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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영적 장자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 본 문 : 빌립보서 4장 4절 - 13절 (신약성경 322쪽)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 “잘 되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참 멋지십니다.” “잘 어울리십니다.” “새로운 느낌입니다.”
우리 사람이 화를 내는 순간, 신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의학자들이 깊이 연구하고 조사했습니다.
① 우리가 화를 내는 순간, 당분이 조직 속으로 스며들어서 당뇨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② 혈압이 정상보다 90까지 상승하고 심장의 박동이 급격히 빨라져 뇌일혈이나 관상동맥의 원인이 됩니다.
③ 그리고 화를 내면, 근육이 긴장되고 팽창하기 때문에 원인 모를 근육질환들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④ 얼굴을 찡그리면 위장이 위축되어 소화기관이 산성화되고 위장 발작증세, 만성 위장질환을 가져옵니다.
또한 의학자들이 최근에 뇌를 연구하다가, 우리 뇌에서 모르핀이 나오는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사람의 기분이 좋아질 때에, 분명히 마약과 거의 똑같은 분자구조로 되어 있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게 되는데, 우리 뇌 속에서 분비되는 이 모르핀 마약은 경찰에 붙잡히지도 않습니다.
밖에서 강제로 주입한 모르핀은 몸을 해치지만, 우리 몸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모르핀은 암세포를 잡아먹습니다.
각종 염증도 치료합니다. 우리 몸의 모든 근육과 혈관과 신경조직과 피를 맑고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화를 내거나 긴장을 하게 되면, 뇌 속에서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나쁜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이 물질은 사람의 몸을 활성화하여 운동 능력을 높여 주지만, 너무 많이 나오게 되면 면역력을 파괴하여,
암 세포를 활성화시키게 되고, 건강한 백혈구를 잡아먹게 되어서, 우리 몸을 병들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이 원한과 분을 품고 하루 이틀 지내다보면, 우리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지고,
이 불쾌한 분노의 감정이 우리에게 지속되면, 암은 물론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한의학에서도 질병의 절대적인 원인이, 울화 즉 스트레스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풀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태생의 생리학자요. 스트레스 학설의 권위자인 한스 셀리에는 억지로라도 웃기를 권했습니다.
억지로라도 하루에 몇 분씩 깔깔대고 웃게 되면, 우리 몸에 굉장히 건강한 호르몬들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심지어 영화촬영을 하든지 연극을 할 때, 화를 내는 연기를 하는 사람들의 몸을 조사해 보니, 그 몸속에,
잘못된 호르몬들이 많이 생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짜로라도 화를 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기쁨과 웃음은 긴장과 피곤한 근육을 풀어 줄 뿐만 아니라, 오장육부에 활력을 불어 넣어줍니다.
애기 엄마들이 기뻐하면서 젖을 먹이면 좋은 영양소가 나와, 아이가 병균을 이기는 저항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분을 품고 젖을 먹이면, 아이가 설사를 하고 몸이 허약해진다고 합니다.
이는 정신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잘 참고 극복하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마음에 기쁨을 잃어버리고 나면 정신적으로도 매우 쇠약해집니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쉽게 분을 내고, 짜증을 내고, 인내심이 없어지고, 쉽게 낙심을 하는가 하면, 노이로제에 걸리기도 합니다.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면, 무슨 일을 해도 잘되고, 무슨 일이나 너무나 쉽게 풀립니다.
아무리 성능이 우수한 기계라도 늘 닦고 기름을 치지 않으면, 곧 마모되어 못 쓰게 됩니다.
기름을 치지 않고 계속 사용하면 과열되어 망가지고 말 듯이, 우리 육체도, 우리의 정서도, 우리의 영혼도,
기쁨의 기름을 치지 않으면, 행복의 기름을 치지 않으면, 우리 건강도, 인생도 금방 마모되고 맙니다.
많은 성도들이 빌립보서를 참 좋아합니다. 저도 제일 좋아하는 성경 몇 권 가운데 하나가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서는 늘 긍정적이고 희망적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에는 고난을 넘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받은 말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오늘 설교 본문을 빌립보서의 주제가 되는 본문으로 정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과 빌립보서 내용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바울이 고난 가운데 유럽의 첫 교회를 세웠고, 또 바울에게 기쁨을 많이 주었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중, 어느 날 밤 환상을 봅니다. 유럽으로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환상입니다.(행 16:9)
그래서 바울은 아시아 전도계획을 유럽으로 바꾸게 되고, 바울이 빌립보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여자를 고쳐 준 일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중,
옥문이 열리고, 이 일로 간수장이 회개하고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어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억울하다고 하소연 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기뻐 찬송하다 얻은 교회가 빌립보교회입니다.
이렇게 빌립보교회는 감옥과 함께 세워진 교회요.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쓴 편지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빌립보서를 바울이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이라 부릅니다.
빌립보서는 내일의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매 맞아 피 터진 몸으로 기록한 복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 헌금을 합니다.
추운 겨울 옷가지도 필요하고, 사식도 필요하고, 선교헌금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목회자 에바브로 디도를 보내 선교헌금을 전달하고, 사도 바울 곁에서 시중을 들도록 합니다.
그런데 시중을 들던 에바브로 디도가 오히려 중병에 걸려 눕게 되고, 이 일로 바울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건강을 회복한 에바브로 디도 편에 편지를 써서 빌립보로 보냅니다. 이 서신이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보내준 헌금에 대한 감사와 함께 빌립보교회가 직면한 교회적 문제들에 대한 복음적 대답을 적어 보냅니다.
그 중심에 흐르는 내용이 “항상 기뻐하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이 “기쁨의 복음” 입니다.
빌립보서는 넉 장 104절로 된 짧은 서신이지만, 기쁨과 관련된 단어가 스무 번 이상이 나옵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에 반복되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은 후렴이 있는데, 빌립보서의 후렴은 “기뻐하라.” 입니다.
기쁨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쁨을,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쁨과 크게 다르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범사가 잘되고 건강해지는 것이 예수 믿는 이유요. 예수 믿고 받는 세상적인 복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쁨의 이유가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 세상적인 내 환경이 달라지는 것만이 복음이 아니라,
지금 내 환경은 달라지지 않고, 아니 비록 고난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 말입니다.
빌립보서가 보여주는 사도 바울은,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상황과 환경을 뛰어 넘어 기뻐할 줄 아는 사람 바울은, 내가 기뻐하니 너희도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때로 질병으로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기쁨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가운데 “항상, 모든, 무엇에든지, 언제나” 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왜 “항상” 이라고 했을까요? 왜 “모든” 이라고 했을까요? 왜 “무엇에든지, 언제나” 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나도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모든,
무엇에든지, 언제나” 하는 말 속에는, 기뻐할 이유가 있을 때에 기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도무지 기뻐할 수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고,
정말 기도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속 에서도 기도하라는 뜻으로, “항상” 이란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참 억울한 일이 많습니다. 분통터질 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정말 기뻐하며 살아야 하는 줄 알지만,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정말 세상을 향하여 주먹을 휘둘러보고 싶을 정도로, 힘든 그런 삶의 환경들이 얼마나 많이 터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런 때에라도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의 존재입니다. 상황과 환경 따라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 자체 때문에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행복자들입니다.
그런 말 있잖아요? 월요일엔 원래 행복한 날, 화요일엔 화가 나도 기쁜 날, 수요일은 수도 없이 웃는 날,
목요일엔 목청 높여 찬양하고, 금요일엔 금새 좋고 또 좋아지는 날, 토요일엔 기쁨이 톡톡 튀는 날,
주일엔 주님과 함께 즐기는 날, 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종말론적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성경적인 “기쁨” 의 깊은 의미를, 참 쉽게 한 마디로 끝내버립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오늘 본문 10절 말씀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아멘입니까?
이어서 13절 말씀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기뻐할 조건이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예수 안에서” “주 안에서” 입니다. 바울의 신학은 한 마디로 “주 안에서” - 엔 크리스토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서 중에 “주 안에서”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무려 132회나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바울이 강조한 “주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의 기쁨” 은 구원 얻은 기쁨,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 구원함을 얻은 기쁨 세상에서 제일이라. 영광의 길 허락하신 내 주 예수 찬양하네.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기쁨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기쁨입니다.
상실되지 않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확실한데 이까짓 문제가 뭐가 그리 대수입니까?
천당과 영생이 이토록 틀림이 없는데, 영원하지 않는 이 땅의 고난과 슬픔이 어찌 나를 이길 수 있습니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을 수 있는 것도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손해 보는 것도 기쁨입니다.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든 사역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요 기쁨입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 이것은 「나는 상황의 주인」 이라는 선언입니다. 환경은 언제나 바뀝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영원합니다. 환경은 일시적이요. 순간적이요.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의 나의 존재, 나의 신분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에 울고 웃는 존재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환경을 뛰어넘는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 가리.
특별히 오늘 본문 마지막 절, 빌립보서 4장 13절은 “기쁨” 의 본질을 설명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다시 한 번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이 구절은 저와 여러분뿐만 아니라, 아마 예수 믿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다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의 “모든” 이란 말 대신에 자신의 소원과 자신의 꿈을 넣어 기도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고 성경 지식이 더해지다 보면, 그보다 더 깊고 놀라운 뜻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바울 선생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헌금도 하고, 감옥생활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에바브로 디도 편에 보내면서, 위로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고맙고 감사한 말을 전하면서, 더 놀라운 차원의 말로 감사를 했습니다.
“나의 참 기쁨은 너희들이 보내 준 이 위문품과 함께 너희들이 복음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거기에 있다.
나의 기쁨은 환경 여하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기 때문에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와 궁핍에도,
감당할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있다. 그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는 말씀은 무슨 소원이든지 이룬다는 뜻보다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기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배부른 것이 배고픈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배짱이 나왔을까요? 그가 기뻐한 것은 교회가 보내준 넉넉한 사식이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가 살아가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했고,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죽어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가장 당황해 하고 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생각하다가 그 반대현상에 부딪힐 때 너무나 쉽게 낙심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신앙이 현실 생활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성경 열심히 보면, 밥이 나오는가? 떡이 나오는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대답이 아닌,
사도 바울과 같이 세상적인 삶이 아닌 영적인 삶으로 보여주고, 말해 줄 수 있는 영적 대답 말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세속적인 것이 아닌 주님의 능력을 우리에게서 보고, 구원의 복음의 믿고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반드시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시련의 계곡을 건널 수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이라는 이 중간 다리를 견디지 못해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만사형통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 속담에 “시합 중에는 점수를 말하지 말라. 는 말이 있습니다. 중간에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직면하는 상황들을 너무 조급하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순간적인 전투에서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궁극적인 전쟁에서는 승리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풍부한 삶을 살았던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볼 때, 사도 바울의 생애는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그는 굶주리고 병들고 매 맞고 핍박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풍성한 삶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풍성한 삶 - 이것이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어떤 분의 글에 온도계와 같은 인생과 온도조절기와 같은 인생이 있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온도계” 와 같은 사람이 있고, “온도 조절기” 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내려가고, 날씨가 더우면 올라갑니다. 이처럼 온도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환경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신앙생활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기쁨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온도 조절기는 날씨가 추우면, 조절기로 온도를 올립니다. 조절기에 따라 방안 온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날씨가 더우면 조절기를 내리면 방안 온도가 내려 갑니다. 이처럼 온도조절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환경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온도계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돈이 온도계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주식이 온도계가 되기도 합니다. 주식이 올라가면 천국이었다가, 주식이 떨어지면 지옥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의 성적이 온도계가 됩니다. 자녀들의 성적이 올라가면 세상 살 맛이 나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적이 뚝뚝 떨어지면, 만사가 재미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온도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온도계에 집중하여 살면 환경 때문에 울고 웃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환경이 어렵지만 믿음의 기도로 극복해 나갑니다.
막다른 골목 같지만, 믿음의 눈을 열고 창조적으로 긍정적으로 능동적으로 뚫고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영역인 온도조절기의 영역을 계속해서 키워 가고, 그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기뻐하며 삽니다. 고난과 고통 중에서도 크게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인 저와 여러분은 내 삶의 환경의 노예가 아닙니다. 환경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의 삶을,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삶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