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全州): 리성계(李成桂)의 본관(本貫)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전주부(全州府) 풍속과 형승(形勝)편에 보면,
『…남국(南國)의 인재(人才)가 물려있는 곳이다. 물건을 싣는데 수레를 사용하며 저자(상점)는 줄을 지어 상품을 교역한다. 국가의 풍패(豊沛)로 산천이 영수(靈秀)하고, 주(周)나라의 조상(祖上)이 일어난 곳이요, 일도(一都)의 으뜸이다』라고 하면서「풍패(豊沛)는 한고조(漢高祖=유방劉邦)의 고향이다.」했고「여기서는 태조(太祖=이성계李成桂)의 선대가 전주이씨(全州李氏)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붙여 놓았다.
또『전주(全州)는 산천의 좋은 기운이 얽히고 서려 왕적(王迹)의 기초를 창립하였으니, 실로 우리 조선(朝鮮)의 근본이 되는 땅으로 주(周)나라의 태빈(邰豳)과 같은 곳이요, 목조(穆祖)가 북방으로 옮겨 간 것은 마치 주의 태왕이 빈(邠)을 떠난 때이다.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열고, 열조의 성군이 서로 이어받아 부(府)를 설치하고 윤(尹)을 두어 한 도의 머리가 되게 하니, 대개 영광스럽게 함이었다. 전주의 부로자제(父老子弟)들이 오래 선왕(先王)의 여화(餘化)를 입고 열성(列聖)의 깊은 은혜를 받아 풍패(豊沛)에 살면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조리니 임금을 생각하는 정성 실만 배나 더 하리라.』라고 했으니,
즉, 풍(豊)은 B.C 1075년경 주문왕(周文王=창昌․서백西伯)이 도읍(都邑)으로 정했고, 그 후 B.C 206년경 유계(劉季=유방劉邦)가 전한(前漢=서한西漢)을 세웠던 곳인 바,
《동국여지승람》<전주부>에서는 이성계가 도읍했던 곳으로 전주이씨의 본향 전주(全州)라는 지명을 설명한 것이다. 이곳은 지금 섬서성 서안시(西安市) 서남쪽 풍경유지(豊京遺址)로 현지(現地)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고 오직 지도(地圖) 책에만「풍경유지(豊京遺地」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삼강록(三綱綠) 金海金氏 족보에서 휘 김극일(金克一)의 행적속에 이성계와 관련사항이 있어 발취함.
1434년 세종(世宗=이방원李芳遠의 子․이도李祹)때, 조선(朝鮮)의 도읍지는 섬서성 서안(西安) 서남쪽 옛 풍경(豊京)으로 이성계(李成桂)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본향(本鄕)이고 조선의 한성(漢城)이었다.
강역(疆域)은 동서(東西) 2,000리(里) 남북(南北) 4,000리(里)였던 곳에서 문화적인 사업으로, 광화문(光化門)에 새 종(鍾)을 달았고, <종각鐘閣>, 노중례(盧重禮)에게 명령하여《태산요록(胎山要錄)》을 편찬케 했으며 주자소(鑄字所)에서 간행했다.
또《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간행 배포하고, 밀양(密陽)에서《고금운회격요(古今韻會擊要)》를 했고,
조판주자법(造版鑄字法)을 개량하고 진양대군서(晋陽大君書)로 20여만(200,000) 자(字)의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었으니 갑인자(甲寅字)로《자치통감(資治痛鑑)》을 간행했다.
첫댓글 티무르의 고향도...현 서장자치구와 서안 서쪽 지대를 기반으로 한답니다...^. .^...찾아 주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