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존재 가운데 속에 하나님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저 왔다가 그저 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겨자씨 속에 우주의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우주 생명의 모든 창조 진화의 과정이 다 들어 있습니다. 피어날 하나님의 생명이 모두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 자녀(아들)임을 자각하였습니다. 예수처럼 자기 안의 겨자씨 생명을 자각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아들, 딸)입니다. 이것이 거듭남, 참 깨달음, 원 복음(기쁜소식 복된 소식 Good News)입니다. 이러한 원래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버지(어머니)로 모시고 형제자매로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시작하는 겨자씨처럼 작은 하나님나라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귀고 있습니까?
(기도-말씀묵상)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살리는 천명 수행)
제로점(Zero Dot) 의식의 축복 제로점 의식은 겨자씨 생명의식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신학)
서울 사는 덕으로 여러 가지 편리한 이익이 있음을 알면서도 큰 손실중 하나가 밤하늘 별들을 보수 없게된지 오래라는 사실이다. 하늘이 맑은 초가을 초저녁에, 희미하게 깜박거리는 금성을 비롯한 몇개의 별들을 헤아려 보다가도, 그것들 마져 금방 보이지 않게 된다. 대도시 상공을 덮고있는 두꺼운 미세 먼지층과 공기 오염물질 때문이다. 중동 아라비아 사막에서 밤하늘이나, 지리산 노고단에서 보는 여름밤의 총총한 별들이 그립다. 아폴로계획의 일환으로 1969년에 성취한 지구인의 달 착륙기념 대형사진을 구해서 거실에 걸어놓고 아쉬움을 달랜다. 달표면이 넓게 펼쳐저 있고, 지구라고 부르는 녹색행성은 저 멀리서 캄캄한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엷은 청록색 축구공처럼 좀 외롭게 떠있는 모습을 달 표면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이 사진을 좋아한다.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두가지 부정하지 못하는 엄연한 사실을 재확인하곤 한다. 허허막막한 대우주 시공간 속에 떠있는 녹색별 지구는 우주속에서 한개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생각하는 나의 생명자체도 최장 20년 안에 지구 흙속에 묻힐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른바 제로점 의식(Zero-Dot Consciousness)이 나를 모든 구속에서 해방시킨다. 기하학에서 점이란 위치만 있고 크기나 질량이 없는 기호적 표식이라고 중학교 때 배웠다. 지구표면에 사는 우리들은 지구가 큰 별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우주 속에서 보면 지구는 글자그대로 한개 점이다. 태양계 마져도 한 점과 같다. 하물며 그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연약한 생물체로서 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자전하면서 공전하는 지구의 황도 운행이, 동일한 자리에서 진동하고 있는 점운동과 같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제로점의식이 나로하여금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현기증만 느끼게 하지 않고, 존재의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도록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 이 제로점 의식이 내게주는 자유와 해방감은 무엇보다도 나를 ‘공작인’(호모파베르)으로서의 엄숙한 의무감에서 해방시켜 ‘놀이하는 인간’(호모루덴스)에로 자유감정을 선물로 준다. 그리하여 루터가 경고했던 공로의식과 성취욕망과 그 강박관념에서 나를 해방시켜준다.노동의 신성성과 의무감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러나, 물질재화의 생산분배를 목적으로하는 경제활동으로서의 노동일반은 현대인 모두를 ‘경제동물’로 전락시켰다. 그렇지만,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보노라면, 한국에서 가장 비싸다는 서울강남구에 있는 20억이상 값나간다는 30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나의 청춘세월을 낭비하지 않았던 지난세월의 나의 선택에 대하여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나만이 아니라 단독주택 전세방을 살고있는 동포들에게도 기죽고 살아갈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알고보면 모두 한 개의 점안에서 진동하는 원자들이니까 말이다. 철학자 막스 쉘러가 쓴 『우주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최재희선생이 우리말로 번역한 문고판 명저를 대학생 시절에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에 예수회신부 떼이야르 샤르뎅의 『인간현상』과 함석헌 옹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서론부분을 읽으면서 천체물리학적 관점에서 생물진화론적 관점으로 나의 의식의 지향점을 돌리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세분의 공통점은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허허막막한 대우주속에서, 한 개의 점과 다를바 없는 지구 행성 안에서, 춤추는 소립자같은 인간생명일지라도, 그 나이가 45억년 내지 35억년 먹은 놈이니까 경이로운 눈으로 봐야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제로점 의식’을 또렷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앙리 베르그송이 그의 명저 『창조적 진화』에서 거듭강조하는 ‘생명적인 것의 특징’에 주목하게 된다. 아직도 한국 보수적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세기 제1장 그대로 창조론을 믿는 모양이지만, 진화론적 창조신앙이야말로 창조주 하느님의 오묘한 능력을 더욱더 절감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창조과학회’까지 조직하여 35억년 달려온 생명의 대파노라마를 보지못하게 하는 그들의 독단은 어디에서 오는가? 생명의 진화가 몇천년 몇만년만에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단위가 적어도 몇천만년 몇억년을 거쳐오면서 자연선택이라고 과학자가 말하는 그 변화가 ‘점진적이고 누적적으로’이루어져 왔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생각 못하는 상상력의 빈곤에서 유래한다. 그것도 그럴것이 하루살이 모기가 코끼리 일생을 이해못하듯이, 인간의 시간의식은 고작해야 몇천년 단위나 백만년 단위 이하인 것이지, 그 이상은 실감이 나지않는 추상적 숫자가 되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제로점의식이 내게 가져다주는 둘째 축복은 단연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사랑이다. 지금 65억 지구촌 동료인간들이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조립식 공산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조상대대로 35억년 길고 험난한 생명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온 연어떼들처럼 놀랍게 살아남은 결실물이라는 사실이다. 함석헌의 시구절을 인용하여 노래한다면 사람의마음은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도 모든 형상의 어미니”이다. 인간 생명만이 아니라, 인간종과 더불어 지구촌을 공유하는 다른 생명의 종(種)들이 또한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계획이 경제동물들의 독단과 독선이라는 것이다. 정치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종교신념이 다르다고, 피부색갈이 다르다고, 생명을 함부로 죽이거나 해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계원로중 한분이셨던 장공 김재준 목사가 85세경에 여신도들에게 내려준 휘호의 세글자가 < 生命․平和 ․正義 > 였다는 사실은 깊이 음미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제로점의식이 내게 가져다준 세 번째 큰 축복은 오랫동안 내 안에서 충돌해왔고 나를 괴롭혔던 서로 다른 두가지 견해 곧 인간정신의 초월능력 기원에 관한 실재관의충돌을 화해시켜주는 축복이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하여 독일관념론을 거쳐 현대 헤겔과 훗서얼에 이르는 ‘선험적 주체의 초월론’은 인간정신능력이 지닌 시공초월능력과 자기반성적 사유능력이 인간 본성에 갖춰져있는 선험적 능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의 불성론(佛性論)이나 유학의 심학(心學)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입장이다. 다른한편, 인간정신의 역사성과 시간성에 주목하거나 발달심리학에 정직하려는 사상계열은 고대 헤라클레토스로부터 현대 하이데거와 화이트헤드에 이르기까지, 인간정신의 자기초월능력은 삶의 경험적 과정과 세계구조 속에서 후험적으로 형성되고 구성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제로점의식에서 생각해보면, 두가지 견해는 모두 상대방 견해가 말하려는 근본취지의 어느요소를 받아드릴 때, 더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사람은 ‘세계-내-존재’이다. 세계없이, 삶의 경험없이 유아독존적인 주체적 자기초월능력이란 공허하다. 그러나, 아무리 자연의 자기조직원리와 기능을 현상학적으로 강조하더라도, 35억년동안 ‘점진적으로 누적적으로 생명진화’를 달려온 결과물로서 인간정신의 자기초월능력과 영혼의 영험성이 ‘우연과 필연’의 두 가지 주사위 법칙만으로 가능했다고 믿는 것은 자연과학의 한계초월행위로서 과학적 독단이라고 느껴진다. 35억년 진화기간은 그만두고서라도, 내 엄마의 자궁에서 세포분열을 시작한 그 작은 운동이, 20-30년이라는 찰나같은 시간을 지나면서, 자기를 낳아준 온 우주를 한개 점으로 파악하는 그 정신능력으로 인하여 우주를 도리혀 품고도 남는 현상이 신묘하다. 구상선생님의 <풀꽃과 더불어> 마지막 시구가 생각난다 :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이제 여기 존재한다.”
<겨자씨?>
인간의 욕망은 위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고귀한 욕망은 성령의 욕망입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면,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욕망은 스스로 절제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갈등과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성령을 따라 사는 하나님 아들딸의 욕망이 확실하게 느껴지는가 입니다.
의식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의식을 포함한 전 존재의 문제입니다.
예수는 성령의 욕망을 따라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흥미진진한 도전입니다.
내면의 하나님 아들딸의 겨자씨 욕망(=믿음, 영, 하나님의 의, 도)이
귀하의 삶을 인도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종교개혁이 성직자의 손에만 있던 성경을 평신도의 손에 넘긴 사건이었다면, 오늘날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두 번째 종교개혁은 아직도 성직자의 손에만 있는 사역을 평신도의 손에 넘겨 평신도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주체적 사역자가 되게 하는 데 있다.<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가치kingdom's value 내면화>
통치자(統治者; ruler)나 지도자(指導者: leader)가 지녀야 할 아주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자기부정(自己否定: self-denial)이다.여기 자기부정은 비움과 낮춤이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나눔과 세움을 목적한다. 놀랍게도 우주와 인류 사회의 진정한 주인(主人)이며 통치자인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구원주와 만유의 주(主)인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자기부정의 모범을 직접 보여 주었다.자기부정이 모든 통치 철학과 리더십의 핵심 정신임을 강조한다.
자신의 기쁜 뜻에 따라 창세 전에 세워진 작정(엡1:4-5절)대로하나님은 천지(天地)와 그 가운데 만물(萬物)을 창조했다(창1장, 계4:11절).그리고 인간을 창조하기 직전 말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절)여기 인간 창조 목적이 잘 기술된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후 말했다(창1:27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절)이를‘문화 명령’또는 ‘문화 사명’(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른다.이 명령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의 일 -‘만물 통치’- 은 피조물 인간의 일이 되었다.앞으로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 인간을 대리 통치자 즉 지도자로 내세워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건설할 것이다. 대리 통치권 덕분에 피조물 인간은 신(神)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을 비우고 낮춤으로 가능했다.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 존재하는 수직적(垂直的)이고 종속적(從屬的)인 상하(上下) 관계를 고려한다면 하나님의 비움과 낮춤은 인간에게 향한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은총이었다.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하나님은 당연히 그렇게 사랑해야 했다.문화사명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은 하나님 나라 신학과 통치 철학 또는 리더십에 관련하여 자기부정이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창설했고 그곳에 인간이 살도록 조치했다(창2:8절).그리고 아담에게 명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절) 선악과 규례라는 명령을 받아드림으로 아담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호6:7절).이 계약을 언약(言約: covenant)이라고 부른다. 언약의 조건은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면 언약의 약속은 아담이 지상 낙원 에덴에서 계속 사는 것이다. 계약은 대등한 관계에서만 맺어진다. 그러나 이 언약 체결에서 당사자들 사이 차이는 너무나 크다.한 쪽은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다른 쪽은 그의 피조물 아담이었다. 언약 체결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은 또 다시 자신을 비우고 아담 수준으로 낮추어야 했다.이 덕분에 인간은 하나님과 대등한 언약 당사자가 되었다.
창조 언약은 흙에서 난 비천한 존재인 인간을 하나님 앞에 영광스런 인격적 존재로 세웠다. 이 점에서 창조 언약은 인류에게 쌍방적이며 조건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다.이 언약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이렇게 선악과 규례라는 언약(言約)도 하나님 나라 신학과 통치 철학 또는 리더십에 관련하여 자기부정이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선지자 이사야는 앞으로 나타날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해 소개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43:7절)구원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뜻이다(고후5:17절).그렇다면 이 성구는 타락 이전 인류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였는가를 간접적으로 잘 설명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은총(恩寵)은 물론 쌍방적이며 조건적인 언약(言約)에 기반을 두고 인류와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이 사랑을 위해 하나님은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야 했다.이것은 인류 사회의 모든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이 따라야 할 리더십이다.이들은 사랑의 동기에 바탕을 두고 은총과 계약이라는 두 관계에 기반을 둔 문화 사명(창1:28절)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아담의 타락 후 이 개념들은 동서(東西) 세계로 각각 나뉘며 발전했다.동양 문화에선 은총이 지배 개념이다.그러므로 동양 사회는 수직적이며 종속적이며 높은 자의 은총에 주로 의존한다.반면 서구 문화에선 계약이 지배 개념이다.그러므로 서구 사회는 수평적이며 평등한 계약 관계에 근거한다.
농업 시대까지 인류 사회는 주로 지도자에 의존하며 발전했다.이 때까지 은총 문화가 세계를 지배했다.18세기 이전 동양 사회가 서구 사회보다 앞선 이유였다.그러나 산업 시대 이후부터 한 사람 지도자에 의존하는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렸다.이 때부터 계약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서구 사회가 동양 사회를 앞서기 시작한 이유였다. 나라나 사회 개발의 초기 단계에서 한 사람의 능력 있고 강력한 지도자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러나 인류 사회가 발전하여 세분화되고 다원화(多元化)될수록 지도자보다 공동체 구성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이 때는 servant-leadership이 더 요구된다.즉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代理) 통치자로서 인류 사회의 공동 번영을 위해 종(從)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의식을 뜻한다. 그럼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말하는 성경적인 통치 철학 또는 리더십은 무엇인가? 통치자 또는 리더는 하나님의 대리자(代理者)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의식을 갖고 은총은 물론 계약에 기반을 두고 구성원들과 관계해야 한다.우선 지도자는 모든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공유(共有)할 수 있는 목적을 사랑의 동기에서 세워야 한다. 이 목적 달성에 기쁘게 참여하도록 구성원들을 세워주는 반면 자신은 비우고 낮춰야 한다.이 비움과 낮춤은 자신이 가진 권력과 권세를 지혜롭게 나누어줌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 나눔은 동시에 계약 관계에 의해 공적(公的)으로 확인되어야 한다.이 계약에 따라 지도자와 구성원들 사이 인격적인 평등이 보장된다.이렇게 지도자는 아래 사람들을 세워준 후 사랑으로 격려하여 일을 잘하도록 도와주고 공동체가 목표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경영하는 매니저(manager) 역할을 한다. 문화 사명의 은총(恩寵) 사상과 선악과 규례라는 언약(言約) 사상이 가르치는 통치 철학이나 리더십은 세상 조직만 아니라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타락 이전 교회와 세상은 나누어지지 않았다.그리고 성경의 통치 철학이나 리더십은 인간 대리자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이다.인류 역사나 교회 역사가 증명하듯이 하나님은 항상 인간 지도자들을 통해 세상과 교회를 지금까지 통치하기 때문이다(롬13:1-2절).그렇다면 교회나 세상의 지도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 원리를 본(本)으로 삼아야 한다. 인간 통치자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도록 권력과 권한을 분산하는 것 – 이것이 성경적인 리더십이다.통치자나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恩賜)에 따라 몸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지체(肢體)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성경의 지체이론(고전12:12-27절)에서 잘 설명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후진적(後進的)인 분야는 정치와 교육과 종교이다. 이들 분야에서 유교의 가르침인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가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며 그 만큼 지도자들은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권위를 부정하기 싫어한다.그러나 이들이 자신을 비우고 낮출 때 권력 분산은 가능하며 그 때 이들 분야도 발전할 것이다.그 동반 효과로 경제 분야를 비롯한 사회 전반이 더욱 발전할 것이다.이 모두 권세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지도자들이 부정할 때 가능하다.
자기부정은 인간 사회와 교회의 성장을 약속한다.아울러 성화(聖化)와 목회(牧會)의 최절정(最絶頂)에 달하도록 돕는다. 교회개혁과 신앙 삶을 위한 자기부정(쿰란, 장창수)
▲ 임락경 목사는 비정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학력적인 자격보다 희생 정신과 성령이 충만한 영적인 자격을 갖췄다. ⓒ뉴스앤조이 유영
2011년 8월 16일 KBS 아침마당에 임락경 목사님이 출연하였다. 그분은 자신 스스로 돌팔이 목사라고 했다. 중학교 중퇴하고 목사가 되었으니 초등학교 학력으로 목사가 된 것으로 돌팔이 목사라는 것이다. 정규 신학교에 갈 수 없어서 비정규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희생과 섬김 정신으로 평생을 헌 옷만 입고 살았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의 이력이었다. 임락경 목사는 30년째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는 사회 복지가이자 유기농 농부 겸 민간요법을 개발하였다. 17살 때부터 빛고을 동광원에서 이현필 씨의 가르침을 받으며 결핵 환자들과 15년을 지냈고 군인으로 복무했던 강원도 화천에 터를 잡아 1980년부터 시골 교회를 꾸려 가면서 중증 장애인 등 30여 명을 돌보는 한편 유기농 된장과 간장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가장 아름다운 이력은 '맨발의 성자'로 불렸던 이현필(1913~1964)의 제자가 되어 영성 수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며 결핵 환자와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경력과 저술도 화려하다. 정농회 회장, 북한강유기농업운동연합 초대회장, 화천군 친환경농업인연합회 초대회장, 상지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감리교 제2연수원에서 '임락경의 건강교실'을 10년째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세상을 쟁기질하는 바보들의 시골집 이야기>, <돌팔이 잔소리>, <촌놈 임락경의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 <흥부처럼 먹어라 그래야 병 안 난다> 등이 있다고 소개되었다.
사람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진다는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생애를 변화시킨 첫걸음은 교회였고 목사님이었으며 성경이었다. 목사님의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보니까 비록 무인가 신학교 출신 돌팔이 목사이지만 자기도 목사가 되어 있었고 이웃을 돌보는 사람으로 변하여 있었다는 간증이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진정으로 예수님을 닮아 가는 목사님이셨다. 그분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 실천하는 목사님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목사란 무엇인가?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후 총회에서 시행하는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여 1개 년 이상 교역에 종사하고 노회 고시에 합격하고 청빙을 받은 자라야 한다(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제15장)." 이것은 한 교단의 목사의 자격이다. 성경에서 직분을 줄 때의 자격하고는 많이 다르다. 성경에서의 자격은 오로지 '믿음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 6:3, 5)'이였다. 현 헌법에 나타난 목사의 자격을 부인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그런 학력적인 자격을 가졌는가보다는 초대교회가 보여 준 '믿음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영적인 자격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학력을 요구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학력을 넘어 학위로 욕구를 채우려는 사욕에 사로잡혀 있다. 목사를 초빙할 때 먼저 학력, 학위를 따진다. 박사 학위가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박사 학위를 우려먹는다. "우리 목사님은 박사 출신이야" 하고 말이다.
학위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어느 분이 말했다. 박사 중에는 그래도 독일 박사를 알아준단다. 제대로 논문도 쓰고 학위를 받기 때문이란다. 가짜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여튼 그렇다고 치고 박사라는 것이 무엇이냐? 먼저 간 선배들이 써 놓은 자료들을 검색하고 발췌하여 간추려서 틀에 맞게 만들어서 학위를 따는 것이 아니던가? 거기에 자신의 창작물이 있던가? 있다면 몇 개나 있던가? 그저 먼저 써 놓은 논문이나 서적의 수집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으로 평생을 우려먹고 사는 것이 아니던가? 필자도 교수를 하다가 보니까 박사 학위를 몇 개 가지고 있는데 글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요새 더욱더 바울 사도의 말씀이 감동적으로 와 닿는다. 진짜 사도 중의 사도요 간증 중의 간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이런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목회자의 자격이 아니겠는가?
교회들이 담임목사님을 초빙할 때 박사 학위를 선호하는 것은 어차피 성령 충만하지 않을 것이니 겉모양이라도 화려한 사람을 세워 우리 교회 체면을 구기지나 말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문제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은 주님의 영이기 때문이요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며 성령이 거하지 않는다면 더는 교회도 아니요 목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하신 일은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신 일이다(창 1:2).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며 하나하나 창조하시면서 '좋았더라, 좋았더라'를 연발하셨다. 거룩하신 성령님이신 하나님의 영이 동참했을 때 비로소 '좋았더라'가 나온다는 이야기다. 창조 세계에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운행하셨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운행하셨다.
"예언(성경)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그리고 그리스도인 안에도 성령님이 운행하셔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값(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의 피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거주할 때 탐욕스런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순수하게 주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신자나 목회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돌팔이 신자나 돌팔이 목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돌팔이인가 아닌가? 그것이 문제로다.
다. 겨자씨나라 일반 사역자로 활동하고자 하는 분에 한하여
1. 성경통독반 졸업 - 60분*80주
; 키 워드-하나님나라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
2. 매월 영성 도서 1권 읽은 후, 서평 작성 제출(12권 이상, 각 A41장)
; 필독-*한국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이학준, 새물결플러스)
*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
*나와 너(마르틴 부버, 대한기독교서회)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헨리나우웬, IVP)
*신학과 사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대천덕, CUP)
세상이 묻고 진리가 답하다 A Place for Truth(IVP, 달라스 윌라드 편)
*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한길사)
씨알사상(박재순, 나녹)
씨알 함석헌 평전(이치석, 시대의창)
예수의 정치학(존 하워드 요더, IVP)
하나님의 정치(짐 월리스, 청림),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바꾸는 7가지 방법
*자존감, 친밀함(이무석, 비전과리더쉽)
*예수전(김규항, 돌베개)
*새로운 교회가 온다(마이클 프로스트, IVP)
*설교란 무엇인가(정용섭, 홍성사)
삶이 메시지다(김기석, 포이에마)
정의론(존 롤즈, 이학사)
무엇이 정의인가?(이택광외, 마티),
-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이 던진 도덕적 딜레마 정의와 민주주의, 계급적대, 폭력의 문제
3. 겨자씨나라 영성형성 아카데미 과정 졸업 - 이론과 실제 60분*50주, 2박 3일*2회 : 동양적 기독교 영성II
4. 겨자씨나라 설립 및 운영계획서 제출(A4 용지 4장)
마. 기타 특수사역자(예술선교, 스포츠선교,치유선교, 교육선교, 기타 직업선교 등)로 활동하고자 하는 분에 한하여
- 해당 분야의 사역계획서 제출(A4 용지 4장)
바. 공통사항
사람을 세우는 것이 참 성전건축이라는 겨자씨나라 정신에 따라, 모든 사역자들을 위해, 운영(장학)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특별헌금 등 적극적인 지원방안을 강구합니다.
- 목사 안수는 의무사항이 아닙니다. 단, 전문성과 영성의 구비만을 강조합니다.
- 훈련후, 모든 사역자는 원칙적으로 자비량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 겨자씨나라식구, 사역자 그리고 겨자씨나라 인터넷 말씀묵상나눔이 및 관심이는 매년 12월 첫 주 설립기념모임(겸 그 해 송년 모임)에 참석하여, 수행 및 사역에 대한 나눔(sharing)에 참여해야 합니다. 단, 해외거주자에게는 형편을 고려하고, 운영위원회 결의를 거쳐, 여비실비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