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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6. 묵상글 (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 불평에 대한 성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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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6.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불평에 대한 성찰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합니다.
배가 고프기 때문이고,
이집트에선 노예로 살아도 배는 불렀는데 광야에선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남의 일처럼,
나는 그렇지 않은 양 이들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사는 동안 얼마나 불평이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불평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오늘 해야겠습니다.
먼저 볼 것은 불평은 불행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행복한 사람의 입에서는 결코 불평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행하거나 적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불평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왜 행복하지 않고 더 나아가 불행합니까?
그것은 불만 때문이고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또 왜 불만이고 왜 만족할 줄 모릅니까?
그것은 욕구는 한계가 없고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능력에 한계가 있는데도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하려면 만족의 비법을 알아야 하는데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곧 하나는 인간적인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방법입니다.
먼저 인간적인 방법을 보면 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욕구를 없애거나,
욕구를 없앨 수 없다면 욕구가 욕망이나 욕심으로 발전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고파도 화내거나 불평하지 않고
능력이 없고 가난한 자신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겁니다.
다음으로 우리 신앙인은 신앙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으로 만족하거나 하느님의 도움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곧 배고프면 인간에게 불평하지 않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반대의 짓을 합니다.
기도해야 할 입으로 불평을 하는 겁니다.
하느님께 향하지 않고 인간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또 반성해야 할 것은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점입니다.
배고프다고 배불렀던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것 말입니다.
복지 곧 행복의 땅인 가나안을 그리워하지 않고,
배고픔 때문에 노예의 땅인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철학자보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단식하시고 돌로 빵이 되라는 유혹을 광야에서 받으실 때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하느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빵 문제에만 관심이 있어서 하느님 말씀의 좋은 밭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불평 성찰을 한 우리는,
지상에 살면서도 천상의 행복을 그리워하고
배고파도 하느님과 하느님 말씀으로 만족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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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6.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오복음> 13장에서, 예수님서는 하늘나라의 대한 일곱 가지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요, <둘째>는 뿌려진 씨에 대한 이야기, 곧 열매인 결실에 대한 이야기요,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땅에 대한 이야기, 곧 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이 이야기는 <첫째>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서 밭을 구별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해주며, <둘째>로는 그 씨앗은 열매를 맺고 실현되고 성취된다는 사실을 밝혀주며(이사 55,11),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밭을 잘 가꾸어야 할 하느님 자녀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8)
그렇다면, 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 지금 나에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내가 좋은 땅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떨어질 때 그 땅이 ‘좋은 땅’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은 땅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이 뿌려지기 전의 땅의 상태가 좋은 땅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진 후에 땅을 갈고 가꾸는 것에 의해 그 땅의 성질이 결정지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의 씨를 가꾸는 농사법’은 먼저 밭을 잘 쟁기질 한 다음에 씨가 뿌려진 것이 아니라, 어느 땅이든 상관없이 먼저 씨가 뿌려진 다음에 그 밭이 쟁기질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쓸모없는 땅인 것입니다. 황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밭에 씨앗이 선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씨앗의 존재를, 그 가치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베풀어진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그러니 씨앗이 내 안에 뿌려진 채 여전히 묻혀 있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한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 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며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요, 그 열매로 자신의 배를 채우기보다 타인에게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4)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씨앗의 모시고 살며, 씨앗을 기르며 살게 하소서.
오늘 제가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시고
당신 말씀으로 제가 거룩해 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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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6.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 날이 아름다워야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농사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서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아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이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의인이라 생각하는 이에게는 선행과 공로를 쌓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12,19).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 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으십시오. 기회는 찬스입니다. 그 기회를 잘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멈추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유혹받지 않고는 자신에 대해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아우구스티노). 끝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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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6.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8월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과 크루즈 여행을 함께 했습니다. 크루즈 여행은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많이 간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주로 왔고, 젊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첫날 저녁 ‘COOL’이라는 공연을 보았습니다. 70년대 80년대에 유행했던 팝송을 주제로 한 공연이었습니다. 그때는 ‘고고’에서 ‘디스코’로 넘어가던 시대였습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청계천에 가서 ‘레코드 판’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귀에 익은 흥겨운 음악을 들으니 제가 8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매일 저녁 공연을 보는 즐거움이 있고, 짐을 다시 꾸리지 않는 것이 크루즈 여행의 장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굳이 고민하지 않고 정해진 식당을 골라서 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80년대는 풍요와 번영의 시대였습니다. 국민소득 천불과 수출 백억 불의 시대였습니다. 자가용이 보편화 되던 시대였습니다. 86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의 시대였습니다. 교회에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고,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예비자들이 교회를 찾았고, 본당을 새로 늘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를 넘어 저는 1991년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서양의 팝송과 생맥주 그리고 프로야구와 영화에 젖어 있을 때 또 다른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사물놀이와 민중가요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등장했습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 적인 것이다.’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근로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농활’을 통해서 우리 농촌의 현실을 제대로 알아가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서양의 철학과 서양의 신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과 우리의 신학을 연구하며 신학의 ‘토착화’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80년대는 ‘공존의 그늘’에서 힘들어 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대였습니다. 저도 ‘돈 보스코 센터’에서 1년 정도 봉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직업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함께 갔습니다. 야학을 하는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신학교에서는 해방신학, 아시아신학, 민중신학을 토론하였습니다.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한 젊은이는 북한으로 가서 남한의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한 사제는 그 젊은이를 데리고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의 무서움도 젊은이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BTS의 음악이 팝송의 본 고장에서 1위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시대를 그리워합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지만 굶주림 앞에서 자유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굶주린 소크라테스가 되고자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달라고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라는 현실 앞에서 이집트의 풍요를 그리워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망을 다 채울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깨닫지 않는다면, 스스로 일어서지 않는다면 ‘만나’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만나는 씨를 뿌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씨를 뿌려서 거두는 만나를 먹어야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씨를 뿌리고, 아폴로는 거름을 주었지만 결실을 맺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뿌리는 씨가 길가에 떨어지고, 자갈밭에 떨어지고, 가시덤불에 떨어질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2023년이라는 밭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뿌리는 씨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고, 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나는 씨는 뿌리지 않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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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6.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씨앗은 어디든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은 좋은 밭에만 씨앗을 뿌리시면 될 것을 아무 데나 씨앗을 뿌리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좋은 밭이 아니더라도 좋은 밭이 되어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좋은 밭이 되는 길은 우선 자신이 좋은 밭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없이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더욱이 싹도 틔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주위에 많은 위협 특히 참새처럼 사랑의 씨앗을 빼앗아 가거나 혹은 가시덤불처럼 사랑의 씨앗이 볕을 못 보도록 하는 유혹과 시련들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은총이 필요할 때 찬미의 기도를 봉헌해야합니다. 하느님만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찬미가 유혹과 시련들 속에서 우리를 좋은 밭으로, 그리고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만을 찬미할 때, 그분의 은총을 고개 숙여 기다릴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돌밭을 비옥하게 가시밭을 깨끗하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체험 후 우리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재앙을 면케 하시고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 나의 도움이 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밭은 가시덤불일 때도 돌밭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찬미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우리를 비옥한 밭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열매들이 쏟아질 것입니다.
잘 둔다고 뒀는데….
잘 둔다고 뒀는데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오늘 아주 오랜만에
도장을 쓸 일이 있었습니다.
막도장 하나면 됩니다.
그런데 그 막도장을 어디 뒀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잘 뒀는데 말입니다.
사방 팔방, 구석구석을 살핍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젠 대충 둬야겠어.
잘 두려고 하니까 못 찾는 거야.
그리고는 안토니오 성인에게 기도합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
막도장 찾게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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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6.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더운 여름날,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음료는 일명 ‘아아’라고 불리는 것으로, 우리 성당 카페에서도 제일 많이 나갑니다. ‘아아’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줄여서 부르는 것이지요. 사실 이 아이스아메리카노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컵 가득히 얼음을 넣고 물 150ml를 붓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에스프레소 2잔을 넣으면 그만입니다. 저 역시 간단하고 맛있어서 즐겨 마시는 음료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는 지인과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문했던 음료는 둘 다 ‘아이스아메리카노’였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아이스아메리카노 안에 들어있던 얼음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얼음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얼음이 모두 녹아 물이 된 것입니다. 이 물을 가리키면서 1시간 전에는 얼음이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얼음이었다는 사실보다, 지금 물이라는 사실만 남게 됩니다.
‘왕년에~’라는 말을 쓰며 과거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분을 종종 봅니다. 그 영광이 과연 본질 자체가 변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본질은 같고 잠깐의 변화만 있었던 것입니다. 얼음과 물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랑스러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잠깐의 변화를 가지고 본질 자체가 바뀐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겸손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일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들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 능력과 재주를 통해서 그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교만을 통해서는 하느님과 함께할 수 없기에, 하느님의 영광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하거나, 낸다 해도 별 볼 일 없는 결과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씨를 뿌렸는데 길가, 돌밭, 가시밭에 떨어집니다.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길가, 돌밭, 가시밭에서는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 상태가 길가, 돌밭, 가시밭, 좋은 땅으로 비유됩니다.
어떤 마음을 갖춰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커다란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요?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이 아닌 낮추고 낮춰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기 힘만으로는 결코 맺을 수 없는 결실이 세상에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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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굳게 닫힌 마음을 활짝 열린 마음으로 전환하지 않는 한, 올바르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은 열리지 않는다(법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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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6.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聖化의 여정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삶-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이 또한 하늘 나라의 비유에 속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절망은 없다”일 것입니다. 한결같이 씨뿌리는 사람,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흡사 농부 하느님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농부 예수님처럼 생각되는 씨뿌리는 사람, 바로 예수님입니다. 얼마전 수도형제로부터 배웠던 참 좋은 인사말, “성화되십시오”란 말이 참 좋습니다.
어제 강론 제목은 “섬김의 여정-섬김의 순례자”였는데, 오늘 강론 제목은 “성화의 여정-한결같은 신망애의 삶”입니다.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강론중 참 많이 사용하는 말마디가 여정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삶은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聖化의 여정, 성숙成熟의 여정이라함이 맞을 것입니다. 바로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충실한 이들의 삶의 여정이 그러합니다.
요즘 성경을 읽듯이 계속 즐겨 읽는 책들은 위인의 평전들입니다. 어제부터는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평전을 구입해 읽기 시작했습니다. 700쪽 이상의 두꺼운 평전을 보는 순간, “아 이렇게 가득한 삶을 살았구나!” 하는 감탄이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평생동지이자 아내였던 이희호가 없었다면 김대중도 없었을 것입니다. 똑같은 생애를 선물로 받아 씨뿌리는 삶에 참으로 충실했던 분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내 평전이 있다면 어떻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들의 미사를 집전하면서 받은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자매회의 역사가 18년쯤되니 당시는 젊었던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할머니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늙었다기 보다는 깊어지고 거룩해진, 순수하고 맑은 모습들이었습니다.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충실하면서 성화의 여정을 살아 온 모습들이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담쟁이란 시입니다. 요즘 한창 담벼락을 타오르는 담쟁이들이요, 25년전 써놨던 시이지만 참으로 많이 인용했던, 그러나 아무리 반복해도 늘 새로운 제 대표적 자작시입니다. 그대로 씨뿌리는 사람의 삶의 모습도 이러하리라 생각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하늘 향해 힘차게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하늘 나라의 실현이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라 했습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씨뿌리는 과정에 충실한 정주의 삶이 바로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진인사대천명, 과정에 충실하고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람은 결과를 보지만 하느님은 삶전체의 과정을 보십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이처럼 믿음의 사람이자 희망의 사람입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개의치 않고,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충실할 수 있음은 궁극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이요 절망이 바로 대죄입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라면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하루하루 과정에 충실한 하늘 나라의 삶을 삽니다.
사람은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바로 한결같은 갈망의 사람, 열정의 사람, 사랑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이웃 형제들을, 삶을 한결같이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렇게 평범한 일상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수도자만 아니라 열정과 순수는 기본적 인간 자질입니다. 사랑의 열정이요 사랑의 순수입니다.
바로 이런 한결같은 신망애의 삶을 살아갈 때 척박한 땅은 좋은 땅의 옥토로 바뀔 것입니다. 실패인 듯 해도 결과는 성공의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변화하는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충실했다면 어디선가 좋은 땅에서는 무럭무럭 잘 익어가는 신망애 삶의 열매들일 것입니다. 다음 대목이 궁극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바로 경청과 겸손, 관상의 자세로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해 보라는 권고입니다. 내 삶이 척박한 돌밭이나 가시덤불같은 밭은 아닌지 혹은 말씀의 씨앗들이 잘 자라나고 있는 옥토의 마음밭인지 잘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밭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참 많이 강조하는 신망애 삶의 선택과 훈련, 습관입니다. 자나깨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좋은 덕목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입니다.
탈출기의 주인공 모세와 복음의 예수님의 대조가 은혜롭습니다.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모세의 삶도 참 한결같습니다. 불평하는 철부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을 것이나 하느님께 깊은 신뢰와 사랑, 희망을 두고 있기에 참 지도자 모세는 지극한 인내의 사랑으로 이들을 다 감당하시며 이들을 주님의 만나로 배불리십니다. 화답송 시편의 고백입니다.
“그분은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시어, 만나를 비처럼 내려 먹이시고, 하늘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네.”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제일입니다.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역시 그 모범입니다.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위경인 야고보 원복음서를 보면 이들 부부가 얼마나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주님을 섬기며 아기 갖기를 기도했는지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이들 부부의 간절하고 항구한 소원을 들어 주시어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보고 배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부모의 거룩하고 충실한 삶을 그대로 보고 배웠을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성화의 여정을 잘 살도록, 끊임없이 씨뿌리는 신망애의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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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6.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있는 지금여기에서>
나를 믿으시고
나를 바라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지금여기에
나를 뿌리셨으니
그 어디든
그 어느 때든
탓하지 않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바라고
하느님을 사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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