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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재인 과 국민들... 원문보기 글쓴이: 문재인과 국민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님께서1950년12월의‘흥남 철수’ 때,잠시 난을 피한다는 심정으로 별다른 준비도 없이미군 선박에 몸을 싣고 떠난 피난길이 거제도까지 이어질 줄은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날씨만큼이나 푸근했던 거제도 인심 덕분에 부모님은 간신히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3주 정도 예상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야말로 맨손이나 다름없이 고향을 떠나온 부모님 앞에는
뿌리 잃은 고단한 삶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풍경이 내 어린 날의 기억으로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 성당에 다니고 계신다.
자전거
가난에서 비롯된 결핍감 못지않게 가난이 나를가르친것도 무척 많았다고 말하고싶다.무엇보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은 독립심이었다.웬만한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해결하려고 부딪혀
보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긴 인생을 통 털어 볼 때 참으로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그렇다고 제일 중요한 건 아니다’라는 가치관은 나로 하여금 가난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을 주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갖지 못한 물건들과 하지 못한 많은 일들, 그러한 결핍이 가져다주는 아쉬움이
왜 없었겠는가. 돈이 드는 일은 애당초 내 몫이 아니란 자각 때문에 말도 꺼내보지 못한 일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내 자전거를 갖는 것은 고사하고 푼돈을 내고 빌려 타는 것도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자전거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SBS의 힐링 캠프에 출연했을 때 이 사연이 알려져 나는 제작진으로부터 자전거 한 대를 선물로 받았다. 4.11 총선 당시 나는 그 자전거를 사상의 선거 사무실에 갖다 놓았는데 커다란 선거 벽보 앞에 놓인 자전거
앞에서 많은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곤 했다. 소위 그럴싸한 포토 존이 된 것이다. 자원봉사자들은 그 자전거에 바람개비를 달아 장식해 주었다. 그 자전거를 타고 바람개비를 힘차게 돌리며 맘껏 달리는 상상을 하면 언제나 가슴이 설레었다.
문제아
나는 과외수업 같은 것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지만 무난히 부산의 명문 경남중학교에 합격했다. 아버지께서 국제시장 안의, 고향사람이 운영하는 교복맞춤집에서 교복을 맞춰 주시며 아주 자랑스러워하시던 모습이
그립게 떠오른다.
빈부의 격차가 확연한 경남중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으로 세상의 불공평함과 그로 인한 위화감을 피부로 느꼈다. 점차 학교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리나라 소설에서 시작된 독서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서 <사상계> 같은 사회 비평적 잡지와 야한 소설에 이르기까지, 독서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사회와
인생을 알게 되었고 기초적인 사회의식도 갖추게 되었다. 자연히 공부는 뒷전이었다. 훗날 대학 입시 때
공부를 소홀히 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대신 나의 내면을 성장시키고 건강한 사회의식을 갖게 됐으니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중, 고등학교 때 내 별명은 ‘문제아’였다. 물론 처음엔 이름 때문에 생긴 별명일 뿐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사회에 대한 반항심도 생기고 고 3때엔 술 담배도 하게 되었다.
또 소위 ‘노는 친구들’과도 어울리면서 폭넓게 친구들을 사귀어 가는 과정에서 실제로 정학을 먹기도 했으니
정말 문제아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3선 개헌 반대 시위, 학교를 병영화
하려는 교련에 대한 항의 등을 계기로 크게 높아진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을 가슴에 담은 ‘정의파’라는 자의식이 더 강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학생운동에 뛰어들다.
나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학과를 가기엔 높은 점수가 아깝다는
매우 ‘비학문적’인 이유로 반대하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법대로 진로를 바꿨다.
3학년으로 올라가자 대학가의 유신반대 열기는 날로 고조되었다.긴급조치가 연이어 발효되었고 민청학련사건, 인혁당 사건 등이 터졌다. 이렇다 할 학생운동이 없던 경희대에서도 가을에 접어들자 재단 퇴진 농성을 계기로 유신 반대 시위가 계획되었다. 나는 이 시위에 필요한 선언문을 작성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1975년으로 접어들자 대학가의 반 유신 열기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경희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해4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학생회 총무부장이던 내가 시위를 이끌었다. 이날 시위로 나는 구속, 수감되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것은 물론이었다.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집에 알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되도록
늦게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가 교도소로 이송되던 날, 호송차의 동전만 한 구멍을 통해 어머니가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소리쳐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아들의 구속을 뒤늦게 알고 급히 서울로 올라오신 어머니가 어디라 의지할데도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검찰청에서 우연히 호송차를 타는 나를 발견했던 모양이었다.
마치 영화 장면 같은 그 순간은 나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에 무리를 해가며
대학까지 보낸 자식이 포승줄에 묶여 교도소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을때,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그 죄송스러움을 견디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예 면회를 오지 않았다. 다행이 담당 판사의 소신 판결로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 판사는 얼마 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었다고 전해 들었다.
특전사 A급 사병
석방이 되자 곧바로 입영 영장이 날아왔다.신체검사 날짜와입영날짜가 하루 간격이었다.소위 강제징집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특전사였다. 특전사가 공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용산으로 가는 군용열차가 삼랑진을 지날 무렵이었다. 험한 곳에 배치 받은 나에게 동기들의 위로주가 계속 몰려들었다.
폭파 주특기를 부여 받고 6주간 훈련을 마칠 때에는 폭파 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화생방 최우수 표창도 함께 받았다. 어쨌든 자대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단연 A급 사병이 돼 있었다.
군대에서 새삼 발견한 것은 내가 군대가 요구하는 기능을 상당히 잘 해내는 편이란 사실이었다.가장 멋진 일은 점프(공중낙하)였다. 매우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 긴장을 늦출수는 없었지만 낙하산이 펼쳐져서 공중에 떠 있는 동안엔 정말 황홀할 정도였다. 수중 침투 훈련도 기억에 남는다. 부산 출신답게 수영은 좀 하는 편이라 첫해에 바로 고급인명구조원 자격을 취득했다.
아내가 면회를 왔던 일을 잊을 수 없다. 특히 자대에 배치 된 후 처음 온 면회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그 당시 군대의 면회란 무조건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와야 하는 거였다. 아무리 가난한 어머니라도 통닭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먹는 것은 아예 없이 한 아름 안개꽃 다발을 안고 왔다. 대한민국 군대에 이등병 면회 가면서
음식 대신 꽃을 들고 간 사람은 아내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꽃을 여러 내무반에 나누어 꽂아줬더니
다들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군대 경험이 내 삶에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난생 처음 해보는 그 많은 일들이 막상 닥치니 해 낼 수 있더라는 경험, 그것이 나를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변호사 시절이나 청와대 시절에 처음 겪는 일을 만날 때 참고할 선례가 없어 스스로 부딪혀가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런 마음가짐이 큰 도움이 되었다.
변호사가 되다.
1978년 2월,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갑갑한 상황이었다. 복학은 오리무중, 취직하기도 어중간하고, 내 인생에서 가장 난감하고 대책 없는 기간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 연세 겨우 쉰아홉,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다. 오래 동안 너무나 삶에 지쳐서 생명이 시나브로 꺼져 간 것 같아 너무나
가슴 아팠다. 나는 뒤늦게나마 한 번이라도 잘 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을 했다. 49제를 치른 다음날 나는 해남의 대흥사로 가서 틀어 박혔다. 그렇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소용돌이는 비켜가는 법이없는것인지,2차 시험을 준비하던 중이던 그해10월 부마항쟁이 터지고 급기야 10.26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시해되었다. 그때로부터 이듬해 5월까지, 나는 소위 ‘서울의 봄’이
일으키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2차 시험을 보긴 했지만 준비가 워낙
소홀했던 터라 경험이나 쌓자는 심정으로 치른 시험이었다. 따라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시위와 구속을 거쳐 유치장에 갇혀 있을 무렵에는 합격자 발표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뜻밖의 낭보를 들고 온 사람은 아내였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학교 관계자들이 축하해 주기 위해 면회를 왔을 때,나를 유치장 밖으로 내보낼수 없으니 경찰서장은 그 분들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 축하할수 있게 해주었다. 조촐한 소주 파티까지 벌였다. 경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했다. 며칠 후 나는 석방되었다.
3차 면접을 앞두고 안기부 요원이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지금도 예전 데모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느냐?”는 것이었다. 일종의 사상 검증인 셈이었다. 대답하기 곤혹스러웠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갔지만 결코
자존심을 굽히기는 싫었다. “그때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최종 발표가 있을 때까지, 그렇게 대답한 것을 후회했다. 다행이도 결과는 최종합격이었다.
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검사가 되어 남을 처벌하는 일이 내 성격에는 맞지 않게 느껴져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 때문에 임용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그리고 그 길목에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게 된다. 이렇듯 온갖 우연과 필연이 뒤엉켜, 운명적 수순처럼 그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연애, 그리고 결혼
아내와 나는 대학 시절 법대 축제 때 파트너로서 처음 만났다. 서로에 대한 호감은 있었지만 한동안은 고작
눈인사나 나누는 숙맥들이었다. 그러다 75년 4월 시위에서 내가 최루 가스에 실신해버렸을 때
아내가 간호를 해 주었던 일을 계기로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첫 번째 구속이 되었을 때, 걱정이 돼서 면회를 왔다는 아내는 면회시간 내내 신문을 접어 안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내 모교인 경남고등학교가 무슨 전국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기사였다.감옥에 갇힌 내가 기뻐할 만 한 일을 궁리하다가 야구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야구를 좋아한단들,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처지에 그 소식이 무어 그리 절실했을까. 하지만 아내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귀여웠고 나는 두고두고 그 일을 생각하고 웃음을 짓고는 했다.
아내는 그 후로 내가 강제 징집 당했을 때는 군대로, 제대 후 고시 공부를 하고 있을 때는 또 그곳으로 면회를 다녔다. 아내는 우리의 연애사(史)를 면회의역사라고 말하곤 했다.언젠가 아내에게 내가 경희대에 가게 된것은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나 보다고 말하는 것으로 아내에 대한 감사함을 은근히 표한 적이 있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장인장모님께 첫인사를 드린 건 군대시절이었다. 평일 날 열리는 아내의 졸업연주회에 참석하기 위해 영창 갈 각오를 하고 가짜 외출증을 끊어 달려갔다. 군복차림에 베레모를 쓰고 불쑥 나타난 나를 보고 그분들은
‘경악’했다고 한다. 첫 인사를 드린 장면 치고는 참 거시기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랑에 눈멀면 이런 일 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법연수원 시절, 적은 월급이었지만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7년 연애 끝에
드디어 결혼을 했다. 첫 애도 이 시절에 태어났다.
'노무현'을 만나다.
판사 임용이 무산 된 나는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고 어머니도 모실 겸 부산행을 결심했다.
서울시립합창단원 생활을 하던 아내한테는 몹시 미안한 일이었지만, 아내가 흔쾌히 동의해 주어서 고마웠다.
사시 동기 박정규 씨의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찾아갔다.박정규 씨는 예전 노무현 변호사와 고시 공부를함께한 인연이 있었고 정작 그가 노 변호사와 함께 일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검사로 임용되는 바람에 나를 대신 소개한 것이었다.
노 변호사의 첫 인상은 매우 소탈하고 격의가 없었다. 같은 과에 속한 사람이라는 동질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당일로 변호사 동업을하기로 결정해버렸다.하지만 말이 동업이지 나는 달랑 몸만 들어가면 될 정도로 모든것이 준비된 상태였다.덕분에 나는아무런 어려움없이 변호사 생활을 시작할수있었다.
그는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한번 해보자고 얘기했다.그리고는 당시의 관행처럼 되어 있던 사건 알선 브로커를 단칼에 끊어버렸다. 판검사에 대한 접대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수입이 줄긴 했지만 사무실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애초부터 생활의 규모를 키우지 않고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들였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자연히 주변의 법조인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했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했고 인간적으로도 매우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는 나를 동료로서 존중하여 결코 말을 낮추지는 않았다. 나도 웬만하면 형님 소리를 잘 하는 편인데 그러질 못했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찾아오는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고 나중에는 우리 사무소가 부산 경남 울산의 노동인권
사건의 센터처럼 변해버렸다. 재야운동에도 자연히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는 참으로 치열했고 경계가 없었다.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대의를 위한 실천에서도
한계를 두지 않고 철저하고자 했다. 나는 이것이 그가 가진 원칙주의의 힘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6월 항쟁의 중심에서...
1987년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벽두부터 달아올랐다. 부산의 추모 열기는 그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는데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이 부산극장 앞에서 개최한 추도식은 대규모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검찰은 시위를 주도한 노 변호사를 잡아넣기 위해 이미 기각된 구속영장을 들고 판사의 집을 전전하며 하룻밤 사이에 무려 네 번이나 구속영장을 재청구 하는 탈법을 저질렀고 이 일이 모든 매스컴에 도배가 되자
노무현 변호사는 일약 전국적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민주화 열기는 점차 그 강도를 높여가며 6월 항쟁을 향해 치달았다. 나는 노 변호사와 함께 부산 변호사
사회에서는 전무후무한 ‘호헌철폐와 직선제를 요구하는 부산 변호사 시국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연일 가두시위의 선두에 서 있었다. 5월부터는 부민협을 모태로 한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 결성되어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나는 상임집행위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6월 항쟁에 뛰어들었다.
서울의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했을때 오히려 부산에서 가톨릭 센터 농성을 더욱 강고하게 이어감으로써 항쟁의 불씨를 되살리고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런 투쟁 끝에 결국 군부독재정권의 항복 선언인
‘6.29 선언’이 발표되었다.
6월 항쟁은 우리 민주화 운동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민민주항쟁이었다.직선제 개헌이라는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국본’이라는 연대투쟁기구가 결성돼, 그 지휘 하에 목표를 쟁취할 때까지 시종일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투쟁했기 때문이다.이 과정에서 중심적 역량을 발휘한 부산 국본의역할은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부산 국본의 중심에 노무현 변호사가 있었다.내가 알기로 적어도 5공시기 동안 노무현 변호사만큼 치열하게 투쟁한 이가 없었다. 내가 그런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
노무현을 국회로 보내다.
6월 항쟁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 되거나 해고 되었다. 사건 변론은 모두 내 몫이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사실상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놓고 현장을 누볐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부산지역 변호사 120명 중에서 기꺼이 선임계를 낸 91명을 포함,99명이나 되는 대규모 공동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에 임한 끝에 그는 구속적부심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변호사업무는 결국 정지되고 말았다.
1988년4월의 13대 총선을앞두고 노 변호사는 김영삼 총재의 영입제안을 받는다.노 변호사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부산지역 민주화운동권에서 먼저 논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의 정치권 진출을 찬성했고 대체적인 논의의 결과도 그랬다. 본인도 결단을 내렸다.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들이나 개인적 입신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산 민주화운동권을 대표해 파견되어 간다는 인식이 있었다.
노 변호사는 오래 산 남구를포기하고 연고도 없는 동구를고집했다.그 지역구에 신군부의 5공 핵심 허삼수 씨가 나온다는 사실 때문이었다.그를꺾어 5공을심판하겠다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는결국 이겼고 정치에 입문했다. 그때 쓴 선거 구호가 ‘사람 사는 세상’이다. 이것은 이후 오래 동안,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한 뒤에도 즐겨 쓰는 사인 글이 되었다. 그만큼 사람 사는 세상은 쉬 오지 않는 꿈같은 것이었던지.
나는 정치인으로서의 노무현, 그의 굴곡진 행로를 낱낱이 지켜본 사람이다.그를 키운건 국회의원 선수(選數)가 아니라 낙선회수였다고 할 만큼,떨어진 선거가 더 많았다.정치를당분간 접고 변호사로 돌아올것을 권유한적도 있었지만, 일단 정치에 발을 담근 그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딱 한번 그만둘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부산 강서에 출마했을 때였다. 본인 스스로도 이번에 떨어지면 정치 그만 두겠다고 했다.
그는 떨어졌다.
하지만 지역구도에 온몸으로, 줄기차게 맞서는 그의 모습에 감동한 국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지지가 몰려들었고 이 힘이 근거가 되어 결국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비운으로 가시고 나니 처음부터 말렸어야 했다는 회한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노무현 변호사가 초선의원으로 5공 청문회의에서 맹활약을 보이는 등 정치인으로 성장해 갈 때 나는 부산에
혼자 남아 노동관련 사건 변호에 매달렸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늘 행복했다. 일이 많아 힘들었지만 내 삶에서 가장 안정된 시기였고 나의 개인적인 삶과 세상을 향한 나의 의무감이
나름대로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충만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동의대 사건 재판과 신 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변론이었다. 1995년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했고, 나는 주로 노동운동이나 노조활동을 지원하는 단체 쪽 일에 집중했다. 이때 관여하거나 함께 만든 단체들로는 부산 노동문제 연구소, 부산 노동단체협의회, 노동자를 위한 연대 등이 있다.
2002년 대선
국회의원 노무현의 지역주의와의 싸움은 참으로 가열했다. 자신의 유, 불리를 따지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는 그의 진정성을 국민들이 알아주기 시작했다. 그는 15대 총선 때 처음으로 대선 출마 의지를 내보였다. 그리고 2001년 9월 6일, 드디어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하기에 이른다.
그의 대선행보는 남달랐다. 조직과 돈을 먼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들로 학습 팀을 꾸려
국정운영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했다. 참으로 노무현다운 준비였다. 후보 경선이 시작되었고 나는 부산, 울산 지역 경선을 책임지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워낙 노동운동이 활발하던 지역이라 그간 우리가 각급 노조와 맺은 끈끈한 유대와 인맥이 큰 힘이 되었다. 다들 기억하고 있을 ‘광주 경선의 감동’을 넘어 그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나는 다시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이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란 말이 나왔다. 나를 정치판에 끌어들인 사실이 미안했던지 노 대통령께서 어떤
행사에서 나를 추어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담긴 그의 속 깊은 우정에 대해 언제나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비록 과분하긴 하지만 지금도 그 말을 가장 듣기 좋은 칭찬으로 여기고 있다.
그의 대선 가도는 참으로 험난했다. 후보가 되고 난 뒤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지지율이 하락했다.
당내의 후보 흔들기, 후보교체론에 이어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다. 가장 힘든 시기였고 절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는 모든 것을 뚝심과 배짱으로 정면 돌파하며 꿋꿋하게 버텼다.
분수령은 정몽준 씨와의 후보단일화였다. 지지율이 뒤지는 상황에서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방식은 매우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후보단일화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 방식을 받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말씀드렸다. 당내에서는 걱정이 많았지만 오히려 불리함을 무릅쓰고 이런 방식을 담대하게 수용한 노 후보에 대해
국민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난관은 또 있었다. 정몽준 씨 측에서 연합정부, 사실상 권력의 절반을 요구하며 그것을 명문화해
달라고 했다. 장관 자리를 어떻게 나눌지를 특정하자는 것이었다. 받지 않으면 판을 깬다는 식이었다.
당내에서는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라도 우선 받으라고 압박했다. 노 후보는 매우 힘들어하면서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때 나는 “우리가 살면서 여러 번 겪어 봤지만, 역시 어려울 때는 원칙에 입각해 가는 것이 정답이다. 뒤돌아보면 그것이 언제나 최선이었다. 당신이 옳다.”고 말씀드렸다. 외로우셨던지 나의 지지의사를 듣고
노 후보는 매우 기뻐했다.
그런 선거가 또 있을까. 투표 전날 밤, 정몽준 씨는 단일화 약속을 파기하고 지지를 철회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정몽준 씨를 직접 찾아가라고 종용했으나 노 후보는 잠을 잔다고 하니 내가 깨워서 설득 좀 하라고 전화가 오기까지 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 되던 날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날만큼은 나도 그 속에 휩쓸리고 싶었다. 아름다운 밤,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싶은 순간이었다. 그때로서는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은 생각지도 못했다.
첫댓글 멋지신분, 총선때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바래요. 화이팅!!
경선 대선으로 ㄱㄱ
저도 정권교체 고고고~
흠...그래도 왠지 끝나고나면 비리폭풍 쓸고갈꺼같은느낌....
매번 총선전에는 항상 훈훈하지만 임기가 끝나면 씁쓸해지는...
또다시 기대하고 실망하고 반복하기 지칩니다 정말..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