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관연락선' 현장을 찾아서
부산세관서 보이는 저 부두, 일제의 수탈선이자 전시노예선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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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중구 중앙동 부산본부세관 옥상에서 본 부산국제여객터미널과 부산항. 일제강점기 때 부관연락선이 다닌 이곳은 일본으로 가야 했던 조선 백성이 마지막으로 본 고국산천이자 해방 뒤 귀환동포를 처음 맞이한 조국 풍경이다. 강덕철 선임기자 kangdc@ |
- 현 부산국제여객터미널
- 옛 부산역 터 무역회관 자리
- 제국 일본과 식민지의 경계지
- 한반도와 중국 대륙 침탈 위해
- 부산의 '부' 시모노세키 '관' 딴
- 정기 여객선 부관연락선 운항
- 더 커지고 운항시간 줄인 배와
- 日 산요선~도카이도선부터
- 경부·경의선~만주 잇는 철도로
- 수많은 인적·물적 자원 약탈
동아대 다우미디어센터 장소영(31) 간사와 서영우(22) 동아대학보 기자, 동아대 박민정(27) 홍보팀 직원과 함께 부산 중구 중앙동 부산세관 옥상에 올라갔다.
거기서 일제강점기 부관연락선 부두로 이용되던 현재의 부산국제여객터미널과 그 연락선과 연결됐던
옛 부산역 터(현 무역회관)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일제시기에 돈을 벌기 위해, 유학 가려고 바로 저 부두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힘없는 민족의 아픔과 불안감으로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가면서 그 배에 승선했던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반대로 한반도와 만주에서 돈을 벌려고, 침략과 수탈을 목적으로 그 배를 타고 온 일본인의 모습도
서로 얽혀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일렁거렸다.
일본이 한반도와 대륙을 침탈할 목적을 갖고 부산에 처음 정기 여객선을 운항한 것은 1905년 9월 11일이었다.
전날인 10일 일본 시모노세키항을 출발하여 11시간30분 항해 끝에
이튿날 1600t급 여객선 이키마루(壹岐丸)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단순히 일본 배의 부산 도착이 아니라 한반도와 대륙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쓰시마마루(對馬丸)도 함께 운항하였다.
앞서 같은 해 1월 1일부터 경부선 철도가 열려 부관연락선은 시모노세키와 고베 사이의 산요선,
고베와 도쿄 사이의 도카이도선 등 일본 철도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경부선·경의선, 만주의 만봉선·남만주철도 등과도 연결되었다.
■ 꼭 기억해야 할 부산의 역사기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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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관연락선 이키마루 |
이들 배를 일제강점기에 '관부연락선'으로 불렀다.
관부연락선이란 명칭을 대중화시킨 사람 중 한 명이 소설가 이병주 씨였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 간 하태림을 주인공으로 소설 '관부연락선'을 통해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애환과 광복 전후의 시련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상징물로 등장하는 게 관부연락선이다.
'관부'는 시모노세키(下關·하관)의 '관' 자와 부산의 '부' 자를 따
만든 것인데, 지금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부관연락선'으로 쓰고 있어
필자도 같은 단어로 통일한다.
부관연락선이라고 하면 대중에게 더 잘 알려진 사람이 있다.
1926년 8월 3일 부산으로 돌아오던 부관연락선에서 서른살 동갑이던 유부남
연인 김우진과 대한해협에 몸을 던진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인 윤심덕(1897~1926)이다.
그녀는 부관연락선에 몸을 싣기 전 오사카에서 28곡, 14장의 레코드판을 녹음하였다. 여기에 우리가 잘 아는 노래 '사의 찬미'가 들어 있다. 그녀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주요 가락을 사용하여
직접 가사를 쓰고 취입했다.
윤심덕의 비극적이지만 다소 낭만적인(?) 자살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녀의 마지막 취입곡 '사의 찬미'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노래는 원래 녹음 예정에 없던 곡인데, 윤심덕이 녹음하면서 조선말을 모르는 담당자를 속여
슬쩍 녹음했다는 말도 있다.
음악학자 노동은은 "'사의 찬미' 3절을 그녀가 직접 노래한 원반으로 들은 사람은 윤심덕의 심한
떨림(바이브레이션)이 마치 소쩍새의 피울음과 같은 절규와 어울려 노래가 어찌 이럴 수 있을까라고
소스라치게 놀란다"며 "이 노래는 그래서 허무의 찬미가이자 죽음의 찬미가"라고 했다.
그녀의 '사의 찬미'는 비가(悲歌)가 아니라 사가(死歌)라는 것이다.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로 손에 넣은 일제는 신라마루(新羅丸)와 고려마루(高麗丸)라는
3000t급 신예선을 취항한다.
1922년 5월 8일에는 경복마루(景福丸), 11월 12일에는 덕수마루(德壽丸), 이듬해 3월 12일에는 창경마루(昌慶丸)를 운항하는데, 이들 배는 3500t급으로 운항시간을 8시간으로 단축했다.
그러다 일제는 1932년 만주국을 건설하고, 중일전쟁 시기인 1937년부터 연간 수송객이 100만 명을 넘어서자
7000t급 대형 여객선 금강마루(金剛丸)와 흥안마루(興安丸)를 취항한다.
부산세관에서 보이는 현재의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은 바로 그 현장이었다.
그러므로 후대인 우리가 각별히 눈여겨 봐야 할 역사의 현장이며 생생한 '부산 도심 역사 기행지'이다.
부산역이 있던 무역회관 자리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근대사의 장소이다.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던 1942년과 1943년에는 더욱 커진 8000t급의 천산마루(天山丸)와 곤륜마루(崑崙丸)가
취항하는데, 중국의 대산맥 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을 넘어 팽창하려는 일제의 야욕을 반영했다.
이 연락선에는 대륙을 침략하는 일본군이 타고 왔으며, 그들이 내린 자리는 일본으로 끌려가는
강제징용·징병자·학도병·군위안부 등으로 가득 채워졌던 것이다.
이른바 '전시노예선'에 다름 아니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일제 시기 이런 상황을 거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마침내 패전을 맞고 한반도에서 물러간다.
그러면 일제 시기 우리나라에 거주했던 일본인은 얼마나 되었을까?
일본 후생성 등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인이 패전과 함께 돌아가기 시작하여 1961년까지 총 628만8665명이
귀환한 것으로 돼 있다.
부산상공회의소가 1944년 12월 말에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 전역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80만9900명, 부산 거주자는 7만1824명이었다. 서
울의 16만1818명 다음으로 부산에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
■ 귀환동포가 처음 밟은 고국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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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촬영한 부산의 부관연락선 잔교 모습. 김한근 부경근대역사연구소장 제공 |
그러면 해방 당시 징용 징병된 사람들과 함께
일본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일본 내무성 자료에 따르면 1944년 말 일본에 체류 거주한
한국인 수는 193만6843명이었으며, 후생성 통계로는 전시에
일본으로 노무 동원된 우리나라 사람은 66만7684명이었다.
1947년 9월 일본에 체류 중인 한국인이 총 52만9907명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140만 명 정도가 일본 패전 직후 일본에서 귀환했다.
한편 해방 후 며칠 뒤에 수많은 한국인들이 바다에 생매장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1945년 8월 22일 일본 오미나토항을 출항한 해군 수송함 우키시마마루(浮島丸 4730t)가 귀국길에 오른
한국인 강제 징용인들을 태우고 항해하던 중 기항지에 입항 직전 8월 24일 마이즈루만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대형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당시 일본은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부딪친 것이 폭발 원인이며, 승선인원 3990명 중 한국인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이 귀국길에 오른 강제 징용인들을 의도적으로 침몰시켰다는 설도 있다.
당시 생존자 증언과 일본 정부의 문서 등에 따르면 이 배에 한국인 7000~8000명가량이 승선해 있었다고 한다.
지면 관계상 부관연락선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도 일본이 독도와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인식하는 것을 보면 잊을 수 있는 역사가 있고, 잊을 수 없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부산세관, 무역회관,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은 민족의 아픔과 숨결이 살아있는 잊어선 안 될 공간이다.
동아대 다우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