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李珥.율곡)와 고을 사람 가운데 뜻 있는 자들이 의논하여 향약(鄕約)을 행함으로써 퇴폐한 풍습을 바로잡기로 하였다(이는 율곡이 황해도 관찰사로 해주에 부임하여 실시했던 향약을 말한다.율곡전서 16권). 그리하여 여씨(呂氏)의 옛 법(여씨향약 즉,중국 북송때 향촌을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규약)을 다시 참작하여 절목(節目)을 더하거나 빼되, 현재의 풍속에 마땅하면서도 옛 제도를 저버리지 않고자 하였다. 또 모여서 향약을 읽는 법을 정하여 한 달 걸러 한 번씩 서원(書院)에서 향약을 강독하였다. 또 부자(夫子.공자), 사성(四聖.안자 자사 증자 맹자) 및 주자(周子.주돈이), 이정(二程.정호 정이), 주자(朱子.주희)의 위판(位版)을 강당에 설치하고 이곳에 이르는 자들은 모두 두 번 절하도록 하였다. 이어 문헌공묘(文憲公廟.고려 최충을 제향)에 절하게 하였으니, 곧 최충(崔冲)의 사당으로서 해주(海州)에 있었다. 당상(堂上)에서 예의를 갖추어 만나는 의식을 다 행하고 나면 마침내 향약의 조문을 읽고 강론한 뒤에 끝마쳤다. 또 민간의 마을에 주자(朱子)의 유의(遺意)를 대략 모방하여 사창(社倉)을 설치해서 봄가을로 2푼(分)의 이자를 거두어서 먹고 살기 어려운 사민(士民)을 구제하였다. 이어 약속(約束)을 만들었는데, 그 조례를 향약보다 더 자세하게 하여 서민에게 편리하도록 하였다. 또 강신(講信.한자리에 모여 술을 마시며 신의를 새롭게 다지던 일)과 위차(位次) 등의 의례(儀禮)가 있었다.
해주의 풍속이 처음에는 매우 야박했는데 이 이후로 문풍(文風)이 크게 변하여 예의를 차리는 풍속이 풍조를 이루었다. 비록 촌마을의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모두 알고 감화되었으니, 혹 처(妻)를 버린 지 수십 년 만에 다시 처음처럼 사이좋게 합한 경우도 있고 또 서인(庶人)으로서 노인이 상복(喪服)을 입고 노쇠한 것을 보고는 애통해하면서 지날 때마다 들러 위문하는 자도 있었다. 모두 말하기를, “이는 이 감사(李監司.율곡을 칭함)의 교화 덕분이다.” 하였다. 대개 이이(李珥)가 일찍이 본도(황해도)에서 은혜로운 정사를 펼쳤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