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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일제의 수탈정책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국에게 있어 부족한 자원을 조선을 통해 충당한다는 모토입니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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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 이때 일제의 가장 주 목적은 조선의 땅을 몰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땅을 악착같이 빼앗아 갔을까요? 당시 일제는 공업화 과정에 따른 엄청난 쌀부족을 겪고 있었고, 그에 따른 쌀 생산을 조선에서 하려 했습니다. 즉, 그 쌀 수탈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게 토지였던 것이지요. 또한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을 식민지로서 다스리기 위해 일본 백성들을 조선으로 이동해서 살게끔 장려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도 역시 토지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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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에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됩니다. 토지조사사업은 그 근본적 의의를 봤을때 100% 부정적인 것만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근대적 토지 조사법을 통해 근대적인 토지 소유가 가능하게 하였던 사업이거든요. 하지만 이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이 잘못되었던 겁니다. 우선적으로 신고하지 않은 땅은 모두 총독부 소유로 취급하여 몰수해갔습니다. 일제의 정책에 시큰둥하거나, 혹은 소식을 몰랐거나해서 신고하지 못한 농민들은 모두 땅을 잃었던 것이지요. 또한 악탈 형식으로 조선 정부의 땅을 몰수해갑니다. 게다가 정부에게 압력을 넣어 농민들에 땅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다가 헐값으로 팔게끔 하지요. 결국 토지조사사업은 그 근본취지를 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땅 수탈이라는 일제의 개념없는 정책으로 인해 말그대로 땅 몰수 사업이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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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일본은 광업령, 어업령, 산림채벌권 등을 통해 조선땅의 기본적인 이권을 모두 침탈해 갑니다. 참고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에 세워진 토시회사로서, 조선 땅을 헐값에 사드리는 일제시대 초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온 곳입니다.
(이후 의열단에 의해 폭탄테러를 당하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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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 이제 땅은 준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족한 쌀을 증산하는게 문제였지요. 조선은 본래 쌀이 잘 자라는 곳이지만, 더욱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수리조합과 같은 농법 개선을 꾀하여 좀 더 많은 쌀 생산을 꾀하였죠. 중요한 것은 수리조합은 분명 일본놈들에 필요에 의해 거행된 것인데, 이것을 모두 우리 농민들이 지불했다는 겁니다. 또한 쌀 생산량은 늘어나는데, 수탈량은 더욱 증가했고 백성들은 엄청난 쌀을 앞에 두고도 주린 배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쌀 증산책을 산미증식계획이라고 합니다. 결국 덕분에 조선은 쌀 생산국으로 전락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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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 1931년, 1938년. 일제는 만주사변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킵니다. 둘 모두 대륙을 통해 진격해야했던 전쟁이고, 덕분에 조선의 최북쪽은 빠른 물자공급을 위해 공업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북쪽에 중공업 기반이 몰려들면서, 이때부터 공업 기능의 남북 차이가 생겨납니다. 또한 일제는 남면북양 정책을 통해 남쪽에는 면, 북쪽에는 양을 길러 이들로 얻을 수 있는 자원을 전쟁에 이용하기도 했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일제는 더욱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군인과 같은 인적자원, 무기와 같은 물적자원들이 말이지요. 그래서 일제는 1937년 국가총동원법을 발령하여 조선의 모든 것을 악탈해갑니다. 인간이든 자원이든 모두요 ;ㅁ; 조선을 정말 말그대로 문방구 수준으로 본 것이지요. 그래서 학도병이다 징원제다 징병제다 하면서 건장한 젊은이들을 데려가 총알받이로 쓰거나 죽도록 일만하게 하고, 잘 아시다시피 이때 위안부들을 모집합니다. 물론 모집이란 이름 하에 강제 납치였지만요. 또한 공출제라고하여 녹여서 무기를 만들 수 있는거면 뭐든 악탈해갔습니다. 또한 비행기 연료로 쓴답시고 나무의 송진액까지 빼앗아 갔고요 ㄱ-;; 정말로 전쟁에 필요하지 않은 것 빼고 전부 악탈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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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국권침탈 후 일제의 만행은 시간대 별로 세그룹으로 나눕니다.
첫번째 단계는 1910년 경술국치이후부터 1919년 3.1일 기미독립만세혁명까지 무단통치기라고 구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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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단계는 1919년 기미년 이후부터 1930년대까지 한민족의 정신까지 말살하는 단계로서 문화통치기입니다. 기미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일제는 단순한 무단통치만으로는 우리민족을 영구통치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정책적으로 민족문화와 역사정신을 말살하기위한 정책과 기관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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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왕의 특명으로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직속기관이 바로 조선사편수회이며,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왜곡하여 식민사관인 반도사관의 기반을 확고하게 세우게 됩니다.
이때 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반도사관 확립하는 등에 반민족행위의 죄를 저지른 한국인으로는 최남선, 이병도, 신석호, 이능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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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는 1930년대부터 일제는 중일전쟁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나라를 병참기지화하면서 인적물적 자원수탈과 함께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한 때로 민족말살기에 해당됩니다.
1930년대에는 중일전쟁 이후부터 1945년 일제패망까지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인적물적수탙과 더불어 생체실험과 위안부, 징용, 징병등의 강제동원이 이뤄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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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왜곡된 대표적인 식민역사관인 일제반도사관은 지금까지도 우리역사를 반도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서 우리의 혼과 역사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 년도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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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의 개혁이 시작. (사회전반의 부조리를 척결하기위한 과감한 개혁이 었음)
그 결과 반대파가 다수 생겨나고 특히 유생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부르짖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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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 병인박해 :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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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 제너럴 셔먼호 사건 :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함대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나 백성을 괴롭혔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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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 병인양요 : 병인박해에 대항한 프랑스가 침입. 한성근부대와 양헌수부대의 활약으로 우리나라의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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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 오페르트 도굴 사건 :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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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 신미양요 :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로 침입. 우리나라의 승리로 척화비를 세움.
洋荑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오랑캐가 침범하오매,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오.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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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 명성왕후 집권(흥선대원군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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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 운요호 사건 : 일본의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 대포를 발사하면서 통상을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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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 강화도 조약 : 조선이 일본에서 누리는 권리는 없고 일본이 요구하는 조건만 있던 불평등 조약.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
이후 우리나라는 미국을 시작으로 하여 서양각국(영,독,러,프)과의 조약체결에 들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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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 1차수신사 파견(일본. 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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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2차수신사 파견(일본. 김홍집. 1880 조선책략→1881 영남만인소) 조선책략은 청의 외교과 황쭌센이 김홍집과
6차의 필담을 나눈것을 글로 적어 전달한 것.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위하여 친중국, 결일본, 연미방
해야한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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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운동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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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이항로, 기정진) 통상반대론, 척화주전론
1870년대(최익현, 유익선) 개항반대운동 - 왜양일체론, 개항불가론
1880년대(이만손, 홍재학) 개화반대운동(영남유생 이만손의 만인소와 강원도유생 홍재학의 척사상소)
이들 위정척사운동은 1890년대 이후 의병운동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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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조사시찰단(일본.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 62명), 영선사(청. 김윤식이 유학생들 인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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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 조미수호통상조약 : 미국과의 조약으로, 서양과 최초로 맺은 조약. 최혜국(최고 혜택의 나라) 대우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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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 임오군란 : 구식 군대를 차별하자 구식군대들이 궁궐이나 관청을 습격. 이루 조선의 친청정권이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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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조약 : 임오군란결과 조선이 일본에게 배상금을 물고 일본공사관의 경비병 주둔을 허락한 조약.
이 조약에 따라 박영효가 3차수신사로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 배안에서 태극기를 도안하여 최초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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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청상민 수륙 무역 장정 : 임오군란을 빌미로 청이 조선의 종주국임을 규정. 청상인의 통상특혜. 청상인의 조선진출이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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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 한성순보 : 박영효의 주장으로 박문국이 설치되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순한문의 한성순보가 간행.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의 불타자 간행이 중단되었고, 1886년에 한성주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간행.)
원산학사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학교가 덕원 주민들에 의해 세워짐. 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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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갑신정변 :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가 우정국 개국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킨 사건. 개혁.
청군이 몰려오고 일본군이 배신함에 따라 3일천하로 끝이남.
이 일로 인해 청과 일본간의 톈진조약이 맺어졌는데 양국은 이로써 철수하게 되었지만, 앞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 파병시에 서로 통보해주게 되었으므로 (톈진조약) 1894년의 사건에 불씨를 남김.
갑신정변이 끝난뒤에 조선은 또다시 일본과 한성조약을 맺고 배상금지불, 공사관신축비 부담을 하게됨.
1885 거문도 사건 : 영국이 제국주의의 횡포로 인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사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우리땅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고, 러시아가 조선으로 남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물러감. 이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신은 추락.
1889 방곡령 선포 : 함경감사 조병식이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막는 방곡령을 선포.
그 결과 우리는 일본에 배상금을 물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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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동학농민운동 : 동학교단을 이용한 농민들의 반봉건, 반외세적 항거. 고분군수 조병갑의 횡포에서 출발한 고부민란을
시작으로 하여 1차농민봉기(반봉건), 전주화약시기(집강소), 2차농민봉기(반봉건, 반외세)로 전개.
그 과정에서 청과 일본을 불러들였고 전주화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의한 경복궁점령이
이루어졌고 이어서 갑오개혁이 단행.
청,일간에는 청일전쟁(일본의 승리)이 발발. 우리의 땅은 그들의 전쟁터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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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95 갑오개혁 : 1,2,3차개혁으로 이어짐. 1차개혁때 역사적인 개혁이 일어나는데 바로 신분제의 법제적 철폐.
이후로도 조선인들은 고질적인 신분제의 병을 고치지 못함.
2차개혁때는 고종이 국정개혁의 기본강령인 홍범14조를 반포.
3차개혁은 단발령을 주내용으로 하는 개혁으로, 을미개혁으로 불림.
최익현은 울부짖으며, 내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자를수 없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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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삼국간섭 :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이 획득한 요동반도의 점유에 대하여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끌여들인 사건.
그 결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요동반도는 반환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조선의 명성황후는 궁중에 친러파를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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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을미사변 : 일본 야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그 결과, 을미의병이 일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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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아관파천 : 고종이 일본을 피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 아관파천이후, 열강들에 의한 조선에 대한 이권침탈이 가장 심하게 집중.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신이 또한번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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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독립협회 설립 :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출간. 독립협회 수립.
독립협회는 국민들과 함께 고종의 환궁을 요구.
1989년에는 민중대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고, 관과 민이 함께한관민공동회도 개최.
(독립협회는 황국협회를 동원한 보수파의 계략으로 1898년에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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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대한제국 선포 : 고종이 환궁하여 대한제국, 황제를 선포하고, 이때 광무개혁이 실시.
광무개혁은 근대산업, 근대교육, 근대문화에 대한 개혁을 표방한 근대적 개혁이었음에도 황제권강화(복벽주의)를 표방한 뭔가 미흡부족한 아쉬운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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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경인선 개통 :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미국과 합작으로 1897년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미국이 재정 문제로 철수하고 일본의 손을 거쳐 1899년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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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제 1차 한일협약 : 외교고문(미국인 스티븐스), 재정고문(일본인 메가다)을 두게 되어 고문정치가 실시.
보안회(애국 계몽운동) :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 철회를 주장하여 성공. 하지만 곧 해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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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을사조약(제 2차 한일 협약) :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면서 통감부가 설치.(통감정치)
전국각지에서 을사조약 반대투쟁(민영환 자결, 5적암살단,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항일 논설게재, 장인환, 전명운의 스티븐스사살 등) 및 을사의병이 발발
(병오의병이라고도 함.) 평민의병장신돌석의 활약.
화폐정리 사업 : 일본이 조선에 대한 경제침탈을 목적으로 시행한 것으로, 메가다에의해 화폐정리사업이 단행.
조선화폐의 유통 및 교환기능을 없애 조선화폐를 정리하고, 대신 일본화폐를 조선에 널리 유통시킴으로써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쉽게 하려는 데 목적이 었었는데 이를 우해 일본은 조직적이면서도 신속하게 화폐정리사업을 추진.
구권을 신권으로 바꿔주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은 사전정보가 없어 막대한 손해를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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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통감부 설치 :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가 외교업무만을 담당할 기구로 설치하였는데 이후 일체의 사무를 담당하는 기구. 다시 말해, 통감부는 1906년(광무 10) 2월부터 1910(융희 4) 8월까지 한국을 완전 병탄할 목적으로 설치한 감독기관으로, 이를 통해 일제는 한국병탄의 예비작업을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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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국채보상 운동 : 1905년에 일본이 차관지급을 했는데, 이 돈을 갚자는 운동. 대한매일신보가 중심.
대구에서 서상돈의 제안으로 시작하여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설립되는 등 전국적으로 파급된 구국운동. 하지만 결국 실패.
헤이그특사 : 고종이 우리나라의 억울함과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을사조약 체결이 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려 꾀한 일.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네덜란드 헤이그에 보냄. 이일로 인하여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는 불상사가 발생.
고종 강제퇴위 : 헤이그특사사건으로 인하여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고 순종이 즉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내에 일본인 차관을 두게하여 내정을 완전 장악하는 '차관정치'를 실시
['조선정부 각 부서에 통감이 임명한 차관을 둔다.']
군대해산 :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인하여 정미의병이 발발. 하지만 의병운동은 일본의 남한대토벌 작전으로 인해
크게 위축되었고 1910년이후에는 국내에서의 활동은 극히 미미함.
다만마지막의병장 채응언이 평안도 함경도 일대에서 활약하였고 1915년에 체포.
신민회 결성 : 애국계몽단체. 비밀결사 단체이고, 주요 활동단원은 안창호와 양기탁, 이승훈, 이동휘, 이동녕 등.
주요 활동으로는 대성학교, 오산학교 설립, 태극서관(서울, 평양, 대구)과 도자기회사(평양) 운영,
민주독립운동기지 건설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것은공화정수립을 민족운동의 공식목표로 채택한
역사적 단체. 역사상 최초.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해산.
1910 국권피탈 : 이완용 매국내각이 일제와 합병조약을 체결. 한국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
양여함. 이로써 조선은 27대 519년 만에 완전히 멸망.
총독부 설치. 1대 총독으로는 3대 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취임.
1911 105인사건 : 이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산됨. 안명근의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사건을 구실로 일제가 신민회 600여명을
투옥하고 그중 105명을 재판에 회부한 사건.
1912 토지조사사업 : 조선의 땅을 빼앗으려 작정한 일제. 원칙은 신고주의 였으나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제에 대한 반감으로
또는 몰라서 제때 정해진 절차를 밟아 신고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제에게 의해 땅을 모조리 몰수당하였고,
일제는 이렇게 뺏은 토지로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인에게 넘김.
1914 대한광복군정부 : 1910년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 이동휘 등이 만듬.
정통령에 이상설, 부통령에 이동휘가 선임되었고 임시정부수립에 영향을 주어 3.1운동이후
대한국민의회의 결성을 보게 됨.
1919 3.1운동 : 유관순의 대한독립 만세운동. 거국적인 항일민족만세운동. 1단계는 대도시, 2단계는 중소도시, 3단계는
농촌까지 파급. 비폭력에서 출발하여 점차 무력저항주의로 발전. 그리고 이후에 국외(만주, 연해주, 일본,미국)
까지 확산되었던 대규모의 항일운동. 3원초 시작하여 4월초의 절정기를 거쳐 5월말까지 계속 이어짐.
이때 일제의 무참한 학살이 일어났으니 바로 경기도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4월 15일).
일본군이 주민 30여명을 교회에 가두고 집중사격을 가해 학살하였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지른 사건.
하지만, 일제는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우리민족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문화통치를 실시하여 유화책으로 전환.
하지만, 이또한 일제의 고등 기만술. 친일파가 더 늘어남.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 상하이에 수립됨. 민주 공화제를 주장. 연해주 대한국민의회(1919.3) + 상하이 대한민국임시
정부(1919.4) )+ 국내 한성정부(1919.4) 이렇게 3개정부를 합친통합정부(1919.9.6출범)
대통령중심제, 3권분립의 정부로, 대통령으로 이승만, 국무총리로 이동휘가 선임.
우리의 독립운동을 하나로 묶어주고 이끌어줄 구심점이 필요로하여 탄생.
1920 산미증식 개혁 : 한반도를 일본의 식량 공급 기자화할려는 일제의 욕심.
일본국내의 부족한 쌀을 조선으로부터 들여가려는 일본의 경제정책인데, 증산량보다 수탈량이 훨씬 많아
우리 농민들은 쌀을 생산하고도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밥을 먹어야 했음.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청산리대첩은 홍범도 연합부대를 비롯하여 특히 김좌진장군의
활약상이 뛰어났던 전투. 청산리대첩은 특히 독립전쟁사상 최대 승리로 이끌었던 전투.
일본은 이 두번의 전투에서 연속 패배 이후에 복수심에 불타 간도참변을 일으키고
우리동포 3600여명을 학살.
1926 6.10만세운동 : 3.1운동이후 1920년대때 크게 유행하였던 사회주의계열과 학생들이 각각 시위를 계획.
결국 학생들의 주도로 순종의 장례식에 만세시위가 전개 되었고, 시민들이 가세하게 되었는데
3.1운동만큼 크게 확산되지는 못함. 하지만 민족유일단운동의 신호탄이 되었고, 이후 학생들의 동맹휴학
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조직화하게 됨.
1927 신간회와 근우회의 창립 : 좌우합작 합법단체. 민족유일당운동의 중심단체. 근우회는 신간회의 자매 단체.
1929 광주학생항일 운동 : 3.1운동이후 최대의 항일민족운동. 광주에서 한.일 학생간의 충돌이 확대되어 학생 총궐기와
동맹휴학 및 시위로 발전하여 여기에 시민까지 참여하는 전국 규모의 항일투쟁이 이루어짐.
학생운동은 교내문제를 넘어 일본제국주의의 타도를 부르짖는 항일민족운동으로 발전.
1930 한국독립군 조직 : 국내에서의 민족유일당운동의 영향으로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도 통합운동에 나섬.
남만주는 국민부, 북만주는 혁신의회, 그리고 국민부 산하 독립군으로 조선혁명군(양세봉 지휘)이 편성,
혁신의회 산하독립군으로 한국독립군(지청천 지휘)이 결성.
이들은 한중연합군을 성립하여 대일항전을 펼침.
1938 국가 총동원령 :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려는 일제의 만행. 일제는 민족말살통치를 하는 한편 우리나라를 통채로
병참기자화시키는 정책을 시행. 1년후에는창씨개명이 시행.
1943 카이로 회담 : 2차세계대전때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회담.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약속.
1945 얄타 회담 : 제 2차 세계대전 종반에 소련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들이 모여 독일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
포츠담 회담 :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영국.중국 3개국 수뇌회담.
일본에 대해서 항복을 권고하고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대일처리방침을 표명.
카이로 회담의 내용을 재확인.
1945 8.15광복. 그러나 이후 미.소의 군정이 시작.
1945 모스크바 3상회의 : 미,영,소가 5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정하고, 한국인의 임시정부를 구성.
1946 1차 미.소 공동위원회 : 참가단체 문제로 결렬.
이승만의 단정론(단일정부론) :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이승만이 주장.
1947 2차 미.소 공동위원회 : 완전 결렬.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정부로 개칭하고 통치의사를 밝힘.
1948 UN소총회 결의 :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정. 후에 김구, 김규식이 남북협상하려고 평양으로 감.
4.3사건 : 5.10선거에 반대하고,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자 양민들을 학살.
5.10총선거 : 결국은 총선거가 실시되고, 제헌의회를 구성.
대한민국정부수립 : 8.15에 수립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 9.9일날 북한도 나라를 세움.
UN 대한민국 합법 정부 승인 : 12월에 파리총회에서 승인함.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는 대한민국 뿐이라는것을 승인.
1950 한국전쟁 : 일명 6.25전쟁. 미국의 애치슨선언으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이
1950년 1월 12일 네셔널프레스클럽에서 행한 연설의 내용으로, 미국의 극동에 있어서의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로부터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을 통과한다. 방위선 밖의 국가가 제3국의 침략을
받는다면 침략을 받는 국가는 그 국가자체의 방위력과 국제연합헌장의 발동으로 침략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방어선 밖의 한국, 타이완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국가적 공격에 대해 미국이 도와줄 수 없다는 내용
으로 6.25전쟁의 원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음.
1952 1차 개헌 : 대통령직선제 개헌. 이승만이 2대 대통령으로 당선.
1953 휴전 :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휴전.
1954 2차 개헌 : 일명 4사5입개헌으로 알려진 개헌으로 이승만의 독재야욕이 보임. 자유당은 초대대통령 3선제한을 철폐하는
개정법안을 내었는데 재적의원의 2/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했으나(135.33명이상의 찬성을 얻어야함.)
실제 투표결과 재적 203, 참석 202,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이 나왔지만, 1표가 모자라 부결되자
자유당이 여기에 사사오입의 논리를 내세워 통과하였다고 번복함.
이후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 민주당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
1960 3.15부정선거 : 이승만의 권력욕으로 일어난 사건. 4대 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단선 시키기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함. 이로 인하여 마산 상고 김주열 사건이 발생.
마산의거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
4.19 혁명 : 이승만이 하와이로 쫓겨남.
3차 개헌 : 장면내각으로 잘알려진 의원 내각제와 양원제가 특징. 우리나라의 최초이자 유일 함.
4차 개헌 : 박정희가 실시. 소급입법의 근거를 마련하는 개헌.
1961 5.16쿠데타 : 박정희의 집권이 시작.
1962 경제개발 5개년 개획 : 경제를 살리고자 하는 박정희의 첫도전. 1차임
5차 개헌 : 대통령 직선제와 단원제.
1965 베트남 파병 : 일명 3선개헌. 즉, 대통령을 3선까지 하도록 함. 박정희도 이승만과 같은 낌새를 보임.
1970 전태일 분신사건 : 평화시장의 전태일이 노동자의 인권을 주장하며 분신한 사건.
1972 7차 개헌 : 간선제. 유신헌법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매우 심하게 강화.
유선독재체제가 구축됨.
1973 6.23선언 : 북방외교의 기초를 마련.
1979 10.26사태 : 김제규가 권력욕에 미친 박정희를 총살.
12.12사태 :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1980 5.18광주민주화 운동 : 10일간의 민주화 운동. 전라남도 및 광주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
8차 개헌 : 간선제. 7년단입을 약속하고 전두환대통령의 독재가 시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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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6월 민주항쟁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과 4.13 호헌조치, 이한열 사망사건으로 국민들은 분노함.
9차 개헌 : 정부는 결국 항복. 최초의 여야 합의 개헌. 이때부터 직선제, 5년단임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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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서울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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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남북한 UN동시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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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금융실명제 : 지하경제를 수면위로.
1997 IMF사태 : 김영삼의 지지율은 2%로 최악의 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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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6.15공동 선언 : 최초로 남북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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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외환 위기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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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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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탄핵소추 : 야당의 권력욕을 보여주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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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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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캔디&향미님 너무나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할께요!
별~말씀을요...언제나 얻어만 가는걸요. 이렇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픈 마음입니다.
고운 마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