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창경원(昌慶苑, 1909년~1982년)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을 훼손하여 만든 공원. 1983~1986년에 거쳐 철거되어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되었다.
2. 상세
1909년(융희 3)에 일본인들이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 등으로 우울함과 걱정근심에 빠진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궁궐에 동물을 들여왔는데,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궁궐 안에 있는 전각을 훼손하여 일본식 정원과 건물을 세우고 급기야는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 으로 격하시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창경궁은 궁궐이 아닌 유원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순종이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상 일반 평민과 천민들도 궁궐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창경원으로 바꿨다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순종이 즉위하기 20여 년전에 갑오개혁(갑오경장)을 통해서 법적인 신분제가 사라졌으며 양반일지라도 관직에 있거나 어명이 있지 않은 이상 누구도 궁에 들어올 수 없었으므로 그 반론은 타당하지 않다. 게다가 순종 당시 실권이 누구에게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순종이 그렇게 명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온전히 순종의 뜻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일제시대에는 매주 목요일이 창경원 휴무일이었는데, 순종이 창경원을 산책하는 날이었다고 한다.
1922년에는 창경원에 벚꽃을 심어서 일본인들이 벚꽃놀이를 즐기도록 하였으며 1924년에는 불꽃놀이도 열었다. 일본인들이 기틀을 닦아서인지 앵무새들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어를 따라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폭격으로 우리가 파손될 경우 맹수들이 탈출하여 사람들을 해칠까봐 일제 군경에 의해 호랑이, 사자, 코끼리 등, 21종 38마리의 동물들이 몰살되기도 했으며 광복 이후 280마리 정도의 동물들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얼마 안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개전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됨에 따라 사육사들과 동물들은 순식간에 북한군의 치하에 놓였다. 근데 의외로 공산치하의 서울에서도 동물들은 안전하게 보살핌을 받으며 살 수 있었다. 아마 이데올로기와 동물을 전혀 관계가 없었을테니 가능한 일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1951년 1월, 중공군의 반격으로 1.4 후퇴가 이뤄지고 이때는 사육사들도 피난행렬에 동참했다. 2개월 뒤 사육사들이 창경원으로 돌아왔을땐 말그대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낙타, 사슴, 얼룩말 등은 도살 되어 잡아 먹힌듯 머리만 남아 있었고, 여우와 너구리, 오소리, 삵 등은 굴 속에서 혹은 돌 틈에 끼어 죽어 있었다. 그 밖에 다른 동물들도 모두 굶어 죽거나 얼어 죽어서 열어둔 동물사에 살아 움직이는 동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창경원의 텅 빈 우리에 전방의 군인들이 잡아서 보낸 곰과 산양, 노루, 삵 등이 다시 들어오자, 전쟁 후 피폐한 삶을 살던 시민들의 큰 위안이 되었다. 얼마뒤 동식물원재건위원회가 발족되어 정부기관 및 기업체, 독지가들로부터 42만2천 달러의 재건 기금을 모았다. 이런 노력끝에 드디어 1954년 7월 15일 창경원의 동식물원이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또 1955년 사자와 호랑이, 코끼리, 북극곰, 물개, 하마, 낙타 등 10여 종의 동물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으로 동물원 재건 2년 만에 100종 500마리를 전시하여 동물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동물원 외에도 놀이공원, 케이블 카 등의 시설이 운영되었다.
구경거리가 된다는 관용구로 "창경원 원숭이 꼴"이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도 4~50대 이상의 연령대는 자주 쓰는 말이다.
1970년대 서울 강북 지역에 살았던 국민학생들은 여기로 소풍을 많이 갔다고 한다.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복원된 뒤에도 종로구의 법정동 지명에서 '원서동'(창경원 서쪽), '원남동'(창경원 남쪽)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3. 이모저모
3.1. 사건사고
한국 동물원 역사의 산증인인 故 김정만 박사의 술회에 의하면 58년 그가 처음 들어왔을때는 제대로 된 동물학 장서조차 없었고 의료장비도 열악해서 동물이 아파도 원인을 못찾아서 장님 코끼리 만지듯 진료하다 맥없이 폐사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따로 책을 찾아 공부하고 일본 동물원에 가서 어떤 장비로 어떤 진료를 하는지 배우고 도입하면서 차차 보완해 나갔다고.
3.1.1. 표범 피습 사건
일제강점기 중의 일이라고 한다. 일본인 사육사가 한국표범 우리를 청소하고 있었는데, 닫힌 줄 알았던 내실 문이 열려 있었다. 살그머니 기어나온 표범이 사육사를 정면에서 덮쳤고(뒤에서 덮쳤으면...) 한데 엉킨 사육사와 표범은 한덩어리가 되어 우리에서 굴러나왔다. 이때 마침 동물원 경비를 맡고 있던 일본군 헌병 장교가 지나가다가 현장을 발견하고 군도를 뽑아 표범을 찔러 사육사를 구했고, 얼굴이 상처투성이가 된 사육사는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용감히 싸웠다 해서 훈장도 받았으나 창경원은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한편 표범은 몸에 칼을 꽂은 채 내실로 도망쳤고, 누구도 칼 맞은 표범이 있는 내실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헌병 장교는 빈 칼집만 차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표범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보름이 지나자 표범은 멀쩡하게 내실 밖으로 걸어나왔고, 군도는 후에 녹슨 채로 내실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꺼냈다고 한다.
후에 태평양전쟁 시기 모든 맹수를 독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독을 든 고기를 주니 사자나 호랑이들은 바로 먹고 자빠지는데 표범들은 그 희미한 독냄새를 맡고 바로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다른 표범들은 며칠 뒤에 결국 독먹이를 먹었는데, 한국표범은 스무날이 되도록 먹지 않아 결국 따로 처분해야 했다고...
3.1.2. 반달곰 사건
1956년 11월 13일 사육사 윤봉우씨가 곰 사육사에서 아침청소를 하던중 반달곰에게 엉덩이를 물어 뜯겼다. 반달곰이 관광객들이 가져온 음식 냄새를 맡고 청소를 하기 위해 열어놓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걸 보고 윤씨가 다급히 문을 닫자 화가 난 반달곰이 깔아뭉개고 엉덩이를 물어뜯은 것. 당시 경비를 위해 나와있던 육군헌병이 권총 3발을 발사, 반달곰은 사살되었고 윤씨는 목숨을 구했다.
3.1.3. 녹두 사건
1961년 9월 30일 동양철학을 연구한다는 백영주씨가 창경원에 들어와 사슴 한마리의 목을 잘라갔다. 외팔잡이인 백씨는 동양 철학에 관한 책을 읽다가 사슴을 활로 죽인다음 녹두를 잘라서 백일 동안 먹으면 천하장사가 된다는 얘기를 보고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 사건은 4년 동안 해결되지 않다가 백씨가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대한민국 수사진은 엉터리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을 옆자리에 있던 형사가 듣고 조사한 결과 범인이라고 밝혀졌다.
3.1.4. 비단 구렁이 탈출 사건
1965년 7월 29일 창경원 수조에 들어있던 비단 구렁이 한마리가 탈출했다. 길이 2.7m 직경 15cm의 이 비단 구렁이는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들이 베트남 현지에서 붙잡아 창경원에 기증한 것으로 수조를 받치고 있던 돌을 밀어내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당시 돈 3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3.1.5. 호랑이 사건
1976년 11월 10일. 충청도에서 목수일을 하다 서울구경 하러온 서씨는 창경원에서 친척들과 소주 4병을 마신 뒤 호랑이 우리 앞에 와 "이 호랑이는 사람 말을 잘 듣게 생겼다"며 철책 사이에 손을 밀어 넣어 과자를 주려 했다. 그런데 그가 일을 저지른 3시에서 3시 반 사이는 사육사가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던 시간이었다. 먹이 기다리던 호랑이는 서씨의 팔을 덮썩 물어버렸다. 사육사가 급히 기름 솜 방망이에 불을 붙여 위협하면서 10분만에 구해 냈다. 서씨는 병원으로 옮겨질 때도 술에 너무 취해 주변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는 기자들을 때리며 행패를 부리고 자신의 팔이 잘린 줄도 모르고 "그 호랑이 힘이 참 센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3.1.6. 재규어 탈출 사건
1978년. 밤중에 200㎜에 달하는 비가 내려 청계산 자락이 무너져 동물우리를 덮쳤다. 그 바람에 표범 두 마리와 재규어 한 마리가 없어졌는데 표범은 잡았지만 재규어는 잡지 못했다. 낮에는 민가에서 기르는 닭을 잡아먹고 밤에는 토끼를 잡아먹는데 워낙 민첩하고 신출귀몰해서 수렵협회와 협력해 숙련된 포수와 사냥개들을 지원받고 경찰병력 700명까지 동원했는데도 쉽게 찾지 못했다. 그러다 3일 째 되던 날 사냥개에게 덜미를 잡혀 동물원 직원이 추격끝에 사살했다. 마취총은 듣는데 10분에서 15분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워낙 잔뜩 성난 맹수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사살이 불가피했다고 한다.
3.1.7. 코끼리 사건
1981년 9월 27일 서울 상공을 지나던 제트기의 폭음에 놀란 코끼리 '자이언트'가 쓰러졌다. 몸무게 6.5톤 키 3m50인 이 코끼리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급성위식체현상을 보이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창경원 측은 긴급 상황에 묘방을 찾다 체인으로 들어올려 6시간 만에 코끼리를 살려냈다. "구출작전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육중한 체구에 폐가 압박돼 폐기능 마비로 숨졌을 것"이라고 당시 창경원 관계자는 밝혔다.
해당 코끼리는 1955년부터 태국에서 들여와 삼성 측이 창경원에 기증했으며, 1983년에 과천으로 이사간 뒤에도 건강하게 살다가 2009년에 5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3.2. 벚나무와 벚꽃놀이
1986년의 복원사업 당시 일각에서는 창경원 시절 일제가 심었다는 벚나무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는 주장과 그냥 나무이니만큼 그대로 두자는 주장이 맞서기도 했지만 결국 벚나무 일부는 베여지거나 일부는 서울특별시 여의도 윤중로 등으로 자리를 옮겨서 심기도 하였다. 창경원 시절부터 사육해온 동물들과 식물들은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졌다.
창경궁은 창경원 시절에만 해도 당시 어린시절을 보냈던 세대들에게는 궁궐이라기 보다는 어린이들의 놀이동산, 코끼리 먹이 주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당시 휴일만 되면 창경원 입구가 많은 인파로 붐벼서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암표상까지 기승을 부려 속앓이를 썩히기도 했다. 여기에 미아들까지 발생하여 어른들의 부주의까지 겹쳤고 화장실도 많은 인파 때문에 초만원이 되는 등 난장판이 되기도 하였다. 이 때의 기억이 꽤 남아있는 지 궁을 안내를 하시는 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아직까지도(2016년 6월 기준) 창경궁이 아닌 "창경원 벚꽃놀이가 언제인지 문의"하는 전화가 오기도 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1973년 서울어린이대공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1950년대~1960년대 수도권의 유일한 동물원 및 놀이동산이었고 어린이대공원 이후에도 유이한 테마파크(?)였다. 물론 그 시절 지방에는 수도권 수준의 테마파크는 경주월드 정도가 전부였고, 심지어 1970년대 일부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나체팅'의 장소로도 알려져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의 위상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그 시절 서울에 살았던 국민학생들의 소풍 장소이기도 했다.
3.3. 창경원 코끼리
창경원 시절 명물이자 마스코트격으로 떠올려지는 것이 바로 창경원 코끼리였는데 이 당시 창경원에 놀러왔던 중노년 세대들에게는 어린시절 창경원에 서식하는 코끼리에게 먹이를 던져주거나 코끼리가 길다란 코로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 하거나 환호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던 동물이었다.
우리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박물관. 창경원박물관, 어원박물관, 이왕직박물관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으며 현재는 제실박물관으로 통일된 상태다. 정확한 명칭은 아직 발견된 사례가 없다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박물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1차사료에 해당하는 여러 서류나 자료가 관리가 귀찮다는 이유로 폐기처분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건립 이유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려진 이유가 없다. 순종이 백성들에게 소장품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경궁에 세웠다는 설이 전해지긴 한다. 하지만 대한제국 궁내부 소속 일본인 관리들이 대한제국의 보물을 소장하기위해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일까 지붕 디자인은 한옥보단 천수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되었든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되고 놀이시설, 동물원과 함께 창경원의 일부로서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며 명칭도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 되었다고. 아마 창경궁이 창경원일 때의 역사를 기억하는 이 페이지를 어떻게든 볼 노령이신 분이라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대한민국에 세워진 최초의 박물관이고 순종황제의 의지로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현 국립중앙박물관의 직계 조상으로 대우받고 있다. 물론 정말 순종황제의 의지로 세워졌는지 아니면 창경궁 온실이 그렇듯이 순종황제를 위해 짓는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을 훼손하기 위한 일제의 수단 중 하나였는지는 알 수 없다.
1937년부터 제실박물관이 덕수궁으로 이전하면서 함인정 남쪽 4층짜리 일본식 건물에 있던 장서각이 위 건물로 이전되었으며, 해방 이후인 1948년에는 미군정에 의해 운영권이 구왕궁사무청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장서각에 보관돼 있었던 조선왕조실록 적상산본 등 귀중한 고문서들이 소개도 못한 채 북한군에 의해 일부 노획/반출되었다.
1955년부터 장서각 관리 소관업무가 구왕궁사무청에서 창경원사무소로 이관되었고, 1961년 9월 13일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어 1969년부터 관리 소관업무가 또다시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으로 이관되었다. 1981년에 장서각에 보존된 문서 전량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옮겨진 이후 빈 건물로 방치되었다가 1992년 11월 2일에 철거되었다. 현재 창경궁의 궁궐 권역이 그러하듯 나무가 심어져 공원처럼 꾸며진 공터다.
4. 철거와 원형 복원
이후에도 창경원은 서울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계속 남게 되었지만 일제가 만든 잔재이니만큼 궁궐로 복원해야한다는 움직임에 따라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에서 창경궁 복원계획 및 서울대공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창경원 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궁궐을 복원하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경기 과천시에 짓는 새 공원으로 이전하는 계획이었다.
1983년 12월 일반인의 출입 및 관람을 중단하고 일제가 뿌려놓은 잔재들과 일본식 건물 및 정원 등을 모두 없애고 역사적 고증에 따라 당시 존재해 있었던 전각과 편전들을 복원한 끝에 1986년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일부 전각과 편전 등은 아쉽게도 복원하지 못한 채 소실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계획에 따라 창경원에 있던 유원지는 놀이기구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전, 각각 1984년과 1985년에 재개장했다. 그리고 유원지와 동물원, 식물원 터는 거의 대부분 산책로로 다시 바뀌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젊었을때 구경만 한게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