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자유인
고린도전서 9:16-23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이다. 부활절은 성령강림주일 전까지 일곱 주간 동안 계속된다.
세계교회의 전통에 따라 부활절 인사를 나누자.
선창-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후창-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 종교에 대해 비난해도, 교회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해도 예수님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밀레니엄을 맞아 지난 2천 년동안 가장 커다란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정하였다. 어떻게 2천 년 전에 하신 말씀이 여전히 영향을 끼칠까? 이런 저런 해석을 한다.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혹은 부활신앙의 능력이다. 모두 맞는 말이다.
나는 덧붙이기를 예수님은 참 자유인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전통이나, 교리나, 역사적 평가에 매인 분이 아니다. 참 자유인이다. 누구든, 역사든, 이 세계든 참 자유를 모색한다. 예수님은 단연 모범교사이다.
거칠게 사람을 구분한다면 고립인으로 사는 사람, 독립인으로 사는 사람, 자유인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겉모습과 내면 모두의 모습이다.
홀로 존재한다고 고립인은 아니며, 남다른 삶을 산다고 독립인은 아니다. 자유인은 하나님과 사람과 관계 속에서 세상을 풍성하게 한다.
1)
사도 바울은 ‘참 자유인’으로 산 사람이다. 바울의 자유는 지극히 역설적이다. 그는 참 자유인로 살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내 뜻대로 산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의 뜻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종이 되려는 자유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
그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이었다.
자유인으로 산 바울의 삶을 살펴보자.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랑에 대해 입을 다문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솔직히 말하기를,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부득불 할 일”(16)이라고 하였다.
부득불(不得不)은 ‘어쩔 수 없이’란 뜻이다. 그는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이었다. 바울은 만약에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16)라고 실토한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 역시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유보하고, 하나님의 자유하시는 은혜를 선언하였다.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경우가 그랬다. 그도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예언 활동을 해야 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 4:19).
예레미야는 자기 사명에 대해 하소연한다. 그가 잠잠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는 마음에 하나님이 외치시는 나팔 소리와 비상경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찌 외치는 일을 주저할 수 있을까? 예레미야는 자신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다고 고백하였다(렘 20:9).
물론 바울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바울은 두려움 때문에 복음 전파자가 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하였다. 상을 받거나, 대가를 얻거나, 권리를 행사하려는 목적 때문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자유가 위대한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자기 포기’라는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강요를 받아서가 아니라, 상급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비천하심과 그 희생에 동참한다고 고백한다.
한스 쿠르파는 이런 말을 했다. “자유란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일 뿐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닌가? 다시 말하면 바울의 자유는 모든 것을 다 버릴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다.
2)
본문은 바울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유익을 주기 위하여, 어떻게 자유를 포기했는지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바울은 그 기준을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맞추고 있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20)인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인들과 같이 행하였다.
바울은 “율법 없는 자들”(21)인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방인들과 같이 행하였다.
바울은 “약한 자들”(22)을 얻기 위해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
바울의 포기는 줏대 없이 적응하고, 타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그 자리에 내려간 것이다.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22) 그 사람들의 입장에 서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誠肉身) 원리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빌립보서에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 담겨있는데 이를 ‘케노시스’(비움)라고 한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이 되어 사람들의 자리로 내려가셨다(빌 2:6-7).
여기에서 자기 비움, 내려놓음, 자기 포기와 같은 사명의 원리가 나온 것이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복음의 전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태도는 두려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이요, 그 사랑의 원리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위대한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 동포인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과 세상의 약자들을 사랑하였다. 그들을 가리켜 성경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 ‘율법 없는 자들’, ‘약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먼저 바울이 말하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율법이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생명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율법의 관습을 따르는 것을 일부 허용한다. 바울은 율법의 조항 때문에 갈등하지 않았고, 작은 차이 때문에 더 큰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 아래 살고있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
또한 바울은 “율법 없는 자들”인 이방인을 구원하려는 특별한 사명을 갖고 있다. 그들은 율법과 동떨어진 사람으로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이었다.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을 구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약한 자들”을 위해 특별히 배려한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2). 그 약함은 세상의 약자들이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고전 1:28)셨음을 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무런 댓가를 지불 할 수 없는 “약한 자들”, 약자와 타자와 소수자의 편이 되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를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예수님이 먼저 그를 선택하시고, 그를 위해 낮아지셨고,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음을 믿기 때문이다. 값없이 주신 은혜였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포기할 수 있었다. 자신의 보수와 상급을 요구하지 않고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자신이 받을 상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려고 스스로 자신의 결단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그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울을 참 자유인이 되도록 하였다.
3)
바울은 자유인으로서 자신이 행하는 것, 전하는 것, 견디는 것은 모두 복음 때문이라고 하였다. 바울의 자유는 고난에 대한 선택이었다. 복음을 통해 축복과 함께 고난도 감수하였다. 바울은 담대히 말한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23).
이렇듯 바울은 예수의 모범을 제대로 따랐던 진정한 제자였다. 약자에게 한없이 약하고, 강한 자들에게 더 없이 강하셨던 참 자유인이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그런 원칙은 잘 지키지 못한다. 목숨을 걸고 지킬 의무를 모른다. 너무 쉬운 길만 선택하고 사는 것은 아닌가? 나만의 자유를 위해, 우리 자신만의 자유를 위해 너무 많은 진실을 낭비하지는 않았던가?
내일 아시아인권회의에 참석하다. NCC 인권센터 50주년을 맞아 이웃 나라 교회를 초대하여 교회가 어떻게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할 것인지 경험을 나누는 일이다. 그동안 우리 한국사회는 국제사회에게 많은 빚을 졌다. 이젠 빚을 갚을 수 있을만큼 우리 사회가 성장하였다. 이를 위해 아시아의 작고 연약한 교회들을 돕고 협력하는 것이다.
오늘 독일에서 손님이 오셨다. 함부르크한인교회 강범식 집사이다. 독일에서 목회하면서 6차례 한인교회협의회 통일특별위원장을 했는데, 한동안 서기 역할을 맡아 함께 즐겁게 일을 하였다.
강범식 집사는 1990년 말 북한에 ‘의약품 보내기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분이다. 전국에 한국인 간호사들이 있었는데, 이 분들이 열심을 내어 콘테이너 하나 분량의 독일 의약품을 모았다. 함부르크 항구에서 콘테이너 통관절차를 위해 북한 쪽 관계자들이 왔다. 그때만 해도 협력이 가능한 호시절이었다.
강 집사님은 2002년 4월, 북한방문에도 함께 하였다. 그곳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대표하는 강영섭 목사를 만났다. 귀국 후 금강산 기도회에서도 여러 차례 만난 분이다. 비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다.
“어쩌다 우리 북한교회가 둘째 아들이 되었습니까?”
내가 볼 때 강 목사님은 북한 체제에서 가장 어려운 역할을 맡은 분이다. 사실 남한의 교회 지도자들이 오죽 고약한 데가 많은가. 체제 안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그 체제의 뜻에 순복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를 배려하지 못하고, 이렇게 묻기도 한다. “당신들 진짜요?”
그가 ‘둘째 아들’ 곧 탕자라고 고백한 대로, 강 목사는 천덕꾸러기로 비췬 자기 교회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회복해야 할 존재로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교회를 송두리째 부정해 온 남한 교회는 과연 의로운 큰 아들인가? 두 아들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용서받을 죄인들은 아닌가?
지금 북한교회는 체제 안에 갇혀 있으나, 그들에게는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영적 뿌리가 있다. 우리는 언젠가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북한 사회에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자유가 곧 오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손 놓고 있을 것인가? 북한 체제 안에서 구원받을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아예 그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22) 노력해야 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나누고, 협력하고, 웬만한 것은 믿어주고, 동포끼리 편들어 주면서 전도할 지경을 넓힐 이유가 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음, ‘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에 참여하는 일이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23).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가장 낮은 내 죄인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지극한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평안의 복음을 전해 주셨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우리를 축복의 통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부탁하셨다.
만약 바울 사도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만약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그들을 율법과 다름없는 체제의 지배에 갇혀 있는 북한 사람들을 향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반대했을까? “율법 없는 자들”이라고 내치셨을까? 그들을 “약한 자들”이라고 외면하셨을까?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음, 즉 복음에 참여하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복음에 참여하는 일은 하나님의 샬롬 샬롬, 곧 화해와 협력, 평화를 위해 쟁기질을 하고, 씨앗을 뿌리기 위한 모판을 만드는 일을 계속하는 일이다. 인내로 기도하며, 기도하며 인내함으로써 주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일이다.
주님은 물으신다. 언제까지 나 중심으로만 살 것인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계단 한 칸만 더 내려와도 좋을 일이다.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내 욕망의 짐을 조금 가볍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울은 우리더러 네 자유로운 삶을 위해, 네 후회없는 인생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지내라고 하신다.
바로 참 자유인의 모습이다.
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 잡으셔서 진정한 참 자유인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