을 내고 집을 지을 때 방구들을 놓을 구들장도 지게가 없으면 옮길 수 없었다.
지게질만 열심히 해도 식구들의 입에 거미줄은 치지 않으리란 생각으로 사랑하는 동네 처자를 앉히고 야반도주를 할 때도 지게가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요즘으로 치면 포르쉐나, 페라리 못지않은 남자들의 능력을 알아 볼 수 있는 척도였으니. 그런 지게가 유일하게 우리 역사 속에서 악용 된 사례는 단 한가지다. 바로, 늙어 이제 일을 할 수 없는 부모를 깊은 산 속이나 동굴 같은 곳에 져다 버리는 고려장 풍습이다.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 맥을 함께 한 지게에 대하여 오늘 한 번 제대로 알고 넘어가자.
요즘은 지게도 장식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원형 그대로의 지게도 카페의 한쪽 벽면을 장식하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된 지 오래다. 심지어 디딜방아나 밭을 갈던 쟁기도 인테리어 소품이 되었으니 거기에 비하면 크기가 작은 지게야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소재일 수도 있겠다.
때때로 만나는 축소된 형태의 지게는 원형을 그대로 살린 걸 만나기 어렵다. 말 그대로 축소된 모형이 아니라 모방을 한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걸 시장에서나 어떤 행사만 열리면 어김없이 판매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옆의 사진에 보이는 지게는 아버님께서 생전에 만드신 소품으로 지게의 원형을 높이 50cm 정도로 축소한, 그러나 축소한 모형 중에서는 비교적 큰 지게다. 수필을 쓰는 이(사과꽃 일기 ◀링크)가 가까운 곳에 몇 년 전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선물로 전한 것인데 현대식 인테리어를 한 공간에서도 잘 어울리게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게는 이렇게 멋진 인테리어 소품으로 변신 할 수 있다. 누군가 이런 지게를 구입을 원하는 이들이 있겠기에 여기 합당한 가격을 대략적으로나마 제시하겠다.
이렇게 원형을 제대로 살려 만든 지게는 가격이 아직 정확하게 책정 된 것은 없지만 대략 10~20만원을 호가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사진의 지게와 같이 원형 그대로 축소한 지게와 거기에 맞춰 엮은 바소고리까지 갖춘 경우엔 바소고리 하나를 엮는데도 하루로는 어려운 제작공정을 감안하면 이 바소고리는 별도로 구입해야 할 것이다.
등태와 밀삐 등의 제작에 따른 수고도 상당하다. 그러나 이 밀삐와 등태는 원래 지게에 딸린 것으로 별도로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
모형이라고 해도 이와같은 지게를 원형 그대로 만들려면 지게를 제작하는 시간은 똑같이 걸린다고 봐야 한다. 여기 보이는 지게와 같은 종류의 축소된 지게들은 양양지역만 해도 군청과 서면 면사무소, 서면의 서광농협, 많은 지역의 유명 식당 등에서 만날 수 있으니 아버님은 떠나셨지만 고집스럽게 원형을 유지한 소품을 제작하시고자 했던 그 자존심만큼은 지금도 감사할 따름이다.
먼저 나무를 구해 놓은 상태서 지게를 거는데(지게는 만든다고 하지 않고 건다고 한다.) 걸리는 시간은 최소한 2일 정도 잡아야 한다. 새롭게 건 지게는 그늘에서 며칠 동안 말려야 비틀리지 않고 균형이 잘 잡힌다.
나무도 소나무를 주로 사용하는데 아주 드물게 노간주 나무로 만든 지게도 있다. 이는 무게도 가볍거니와 나무의 결 자체가 질긴 특성이 있고, 소나무나 노간주나무에서는 송진이 있어 나무 자체가 썩지않고 오래 원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님께서 제작하셨던 소품들은, 내가 아버님과 오랜 세월을 어머님와 관련된 일 등으로 의절을 한 채 살다 찾아 뵈었을 때 얼마간의 용돈을 쓰시라고 지갑에 넣어드리면 하나씩 주셨었다. 용돈벌이로 거셨던 지게들을 모방하여 모조품들이 2만원 정도로 시장에 널리니 그만두셨던 까닭에 이전에 걸어 놓으셨던 것만 6개를 받았다. 더 거시려고 했으나 연세 탓으로 손을 대지 못하고 소일거리로 밭에 푸성귀를 심어 용돈을 드리려고 들리면 한소쿠리씩 담아 주시곤 했다.
지게엔 과학이 있다.
지게에 뭔 과학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게는 우리 한글의 자음 ‘ㅏ’자형의 나무를 통채로 다듬어 사용하거나 세로로 반을 톱으로 켜 거는데 아마도 건다는 말을 사용하게 된 연유도 음양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 지게의 형태꼴의 반대인 모음 ‘ㅓ’자가 사용되지 않았나 싶다. 미국인들이 처음 이 지게를 보고 ‘A프레임’이라고 불렀다는데 이는 지게의 정면을 보면 영어 알파벳 ‘A’를 닮았기 때문이다.
자, 그럼 먼저 지게의 역사를 간단하게 알아 보자.
지게는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 된 것으로 보인다. 1000년이 훨씬 넘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구로 원형 그대로 오랬동안 사용되어 왔는데 이는 산악지형이 발달한 우리나라의 형편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달구지와 같은 가축을 이용할 형편도 못 되는 이들이 많은 까닭도 있겠으나 우선 달구지와 같은 걸 끌려면 넓은 길이 있어야 했는데, 서해안이나 넓은 강의 유역이 아니면 그런 지형은 없다. 결과적으로 지게만큼 유용한 운반수단은 없다는 이야기다.
지게의 부분별 명칭
먼저 지게의 양 쪽 기둥을 가로지른 나무가 있는데 이는 ‘세장’이라고 한다. 맨 위의 가로막대는 ‘윗세장’이라 하고 그 다음 칸이 지게를 어깨에 지는데 사용되는 짚이나 피나무껍질로 만든 ‘밀삐’를 묶는 ‘밀삐세장’이다. 이 밀삐세장엔 ‘탕개줄’을 묶어 뒤틀림을 방지하는 ‘탕개목’이 동시에 고정된다.
다음 세번째 가로지른 세장이 지게를 진 사람의 허리에 닿는 ‘허리세장’이고, 맨 아래 네번째가 ‘아랫세장’이다. 사진에 보이는 노란색 나일론 끈으로 엮은 줄이 바로 지게를 뒤틀리거나 좌우가 분리되는 걸 방지하는 탕개줄인데, 60~70년대엔 주로 군용전화선이 사용되었고 예전에는 삼줄이나 질긴 짐승의 가죽으로 탕개줄을 묶었다.
사람이 지게를 졌을 때 등에 닿는 부분에 댄 짚으로 두툼하게 엮은 걸 ‘등태’라고 했으며 밀삐도 아랫쪽 지게 발목에 묶는 부분을 ‘밀삐아랫도리’란 이름으로 불렀다.
지게의 뒷면에서 보면 팔처럼 뻗은 물건을 지탱하는 부분을 ‘가지’라 했고, 탕개줄을 비튼 나무를 ‘탕개목’이라고 했는데 아랫쪽은 짧고 위만 밀삐세장에 걸릴 정도의 길이인 게 보인다. 그 이유는 허리세장에 굳이 걸지 않아도 되지만 허리세장에도 걸리게 하면 탕개를 틀 때 걸리기 때문에 한쪽만 밀삐세장에 걸릴 정도의 길이로 한 것이다.
지게엔 짐을 얹고 고정을 시키기 위한 ‘바(끈)’가 있는데 이를 강원도에서는 ‘지게초리’라 했으나 원형은 ‘동바’가 표준말이다.
지게의 윗세장 위로 솟은 부분은 ‘세고자리’라 했고, 아랫세장 아랫부분은 ‘장치다리’라 불렀다. 장치다리 아래를 10cm 정도 끝에서 위쪽으로 올라간 위치를 약간 톱질을 한 다음 비스듬히 깎아 그곳에다 밀삐아랫도리를 묶었다.
이 지게를 지는데 사용되던 도구가 세 가지 있는데 지게를 땅에 고정하거나 무거운 짐을 지고 균형을 잡을 때 쓰는 ‘지게작대기’와 자잘한 물건들이나 두엄을 낼 때 가지에 얹고 세고자리에 묶어 쓰던 ‘바소거리’, 그리고 ‘똥장군’이 있다. 두엄 중에서 분뇨나 오줌을 밭에 낼 땐 ‘똥장군’이라 부르던 진흙으로 빚어 노천소성(가마에 넣지않고 맨 땅에 빚은 질그릇을 놓고 주변에 불을 피워 굽는 방법)을 하고 연을 먹인 오지도 사용했다.
지게작대기도 Y자로 갈라진 부분은 ‘귀’라고 했으며 이 귀는 윗세장만 고정 될 정도의 길이인 6cm을 넘지 않게 만들었고, 손으로 잡는 긴 막대 부분은 ‘알구지’라 했다.
간단한 도구인 거 같은 이 지게에도 이렇게 부분마다 모두 제각각의 이름을 붙여 준 것은 지게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고마움의 표시였을 것이며 모든 사물에 신격을 부여하던 그들의 성품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 조상들이 모든 삶에서 음양과 오행의 조화로움을 바탕으로 도구를 만든 확증적인 근거는 지게초리를 묶는 위치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지게초리는 아랫세장의 왼쪽(뒤에서 보았을 때)에 묶어 짐을 지고 이 지게초리를 윗세장에 고정하게 했으며, 윗세장에 걸기만 하고 질 경우엔 오른손으로 잡아도 충분히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했다. 지게는 이렇게 하나하나 각 부분마다 그 용도에 맞게 규격을 맞춰 세장을 지르고 탕개를 튼 과학적인 결과물인 동시에 인체공학적이며 자연친화적인 운송수단이었다.
어느 정도 합당한 가격이 형성되고 시장성만 확보된다면 나라도 아버님께서 거시던 방식 그대로의 지게를 걸겠다. 밀삐며, 등태까지 원형 그대로 살려 지게의 과학적 우수성을 살린 지게를 말이다.
이 포스트가 유익한가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면 아래 내용을 읽으신 다음 포스트의 하단에 있는 박스의 추천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지게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로 오늘 지게 이야기는 여기서 줄인다.
한국전쟁이 치열할 대인 1950년대의 일로 미국엔 ‘지게’라는 도구가 없었기에 우리의 이 지게가 지닌 힘을 과소평가해서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려다보니 낭패를 본 이야기다.
어느날 한 미군 조종사가 사고로 깊은 산골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중상을 입었는데 조종사를 구조한 마을사람들의 극진한 정성으로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부대로 돌아 갈 수 있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헨드폰이나 전화가 없던 때였고 정말 차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많던 시절이니, 조종사는 자신의 부대와 연락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거니와 산촌 사람들이다보니 말도 통하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어느덧 건강을 회복한 조종사가 부대로 복귀 한 뒤에야 부대장에게 자신이 사고를 당한 경위와 마을사람들의 극진한 정성 보살핌으로 무사히 귀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고하니, 이에 감복한 부대장은 몇 명 안 되는 그 산촌 마을사람들을 모두 부대로 불러 선물을 줄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선물로 줄 물건을 운반 할 수 있는 도구를 하나씩 가지고 오라고 당부하게 했다는데, 그 당시 ‘먹고 죽을래도 먹을 게 없어 죽지 못한다’는 우스게 소리나, ‘목구멍에 거미줄 치게 생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기도 했고, ‘똥구멍이 짖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로 알 수 있던 가난이 한이던 때였으니, 당연이 먹을 것이 돈 보다도 더 귀하고 얼마나 사무친 설음이었겠는가. 그런 실정을 아는 부대장은 먹을 것을 선물로 나눠주기 작정하고 운반 도구를 가지고 오라고 했나보다.
부대장의 생각으로는 자신들과 비교해 덩치는 작고 체격도 보잘 것 없으니 당연히 근력도 자신들만큼은 되지 않아 보였을 것이다. 당연히 부대장 판단엔 들고 가면 얼마나 들고 가겠는가 싶어 가져 갈 수 있을 만큼 가져 가라고 한 모양이다.
부대장이 창고를 열고 혼자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가도 좋다고 큰 소리로 호기롭게 말했는데 잠시 후, 부대장은 얼굴이 노랗게 질리고 말았단다. 사람마다 등에 하나씩 지고 있는 도구의 유력에 놀라서 입도 다물어지지 않았다는데, 동네 사람들은 지게에 가득 물건을 지고 유유하게 부대 정문을 나서더란 것이다.
그들은 생전 보지도 못 한 ‘지게’라는 과학적인 운반도구의 위력에 놀랐으며, 자신들과 비교를 해 턱도 없이 작은 한국사람의 힘에 놀란 것이다.
미제는 양잿물도 좋다고 하던 때가 있다. 그러나 미국의 등반가 ‘취나드’나 프랑스, 독일, 등 유명한 등반장비 생산자들도 한국의 지게에서 자신들이 만드는 배낭의 등받이와 멜빵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걸 아는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제 지게가 농촌에서도 만나기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조상들의 슬기로운 삶은 배울 가치가 있다. 고려장만 아니라면 말이다.
첫댓글 비쓰리님 올려주신글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배낭에 대한 생각을 또 새롭게 만드시네요...감사합니다 ^^
가치 있는글 잘 읽고 갑니다.^^ㅎㅎㅎ
소중한 글 잘 읽었습니다...
지게 세대를 모르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겐 좋은 정보가 될 듯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옛것,우리것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일깨워주는군요^^*
훌륭합니다
ㅎㅎㅎ 재미나게 읽었습니다...흥미롭고 옛분들의 경험에 의한 지혜와 슬기에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다만 고려장얘긴...쫌...일제식민사관에 의해 부풀려진 얘기가 아닐까요?
아예 없진 않았겠지만...우리조상님들이 다...그랬던거같은 오해을 불러올수 있는데...아쉽네요^^
잘~~~읽었습니다. 자기몸에 맞지않으면 그림에 떡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