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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이행지(激而行之)
물을 막아 거꾸로 흘러가게 한다는 뜻으로, 사람의 본성은 착하지만 욕심이 그것을 가로막으면 악하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激 : 격할 격
而 : 말 이을 이
行 : 다닐 행
之 : 갈 지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이라는 혼란한 시대를 겪으면서 발생했다. 제자백가에는 유가(儒家), 법가(法家), 묵가(墨家), 도가(道家) 등 여러 사상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가는 공자(孔子)가 인(仁)을 주장하면서 생겨난 사상으로 공자 이후에도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에 의해 계속해서 발전하게 된다.
진(秦)이 통일한 후 시행한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약간 주춤하기도 했지만, 진(秦)이 망하고 한(漢)나라가 들어서면서 관학(官學)으로까지 발전한 사상이 바로 유가이다.
유가에서 맹자와 순자하면 서로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차이점에 주목하기 쉽다. 맹자와 순자는 각각 성선설과 성악설을 주장했는데 둘 다 사람의 본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고 보고 인간의 본성을 물에 비유하면서 ‘사람의 본성이 착한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사람에게 착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물에 아래로 흐르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물을 쳐서 튀어 오르게 하면 높이 솟아 이마를 넘게 할 수 있고, 물을 막았다가 터서 흘려보내면 산 위로 오르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은 착하지만 환경에 의해서 악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순자 또한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보았지만, 교화에 의해 선해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맹자와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선하다 악하다 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면서 우산지목(牛山之木)이라는 말을 동원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착하지만 주변의 외물(外物)로 인해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본성은 마치 우산(牛山)이 원래 수목이 우람차고 무성한 숲을 이뤘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중국 산동 성의 임치(臨淄)라는 대도시를 끼고 있어 쓸 만한 나무를 재목으로 베어가고 땔감으로 찍어 넘기면서 그루터기만 남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산은 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싹이 돋고 다시 숲이 우거지는 복원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소와 양을 풀어놓아 그루터기마저 남아나지 않게 되면 본래 숲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민둥산만 남게 되는 데 이게 우산의 운명입니다. 맹자는 우산의 무성한 숲이 벌거숭이가 돼 가는 과정을 사람의 양심에 비유합니다. 숲이 퇴락해 가는 것과 인간의 인의(仁義)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겹쳐놓고 본 겁니다.
산이 본 모습을 유지하는 길은 자명합니다. 남벌(濫伐)을 막고 어쩌다 숲이 훼손됐다고 하더라도 그 싹을 키워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나무를 베는 것과 나무가 자라는 것 사이의 뜸이 필요합니다. 베는 일이 낮의 일이라면 숨을 고르고 양육의 시간을 주는 것은 밤의 역할일 것입니다. 밤낮이 교차하고 음양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는 그 요철(凹凸)이 톱니바퀴를 굴리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도끼로 쉴 새 없이 나무를 찍어내는 일과 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 흡사하다고 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일이 다 야기(夜氣)가 부족한데서 오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야기란 밤의 기운을 말하는데 어둠이 내리고 만물의 활동이 멈추면서 비로소 생기는 평정하고 맑은 기상을 이릅니다. 낮의 시간이 발산하고 소진하는 기운이라면 밤의 시간은 수렴하고 온축하는 영역에 해당한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우산의 아름다움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도끼질을 멈추는 격절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야기가 부족하다는 것은 바로 그 휴지(休止)의 시간을 잃어가고 있다는 경고나 다름없다고 하겠습니다. 맹자는 우산의 예를 들어 자칫하면 도둑맞기 쉬운 인간의 본성을 지키는 일을 강조합니다. 굳이 보이지 않는 양심을 거론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돌아보면 야기가 부족해 일어나는 사고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맹자(孟子) 고자장구(告子章句) 상편(上篇)에 나오는 내용이다.
告子曰; 性猶湍水也.
고자가 말하였다. “사람의 본성은 소용돌이치면서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決諸東方則東流 決諸西方則西流.
그 물을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릅니다.
人性之無分於善不善也 猶水之無分於東西也.
사람의 본성에 선함과 선하지 않은 구분이 없는 것은, 물에 동쪽과 서쪽의 구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孟子曰; 水信無分於東西 無分於上下乎.
맹자가 말하였다. “물에는 정말 동서의 구분이 없지마는, 어찌 상하의 구분이야 없겠는가?
人性之善也 猶水之就下也.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것과 같다.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가지 않는 물이 없듯이 그 본성이 선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今夫水 搏而躍之 可使過顙, 激而行之 可使在山.
지금, 물을 손으로 쳐서 사람의 이마 위로 튀어 오르게 할 수가 있고, 또 거세게 흘러가게 한다면, 산에라도 올라가게 할 수가 있다.
是豈水之性哉 其勢則然也.
그러나 그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물에다 외부의 힘을 가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人之可使爲不善 其性亦猶是也.
사람이 선하지 않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본성 또한 이와 같이 바깥으로 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다음은 정조실록(正祖實錄) 22년(1798) 11월 30일자 기사에 농사를 권장하기 위하여 수로(水路)를 설치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鄭始元疏曰:
정시원(鄭始元)의 상소(上疏)에 아뢰기를,
我東沃野數千里, 間多空地之棄, 以其灌漑之無計也.
우리 나라에는 기름진 들판이 수천 리나 되는데 그 가운데에는 간혹 공한지로 내버려 둔 것이 많습니다. 이는 바로 물을 끌어댈 방도가 없어서입니다.
今臣別有設筒引水之法.
지금 신에게는 통(筒)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다.
自高而流, 從地形而下者, 水之本性也.
높은 곳에서 부터 지형에 따라 흘러 내리는 것이 물의 본성입니다.
作田處雖在水下, 然間阻邱陵, 及有深壑, 則引水中斷, 難以踰越.
그러나 논을 만든 곳이 물 아래쪽에 있더라도 그 사이에 구릉으로 가로막혀 있거나 깊은 골짜기가 놓여 있으면 끌어오는 물길이 중간에서 끊어지고 넘기가 어렵습니다.
故雖有沃野, 廢棄者以此也.
그러므로 비록 기름진 들판이 있더라도 버려두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인 것입니다.
臣所謂設筒之法, 陶甄瓦筒, 而中通外圓, 自上流鱗次埋之於土中, 導水於筒中.
신이 말한 통을 설치하는 법은, 질그릇 통을 굽되 속은 통하게 하고 밖은 둥글게 만들어 상류에서부터 고기 비늘처럼 차례로 이어 땅 속에 묻은 다음 통 속으로 물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而若逢川壑, 則隨地形埋筒於水底, 越其低, 若阻高岸, 則從地勢而立筒於岸邊, 踰其高者.
그러다가 만약 시내나 골짜기를 만나면 지형에 따라서 물 밑으로 통을 묻어서 낮은 곳을 넘어가게 하며, 높은 언덕이 가로막혀 있을 경우에는 지세에 따라서 언덕 가에 통을 세워 높은 곳을 넘어가게 합니다.
無他理也. 源流自高而入于筒中, 則水積中而流不息, 故陞高而踰者也.
이것은 딴 이치가 아닙니다. 원류(源流)가 높은 곳으로부터 흘러 통 속으로 들어가면 물이 통 속에 가득 차서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높은 곳을 올라가 넘는 것입니다.
如是引水, 則不計高低遠近, 灌水作田, 奚特築堰防洑之利乎.
이와 같은 방법으로 물을 끌어댈 경우 높거나 낮거나 멀거나 가깝거나를 따질 것 없이 물을 대어 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제언(堤堰)과 보(洑)를 만들어 얻는 이익뿐이겠습니까.
批曰:
하니,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爾旣別有設筒引水之法, 發前人所未發, 質言於章奏.
네가 이미 통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특별한 방법이 있어 옛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방법을 개발하였다고 상소에서 분명히 말하였다.
仍言其制之陶甄瓦筒, 中通外圓, 壑則埋而越其低, 岸則立而踰其高.
그리고 이어 그 방법을 말하면서 질그릇 통을 굽되 안은 텅 비어 통하게 하고 밖은 둥글게 만들며, 골짜기를 만날 경우에는 통을 파묻어 낮은 곳을 뛰어넘고 언덕을 만나면 통을 세워서 높은 곳을 넘어가게 한다고 하였다.
試之則可知其利用與否, 卽令戶惠堂, 取考論理草記.
그것에 대해서는 시험해 보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니, 즉시 호조와 선혜청의 당상관들로 하여금 상소를 가져다가 따져본 뒤 초기(草記)를 올리게 하겠다.
戶曹判書趙鎭寬啓言: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
臣與惠廳堂上鄭民始, 招問鄭始元, 則其言以爲:
신과 선혜청 당상 정민시(鄭民始)가 정시원을 불러다가 물어보니, 그가 말하기를
水之趨下, 其性然也.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은 물의 본성이 그런 것이다.
若夫設機激巧以行之, 終非水之性, 故可暫而不可久, 可少而不可多也.
만약 기계를 설치하여 물을 쳐서 올라가게 한다면, 이는 물의 본성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는 그렇게 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은 불가능하며, 작은 양은 할 수 있으나 많은 양은 할 수가 없다.
今所陳設筒引水, 亦似乎激而行之.
지금 진달(陳達)한바, 통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것도 역시 물을 쳐서 올라가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其實則上流受處, 高於下流, 洩處雖引之,
數百步之遠, 紆回曲折, 或起或伏,
畢竟噴起處, 較之筒口, 蓋落下幾許.
그러나 사실은 상류의 물을 받아들이는 곳이 하류의 물이 흘러나오는 곳보다 높아서, 비록 수백 보나 되는 먼 거리를 구부러지면서 돌고 높이 올라가기도 하고 낮게 내려가기도 하나, 결국에는 물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물이 흘러드는 통 입구에 비하면 얼마쯤은 낮다.
此無他. 水之性, 終必趨下故也.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물의 성질이 끝내는 반드시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가기 때문이다.
嘗裁竹筒試之鄕中, 明知其無疑.
일찍이 시골에 있으면서 대나무로 통을 만들어 시험해 보았으므로 그것이 의심할 바 없음을 분명히 안다.
若以陶瓦爲筒, 其交接處, 兩口相銜,
外設小圍, 間實油灰, 可免滲漏之患云.
만약 진흙을 구워 통을 만들어 서로 맞붙는 부분의 양쪽 아가리를 맞물리게 하고, 바깥쪽에다 작은 고리를 끼운 다음 그 틈을 유회(油灰)로 채우면 물이 새는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激(격)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갑자기 뻗는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敫(교, 격)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물이 바위 따위에 부딪쳐 물보라를 튀긴다는 뜻이 전(轉)하여 맹렬하다는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매울 렬/열(烈), 찌를 충(衝)이다. 용례로는 몹시 성을 냄을 격노(激怒), 심히 움직임 또는 매우 감동함을 격동(激動), 마음이나 기운을 북돋우어 힘쓰도록 함을 격려(激勵), 몹시 바쁘고 힘드는 일을 격무(激務), 몹시 흥분함을 격분(激奮), 몹시 화를 내는 것을 격분(激忿), 몹시 분개함을 격분(激憤), 격렬한 감정을 격정(激情), 급격히 늘거나 불어남을 격증(激增), 세차게 부딪침을 격돌(激突), 갑자기 줄어 듦을 격감(激減), 갑자기 심하게 변하는 것을 격변(激變), 급격하게 뚝 떨어짐을 격락(激落), 격렬하게 되는 과정을 격화일로(激化一路), 물을 막아 거꾸로 흘러가게 한다는 격이행지(激而行之), 탁류를 몰아내고 청파를 끌어들인다는 격탁양청(激濁揚淸) 등에 쓰인다.
▶ 而(이)는 상형문자로 턱 수염의 모양, 수염을 뜻한다. 음(音)을 빌어 어조사로 쓴다. 而(이)는 말을 잇다, 같다, 너, 자네, 그대, 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만약, 만일, ~로서, ~에, ~하면서, 그러나, 그런데도, 능(能)히, 재능, 능력 등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제 와서 또는 이금에를 이금(而今), ~할 따름 또는 ~뿐임, ~일 따름임을 이이(而已), 지금부터를 이후(而後), 30세를 일컬음을 이립(而立), 그러나 또는 그러고 나서를 연이(然而), 이로부터 앞으로 차후라는 이금이후(而今以後), 가만히 기다리고 있음을 정이사지(靜而俟之), 목이 말라야 비로소 샘을 판다는 갈이천정(渴而穿井), 베개를 높이 하고 누웠다는 고침이와(高枕而臥), 남과 사이 좋게 지내되 의(義)를 굽혀 좇지는 아니한다는 화이부동(和而不同) 등에 쓰인다.
▶ 行(행)은 회의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彳(척; 왼발의 걷는 모양)과 亍(촉; 오른발의 걷는 모양)의 합자(合字)이다. 좌우의 발을 차례로 옮겨 걷는다의 뜻을 나타낸다. 또는 네거리, 굽지 않고 바로 가는 일, 나중에 가다, 하다란 뜻과 항렬(行列), 같은 또래란 뜻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 할 위(爲), 옮길 이(移),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알 지(知), 말씀 언(言), 말씀 어(語)이다. 용례로는 길 가는 사람을 행인(行人), 동작을 하여 행하는 일을 행동(行動), 여럿이 벌이어 줄서서 감을 행렬(行列), 가는 곳을 행선(行先), 물건을 가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파는 일을 행상(行商), 실지로 드러난 행동을 행실(行實), 정치나 사무를 행함을 행정(行政), 체면에 어그러지도록 버릇 없는 짓을 함을 행패(行悖), 몸으로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행동거지(行動擧止), 그 해의 좋고 언짢은 신수를 행년신수(行年身數), 간 곳을 모름을 행방불명(行方不明), 일을 다하고도 오히려 남는 힘이 있음을 행유여력(行有餘力), 기러기가 줄을 지어 남쪽으로 날아감을 행안남비(行雁南飛), 길을 가는 데 지름길을 취하지 아니하고 큰길로 간다는 행불유경(行不由徑),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이라는 행운유수(行雲流水), 타향에서 떠돌아 다니다가 병들어 죽음을 행려병사(行旅病死), 길에서 만난 사람이라는 행로지인(行路之人), 걸어가는 송장과 달리는 고깃덩이라는 행시주육(行尸走肉) 등에 쓰인다.
▶ 之(지)는 상형문자로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이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나 어조사로 차용한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主見)이 없이 갈팡질팡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라는 새옹지마(塞翁之馬), 옛날 중국의 관중과 포숙처럼 친구 사이가 다정함을 이르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라는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결자해지(結者解之)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