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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강화성당의 건축적 특징과 의미
김정신(단국대학교 건축학 전공 교수)
1. 서언
한국교회의 찬란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교회문화의 역할이 한국 전통문화를 무시하고 잘못 주도되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신앙의 표현인 교회건축에 있어 귀중한 토착화의 과정을 한옥성당의 발생과 변천과정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상징적인 건물이 건립 100주년을 맞는 강화성당이다.
본고는 강화성당의 건립배경과 건물의 형상분석을 통해 강화성당의 건축적 특성을 밝히고, 성공회 한옥성당의 발생배경과 전개과정을 타 종파와 비교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성당의 선교이념과 토착화의지를 재확인 하고, 강화성당의 역사적·건축적 의의를 규명하고자 한다.
2. 강화성당의 건립배경과 형상분석
1. 강화성당의 건립배경
강화성당은 첫 한인사제를 탄생시켰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성공회 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성공회의 한국선교는 이미 중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선교사들의 청원에 의해 영국해군 군종사제인 코프(Charles John Corf)신부가 한국 초대주교로 승품되고, 1890년 조선에 입국하여 서울과 인천에 의료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강화교회의 선교의 역사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1897년 6월 25일을 그 시작일로 잡고 있으나 사실상의 역사는 1893년부터 시작된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이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긴 하였으나 아직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한불조약은 선교사들에게 치외법권, 영사재판, 개항지에서의 토지매입과 교회건축 등의 합법적인 수속을 인정하고 조선 국내 여행시 護照(일종의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도록 규정함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의 전교사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였다. 한영조약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이 조약은 제9조에서 "모든 프랑스인이 학습이나 敎誨(enseigner)를 위해 조선 국내를 여행할 수 있게" 규정되어 있는데 이 敎誨라는 어휘에 대해 프랑스측에서는 천주교 선교사업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하였으므로 후일 이 조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조선정부와 분규가 있었다. 즉 조선정부는 조약체결 이후에도 천주교에 대한 금지를 해제하는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음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활동은 허가하면서도 조선인들에게 있어 천주교는 결과적으로 금지된 종교이기 때문에 선교활동은 제한되었던 것이다),
가톨릭의 경우 교세의 확장과정에서 선교사와 민간인 또는 지방관리, 교인과 민간인, 교인과 지방관리 사이에 수많은 충돌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외교문제화 되어 수많은 敎案(敎案이란 유교적 동양 전통사회에 있어서 개항정책에 따라 서구열강과의 외교적 관계가 맺어진 후 反그리스도교의 사회분쟁이 외교적 절충을 거쳐 해결된 사안을 뜻한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정치적 사항과 종교적 사항의 분리가 명문화됨으로써 내국인(한국인)의 신앙자유가 전제되고 교인에게도 비교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인정된 것은 1899년의 敎民條約이후이며, 1904년 宣敎條約의 체결로 내국인에 대한 信敎의 자유가 공인되었다.
1893년 성공회 코프(Charles John Corfe, 高요한)주교가 강화에서 도보로 9시간 걸린 끝에 서울에 도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강화지역을 내왕하였다. 강화를 서울 밖 직접선교의 최적지로 삼은 것은, 서울 중심 100리 안에 위치하여 護照없이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선교와 토지매입 등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며, 강화는 조선시대 유배지로서 정치적으로 많은 소외와 핍박을 받았고 당시 교회진출이 전혀 없었던 지역이며, 해양제국의 영국인으로서는 해양교통수단의 활용이 용이한 이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강화도를 '이오나'(Iona,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섬. 6세기경 콜롬바(Colomba)가 들어가 교회를 개척하고 수도원을 세워서 후일 성공회의 뿌리가 되었음)와 같은 신앙의 성지로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를 통해 프랑스(가톨릭)와 미국(감리교)에 대한 주민들이 가졌던 부정적인 시각도 없었다.
당시 조선정부는 개항과 함께 해군의 조직적 육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정부 안에 海淵摠制衙門을 설치한 후 그 직속으로 朝鮮水師海防學堂을 1893년 강화읍에 설립하였는데 영국정부의 추천을 받은 해군장교와 포병교관이 교관으로 임명되고 통역으로 고용된 성공회 교인이 영어를 가르쳤다. 이로서 영국인의 강화성안 출입이 가능해졌으며 조선수사해방학당은 2년만에 폐쇄되었지만 성공회의 강화선교에 간접적인 지원이 되었다. 영국인 교관이 돌아가자 그가 살던 동문안 견자산 언덕마루의 주택을 성공회에서 구입하여 '성 바오로 회당'을 시작함으로써 강화성당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위치한 이 성당은 후에 제 3대 주교가 된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신부가 구상하고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목수가 시공하였다. 사용된 목재는 백두산 원시림산 적송이며, 기와와 석재는 전부 강화도산이며 제대, 세례대, 축대 등 석공사는 중국인 석공이 맡았다고 한다.
1899년 가을부터 대지정지 작업을 시작해 1900년 11월 15일에 성 베드로와 성 바우로 성당으로 축성하였다. 건립 이후 몇차례(1914, 1936, 1949, 1984)의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1981년 경기도 지방 문화재 111호로 지정되었다가 1998년 강화군이 인천광역시에 편입되면서 인천지방문화재 31호로 변경되었다.
2. 배치 및 평면
성당이 위치한 강화읍 관청리 언덕은 고려중기 몽고군의 침입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에 천도하고 내성을 축조한 남쪽 성터의 일부분이다. 이곳은 1896년 강화읍 선교를 책임맡았던 트롤로프신부가 자리잡은 임시회당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으로 강화읍 시가지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견자산 언덕마루이다.
경사지의 주변대지를 배모양으로 축성하고(대지 남쪽 주위의 축대는 성당건물이 완성된 후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제일 높은 부분은 5m나 된다. 자연석 막돌 허튼층 쌓기 석축은 가장 한국적인 석축으로 약간 배흘림과 함게 축대위의 돌담 쌓기수법은 매우 뛰어나다), 외삼문, 내삼문(1914년 영국으로부터 종이 도착한 후 3간의 외삼문과 종각으로 쓰인 내삼문을 건축하였다), 성당, 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하여서 흡사 강화읍과 남산을 향해 항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외부공간의 구성이 구릉지 伽藍과 유사하게 경사진입로, 석축계단, 외삼문, 내삼문을 지나 성당에 이르게 되고 성당 뒤 담을 둘린 뒤 사제관이 위치한다. 외삼문은 솟을대문에 팔작지붕이고 보다 낮은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칸에는 제2대, 3대 주교의 기념비가 있다. 내삼문도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인데 서쪽칸이 종각으로 활용되고 있다. 종각 옆에는 높은 쌍둥이 보리수 나무가 심어져 있고, 성당 좌측면에는 큰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성당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성당은 정면 횡간이 보간(양간)으로서 좌우 퇴간 한간씩을 합쳐 4칸이고, 측면 從間은 앞 뒤 퇴간 한칸씩을 합쳐 10간이다. 앞 退間 4칸은 배랑(narthex)으로 쓰이고 뒤퇴간 4칸은 제의실로 쓰이며 예배실은 좌우 7개씩의 고주에 의해 신랑과 측랑의 구별이 뚜렷하다.
3. 구조
전통적 목구조로서 중층구조로 되어 있으며, 지붕가구는 납도리 5량 구조이다. 지붕의 형태는 팔작지붕에 사방 퇴간 위에는 부섭지붕을 내달았다. 부연이 있는 깊숙한 처마를 가지고 추녀부분에는 막새기와가 5개씩 있으나 나머지는 아귀토로 막음하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가 끼워져 있다. 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를 얹었고 용마루 양 끝에는 십자가가 있다.
외벽은 목골 벽돌조로서 적벽돌 한 장의 불식쌓기로 되어있다. 고창은 쌍여닫이로 외부 유리와 내부 한지의 2중창이다. 처마 아래 고주 사이에는 사방둘러 고창(clearstory)이 있다. 정면은 쌍여닫이문으로 유리가 끼워져 있으며 합각지붕 아래 "天主 聖殿"의 현판이 있고, 기둥에는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등의 주련이 걸려있다.
내부 高柱는 단면 30㎝X 30㎝, 높이 4.15m의 각기둥이며 고주 사이의 5m 경간을 45㎝각 대들보(大樑)가 가로지르고 대들보를 3등분한 2점에 장혀를 놓고 그 위에 중도리를 놓아 서까래를 받힘과 동시에 종보(宗樑)를 지지하며 종보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히고 있다.
고주의 1층과 중층부 중간에 도리와 창방으로 연결하였으며, 도리 밑에는 장혀를 끼우고 장혀와 창방 사이에는 매 칸마다 6개의 소로를 끼웠다.
평주는 고주 중간에서 퇴보(退樑)로 연결되며 평주와 평주 사이는 창방과 도리로 연결된다. 중방은 전부 11㎝각으로 하인방, 중방, 상인방 3개씩이 4방 돌아가면서 기둥 사이를 연결한다.
서까래는 말구 12㎝의 원형 서까래이며 1층 및 중층 지붕의 4귀는 扇子椽 으로 처리하여 한국 전통 지붕곡선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4. 내부공간
한국 전통목조 중층 한옥(4칸 X 10칸)의 축을 바꾸어서 전형적인 삼랑식 바실리카 성당의 내부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배랑(narthex) 역할을 하는 退間과 예배실의 御間 사이는 한지를 바른 四分閤門으로 되어 있고 퇴간의 중앙에 기둥이 있어 건물 중심축 방향성을 다소 훼손하고 있다. 퇴간 배랑은 원래 문이 없이 개방된 툇마루였는데 나중에 비바람을 막기위해 유리창의 쌍여닫이 문을 부착하였다. 예배실은 좌우 7개씩의 高柱에 의해 身廊(nave)과 側廊(aisle)의 구별이 뚜렷하며 신랑의 폭은 측랑의 폭의 두배이고, 신랑의 천장높이(대들보 하단까지)는 측랑의 폭과 거의 같다. 사방 고창에 의해 내부공간은 비교적 밝다.
5번째 고주 사이의 신랑과 6번째, 7번째, 8번째칸의 신랑과 측랑 사이에 3척 높이의 성찬란이 둘러처져 있어 지성소 내진(chancel)과 성가대석 및 회중석을 구분하며 좌후면에 소제대가 설치되고 그 위에 감실이 위치하고 있다. 바닥 레벨도 회중석에 비해 5단 높으며 석조 제대가 놓인 바닥은 화강석으로 되어있다. 전면 성찬란이 있는 고주 사이에는 측랑의 퇴보를 신랑 위에도 연결하고 그 위에 화반과 소로받침한 장혀 및 멍에창방으로서 '영광의 문'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위에 십자고상과 마리아상 및 성 요셉상이 있다. 제대 후면 중앙기둥에는 '萬有之原'(하느님 야훼를 표현한 뜻이다. 만물을 지으신 조물주는 천주이시니 만물의 조재자시오 창조의 근원이시다. 지극히 신령하시고 무시무종하시니 전지전능하시여 인자 성하심이 무량하시도다)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신랑 두 번째 칸의 중앙에 상대적으로 큰 화강석의 팔각 세례대(직경 1.8m의 8각형 화강석 판 위에 두께 15cm 한변 75cm의 정방형 석판을 놓고, 높이 45cm의 돌기둥 5개로 받힌 높이 40cm, 한변 80cm의 큰 세례대. 전면에 重生之泉(거듭나는 샘물), 후면에 修己(몸을 닦고), 洗心(마음을 씻어내고), 去惡(악한 마음을 버리고), 作善(선한 행동을 하라)이라 새겨져 있다)가 있으며 바닥은 목재 장마루로 되어 있고 5번째칸의 좌우외벽에 아치형의 측면 출입문이 나있어서 전체적인 라틴십자가(Latin Cross)의 진행축을 암시한다. 이 측면 출입문과 제의실 출입문은 영국산 참나무로 제작되었다. 건립당시엔 회중석 중간에 남녀석을 구분하는 칸막이가 있었다.
예배실 공간의 단변 : 장변의 비가 1 : 2.2 이고 신랑만은 1 : 4.4 의 길고 깊숙한 장방형 평면을 이루나 실제로는 제단이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이는 인방과 창방, 대들보, 도리 등이 신랑의 길이를 단축시키는 효과와 더불어 수평적인 연속성을 강조하고 고창을 통해 빛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반면 단면은 폭과 높이의 비가 거의 1 : 1을 이루어 평범한 느낌을 줄 것 같으나 신랑의 종보 위 소슬 합장한 어두운 천장공간이 밝은 상부공간과 대비되어 깊숙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든다.
3. 성공회의 선교이념과 성당건축
1. 성공회 교회건축의 일반적 특징
성공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하여 교황권의 관할과 교리상의 지배에서 분리되어 나온 3개 교회집단(성공회, 루터교, 개혁교회)의 하나로서 영국교회를 위시해서 영국교회의 대표주교인 캔터베리 대주교 관구와 통공관계에 있는 교회다.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도 아니고, 일반 프로테스탄트도 아닌 중간 위치에서 양쪽을 포용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영국교회를 모교회로 하여 그 역사의 뿌리가 중세기 이전 영국역사에까지 뻗어있다.
종교개혁시대 영국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公敎會(Catholic) 전통을 유지하면서 개혁사상을 받아들여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용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나태해진 신앙을 18세기에는 복음주의 운동(18세기 형식화된 교회에 신앙적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일어난 운동.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 신부의 복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아 박애활동, 사회개혁을 위한 활동, 노예해방운동, 주일학교의 조직, 활발한 선교단체의 조직 등을 통해 성공회의 경건한 신앙생활과 복음적인 선교활동의 전통을 이루었다)으로, 19세기에는 옥스포드운동(영국 성공회가 종교개혁시 보유했던 가톨릭 유산에 대한 회복과 자각으로서 국가적 교회개념에 더 나아가 보편적 교회에 대한 영적근거와 사명을 자각케 했으며 성사와 전례를 중시하게 되었다. 또한 수도원제의 부활, 많은 학교와 대학의 설립, 빈민선교, 해외선교 등 성공회의 보편성을 재확립시키는데 공헌하였다)으로 교회의 신앙을 확립하였다.
오늘날 성공회 내에는 로마 가톨릭에 가까운 앵글로 가톨릭(Anglo Catholic), 전통의 高敎會派(High Church), 개신교 전통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노선인 底敎會派(Low Church), 그리고 이 양자중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는 廣敎會派(Broad Church)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명확한 구별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성공회는 세계 성공회가 하나로 연합되는 중앙헌법이나 기구도 없고, 각자가 독립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에 일치, 비본질적인 것에 다양성'이라는 전통을 이은 성공회는 19세기 이래 교회일치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영국으로부터 전래된 대한 성공회는 고교회파에 속하며, 성사와 전례를 중시하는 고교회파 성공회의 건축적 전통은 로마 가톨릭과 유사하다. 성당건축의 일반원칙은 다음과 같다.
1) 평면
평면구조는 전통적인 바실리카식을 고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출입구를 서향으로 하고 예배의 중심에 놓이는 내진(chancel)을 동쪽으로 함이 원칙이다.
2) 내진
성찬란으로 2등분된 내진의 내부 중앙에는 제단이 놓이며 좌후면의 피시나(piscina, 성기를 씻는 수반)와 크레던스(credence, 제대옆의 보도 테이블, 주수대)를 각각 설치하며, 좌측 전면이 주교의 좌석이고 우측 전면이 일반 신부의 좌석으로 되어 있으므로 주교와 신부는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된다.
성찬란 외부 좌우에는 성가대가 서로 마주앉게 되어 있어 내진 최전면 신자석측 중앙계단을 그 좌측이 성서 봉독대(lectern), 우측이 설교대, 그리고 그 사이에는 화려한 찬셀 스크린(chancel screen)이 설치된다. 이 스크린은 난간 정도로 일부 성가대 부분에만 설치한 예도 있고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3) 제단
제단의 치수는 대체로 로마 가톨릭에 준하되 장식적 병풍(reredos) 또는 리테이블(retable, 제단 배후의 장식벽)등의 장식은 가능하다. 그리스도 조상 대신 십자가만 설치한다.
4) 세례반
세례반은 보통 신자석 전면 성서봉독대 앞에 설치하여 세례의식을 전체 신자석에서 보이도록 하는 것도 있고, 혹은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과 세례의식을 회상토록 출입구 근처에 설치한 예도 있다.
5) 회중석
좌석은 대개 장의자(pew)를 사용하며 무릎을 대는 대가 있다.
2. 성공회의 선교이념
한국 교회건축사에서 주목되는 특징중의 하나는 각 선교단체의 선교이념과 선교사 출신국의 건축적 전통이 건축양식결정에 중요한 인자로 등장함이다. 성공회의 한국선교는 다양한 선교단체들이 참여한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영국의 '해외복음 선교협의회(SPG : 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라는 한 선교단체의 소극적인 지원하에 이루어졌다.
영국 성공회의 선교는 19세기 서구열강의 팽창주의에 따른 선교의도는 아니었으며 순수한 종교적 열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특징과 전통은 다음과 같다.
1. 복음을 전하려는 왕성한 선교의욕, 학문에 대한 존중, 토착화 정신
2. 公敎會적 전통 유지, 聖書와 聖事를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음
3. 교회의 재일치와 新·舊敎 사이의 중도신학
한편 초기 선교사들은 거의 옥스포드 대학 내지는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으로 한국에 진출한 어느 교파보다도 월등히 교육수준이 높았다. 특히 옥스포드 대학은 19세기 옥스포드 운동의 중심지였고,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이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공부하였던 사제들이었다. 그들은 한국 전통문화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가톨릭보다도 더 정통적인 전례를 중시하였고 그에 합당한 성당건축을 추구하였다. 특히 선교초기부터 교회건축에 깊이 관여하고 후에 대한 성공회 3대 주교가 된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신부(트롤로프는 영국 런던 웨스터민스터 출생으로 옥스포드대학교에서 MA를 받았으며, 어머니로부터 장로교의 영향과 아버지로부터 옥스포드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초대 주교 코프와 함께 1891년 한국에 와서 강화지역 개척, 문서선교, 성당건축 등 초기 교회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1년 영국으로 귀국하였다가 1911년 한국교회 제3대 주교로 승품되어 돌아왔으며 1930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다)의 안목(강화성당(1900)을 직접 구상하고, 설계에 참여한 것이나(Morning Calm, Vol. 10, No. 83, pp.16-17) 서울 대성당 건립시 건축양식의 선택과 설계원칙의 제시(Mark Napier Trollope, pp.64-65)등에서 그의 건축에 대한 안목을 엿볼 수 있다)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 출신다운 학자적인 사제로 한국의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부의 장을 맡아 한국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불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한국 건축양식과 재료, 기후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였으며, 한국의 전통문화와 융화할 수 있는 표상으로서 성당건축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학문적 배경과 토착화 선교정신은 성당건축으로 이어져 한옥성당으로 나타났으며, 그 첫 결실이자 성당의 모델이 된 것이 강화성당이다.
3. 한옥성당의 발생요인과 변천과정
선교 초기부터 토착화를 추구한 성공회는 주교를 비롯한 영국인 선교사들의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토착화의 열정으로 전통 목조건축양식에 기초한 성당건축을 건립하게 된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경우 한옥교회는 개화기와 일제초반에 국한되고, 서양식과의 절충의 과정을 거치지만 성공회의 경우 1950년대까지도 한옥성당이 지속된다. 수원성당(1908), 서울대성당(1926), 인천 내동성당(1956)과 외국인(영국인과 일본인)을 위한 성당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한옥성당이었다.
성공회 한옥성당의 발생배경과 산출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찰할 수 있다.
1) 초기 영국 선교사들의 토착화 선교이념과 한국 전통건축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한국의 전통문화와 융화할 수 있는 표상으로서의 성당건축을 추구하였고 그 결과 한옥성당이라는 건축유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전통적인 건축유형(한옥)을 유지하면서 성공회 전례라는 외래형식을 수용할 수 있는 요소를 찾고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2)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ecclesia'로서 남녀노소, 사회적 신분이나 역할, 개인적 성숙의 여부 등과는 상관없이 누구나의 생활공동체이다. 이는 수련공동체인 僧家나 제사공동체로서 가족과 구별되고, 굿판의 현장에서만 그 유기적 기능이 실현되는 무속의 祭場공동체와도 다르다. 따라서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생활공동체의 넓은 내부공간이 요구되었다. 많은 회중이 모일 수 있는 기능적 요구는 도리방향의 間의 부가에 의한 실내공간의 확장으로 충족시킬 수 있었다. 즉 한국 전통 목조건축은 柱樑구조에 의한 架構式으로 전후 방향으로는 1간(퇴간)씩 밖에는 확장이 불가능하나 도리방향으로는 구조적으로 무한히 확장이 가능하므로 도리방향의 횡축과 보방향의 종축을 바꿈으로써 넓은 실내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3) 횡축과 종축을 바꾼 장방형 평면의 종축 끝에 제단을 놓고, 반대쪽에 입구를 둠으로써 건물을 들어서면 상당한 공간의 깊이를 느끼게 되고 한눈에 파악되어지며 제단을 향한 투시효과는 반복된 열주와 보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구원의 통로'라는 길이 만들어져서 그리스도교의 주제와 결합할 수 있었다.
4) 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는 단위공간인 間은 중세 서양교회건축의 bay와 유사하며, 2高柱 7樑架 구조에 의한 어간과 퇴간은 바실리카식 교회의 nave와 aisle에 정확히 대응한다. 그리하여 3랑식 공간구성과 간의 분화에 의해 적절한 분절화가 이루어진다. 또한 노출천장에 의해 가구부재가 다 드러남으로써 균일한 부분들의 반복과 상이한 부재들의 역학적인 통합에 의해 공간의 통일성을 이룰 수 있었다.
5) 한국 성공회는 영국에서 옥스포드운동 이후 앵글로 가톨릭시즘이 형성된 후 이 부류에 속한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되었기 때문에 엄격한 예전이 중시되었고, 따라서 바실리카식 공간이 계속 추구되었는데, 한옥성당이 이에 대응할 수 있었다. 같은 한옥성당이라도 가톨릭의 경우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시도(바실리카식 뿐만 아니라 T자형, 라틴십자형, 그리스십자형 등이 시도되었고, 바실리카도 단층과 중층이 있었으며, 일제 중반이후에는 내부공간의 분절이 약해지고 양식상실 또는 절충의 단계를 거친다)나 서양식 종탑의 부가, 절충적인 양식변형이 전개되지 않았다. 오로지 두가지 유형 -중층 삼랑식과 단층 삼랑식-이 시종일관 지속되었다.
6) 당시의 기술적, 경제적 여건에 적합하였고, 내부의 구조를 꾸밈없이 그대로 솔직히 드러내는 외관은 검소 질박한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하였다. 제일 처음 지어진 강화성당이 너무 완벽하여서 양식상의 다른 시도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다만 중층구조의 경제·기술상의 문제 때문에 단층 삼랑식이 주로 지어졌다.
4. 결언
교회건축은 교회문화의 표상으로서 시대와 신앙의 내용을 반영한다. 강화성당은 초기 대한 성공회의 高敎會 전통과 토착화 선교이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건축이다. 서양교회건축의 기능과 상징성을 우리 전통건축 속에서 찾고 재해석함으로써 교회문화의 수용이 일방적인 이입이 아닌 주체적인 우리문화로의 수용이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한옥이 가지는 기능적·구조적·공간적 잠재력을 확인시켜준 건축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우리 것을 지키기는커녕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한국 현대성당건축의 나아갈 바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이때 100년 전의 강화성당은 오히려 그 생명력을 더 발휘하고 있다.
강화성당의 축성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대한 성공회 성당건축의 전통을 재확립하고 올바른 방향을 찾기를 기대한다. 개화·일제기의 한옥성당이 이후 어떻게 하여 계승되지 못하고 성공회 성당건축의 전통과 특성을 잃어버렸는가는 추후 연구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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