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이기우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리라
이사 9,1-6; 티토 2,11-14; 루카 2,1-14
성탄 대축일 밤미사; 2023.12.25.
1. 어둠 속에 비추어진 빛, 생명
교우 여러분! 성탄을 축하합니다!
오늘 성탄대축일 밤미사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빛을 찬송하였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이 빛은 무엇일까요? 이 빛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리고 또, 이 빛은 우리 눈에 비치는 물리적인 빛과 같을까요? 아니면 다를까요?
태초에 우주를 창조하시고 이 안에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별로 지구를 조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지구 생태계 안에서 자율적으로 진행된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출현하는 그 정점에 계획적으로 개입하시어 의식을 갖추도록 인간을 진화시키셨습니다. 이 진화 과정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은 항성(恒星)이요, 항성으로부터 빛을 받아 열에너지를 공급받는 별은 행성(行星)으로 구분하는데, 행성인 지구에서 출현한 피조물 인간은 항성인 태양에서 나오는 빛으로 열에너지를 공급받아 진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 하느님을 닮도록 선택된 첫 사람들이 의식으로 하느님과 소통하면서도 뱀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 말씀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바람에 원죄를 지은 이후 그 후예들은 하느님 없이 제멋대로 살고자 하였고 그래서 홍수의 심판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세상의 죄는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고 인지가 발달하여 문명을 이룰 무렵, 우상숭배 풍습에 물든 수메르 문명에서 아브람을 고르시어 당신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대로 지목하셨습니다. 이후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가서 하느님과 대화하며 하느님의 집안을 일구었습니다. 그는 말벗이 필요하셨던 하느님의 대화상대가 되어 의사소통을 한 첫 사람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현대인들은 진화론이나 우주천문학, 인류문화학, 고고학 등의 과학적 방식으로 검증해 왔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 생명과 인류의 진화에 개입하신 방식은 계획적임을 알았고, 첫 개입 시기는 인간의 의식이 하느님과 소통가능한 신석기시대였으며, 하느님과 인간의 의사소통이 더욱 직접적이고 인격적이며 구체적으로 발전한 계기는 고대인 아브라함부터였고, 이 당시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하느님을 모르는 인류가 세운 문명은 다분히 우상숭배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과학적 검증 작업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는 이제까지의 과정을 창조적 진화로 규정하였고, 진화의 최종 정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을 천명하였는가 하면, 의식이 퇴화하지 않고 영성에로 진화하는 도약대가 바로 그리스도 신앙임을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아나빔들은 이 지혜를 꿰뚫어보고는 이렇게 기도를 남겼습니다.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또,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또한 이 아나빔들과 교감하며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던 예언자들도 이렇게 빛에 관한 예언을 남겨 놓았습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일어나 비추어라. 너희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 60,1). “해는 너에게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고 달도 밤의 광채로 너에게 비추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이사 60,19).
이사야뿐만이 아니라 에제키엘도 이렇게 예언을 남겨 놓았습니다. “내가 너의 빛을 끄는 날 나는 하늘을 가리고 그 별들을 어둡게 하리라. 해는 구름에 가리고 달은 제빛을 내지 못하게 하리라”(에제 32,7). 게다가 마태오 사도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이사야를 이렇게 인용하며 메아리를 내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드디어 요한 사도는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에서 이렇게 결정적인 계시를 남겼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4.9).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생명체의 출현과 인간으로의 진화를 이끄신 힘으로서, 이는 우주의 항성이 발사하는 물리적인 빛을 능가하는 참 빛이었던 것입니다. 태양의 그 어마어마한 빛도 우주를 감싸고 있는 전체적인 어둠 안에서 보면 희미한 촛불 같이 보이고 또 지구라는 별에 사는 우리에게는 자전과 공전 주기에 따라 낮과 밤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추시는 빛은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주께로 이끄시는 진리와 사랑의 빛으로서 낮도 밤도 없으며 온 피조물 세계를 창조주께로 이끌어 주시는 참 빛이십니다.
2. 신학이 과학의 눈으로 성서를 보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태양도, 별도, 달도 다 신으로 숭배해 오다가 하느님께서 몸소 당신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하시자 하느님이야말로 태양도 별도 달도 만드신 창조주이심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첫 메시지입니다(창세 1장). 신학이 과학의 눈으로 성서를 보기 시작하자 자연의 질서 외에도 보이는 것이 더 있었으니, 그것이 역사의 진행과정 안에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은 과학이 도발적으로 제기한 문제를 풀다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 이래로 지구상에 최초로 하느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민족 집단이 공동체를 이루고 나라를 세우며 종교적 형식까지 갖출 때까지 하느님께서 기다려주셨음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동서양에 흩어진 인류도 언어와 문자를 기반으로 학문이 생겨나서 세상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기 시작했고, 과학기술의 초보적 형태라 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 농업혁명이 일어나서 세상을 개척하기 시작했으며, 문화예술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역사와 문명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말씀을 건네시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리하여 신학과 과학의 만남으로 교회는 성경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하니 강생의 신비가 더 선명하게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때가 차서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전의 역사에서도 사람들은 하느님을 닮도록 살아야 했지만 그러기는커녕 세상의 죄가 넘쳐나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 진화의 정점에 이르러 출현한 인간 존재의 정신과 의식을 다시 한 번 그 실체가 영성으로 도약하도록 하느님을 꼭 빼닮은 존재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을 통해서는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3).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셨던 그분은 당신의 온 생애를 통해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말씀이셨습니다(요한 1,1-3). 이로써 어둠 속을 걷던 인류가 큰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암흑의 땅에 살던 인류에게 빛이 비추이게 되었습니다(요한 1,4-5). 창조의 신비가 진화되어 가다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 도약한 단계가 강생의 신비입니다. 양심으로 하느님과 의사소통하여 영혼으로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는 인간 존재가 출현한 역사적 기원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요한 1,14)는 역사적인 신앙 고백의 뜻입니다.
3. 하느님을 배척한 역사
그런데 유다교라는 종교 형식으로 하느님을 섬겨오던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내려오시어 그들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 형식을 갖추게 되었고 교회라고 불리는 새 인류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옛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새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들을 모태로 삼고 쇄신한 참 이스라엘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동서양에서 인류가 이룩해온 문명과 만나면서 세상의 지식을 배웠고 세상을 개척했으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류 문명은 인간을 문명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어서 하느님과 원활한 대화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하느님과도 그렇고 또 인류 문명과도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으로 출현한 교회는 강생하신 그리스도의 성사이며 또한 인류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성사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인류를 대신하여 소망을 전하고 축복을 청하는 한편, 인류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류에 앞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존재이며 또한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교회도 세상에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강생해야 하며 이를 통해 세상에 말을 건넬 수 있어야 합니다. 예언자들은 물론이요 예수님을 이끌어주신 성령께서 교회의 이러한 강생 노력과 대화 시도에도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을 맞이하여 세상에 교회가 기쁜 소식을 전하기에 앞서서 교회가 듣고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세상에 보여주고 가져다주어야 할 교회의 성사입니다.
4.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리라
그래서 구세주의 성탄으로 말미암아 큰 빛을 보게 된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던 인류 가운데에서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그들이 본 빛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행성들에게 항성이 빛을 비추어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실 그분 없는 상태에서는 암흑의 땅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암흑 상태에서는 인간다운 언어를 말하고 인간다운 처신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하는 이 성탄은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수확할 때 농부들이 기뻐하듯이, 군사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기뻐하듯이”(이사 9,2) 기쁠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을 수 있고,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무디어져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던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성탄을 맞이하는 자세가 다른 것은 이 기쁨 덕분이라는 것이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이제 예언자들이 내다본 이 빛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사도 바오로도 증언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6). 그는 제자인 티토 사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
사도의 증언에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오시는 메시아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시라고 믿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가르쳐서,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준다고 믿어 고백합니다. 그분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모든 불의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으니, 이 또한 믿음으로 기쁘게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창조 이래 이 세상의 모든 아담과 하와와는 질적으로 다른 고귀한 삶을 시작하실 메시아와 함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새롭게 창조된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 데 대해서 춤출 듯한 기쁨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밤의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 속에 영혼이 잠들어있어 하느님을 닮지 못하던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태양 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오신 구세주를 맞이하는 자세가 달라야 하는 것은 이 감사의 마음이라는 것이 바오로의 사도적 고백입니다.
5. 어둠 속을 걷던 한민족이 빛을 봅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빛과 밝음을 숭상해 왔습니다. 그 빛은 세상을 지어내신 창조주를 상징하는 진리였고 그 밝음은 진리에서 나오는 평화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일 가운데 으뜸으로 제천의식을 치르면서, 진리를 알기 위해 또 평화를 온 누리에 전하고자 홍익인간의 이치를 깨닫고 실천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민족에게서처럼 명시적인 의사소통을 하지는 못했어도, 한민족은 진리와 평화의 빛으로 하느님을 알아보고 숭배해 왔던 것입니다.
제천의식에서 제관들이 입던 흰 옷을 즐겨 입으면서 하느님께로부터 진리를 받아 알게 된 온갖 문명의 지혜를 이웃 민족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홍익인간으로 세상을 다스리라는 하느님 계시를 알아들은 대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거나 이웃 민족들을 노예로 삼음이 없이 오로지 진리와 평화의 빛을 나누어주었던 것이며 이것이 한민족의 문화로서 한류의 뿌리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인도의 시성(詩聖)이라 일컬어지는 타고르(1861~1941)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신음하던 시절에도 이미 위대한 상고사를 알고 나서 이렇게 내다본 바 있었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이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동방의 등불, 동아일보, 1929.4.2.).
또한 ‘25시’의 작가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게오르규(루마니아 정교회 신부, 1916~1992)도 한국을 무척 사랑한 인물입니다. 지금도 외국의 석학들이 게오르규의 통찰을 따라서 역사와 문화를 칭송하며 한류의 근원을 알리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을 방문하여 이렇게 강연한 바가 있습니다.
“나는 ‘25시’에서 직감적으로 "빛은 동방에서 온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빛은 아시아에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25시’를 읽은 젊은 사람들은 그 동방이 모택동의 중공을 의미하는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의 중공은 빛과 반대되는 암흑의 세계인 것을 압니다. 내가 작품 속에서 빛이 온다고 말한 그 동방은 당신들의 작은나라, 한국에 잘 적용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며 당신들의 마음에 들려고 과장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내가 그걸 알 수 있는 것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신 걸 알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 지도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보잘것없는 작은마을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는 태어났습니다. 광명의 상징인 예수님이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그 소촌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빛은 결코 뉴욕이나 모스크바나 북경같은 큰 도시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무명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온 것처럼 지금 인류의 빛도 작은 곳에서부터 비쳐올 것입니다.
내일의 빛이 당신들의 나라인 한국에서 비쳐 온다고 해서 놀랄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수없는 고난을 겪어온 민족이며 그 고통을 번번이 이겨낸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고난과 수렁 속에 강제로 고개를 처박힌 민족이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고개를 쳐든 사람들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내게 있어서 젊은 시절에 읽은 성서의 욥과 같은 존재입니다"( 1974년 한국방문 이화여대, 대구 계명대 강연 중, 문학사상 1974년 5월호).
또한 게오르규는 한국을 "열쇠의 나라"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절망에서 인간을 구원할 열쇠의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도를 펴놓고 유심히 살펴보면 한국은 열쇠처럼 생겼는데 한국은 아시아와 러시아, 유럽이 시작되는 태평양의 열쇠라고 말한 것입니다. 실제 지도상에서 한국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가 연륙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대륙이 시작되는 위치에 열쇠처럼 걸려있습니다. 그는 세계의 모든 난제가 "열쇠의 나라" 한국에서 풀릴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출처: [역사 칼럼]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게오르규의 예언 - 제이에스매거진 - http://www.jsmagazine.net/381893>.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연철학과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무신적 학문을 지배 엘리트들이 들여오면서 어둠도 시작되었고, 2백여 년 전에 오묘한 섭리로 이 어둠을 밝히는 빛이 들어왔는데도 정작 우리 민족이 이 빛을 모르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2백여 년 전에는 소중화를 자처하면서 쇄국정책과 봉금정책으로 우물 안 개구리 노릇을 하다가 복음의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백년이나 박해했으며 그예 우리보다 먼저 근대화를 이룩한 일제에게 식민 통치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는 미국에 의해 근대화를 배우고 서구화로 치달았는데, 정작 우리가 지니고 있는 빛을 모르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것이 서구화의 가치와 함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할 토착화의 절박한 요청이자 이유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직도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우리 겨레에게 이 빛을 비추어주어야 합니다. 진리와 평화의 거울로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한류의 뿌리를 알고, 한류를 복음화시켜야 할 때입니다. “빛은 동방에서 다시 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