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은 아내는 내 아내인가, 아닌가? 치매로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은 내 남편인가, 아닌가? 기억을 잃은 사람은 모릅니다. 문제는 그 상대방입니다. 잠자리를 함께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낯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다정하게 상대하려 해도 받아주지 않으니 어쩝니까? 이 마음을 어떻게 전달하지요? 이 사람은 과연 나의 배우자인가요? 어떻게 이해시키지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모르는 낯선 사람으로 다가온다면 어떻게 하지요? 다 잊고 돌아서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자신을 부정하는 일 아닙니까? 일단은 기억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립니다. 물론 치매환자는 그것조차 어렵습니다.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나는 무엇인가? 어쩌면 기억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과거가 없다면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닙니다. 머릿속에 아무 것도 없다면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몸뚱아리지요. 막말로 말한다면 고깃덩어리일 뿐입니다. 언젠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찰을 한다고 의사와 간호사가 누워있는 나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립니다. 나 자신은 아무 것도 할 권한이 없습니다. 굴리는 대로 이리저리 구릅니다. 한 마디로 마치 도마 위의 고깃덩어리 같더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병들어 꼼짝못하고 누워있으면 그냥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잃었다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머리가 완전히 빈 것은 아닙니다. 결혼 전의 기억은 살아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아내는 미혼인 상태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있음에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못하는 것이지요. 모르니까. 기억이 없으니 결혼한 적도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웬 낯선 남자가 자꾸 아는 척하며 다가오니 불편합니다. 어쩌겠습니까? 일단 물러서야지요. 짧지만 함께 하였던 꿈같은 신혼생활이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하지만 멀정하게 살아있는 아내를, 더구나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냥 나 몰라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어렵지만 일단 기다려봅니다. 기억이 되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다만 얼마나 걸릴지, 과연 이루어질지 그것은 보장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 다시 시작해보자는 마음을 가집니다. 우리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던 때를 재현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때가 상기되도록 그 때의 상황을 만들어봅니다. 뭔가 되는 듯하다가도 감감해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대로 아내를 잃어야 하는가, 절망감이 오기도 합니다. 더구나 아내는 결혼 전 사귀던 남자는 잘 기억합니다. 어쩌다 그가 나타나 다시 그 때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합니다. 어느 쪽에 더 가능성이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이러다 아내를 뺏기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다행히(?) 아내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는 것까지는 기억합니다. 왜 헤어졌던가? 자신의 자유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결혼 전 대학생으로 돌아온 ‘페이지’는 법대를 자퇴하고 예술대학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법대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은 멀어진 딸이 돌아와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법대 공부를 하고 있음에도 몸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머릿속 기억은 잃었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요. 남편 ‘리오’는 그런 아내의 상태를 잘 이용해보려 합니다. 그런데 역시 마음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아내가 스스로 이상하게 느끼면서도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 더 실망만 누적됩니다. 그냥 포기할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내 사랑하는 그 마음이 워낙 큽니다. 주저앉았다가도 일어섭니다. 문제는 아내가 처음 자신에게 느꼈던 호감을 다시 얻는 일입니다.
반세기 전쯤 한창 사춘기 때 보았던 영화가 당시 얼마나 크게 감동을 주었던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기억을 잃습니다. 그는 재벌가의 자손입니다. 큰 기업을 경영하는 대표가 됩니다. 사고 전에 사랑에 빠졌던 여인은 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그 기업의 사장 비서로 취직합니다. 그리고 사장의 기억을 되살리려 많은 시간을 기다리며 노력합니다. 과연 가능할까요? 시간은 가고 몸은 늙어가고 가능성은 점점 희미해져갑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요? 주머니 속에 지니고 있던 비밀의 열쇠 하나, 도대체 어디 열쇠일까? 남자는 늘 궁금해하며 역시 비밀을 추적합니다. 마지막 장면, 가슴 뭉클, 절로 눈물이 글썽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두 사람이 다시 사랑하여 부부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두 번이 없다는 사실이 좀 무색해집니다. 리오와 페이지는 다시 사랑하게 되고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사실 남편 리오의 각별한 애정과 노력 그리고 인내심이 얼마나 컸던가 새삼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내를 다시 찾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여전히 남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 ‘서약’(The Vow)을 보았습니다. 2012년 작품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니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존경스러운 남자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날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