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호 崔京浩, (1898 ~ 1985)】 「1936년 6월 조선혁명군 제2소대장」
1898년 11월 23일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 울진면(蔚珍面) 봉평리(鳳坪里)에서 아버지 최재중(崔在中)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다녔고 조선혁명군에 참여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서간도로 건너갔다. 1918년 만주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29년 12월 20일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신삔현(新賓縣)에서 창건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군대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조선혁명군은 1929년 5월 말 결성되어 1938년 9월까지 남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군 부대이다. 원래 국민부(國民府) 소속의 독립군이었으나 1929년 성립한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이 조선혁명당으로 발전하면서 산하 독립군으로 소속되었다. 조선혁명군은 총사령에 이진탁(李辰卓), 부사령에 양세봉(梁世奉), 참모장에 이웅(李雄) 등이 주요 간부로 선출되었고, 종전에 10개의 부대로 편성되었던 각 지방군은 7개 부대로 개편되었다.
1936년 6월 말에는 조선혁명군의 제2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조선혁명군은 총사령 양세봉, 제1지휘부장(指揮部長) 윤일파(尹一波), 제2중대장 조화선(趙化善)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즈음 조선혁명당은 일제의 탄압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934년 9월 총사령 양세봉이 피살되었고, 1936년 12월 핵심적 이론가인 고이허(高而虛)가 체포되어 이듬해 2월 선양(瀋陽)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1937년 5월 총령 김동산(金東山)도 일제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투항하였으며, 1938년 3월 박대호(朴大浩)·최윤구(崔允龜) 등의 간부와 대원 60여 명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합류하였다.
결국 1939년 9월 조선혁명당 중앙위원이며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활석(金活石) 등이 체포되면서 조선혁명군은 종말을 맞았다. 같은 해 3월 26일 안수를 받고 퉁화교회(通化敎會)의 장로가 되어 활동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