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삼가 금박을 칠한 표문을 갖추고, 공상(公象)은 1쌍, 모상(母象)은 1척, 용연향(龍涎香)은 황제에게 1근, 황후에게 8량, 금강찬(金剛鑽)은 황제에게 7량, 황후에게 3량, 침향(沈香)은 황제에게 2근, 황후에게 1근, 빙편(氷片)은 황제에게 3근, 황후에게 1근 8량, 서각(犀角)은 황제에게 6개, 황후에게 3개, 공작미(孔雀尾)는 황제에게 10병, 황후에게 5병, 취피(翠皮)는 황제에게 6백 장, 황후에게 3백 장, 서양전(西洋氈)은 황제에게 2장, 황후에게 1장, 서양홍포(西洋紅布)는 황제에게 10필, 황후에게 5필, 상아(象牙)는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장뇌(獐腦)는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강진향(降眞香)은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백교향(白膠香)은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대풍자(大楓子)는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오목(烏木)은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백두구(白荳蔻)는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필발(蓽撥)은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단향(檀香)은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감밀피(甘蜜皮)는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계피(桂皮)는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등황(藤黃)은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소목(蘇木)은 황제에게 3천 근, 황후에게 1천 5백 근인데, 특별히 조공사(朝貢使) 파사활리나돌랑(帕史滑里那突朗)·와문실니하악무돌랑(喎汶悉呢霞喔撫突朗)·요찰나비문지돌(扶察那丕汶知突)·문비필오차(汶丕匹遮)를 임명하여 일을 준비하고 조심스레 가서 삼가 대궐에 바치도록 하였으니, 너그럽게 거두어 주신다면, 정화는 지극히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외람되게 바칩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9년 14일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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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개뿔일겁니다
이 표문은 섬라국의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보낸 표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9년 2월 14일 기사-참고로 이 표문도 같은 날 기록에 있습니다-에,북경으로 간 조선 사신이 섬라국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보낸 표문을 베껴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은 명,청의 허가없이는 어떤 나라와도 외교나 무역을 독자적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나라에 속국이나 식민지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글내용을 봐도 조선왕에게 보낸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실록의 내용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것 같군요. 태국이라면 선초에는 사신이 내왕하기는 했읍니다. 중기부터는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태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표문을 보냈더라 하는 내용 아닐까여^^;;
ㅎㅎㅎ 출처카페에 가보니 안양사랑님 내공이 상당하더군요. 이 게시물이나 한반도 괴지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헤매이면 안양사랑님이 친절히 답변해주시고...
그분은 볼수록 감탄이나오죠 ㅋ
거꾸로 말하서 태국이 조공을 해서 조선의 식민지라면 중국에 수없이 조공해온 수많은 나라들은 중국의 식민지인가요?.. 조공은 일종의 무역.
명나라때 베트남인가 태국인가가 조선보다 지위 높았던걸로 아는데..베트남인가.. 그리고 설령 저렇게 저런걸 보내온들 식민지라는 내용과..무슨소용..그리고 태국이 조선보다 잘살았다던데...
조공이니 하는 것도 액면 그대로 믿을 건 못됩니다. 조선도 초기에 용비 어천가든가? 보면 베트남이나 태국등이 조공했다는 내용 있습니다. 물론 과장입니다. 일종의 의례적인 표현입니다. 일본도 네델란드가 자기들에게 조공을 햇다고 주장하고 조선통신사도 조공사절이었다고 주장하죠.
중국쪽의 주장도 그런 부분이 상당히 내재되어 있습니다.
자존심을 죽이고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온갖 하사품과 다양한 학문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데, 누가 그리 못하겠습니까? ^ ^; 중화질서에 처음으로 도전한 영국도 18세기까지는 온갖 수모를 다 겪었습니다.
동아시아: 중국 서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오스만 투르크 라는 구도가 무너진 것은 불과 200년전입니다. 그 전에는 영국 네덜란드 같은 국가들도 실제 모습과 관계없이 속국 내지는 3류국 취급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