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30]아,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 의사義士!
얼마 전 ‘변신령님(성이 변邊씨이고 축령산에서 진짜 산신령처럼 살기에 붙여준 별명)’이라고 부르는 인생 도반道伴이 "10여년 전 우연히 사놓은 퇴락한 한옥집을 리모델링했다"며 집들이 초대를 했다. 지붕, 기둥, 툇마루 등을 고스란히 살리고 내부만 쌈박하고 비용도 엄청 싸게 고쳤다며 자랑이 지나쳤다. 집주변에 10m가 넘는 모과나무 등 서너 그루도 옮겨 심었다. 집에 딸린 황토밭 3600평까지 있으니 10억을 줘도 팔지 않겠다는 호언豪言이다. 춤꾼 김진홍님의 여제자인 듯한 분이 풍물가락에 맞춰 추어대는 즉흥춤이 너무 볼만했다. 눈이 호사를 했다. 이런 것이 진짜 구경거리다.
아무튼, 그날 생각지도 않은 책선물을 모르는 분에게 받았다. 서울 효창원孝昌園에 모셔져 있는 백정기白貞基 의사義士의 5촌조카 시인 백남이님이라는 분이 주신 『구파 백정기-백남이 다큐시집』(도서출판 각 Ltd, 2022년 2월 펴냄, 272쪽, 15000원)이 그것이다. 백의사 이름 석 자는 들어보았지만, 독립운동의 내용은 전혀 몰랐으며, 호가 구파鷗波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허나, 광복 직후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尹奉吉(1908~1932)-이봉창李奉昌(1900~1932)-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의 유해 국내봉환을 가장 먼저 서둘렀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 백의사가 현재의 부안읍 산운리에서 태어나 정읍 소성면에서 간재 전우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운 것도 처음 알았다.
백의사의 연보年譜를 간단히 훑어보자. 1919년 23세에 중국 봉천으로 망명, 서로군정서 홍범도장군 부대와 같이 활동했으며, 1924년 우당 이회영 집에서 거주하며 우관 이정규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했으며, 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였고, 32년 3월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 천장절 및 전승축하식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행사장 입장권 구입 실패로 거사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당을 스승으로 모시고 우관과 동지였다니? 큰 인물임을 알겠다. 33년 주중일본공사가 상해 ‘육삼정’에서 회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흑색공포단:BTP(Black Terrorist Party)>의 실행주역으로 뽑혀 대기하던 중, 거사 직전에 밀정에 의해 정보가 탄로나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그해 11월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 34년 6월 옥중에서 지병 악화로 순국했다. 비록 홍구공원과 육삼정 거사가 실패했으나, 민족정기를 바탕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한 그의 족적과 불굴의 사상이 너무나 뚜렷했기에, 백범 선생이 해방조국에 유해 봉환을 앞장섰을 터. 정부는 1963년에야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서사시, 산문시, 담시 등의 장르는 들어보았어도 ‘다큐시詩’는 처음 들어본지라 의아했다. 어떻게 다큐시일까?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200만건의 자료더미에서 백의사에 관한 300여 페이지의 문서가 기적적으로 발굴되었다한다. 다큐시는 다름아니라, 이제껏 백의사의 활동과 사상이 조명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5촌조카 백남이 시인이 그 자료들을 텍스트로 엮은 ‘백정기의 삶과 투쟁’에 대해 쓴 것들이다. 29살 백의사는 의열단 총회에 참석한 후 중국 광주에서 상해까지 1200km를 걸어서 대장정을 했다고 한다. 항일독립운동을 위해서라면 일편단심 일생을 걸었다. 이 시집에는 실패한 <6.3정 사건>의 주모자로만 백의사를 기억하는 것은 후손으로서 엄청난 결례이며 도리가 아니라는 시인의 신심信心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수많은 자료를 더트느라 고생이 얼마나 막심했을까? 시인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해방 후 백범은 백의사의 정읍집을 방문하여 백의사의 아내에게 양단 옷감 한 벌을 선물했다는 일화가 있다. 역시 예산의 윤봉길 의사의 집을 방문하여 마당에서 큰 절을 했다던가. 백범은 임정을 이끌며 <6.3정 의거> 이후의 대외관계 변화를 겪고, 그 의거의 위대함과 백의사 개인의 고결한 인품을 익히 알았기에 그의 공적을 후대에 꼭 전하고 싶었으리라. 백의사 역시 안중근의사처럼 생전에 일관되게 추구한 것이 자유, 평등, 상호부조의 인류공영임이 역력하다. 백의사의 몇 장 안되는 사진 중 하나일 책표지의 사진을 보라. 형형炯炯한 눈빛에서 그의 강렬한 의지를 읽을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완전 미남이 아닌가. 그분 역시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처럼 민족을 위하여 가정을 초개草芥처럼 버렸다. 중국의 한국독립운동사를 기술할 때,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든 공산주의자(커뮤니스트)든 상관없이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백의사임을 처음 알았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후손의 도리가 아닐 터.
지난주, 백남이 시인의 카톡이 왔다. “올해가 <6.3정 의거> 90주년이며 내년이 백의사 옥사 90주기”라면서 <독립운동가 삼의사三義士 윤봉길 이봉창 그리고 구파 백정기 의사>라는 산문집이 출간됐다고 한다. 산문집 뒷표지 사진에는 광주의 ‘열혈청년’ 김준태 시인의 추천사가 실려 있었는데 <정월단심正月丹心>이라는 제목의 백의사의 시 <눈 쌓인 밭에 가서/천지天地를 우러렀더니 삼동三冬 칼끝 입에 문 마늘촉鏃/매운 맛 잃지 않으렴인지 눈 속에 더 푸르러라>가 쓰여 있었다. 염치없지만 산문집을 한 권 보내주실 수 없겠느냐는 댓글을 보냈다. 시인의 산문집에 기대가 크다.
*후기: 영화 <밀정>의 소재가 된 <6.3정 의거>때 백의사의 동지였던 이강훈은 일본형무소에서 1945년 10월에야 풀려나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을 하면서 백의사 유해발굴과 봉환에 기여했고 동포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60년 귀국했으나 5.16쿠데타때 사상범으로 몰려 옥고를 2년 치른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67년 귀국하여 독립운동사편찬위원으로 일하며 독립유공자와그 후손들을 찾아내는데 헌신했다. 독립기념관장과 88년부터 10-11대 광복회장을 역임했다. 2003년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후기: 백범기념관에서 본 회중시계 2개를 전시해 놓은 사진을 보면 아무리 청맹과니라도 숙연해질 듯하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하려 ‘먼 길’을 떠나기 직전에 ‘당신의 시계는 6원이고 백범선생님의 시계는 2원이니 바꿔차자’고 했다는 시계가 지하가 아닌 지상에서 나란히 만나고 있다. 두 분은 지하에서 만나 격한 회포를 풀으셨을까? 졸문 참조: 알록달록우리소리누리집 : [오목교통신 0925]백범 김구선생을 기리며 (eglo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