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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경영주중앙초등학교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32회 김수종
김수종의 영주 여행기
-무섬마을, 소백산, 죽령옛길, 희방계곡, 희방사, 풍기인견, 풍기인삼, 풍기삼계탕, 선비골순대, 무섬골동반 비빔밥
영주시 무섬마을- 한옥, 내성천, 외나무다리, 황금 모래사장
지난 5월 초순, 친구들과 당일치기로 영주에 다녀온 이후, 너무 짧게 다녀와서 서운하다는 원성이 생겨 다시 2012년 6월 30일~7월1일에 1박 2일 일정으로 영주를 찾았다. 이번 여행의 시작은 내가 좋아하는 무섬마을을 방문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난 고향을 찾을 때면 영주시 문수면의 무섬마을에 자주 간다. 마을을 끼고 도는 내성천이 좋고, 특히 황금 모래사장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또한 고택과 초가집도 되게 마음에 든다.
사실 내가 아주 사랑하는 곳은 청록파 시인인 지훈 조동탁 선생의 처가와, 그 앞 내성천 모래밭과 외나무다리다. 그곳에 가서 서면 오랜 동안 잠들어 있던 시심(詩心)이 다시 일어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섬마을에 가면 시가 쓰고 싶어진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곳에 민박을 얻어 한 달 정도 무작정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무섬, 사랑을 만나다(김수종)
비가 내린다.
빗방울은 내 가슴속까지 튄다.
그리움에 오늘도 강가에 선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 흘렸던가
외나무다리 앞에서 무작정 그대를 기다린 긴긴 나날들
이별의 아픔, 보고픔에 사무쳐,
내 슬픔의 눈물은 비와 함께 강물 되어 저 멀리 흘러간다.
이젠, 안녕
나는 오늘,
무섬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단발머리 나풀거리는 눈이 맑은 여인을 만났다.
원래 무섬마을에는 3개의 섶다리 만이 뭍과의 통로였다. 상여도 가마도 이 섶다리를 통해 들어오고 나갔다. 상류에 있던 다리는 영주로 장을 보러 갈 때, 가운데 것은 아이들이 학교 갈 때, 하류에 있던 것은 농사지으러 갈 때 건너던 다리다.
장마가 지면 다리는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고,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다리를 다시 놓았다고 한다. 지금 복원해 놓은 것은 하류에 있던 외나무다리로, 30년 전 방식 그대로 통나무를 자르고 이어서 다리를 만들었다.
마을에 도착한 일행은 나무솟대를 지표 삼아 외나무다리로 행했다.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한 곳으로 선정된 이 외나무다리는, 영주시에서도 <무섬외나무다리 축제>를 통하여 외나무다리 건너기 체험을 실시하고 있다.
총 길이는 150m인데, 통나무를 반으로 쪼갠 다리의 폭은 20~30㎝ 정도밖에 안 되고 흔들거리기까지 해서 걸음걸음이 조심스러웠다. 튼튼해 보여서 그냥 툭 디뎠다가는 식겁하기 십상이다. 물론 다리에서 떨어져 봤자 강물이 무릎이나 오겠나 싶어 바지나 적시는 정도이겠으나, 이게 은근 긴장감 있다.
처음엔 한 줄로 선 다리 두어 곳에 나란히 붙어 있는 다리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나중에야 그것이 마주 건너던 이들이 피해가도록 배려한 '비껴다리'라는 걸 알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란 말도 있지만, 여기 무섬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서로 길을 양보하기도 하고, 때론 그곳에 선 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쌓았을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 한 걸음이 10년인 듯 뭍에 가까워지면서 나는 조금씩 현실로 돌아온다. 다 건너서 바라본 무섬마을은 그저 다시 그림이 되어 내 머리의 액자 속으로 들어갔다.
안동의 하회, 예천의 회룡포처럼 무섬마을도 강물이 마을을 감싸는 마을이다. 우리말 ‘물섬’에서 연유되었고, 한자 지명도 수도리(水島里)다. 풍수학적으로도 매화나무 가지에 꽃이 핀 형세, 물 위에 연꽃이 뜬 형세라고 하여 기운이 좋은 땅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무섬마을은 뒷산이 태백산 끝자락과 소백산 끝자락이 만나 이루어졌고, 앞쪽은 태백산 내성천 물과 소백산 서천 물이 합쳐져 만들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설명이 어색하게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된 탓인지 강물은 참 수줍게도 흘렀다.
예전에 예천 회룡포 갔을 때도 열심히 데려간 사람 눈치를 보며 속으로만 ‘용은커녕 뱀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땐 숨차게 올라간 게 너무 억울해서 그런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무섬에 와서 외나무다리를 보았으니 이번에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방죽을 내려와 집과 집 사이의 낮은 담장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섰다. 오롯한 흙길을 두리번거리며 혼자 걷는 맛이란! 마치 나 홀로 조선시대로 돌아가 지금 내 집이 어디쯤인가 찾는 것 같았다.
마을의 대부분 가옥은 ㅁ자형이며, 까치구멍집이라 불리는 태백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북부지역에 분포하는 산간벽촌의 주택 형태다. 까치구멍집이라 함은, 부엌 연기가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지붕마루 양단의 하부에 만든 까치구멍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구멍들이 어찌나 앙증맞은지 모른다.
영주시 무섬마을의 무섬골동반 한식당- 조선 선비의 식사
마을을 둘러 본 우리들은 마을 입구에 영주시가 새롭게 조성한 조선시대 영주지역 양반들이, 특히 풍기군수로 계시던 퇴계 이황 선생이 즐겨먹던 비빔밥을 현대식으로 재현한 한식집인 '무섬골동반’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다.
‘무섬골동반’ 식당은 영주에서 혼례음식과 향토음식을 연구하는 토속음식연구가 강성숙 선생이 시의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곳으로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은 자연건강식으로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일행은 아주 맛있게 무섬골동반 비빔밥을 먹었다. 나는 굽지 않고 찐 간 고등어와 3년을 묵힌 된장으로 만든 찌개, 오곡으로 만든 숭늉,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가 마음에 쏙 들었다.
영주시 문수역- 간이역에 가다
영주시 문수면 ‘무섬마을’을 둘러보고, ‘무섬골동반’ 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인근의 ‘문수역(文殊驛)’으로 갔다. 중앙선의 작은 기차역인 문수역을 찾은 이유는 최근 내성천을 막고 공사를 하고 있는 ‘영주댐’이 완공되면 문수역이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수몰예정인 인근의 평은역은 이전되고, 이곳 문수역은 역은 그대로 두고 철로는 상당부분 이설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수몰 예정역이라 다시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착오로 갑작스럽게 방문한 문수역이었지만, 1941년 7월 중앙선 개통과 함께 보통 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곳으로 70년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역 내 외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지난 2007년 6월부터는 여객열차가 정차하지는 않지만, 화물열차가 지나다니는 모습을 보고 사진도 찍으면서 시골 작은 간이역의 운치와 맛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역을 살펴본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영주시내로 향했다.
영주시 가흥동 선사시대 암각화
영주시 시민운동장 옆에 있는 ‘가흥동 암각화(可興洞 岩刻畵)’를 보기 위해서 인근에 차를 세웠다. 가흥동 암각화는 선사시대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바위그림으로 영주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유물로 경북유형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동기시대에 직접 바위에 쪼아 새긴 작품이다. 바위의 크기는 높이 1~1.5m, 너비 4.5m이다. 3~5개의 횡선으로 연결시킨 것으로 모양과 기본형이 같은 그림이다. 마치 상하가 넓어지고 가운데가 좁아지는 돌칼(石劒)의 손잡이 모양 같기도 하고, 사다리꼴을 연상하게도 한다. 어떻게 보면 꽃게처럼도 보인다.
이런 문양은 긴 네모꼴의 바위 수직면을 따라 옆으로 단독 또는 연속하여 11개가 새겨져 있다. 새기는 방법은 선을 쪼아서 굵은 선으로 표현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고령 양전동 암각화와 울산 천전리 암각화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이다. 암각화의 내용은 아직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난 개인적으로는 이곳을 보는 것으로 영주관광을 시작하는 것이 현존하는 영주 역사의 처음을 보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하면 처음에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부석사, 소수서원도 중요하지만, 영주역사의 시작을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주시 가흥동 통일신라시대의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
그리고 암각화 바로 10m 옆 상단의 바위에 있는 보물 제221호로 지정되어 있는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可興洞 磨崖如來三尊像 및 如來坐像)’도 주목해서 봐야할 유적이다.
본존불은 상당히 큼직한 체구로 장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큼직한 코, 다문 입, 둥글고 살찐 얼굴에서 불상의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가슴은 당당하고 양 어깨를 감싸고 흘러내린 옷은 장중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 바위를 그대로 이용하여 연꽃무늬와 불꽃무늬를 새긴 광배와 높게 돋을 새긴 연꽃무늬의 대좌(臺座)등은 장중한 불상의 특징과 잘 조화되어 더욱 듬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왼쪽 보살상은 둥글고 원만한 얼굴이다. 가슴이 넓으며 왼팔은 어깨 위로 걸치고 오른팔은 배에 대었는데 강한 남성적 기질을 느낄 수 있다. 오른쪽 보살상은 왼쪽 보살상과 거의 같은 수법이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으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점 등이 다를 뿐이다.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불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원래 삼존상만 있던 이곳에는 지난 2003년 6월 폭우로 그동안 바위 속에 숨어 있던 여래좌상이 추가로 발견되어 현재는 삼존불 옆에 작은 여래좌상이 하나 더 있는 형태가 되었다.
사실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은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방치에 가까운 수준으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눈 부위의 돌을 갈아서 마시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치성을 드리는 사람보다는 돌가루를 얻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곳이다.
이후 인근에 공장과 아파트 공사 등으로 난개발 피해를 보기도 했다. 어쩌면 지난 2003년 폭우로 새로운 여래좌상이 발견된 다음부터 현존하는 몇 안 되는 통일신라시대 마애불로 조명을 받았다. 이에 안내판과 외부에 펜스를 설치하여 일반인의 접근을 막는 정도로 유지관리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직도 미흡한 측면이 많다. 마애불도 문제지만, 특히 하단부에 위치한 선사시대 암각화의 경우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는 낮은 위치에 있어 훼손이 심하다. 이제는 그 내용과 모양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상태로 별도의 보존방안이 필요한 때가 된 것 같다는 것이 지역민들과 학계의 의견이다.
서천이 바라다 보이는 좋은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영주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들을 둘러 본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인근 구학공원에 있는 삼판서 고택으로 갔다. 서천 건너편에 버스를 세운 관계로 차에서 내려 서천을 가로 지르는 폭포를 건너야 했다.
영주시 구학공원에 있는 삼판서 고택 - 정도전의 생가
이곳에서 어린 시절, 여름이면 친구들과 자주 수영(?), 아니 목욕을 했다. 바위산의 허리를 잘라 새롭게 물길을 돌린 곳이라 바위를 타고 흘러가는 폭포가 장관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개울에 바위가 많아 중간 중간의 소(沼)에서 물장난을 하기 좋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매년 사망사고가 나기도 하여 늘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놀던 기억이 난다. 지난 10여 년 전 대대적으로 하천정비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지금도 물놀이를 하고 싶은 곳이다. 그러나 오늘 보니 약간 위험해 보이긴 하다.
아무튼 서천을 건넌 우리들은 구학공원에 올라 ‘삼판서 고택’을 둘러보았다. 삼판서 고택은 지난 1961년 홍수로 유실된 것을 1997년부터 2008년까지 총 사업비 13억 원을 투입하여 본채 157㎡의 입구(口)자형 와가형태의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전통한옥이다.
고택은 고려 말 형부상서 정운경(정도전의 아버지), 고려 말 공조전서 황유정(정운경의 사위), 조선 초 이조판서 김담(황유정의 외손자) 3명의 판서를 배출한 영주지역 대표 선비가옥이다. 여기에 조선 개국공신인 삼봉 정도전 선생이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내는 등 상당한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삼판서 고택은 아들이 아니라 연속하여 딸들에게 상속된 집으로 고려 말, 조선 초까지 상속이 남녀모두에게 평등하게 이루어졌던 사실과 삼봉 정도전이 살았던 집이라는 연유로 영주의 선비정신과도 맞물려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고택이 복원되기는 했지만, 마지막으로 고택에 살던 ‘선성(예안)김씨 무송헌 김담(宣城金氏 撫松軒 金淡)’의 후손들은 이곳에 살고 있지 않다. 무섬마을의 다른 문화재인 집들도 국가의 지원을 받고 보수를 했지만, 주인이 살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는 현재 무섬마을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중인 19대 종손 김광호(金光昊)씨를 종택에 모시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집이라는 것이 사람이 살아야하고,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단순히 관리인이 살거나 수시로 오가며 유지보수와 청소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인의식이 있는 종손이 들어와 살면서 손님도 맞고, 종가의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영주시 구학공원에 있는 제민루- 조선시대의 보건소
아무튼 원래 인근 구성산성 기슭에 있던 삼판서 고택은 고택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인 ‘제민루(濟民樓)’와 함께 지난 1961년 홍수로 붕괴되었다가 위치를 옮겨 구학공원에 복원된 것이다.
영주시 가흥동 구학공원의 삼판서 고택 뒤에는 1433년(세종 15년)에 창건된, 오늘날의 보건소와 같은 의료기관인 제민루가 복원되어있다. 제민루는 의국(醫局)과 의약소(醫藥所)를 운영하면서 강원, 경북 내륙지역의 한약교역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제민루는 1961년 사라호 태풍 당시 홍수로 붕괴된 것을, 지역 사림들이 뜻을 모아 1965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 이후 관리 미흡과 소홀로 한동안 방치되어 있던 제민루는 지난 2007년 정부지원을 받아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되었다.
아울러 삼판서 고택 바로 뒤에는 1961년 사라호 태풍으로 크게 피해를 입은 영주의 복구 사업이 대충 완료된 시점인 이듬해 3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장군이 방문하여 기념식수한 나무가 있다.
원래의 나무가 아쉽게도 고사하여 현재의 나무는 동일한 수종으로 다시 식재된 것으로 당초의 나무는 아니다. 하지만 지역민들은 당시 홍수피해 복구에 도움을 준 군인들과 박정희 의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죽은 나무를 치우고 동일 수종의 나무를 심어 기념하고 있다. 물론 안내판도 있어 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나무까지 본 우리들은 잠시 시간이 있어 충절의 고장 순흥면으로 이동하여 ‘순흥선비주’를 만드는 순흥양조장으로 갔다. 현재 영주시에는 3개의 양조장이 있지만, 순흥선비주는 젊은 층에 맛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주목을 받고 있는 생막걸리를 만들고 있다.
영주시 순흥양조장, 명품 순흥선비주 막걸리
지난 2010년 등장한 ‘순흥선비주’를 만드는 류규형 사장은 원래 인근 봉화군 출신으로 선친과 형님이 대를 이어 봉화에서 양조장을 운영했던 집안에서 자랐다. 막걸리 제조 분야에서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류 사장은 지난 27년 동안 술을 만드는 공부를 하면서 영주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최고의 명품 막걸리를 만들고자 불철주야로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시간이 나면 현미경으로 누룩과 효모를 보고 관찰하는 것은 물론, 와인, 과실주, 맥주, 소주 등 각종 술을 스스로 연구하고 만드는 일을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 심지어 술 연구를 위해 독일유학도 고민한 적이 있다고 한다.
27년 술 연구자가 만드는 막걸리 순흥선비주는 선비의 고장 영주시에서 만들어지는 막걸리답게 고고한 조선선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은은하고 깊은 맛이 나는 깔끔한 술이다. 현재 순흥선비주는 류 사장의 노력으로 국내산 쌀과 수입 밀가루를 반반의 비율로 혼합에서 제조하여 판매하고 있다.
류 사장의 연구와 노력 덕분에 일반적으로 유통기간이 짧은 생막걸리와 달리, 순흥선비주는 한 달 정도 냉장보관이 가능한 관계로 전국 어디든 택배로 배송을 하고 있다. 또한 지역의 특산품인 ‘순흥기지떡(증편,술떡이라고도 한다)’을 만드는데, ‘순흥선비주 만한 것이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막걸리와 궁합이 맞는 순흥기지떡이 지역에서 생산 유통되고 있다.
나와 친구들은 막걸리 한잔을 마시며, 비오는 날의 여독을 날리고는 이웃한 금성대군신단으로 이동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란 소릴 들어보았을 것이다. 동생보다 매를 한 대라도 더 맞거나 하면 ‘난 정말 다리 밑에서 주워온 게 아닐까’
임 향한 일편단심, 금성대군의 한 - 영주시 순흥면 금성대군신단
설움도 느꼈을 거다. 그러다 사춘기가 되면 생각한다. 서양에선 아기를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데 왜 우린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는 걸까 의문이 든다. 그러다 아하! 하며 떠오르는 생각. 오호라, 그 다리가 그 다리군! 참 옛날 사람들은 위트가 있다니까, 음흉한 미소가 입가에 절로 피어난다.
그런데 세상에! 그게 아니란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의 다리라는 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다리가 아니란다. 진짜 다리란다. 그것도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역사에 묻힌, 참으로 슬픈 사연을 간직한 다리란다.
경상도 북부 지방에서 흔히 ‘청다리’라고 불리는 ‘죽계제월교’는 순흥면 청구리에 있다. 쉽게 말하면 금성대군신단에서 금성대군의 위리안치지로 가는 길목이다. 지금은 역사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새로 지은 냄새가 폴폴 나는 흔하디흔한 작은 다리지만, 흐르는 죽계천을 내려다보며 어두운 역사의 한 자락을 생각하면 맘이 무거워진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이를 반대한 금성대군은 당시 순흥도호부인 이곳으로 위리안치의 형을 받고 온다. 유배 중에도 금성대군은 단종 복위를 위해 비밀리 거사를 준비한다.
순흥부사였던 이보흠을 선두로 고을의 군사와 향리를 모았고, 영남지방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거사를 감행하기도 전에 밀고로 발각되면서 금성대군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결국 금성대군과 이보흠, 그리고 수많은 영남 선비들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역모에 동참한 혐의로 가문이 멸족당하는 등 수천 명이 죽계천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죽계천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도 안정면 동촌리에 ‘피끝’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는 마을이 있어 그날의 피비린내를 짐작하게 한다. 이때 등장하는 무대가 ‘청다리’이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나 멸족의 위기를 모면코자 부모들이 외부의 눈을 피해 피신시킨 아이들이 다리 밑으로 모여든 것이다.
결국 고아들의 집성촌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하면서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란 말이 생겨났단다. 이런 씁쓸한 어원도 모르고 낄낄대기만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단종 복위를 둘러싼 비극적인 사건으로 순흥도호부는 폐지되었고, 한강 이남에서 제일 큰 고을 중에 하나였던 순흥은 졸지에 역모의 땅이 되어버렸다. 순흥도호부는 처마만 따라가면 10여리는 비를 맞지 않았을 정도였다던 집들도 불바다로 변하여 인적조차 찾기 힘들어진 거다.
그 후 200여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숙종 때가 되어서야 금성대군과 역적으로 몰렸던 선비들이 복권된다. 비극의 상처를 안고 살던 순흥 사람들은 금성대군이 죽어서 소백산의 산신령이 됐다고 믿고,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 비명에 간 영남 선비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제단을 세웠다. 그곳이 바로 금성대군신단이다.
신단은 두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쪽의 앞 공간은 제향과 관련된 제청(祭廳) 공간이고, 북측의 뒤 공간은 단소로 되어 있는 공간이다. 제청 공간은 토석담장을 돌린 방형 내에 다시 담장으로 구획된 재실(齋室)과 관리사로 나누어 놓았다.
ㄱ자형으로 지어진 동쪽의 재실은 가운데 3칸을 마루로 깔았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마루 중앙에는 금성단기(錦城壇記), 금성단중수기(錦城壇重修記), 재실상량문(齋室上樑文), 흥주고부은행수기(興州故府銀杏樹記) 등의 현판이 잔뜩 걸려 있다.
휑한 단을 둘러보다 담 너머 왼편으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오호라, 저것이 그 유명한 ‘압각수’임에 틀림없었다. 은행나무 잎이 오리 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압각수(鴨脚樹)라는 이름 지어진, 수령이 1200년도 넘는다는 이 은행나무 거목은 지금도 가을이면 은행이 탐스럽게 열린단다.
금성대군이 사시된 정축년, 은행나무가 말라 죽었으니 산천도 슬픈 빛을 띠고 천지도 온통 원통한 기운에 잠겼으며, 길 가는 나그네들도 폐허를 지나면서 마음 아파했고, 마을 아이들도 나무를 안고 울었다.
감히 나무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으나 비바람에 상하고 들불에 타버려 껍질은 벗겨지고 속은 비어, 남은 것은 다만 두어 길의 밑동뿐이었다. 일찍이 어느 노인이 지나가다가 이르기를 “흥주(興州)가 폐해지면 은행나무가 죽고, 은행나무가 살면 흥주가 회복될 것이다”라고 했다.
고을 백성들이 그 말에 감개해서 전송해 온 것이 대개 227년이었다. 1681년(숙종 7) 봄에 비로소 새 가지가 나고 잎이 퍼지더니, 그 3년 뒤인 1684년(숙종 10)에 과연 흥주부를 회복한다는 어명이 내렸다.
영주시 재능기부콘서트 - 영주아트파크에서
영주시 순흥면에서 금성대군신단을 둘러 본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를 돌려 시내로 향했다. 최근 개관한 가흥동에 위치한 영주아트파크에서 민관이 합동으로 ‘재능기부콘서트’를 매달 열고 있다고 하여 잠시 문화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간 것이다.
인구 12만 명 정도의 작은 소도시인 영주에서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상당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의 재능을 펼치고 열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자발적으로 재능기부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고 한다.
아직은 초기 단계라 중고등학생들의 비보이 공연과 대학생과 성인들의 국악공연, 지역에서 무용을 하시는 분들의 춤 공연과 직장인들의 노래 공연이 거의 전부이기는 했다. 그러나 나름 볼 것도 있고 신선한 도전이어서 잔잔한 감흥이 있었다.
특히 예술적인 재능과 끼가 넘치는 청소년들에게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힘이 되어 주는 일에 지역에서 살고 있는 뜻있는 어른들이 크게 도움을 준다고 하니 보기에 더욱 좋았다.
사회를 보는 사람도, 공연을 기획한 사람도, 조명, 물품 찬조, 식음료 제공 등등 모두가 자발적인 기부로 이루어지는 행사라 감동이 더 큰 것 같았다. 나는 국악을 하는 후배들과 물품 찬조를 한 동기생들을 오랜 만에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어 더욱 좋았다.
영주시 선비골순대 - 순대전골, 인삼순대의 신기원
공연을 한 시간 정도 관람한 우리들은 다시 저녁식사를 위해 영주의 도심인 영주초등학교 앞에 새롭게 문을 연 수제로 인삼순대를 만들어 파는 ‘선비골 순대’집으로 갔다.
선비골 순대는 연초에 개업을 한 식당이지만, 인근에서 28년간 순댓국밥집을 한 장모에게서 긴 시간 교육을 받는 배기범 사장 부부가 문을 연 식당이라 그런지 전통의 맛에 인삼순대라고 하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50년 정도 된 한옥을 개조하여 인삼순대집을 열어서 그런지 운치도 있고, 특히 내가 먹은 순대전골을 가족이 함께 와서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토요일에는 원래 예약 손님만 받는 관계로 사전에 예약을 하지 않고 불쑥 찾아오는 손님은 일체 받지 않고 있었고, 매일 매일 일정량의 순대국밥과 순대전골만 판매하는 것이 더 특이하고 놀라운 음식점이었다.
영주에서 최근 인삼순대, 사과순대 등이 개발되어 판매가 되고 있다고 하는데, 인삼순대는 특히 소량의 인삼이 돼지 내장 특유한 냄새를 전부 잡아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여성들이 많이 찾고 또 즐겨먹는 인기 먹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프랑스의 유명한 레스토랑 평론지 ‘미슐랭 가이드’에서 경북의 3대 명문 제과점으로 극찬한 30년 전통의 영주‘태극당’빵집에 들러 야식거리를 조금 사서 숙소로 향했다.
다음 날인 7월 1일(일) 아침 일찍 눈을 떠서 세수를 한 다음, 잠시 동네를 산책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지역이라 인근의 성당과 작은 음식점 등의 변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초중학교 시절이 잠시 떠올라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다녔다. 히히 하면서. 그리운 추억이 많은 곳이다.
영주시 최고의 길 - 죽령옛길을 걷다
8시 30분쯤 다들 모여서 아침식사를 위해 영주역전에 있는 ‘만당’이라는 해장국집으로 갔다. 간혹 친구들과 아침을 먹기 위해 방문하는 곳으로 24시간 영업을 하는 식당 치고는 나름 맛이 있는 곳이다.
쇠고기 해장국과 콩나물 해장국을 파는데, 조미료가 조금 많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아침에 여는 식당이 많지 않고 나름 맛이 있어서 자주 찾게 되는 곳이다. 모두들 콩나물 해장국으로 식사를 했고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라 나도 안도를 하고 다음 일정이 있는 소백산의 ‘죽령옛길’로 향했다.
죽령옛길은 최근 영주시가 중점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소백산 자락길’의 일부가 되어 찾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한동안 아주 고즈넉한 길로 아침 산책에 좋은 코스라 각광을 받아온 곳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풍기읍 수철리에 있는 중앙선 소백산역(희방사역)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길을 나선다. 주차장 바로 앞에서 작년 5월에 문을 연 ‘죽령초가’가 보인다. 죽령초가는 과거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향하던 길목에 예부터 있었던 객주와 주막을 약간 위치를 이동하여 복원한 것이다.
영남의 수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고개를 넘을 때 힘을 실어 주고, 때로는 과거에 낙방해 쓰라린 가슴을 안고 다시 고개를 넘을 때 피로를 풀어주며 위로해 주던 초가집이 영주시에 의해 재현된 것이다.
죽령초가집은 영주시가 지역 관광자원 개발을 위해 조성한 테마공원으로 부지면적 5,825㎡에 초가집 3동, 화장실 1동, 물레방아, 연못을 조성하여, 민간에 임대 계약 관리하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전통음식으로 구성된 먹거리는 물론 농 특산물 판매, 민박까지 가능하여 죽령옛길과 소백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전통의 멋과 아름다운 조경이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죽령초가를 둘러 본 다음, 소백산 역의 내 외부를 살펴보고서 길을 재촉한다. 역을 끼고 죽령 방향으로 길을 돌려 조금만 걸어가면 죽령옛길 표지판이 보인다. 죽령옛길은 현대적인 의미로 보자면, 생태공원과 산책로, 역사탐방을 겸하여 복원이 된 완만한 등산로이다. 따라서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걸을 수 있다.
신라시대 죽죽(竹竹)이 길을 처음 낸 이후 마의태자, 왕건, 회헌 안향 선생, 정도전, 금성대군, 의병대장 유인석, 이강년 등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서려있는 죽령옛길을 걸으며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다.
옛길이 시작하는 길목의 안내판에는 신라의 명재상 ‘죽지’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신라의 명신 술종이 삭주도독사로 부임 시 고갯마루에서 길을 닦고 있는 한 거사를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부임해서 한 달 뒤, 술종과 그 부인은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이를 이상히 여겨 거사의 안부를 알아보니, 거사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술종은 거사가 꿈속에 자기 집에 찾아 온 일을 두고 ‘아마 우리 집에 다시 태어나려는가 보다.’했는데, 과연 부인이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을 죽지라 했다. 그 아이가 성장하여 화랑이 되어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대업에 큰 공을 세우니, 그가 바로 신라 진덕왕에서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친 명재상 죽지였다. 이 같은 사연은 죽지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한 득오곡이 죽지를 사모하여 지은 <모죽지랑가>로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 외에도 죽령옛길 곳곳에는 숲, 풀, 나무, 꽃, 새, 동물 등에 대한 안내판과 전설 및 터의 유래에 관한 해설판 등을 설치하여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굽이굽이를 돌 때 마다 각종 산새들과 다람쥐가 노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중간 중간에 설치된 안내판을 읽으면서 간간히 풀과 나무, 장승, 주막터 등을 둘러보면서 1시간 정도를 올라가니 시나브로 고갯마루 주막거리에 다다른다. 이곳을 넘어 20리 정도를 더 전진하면 단양군 대강면의 옛 용부원역 터가 나온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풍기읍과 영주시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길 건너편 죽령주막의 약수는 먼 길을 오느라 지친 길손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어 좋다. 죽령 정상에는 휴게소가 있고, 영남의 초입을 알리는 정자도 있고, 영주와 단양을 가르는 경계석도 있고, 각종 안내문구와 관광안내용 대형지도 등도 있어 도보여행자들에게 길 안내에 큰 도움이 된다.
영주시의 특산품, 풍기인견, 풍기인삼을 만나다
영주시 소백산의 ‘죽령옛길’을 한 시간 반 정도 둘러 본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이라 풍기읍으로 이동하여 풍기인견 판매장과 풍기인삼홍삼판매장을 찾았다.
풍기읍에는 현재 백여 개의 풍기인견공장과 판매장이 있지만, 나는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 인근에 있는 풍기인견제조판매업체인 ‘풍기인견백화점’을 자주 찾는 편이다. 가격도 저렴하고 매장도 크고 주차하기 쉽고 풍기홍삼판매장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업체는 지난 1981년부터 인견제조를 시작하여 2005년 천연나노소재를 이용한 웰빙 침구를 개발해 고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현재는 안전하고 쾌적하며 건강을 유지시키는 상품을 개발하는 ‘인체친화기업’을 모토로 ‘침구전문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아울러 최근 풍기인견은 냉장고 섬유 “휘들옷”(Whidrott, 산과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시원하고 가벼운 옷)이라는 의미의 기능성 쿨비즈(Cool-Biz)의류의 공동브랜드를 개발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휘들옷”은 지난 6월 5일 청와대에서 국무위원들이 입고 국무회의를 개최하여 각광받은 바 있다. 지식경제부에서 전국의 패션브랜드를 대상으로 에너지 절감형 여름패션으로 선정하기 위하여 50여 작품을 패션업계 전문가 심사위원들이 심사하는 방식으로 선정한 제품이다.
특히 풍기인견 휘들옷은 마(麻)57%, 인견(人絹)43%로 혼합하여 시원함과 미끄러움을 방지한 신제품이다. 올 여름 전국적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냉장고 섬유 풍기인견의 신장세는, 지난 2010년부터 지식경제부 공모사업인 풍기인견 명품화 사업으로 신제품 개발 및 마케팅 지원에 주력한 성과물이다.
또한 5년 연속 “웰빙인증” 및 금년에는 특허청으로부터 공산품으로서는 전국 최초의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등록”을 했다. 우리들은 풍기인견으로 만든 속옷과 모자, 이불 등을 사고, 풍기홍삼도 잔뜩 사고는 점심을 먹기 위해 영주시 하망동에 있는 32년 전통의 ‘풍기삼계탕’으로 이동했다.
영주시의 명품 식당, 풍기삼계탕
사실 나는 삼계탕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고기를 거의 먹지 않고 특히 닭요리를 즐기지 않는 편이라 삼계탕은 일 년에 한두 번 복날 정도만 먹는데, 이번에는 후배의 소개로 우연히 방문한 풍기삼계탕에서 삼계탕의 진수를 맛보았다.
생후 40~45일 정도 되는 500g 내외의 작은 닭을 사용하는 이곳은 기름기를 전부 제거하기 위해 목과 내장의 지방 부분을 떼어 내고 큰 가마솥에 100마리를 동시에 1시간 30분 정도 끓여서 삼계탕을 만든다고 한다.
사실 나는 맑은 국물의 담백한 맛이 좋았다. 전에 전라도 나주에 갔다가 나주곰탕을 한 그릇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낀 담백함을 몇 년 만에 다시금 맛본 것 같다. 약재를 넣고 끓인 삼계탕에 독특한 향을 보존하기 위해 파도 넣지 않는다고 하니 첫 숟가락의 감칠맛이 정말 기억에 남는 삼계탕이다.
싸구려 인삼으로 담그는 인삼주를 같이 내기 싫어서 인삼주는 별도 요금을 받고 판다는 이곳에서 정말 오랜 만에 입맛을 돋우는 인삼주도 3잔을 마시고는 배부르게 삼계탕를 먹었다. 정말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풍기인삼에 영주의 닭을 이용한 삼계탕이니 당연히 나에게는 어머니의 손맛이었다.
영주시 소백산 희방계곡은 최고의 여름 피서지
풍기삼계탕으로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소백산의 ‘희방사(喜方寺)’로 갔다. 소백산국립공원 탐방객지원센터 앞 주차장에서 내려 희방사까지는 한참을 더 올라가야 했다. 어른 걸음으로 희방계곡을 대략 15분 정도, 다시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는 희방폭포까지 10분, 다시 여기에서 절까진 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희방계곡을 걷는 행복한 위안은 올라가는 내내 들려오는 시원한 물소리와 비록 숨이 차올라도 한껏 들이마실 수 있는 맑은 공기다. 이곳 계곡은 물소리가 너무 좋아 여름에 피서를 오는 가족들이 많다. 나도 어린 시절에는 자주 이곳에 와서 여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가난하던 시절 우리네 부모님들은 주로 산과 계곡으로 피서를 갔던 것 같다. 특히 경상도의 내륙지방인 영주, 안동, 봉화, 예천, 문경 같은 곳에서는 바다 보다는 산과 계곡을 찾게 된다. 나도 어린 시절 희방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목욕을 하고 천막을 치고는 며칠을 보낸 적이 많다. 지금 생각을 해봐도 그때의 희방계곡은 최고의 피서지였다.
계곡을 즐겁고 기분 좋게 올라 매표소를 지나면 올라가는 길을 따라 산불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아마도 산불에 대한 등산객들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리라. 마지막 휴식처와도 같은 너른 공터가 나오고 본격적인 등산길이 시작되려는 곳에 산으로 오르는 소백산의 변화된 모습이 보인다.
1994년과 2006년의 제1연화봉 사진을 나란히 실었는데, 여러 줄의 회색빛 길들이 초록이 완연해진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의 노력으로 소백산이 이렇게 달라졌어요!’ 란 글귀와 함께 말이다. 왠지 뿌듯함이 느껴지는 사진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 숲속으로 들어선다.
영남 제일의 폭포, 영주시 소백산 희방폭포
희방사는 643년(선덕여왕 12) 두운조사(杜雲祖師)가 소백산 남쪽 기슭에 창건한 사찰이다. 해발 850m의 위치에 있는 희방사 바로 밑에는 내륙지방 최대 폭포인 희방폭포가 있다. 소백산 등산로 중에 희방사 길이 인기가 있는 것은 아마도 이 희방폭포 덕분일 게다.
한낮에도 좀 어두울 만큼 폭포로 가는 길에는 신갈나무와 서어나무, 단풍나무로 울창한 숲을 이룬다. 폭포는 눈보다 귀가 먼저 알아챌 정도의 큰 소리를 내고 있어서 구비를 넘는 곳에 바로 폭포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약간 힘들기는 하지만 폭포를 보는 순간 힘이 솟는다.
어제 종일 비가 와서 그런지 오랜 만에 폭포에 물이 많은 듯하다. 난 사진도 찍고 잠시 앉아 쉬면서 폭포의 정취와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본다. 두 팔을 벌리면 피터 팬(Peter Pan)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너무 싱그럽고 좋은 곳이다.
영주시 소백산의 으뜸가는 절경이며, 영남 제1폭포로 손꼽히는 희방폭포는 높이 28m로, 해발 700m에 위치하고 있다. 소백산 영봉의 하나인 연화봉에서 발원하여 몇 백 구비를 돌아서 흐르다가 이곳에서 한바탕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는 장관이 넋을 잃게 하여 조선의 석학 서거정 선생이 “天惠夢遊處(하늘이 내려주신, 꿈속에서 노니는 곳)”이라 읊으며 감탄했다고 한다.
계속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라 물소리는 끊임없이 나를 따라왔건만 눈앞의 폭포는 그야말로 귀를 멍하게 하는 박력으로 다가왔다. 계단을 오르며 여러 각도로 폭포의 시원스러움을 사진에 담고자 애썼건만, 역시 실물의 위대함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계단을 다 오르면 큼지막한 돌이 깔려 있는 길이 나오는데, 어제 내린 비로 젖은 바위에 예쁜 꽃이 떨어져 있다. 노란 꽃술이 선명한 하얀 꽃송이가 회색빛 돌들 위에서 그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어느 광고에서 “레드가 섹시한 줄 알았다. 아니다, 화이트다!”란 카피가 있었는데, 지금 그 말이 너무도 이해가 된다.
절 입구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림이 빽빽이 우거져 있다. 나무다리를 건너며 위쪽을 살피자, 얼핏 나뭇가지 사이로 희방사 당우가 보인다. 다 왔구나 싶어 걸음을 재촉하는데, 양쪽에 돌로 쌓은 벽을 따라 오르막길이 나온다.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영주시 소백산 희방사
통나무를 그대로 가로질러 만들어 놓은 계단을 다 오르자 하늘이 뚫리고 눈앞 노란 벽에 붉은 기둥을 한 2층 건물이 나타났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건물 앞을 지나 옆쪽 계단으로 올라가니 정면에 단청이 고운 대웅보전이 보였다.
작은 석등을 양쪽 앞에 둔 새로 지은 대웅보전에는 좌상의 석가모니불과 함께 양쪽에 협시보살이 모셔져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협시보살은 모두 입상이었다. 불단 양쪽으로는 아기 부처님들이 벽을 층층으로 가득 메우고 있었고, 법당 왼쪽 구석에는 동종이 놓여 있었다.
1742년(영조18)에 주조된 이 동종은, 충북 단양 대흥사 종으로 승장(僧匠)인 해철과 초부 등이 제작한 중종(中鐘)이었으나, 대흥사가 폐사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밖으로 나와 경내를 둘러본다.
대웅보전의 뒤쪽으로 난 돌계단을 올라 삼성각에 오르니 숨 헐떡이며 올라온 보람이 있구나 싶었다. 우선 경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그 밑으로는 끝없는 초록의 물결이다. 이렇게 계곡 물소리와 푸른 잎들이 가득한 숲에 자리한 희방사에는 유별난 창건전설이 있다.
태백산 심원암에 거처하던 두운조사는 수행을 위해 지금의 희방사가 있는 곳으로 옮겨왔다. 지금도 희방사는 울창한 숲속에 있지만 당시에는 더욱 더 인가와 떨어진 숲속이어서 산짐승들만이 오가는 곳이었다.
눈보라 치는 어느 날 수도에 열중하고 있는데, 암 호랑이 한 마리가 와서 괴로운 시늉을 하였다. 호랑이는 출산을 앞두고 있는 것 같아 조사는 부엌에 검불을 깔고 출산을 도와주었다. 얼마 안 있어 호랑이는 새끼 두 마리를 낳았고, 조사는 겨울이 다 가도록 돌봐주었다. 봄이 되어 날이 따뜻해지자 호랑이는 새끼를 데리고 떠나갔다.
얼마 있다가 다시 그 호랑이가 왔는데, 역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은비녀가 목에 걸려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다가 비녀가 목에 걸린 것이었다. 조사는 비녀를 꺼내주면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크게 꾸짖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쿵 하는 소리가 들려 조사가 밖에 나가보니 호랑이가 산돼지를 한 마리 물어다 놓았다. 은혜를 갚기 위해 잡아온 것이 분명했으나, 수행하는 중이어서 그런 것을 먹을 수 없다고 하자,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면서 돌아갔다.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호랑이가 예쁜 처녀를 물고 왔다. 기절해 있던 처녀를 깨워 신분을 물어보니, 자기는 계림(경주)에 사는 호장(戶長) 유석의 딸인데,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려는 순간 잡혀 왔다는 것이었다.
조사는 부모가 크게 걱정을 할 것이라 여겨 처녀를 계림으로 데려갔다. 유석은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이 돌아오자 매우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자기 딸을 데리고 살아 달라고 하였다. 조사가 완곡하게 거절하자 그렇다면 몇 달간만이라도 자기 집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였다.
차마 그 부탁까지 거절하지 못한 조사는 유석의 집에 머물다 몇 개월이 지난 뒤에 수도하던 곳으로 돌아왔는데, 초막은 단청이 잘 된 법당으로 변해 있었다. 유석이 은혜를 갚고자 조사가 자기 집에 머무는 몇 개월 동안 법당을 새로 지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가족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해서 절 이름을 ‘희방사’라 칭했다고 한다.
대웅보전의 오른쪽에는 ‘소백산 희방사’의 오래된 현판을 걸고 있는 요사채가 세로로 놓여 있고, 그 앞으로는 역시 새로 지은 건물인 ‘희방쉼터’가 있다. 왼쪽으로 계곡의 다리를 건너면 지장전과 종각이 보인다. 삼성각을 내려와 지장전으로 향한다.
계곡 건너에 있는 지장전으로 가기 위한 다리 앞에는 다리 건너 오른쪽이 연화봉과 천문대, 비로봉으로 가는 등산로임을 가르쳐주는 표지판과 식수를 여기서 준비하라는 안내의 마지막 음수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두운조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지장전은 다리의 바로 정면에서 석탑과 한 쌍의 석등을 대동하고 있으며, 희방사란 이름이 선연한 범종은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다. 희방사는 또한 <월인석보>를 소장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월인석보>는 수양대군이 부왕인 세종대왕의 명으로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국문으로 엮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세존의 공덕을 찬송하여 노래로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책이다.
원래는 1568년(선조1)에 새긴 <월인석보> 1, 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법당과 훈민정음 원판, 월인석보 판목 등이 모두 소실되어 지금은 <월인석보> 책판만을 보존하고 있다.
불경언해서로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1권 머리에 훈민정음이 얹혀 있어서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국보급 문화재들을 안타까워 하다가, 경내에서 희방사의 설송 주지스님을 만났다.
영주에서 활동한 계삼정 화백의 작품을 만나다
내가 영주출신이라고 하자 스님은 차를 한잔하면서 경내에 보관 중인 그림 몇 점을 보여주었다. 부처님을 그린 서양화로 그림이 너무 좋아 누가 그렸냐고 물었더니, 1910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대학 예술학부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해방 이후 월남하여 영주에 정착하여 그림을 그리던 고 계삼정 화백의 작품이라고 했다.
계삼정 화백은 영주시 풍기읍에서 금계중학교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영주에서는 최초로 서양화를 그린 작가로 주로 풍경과 정물화를 많이 그렸던 분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 초반까지 서울과 미국에서 개인전을 5번 연 경력이 있고, 지난 6월 중순 영주에서 아트파크 개관을 기념하여 그의 유작전이 60여점의 작품이 출시된 가운데 열린 적이 있다.
나는 익히 그분의 존함은 들었지만, 눈앞에서 부처님 그림을 세 점씩이나 보게 되어 무척 기뻤다. 특히 전날 방문했던 가흥동 마애삼존불과 붉은 색이 강조된 부처님은 그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기회가 되어 너무 감격했다. 조만간 다시 희방사를 방문하여 선생의 예전 전시도록을 전부 보게 해 달라고 스님에게 부탁을 하고는 하산을 했다.
희방사는 역시 기쁨을 주는 절이다. 나에게는 고향의 대단한 계곡과 사찰을 다시 한 번 보게 했고, 친구들에게는 색다른 여름 피서지를 알려주었고, 계삼정 화백의 유족들에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선생의 작품을 발견하는 기쁨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