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서 그러면 안 돼!’
‘여자이니까 조신해야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지만, 내가 자란 시대에는 이런 말이 흔했다. 물론 나도 이런 말을 듣고 자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억울해 하였고, 남자 못지않게 씩씩한 여자가 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한때는 군인이 되고 싶었고, 또 한때는 우주비행사를 꿈꾸었다. 그 꿈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되어 책 속 주인공을 통해 그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내가 창작해 낸 대부분의 여자 주인공은 씩씩하고 용감하고 자기 앞에 닥친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늘 역사동화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 년 동안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역사동화를 쓰기로 했다. 어느 날, 한양도성에 관한 책을 읽다 ‘각자성석’이라는 네 글자에 감전이라도 된 듯 팍 꽂혔다. 성을 쌓고 난 후 성 돌에 마을 이름이나 책임자의 이름을 새김으로써 책임제를 실시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 책임제를 실시했던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한양도성을 거닐며 이야기를 구상했다. 도성은 누가 쌓았을까? 어떤 방법으로 쌓았을까? 멀리 지방 곳곳에서 성을 쌓으러 온 백성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시간적 배경은 구체적으로 어느 임금 때로 하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 한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투박한 함경도 아이지만 정도 있고 의리도 있고, 지혜도 갖춘 여자아이. 그 아이가 바로 <성을 쌓는 아이>의 주인공 ‘물미’이다. ‘물미’는 사물을 관찰하고 인식하는 지혜‘라는 뜻을 가진 순 우리말이다. 우리말 사전 속에서 찾아낸 이 낱말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주인공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려고 삼척의 낡은 집을 빌렸을 때의 일도 떠오른다. 인천에서 차를 몰고 삼척에 도착했을 때의 당혹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난방이 안 되는 방, 천장에는 쥐들이 몰려다니고, 노트북을 올려놓을만한 가구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달랑 침대 하나 있었던 집. 지붕이 너무 낮아 집에 들어가려면 머리를 숙여야 했던 집.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유혹을 물리치고 나는 그 집에 적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을 쌓는 아이’ 집필을 마쳤고 씩씩하고 당당한 아이, 물미를 탄생시켰다.
어린 여자아이 몸으로 함경도 땅에서 한양까지 먼 길을 떠나야 했던 물미. 온갖 고생이 닥쳤지만 절망하지 않았던 물미. 병든 아버지 대신 성을 쌓기도 했던 물미. 임금 앞에서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밝혔던 물미. 물미는 내가 사랑하는, 내가 닮고 싶은 아이다.
첫댓글 이 책을 읽고 저도 서울 성곽이 다르게 보였답니다
그렇죠? 서울 성곽길 돌아보면 참 아름다워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