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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덕의 자(字)는 윤좌(潤佐)이고, 호는 우운(又雲), 도호(道號)는 청암(淸菴) 또는 정암(貞菴)이다. 1868년 4월 25일 충북 청주군 미원면 성화동(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에서 안동 권씨 권문영(權文永)과 고령 신씨 신문화(申文嬅)의 아들로 출생하였다.1) 그러니까 그는 고령 신씨가 세거하던 어머니의 고향에서 태어났다.
6살 무렵인 1873년 경 본가가 있던 경북 상주군 화령면으로 이사하여 8살까지 종숙인 권승영(權升永)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의 한문 기초를 익혔다. 그랬다가 1876년 8월 청주군 미원면 양곡리의 외가 인근으로 이사하여 외척형인 신철모(申徹模)와 이름난 유학자 유도관(柳道貫)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다.2)
1883년 아버지의 명을 따라 원주 원(元)씨 원세화(元世華)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이 직후 경북 문경군의 증조부·증조모·조모·백부의 산소를 성묘하고, 상주군 화령면의 조부의 산소에 성묘하였다. 1884년 상주군 화령면 학평리로 옮겨 신혼 생활을 하였다.3)
1885년 권병덕은 임규호(任奎鎬, 任弓鎬)로부터 난세를 구제하기 위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입도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이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읽고 평등한 사회로의 개벽을 주장하는 동학의 교의에 공감하여 4월 27일 임규호의 추천을 받아 입교하였다.4)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 서양 열강과의 수교 후 기독교의 전파, 질병의 만연 등으로 사회가 흉흉하던 시기에, 동양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픈 바램에서 동학에 입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입교 직후인 1886년 2월, 권병덕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 전성촌(前城村)으로 가서 동학의 2세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5) 이후 권병덕은 매일 동학의 주문을 3만 번 외우고, 목욕재계를 하며 수련을 하였다. 권병덕은 질병이 만연하던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포교를 벌여 200여명의 교인을 갖게 되었고, 최시형에 의해 청주접주로 임명되었다. 열성적인 신앙과 포교 활동으로 권병덕은 1887년 중정(中正)이 되었고, 1889년에는 강원도 인제에서 최시형을 호종하기도 하였다.6)
23살이던 1890년 권병덕은 아버지가 청주 통어영(統禦營)의 공금 3만 양을 빌려주었다가 받지 못한 일로 1년 정도 투옥되었다. 출옥 후, 권병덕은 1892년 연초(煙草)를 10여회 판매하여 3만 양의 이익을 남겨 상환하였다.7)이처럼 그는 장사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1892년 2월 최시형이 충북 보은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였을 때 참가하였다. 1893년 1월 충북 청주군 산동면 용곡리의 자택에서 최시형을 모시기도 하였다. 권병덕은 1893년 2월 서울에 올라가 동학 포교의 자유를 인정해달라는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였다. 그리고 1893년 3월 보은취회에 참가한 권병덕은 충경포(忠慶包) 대접주(大接主) 임규호 휘하의 차접주(次接主)에 임명되었다.8)
동학농민혁명 시 권병덕은 소위 제2차 봉기에 참여하였다. 권병덕은 1894년 9월 말 최시형의 명을 받아 관하 도인을 이끌고 기포하였다. 1894년 10월 그는 충경포(忠慶包)와 문청포(文淸包) 도인 3만 여명을 이끌고 충북 보은에 갔다. 그는 중군 통령(統領)인 손병희의 휘하에서 후군(後軍)을 책임졌다. 권병덕은 보은에서 출진하여 옥천군 청산에 가려다가 관군 300여명의 공격을 받고, 큰 희생을 치렀다. 권병덕은 청주진위대 병정과 경병(京兵)의 공격을 받고 연전연패하였고, 충남 내포(內浦) 등지로 도망을 다녀야만 하였다. 1895년 권병덕은 상인으로 신분을 숨기고 경북 상주와 김천 등지로 도망을 다녔다. 그리고 충남 논산과 강경, 전북의 익산 황등과 함열, 충북 영동 등지로 도망을 다녔다.9)
1896년에는 최시형의 명을 받아 전희순(全熙淳)과 함께 경남 일대의 접(接)을 순회하고 교인을 독려하였다. 이후부터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1898년까지, 권병덕은 강원도 원주 등지에서 김연국과 함께 최시형을 보필하였다. 그리고 최시형의 구원 활동을 벌였다. 1898년 6월 최시형 사후에 권병덕은 김연국(金演局)을 보필하며 도망을 다니면서 교인을 단속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1년 김연국이 체포되자, 권병덕은 김연국이 사형을 면하도록 활동하였고, 1904년 말에는 김연국의 석방을 도왔다.10) 1905년 말 김연국으로부터 정암(貞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11)
1906년 1월 권병덕은 김연국, 김낙철(金洛喆), 원용일(元容馹)과 함께 단발을 하고, 손병희를 찾음으로써 천도교에 동참하였다.12) 1905년 12월 동학에서 이름을 바꾼 천도교는 보수적인 전통을 지키려는 데에서 벗어나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문명개화운동을 추진하였다. 천도교는 교헌의 제정, 교구제와 의회제의 실시, 신교리서의 발간·보급, 교인의 교육 등을 통해 천도교인에게 문명개화사상을 보급하고 교회를 근대화시키려고 하였다. 권병덕이 김연국과 함께 천도교에 들어간 것은 천도교의 문명개화운동 혹은 근대화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의사의 표시였다.
이후 권병덕은 천도교의 간부로서 천도교회의 정비와 교세 신장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1906년 2월 천도교의 대정(大正)의 원직을 받고, 이문관(理文觀) 서적원(書籍員)에 임명되었다. 또 1906년 5월 천도교에서 실업을 장려하기 위해 조직하려 한 상업사(商業社)의 발기에 참여하였다. 1906년 10월 20일 전라도 순독(巡督)에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의 교인과 교구를 관리하고 교당을 건축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였다. 1907년 7월 16일 천주(薦主)가 되었고, 김연국이 대도주(大道主)가 된 직후인 1907년 9월 5일 현기사장(玄機司長)에 임명되었다.13)
그런데 1907년 12월 김연국이 손병희계 인물과 갈등을 빚고 천도교를 나와 이용구(李容九)가 이끌던 시천교(侍天敎)로 가자, 권병덕은 그와 동행하였다. 1909년 3월 그는 관도사(觀道師)의 지위에 올랐고, 얼마 후 봉도(奉道)가 되었다. 그리고 시천교인의 지침서인 『교인필지(敎人必知)』를 저술·간행하였다. 1912년 1월에는 시천교본부 종무장에 선임되었다.14)
한편 권병덕은 종교적인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사회단체에 참여하거나, 경제기관을 조직하거나, 교육활동을 통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였다. 권병덕은 1908년 경 대한협회에 참여하여 본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15)시천교의 교수(敎授)로 소년입지회·부인회 등을 조직하고 소년운동과 여성운동을 지도하였다.16) 그리고 권병덕은 1910년 10월에는 박형채 등 시천교인 50명과 태인군에 농산조합을 설립하여 농민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였으며,17) 1912년 말 시천교본부 종무장을 사임하고 중앙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교육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18)
1913년 3월 송병준이 시천교의 교권을 장악하자, 권병덕은 김연국과 함께 시천교총부를 설립하교 시천교에서 분립하였다. 권병덕은 1913년 5월 시천교총부의 신도사(信道師)에 임명되었고,19) 1914년 『시의종경(是儀經政)』을 편찬하였다.20)
그런데 1914년 경 시천교총부가 서도교인파와 남도교인파로 분열되었을 때 권병덕은 서도교인파를 지지하였다가 김연국과 대립하게 되었다.21) 이것이 원인이 되어 권병덕은 1915년 4월 경 시천교총부로부터 출교를 당하였다.22)
1916년 권병덕은 휘하의 이근상·손필규·박준관·김기태 등 30여 지도자 및 그 소속 교인과 함께 다시 천도교로 돌아왔다. 권병덕은 1917년 9월 장석승례(丈席承禮), 1918년에는 도사(道師)에 임명되어 천도교 중앙총부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고, 교인을 교화하고, 교세를 신장하는 활동을 하였다.23) 그러니까 1910년대 후반 권병덕은 천도교를 기반으로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면서 민족운동의 역량을 신장해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개조사상이 유행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일본과 중국과 노령과 미주 있는 민족운동가들은 조선을 일본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8월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이 만들어져 미국의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며, 국내와의 연락을 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에서는 1919년 초 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선언을 하는 한편 중국 상해와 국내에 대표를 파견하여 민족 지도자와 연락을 취하였다. 그리고 노령과 미주의 한인들도 전로한족대회와 대한인국민회 등을 통해 독립을 이루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천도교에서는 1918년 말부터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이 손병희와 협의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천도교에서는 1918년 12월 말에는 행정 자치 청원, 1919년 1월 중순에는 독립 청원, 1919년 1월 말에는 독립 선언의 방식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은 기독교의 이승훈·함태영, 불교의 한용운 등과 협의하여 독립선언서의 제작과 민족대표의 선정 등에 대하여 협의하여 1919년 2월 20일 경 대체적인 사항을 마무리하였다.24)
이처럼 거사 계획이 수립된 직후인 1919년 2월 21일 권병덕은 동대문 밖 손병희의 집에서 손병희로부터 “이번에 조선독립선언을 하므로 여기에 가맹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자 권병덕은 일본의 조선 병합을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였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우가 상이한 점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국가가 독립될 것이니 조선도 독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승낙하였다.25)
이후 권병덕은 2월 24~25일 경 가회동 손병희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의 제작과 배포, 미국대통령 및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열국 대표에게 건의서와 일본정부와 조선총독에 보내는 청원서의 날인과 제출 등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2월 26일 권병덕은 재동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 정부와 미국 대통령 및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는 건의서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발표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명월관지점인 태화관으로 변경하는 데 참여하였다.26)
3월 1일 오후 1시 반경에 손병희를 따라서 오세창 등과 함께 명월관지점인 태화관에 갔다. 그리고 권병덕은 오후 2시 독립선언식을 행하고,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 3창을 행한 후 체포되었다. 체포 직후 권병덕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27)
권병덕은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내란죄를 범한 것으로 결정되어 고등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런데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이 사건을 ‘내란죄’로 보지 않고,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과 ‘제령 제7호’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보아, 다시 경성지방법원에 환송되었다. 그러나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이 이 사건을 수리하지 않는 것으로 판결하자 권병덕은 경성복심법원에 송치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권병덕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 산입)의 형을 받았다.28)
판결 후 권병덕은 서대문감옥에서 공덕리의 경성감옥으로 옮겨졌다. 그는 이곳에서 1년 5일간의 그물을 짜는 징역을 행하며 옥고를 치렀다.29)
권병덕은 1921년 11월 4일 오전 11시 신홍식(申洪植), 이명룡(李明龍), 양전백(梁甸伯)과 함께 만기 출옥하였다. 석방 당일 권병덕은 가장 늦게 나왔는데, 이는 옥에서 찍은 사진이 없었으므로, 사진을 찍고 출옥한 때문이었다. 출옥 당시 권병덕은 “조선 동포끼리 서로 싸우고 잡아먹고자 하는 것은 사랑(愛)이 없는 것이매 첫째 사랑이란 것이 있어야 하겠다.”라는 말로 민족의 사랑과 단결을 촉구하였다.30)
1921년 11월 4일 출옥 직후 권병덕은, 오지영·최동희 등이 개량적 문화운동을 추진하던 정광조 등의 교권파를 비판하며 천도교 혁신운동을 추진하자, 임례환·나인협 등과 함께 이를 지지하였다.31) 그러다가 1922년 4월 손병희가 구제도의 부활을 지시하자, 권병덕은 1922년 6월 박인호·정광조·권동진·최린 등과 구파와 오지영·윤익선·최동희 등 천도교 혁신파와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고,32) 1922년 9월 종리사(宗理師)에 선임되기도 하였다.33) 그러나 1922년 말 혁명정신을 고수하고, 천도교의 이념에 따라 민주제를 실시하려던 천도교 혁신파가 ‘천도교연합회’를 설립하고 분립할 무렵, 권병덕도 천도교에서 탈퇴하였다. 권병덕은 1923년 경주 출신인 이상룡(李相龍, 崔尙龍)을 맞이하여 1923년 11월 11일 서대문정 2정목 7번지에 수운교 본관을 창립하고, 1924년 11월 11일 서대문정의 교당에서 개최된 창립 1주년 기념식과 개교식에 참석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34)
그러다가 권병덕은 1925년 7월 경 교인을 이끌고 가회동에 근거한 김연국의 상제교(上帝敎)에 들어갔다.35) 이후 권병덕은 1925년 10월 경 서대문 안 영성문(永成門) 옆에서 약방을 경영하며 생활하였다.36) 그렇지만 1927년 신간회가 조직되자 산하 교인들과 이에 참여하였다. 그 한 예로 권병덕은 1928년 2월 15일 신간회 대구지회에서 개최된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민족운동과 신간회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였다.37)
신간회가 해체되고 난 직후인 1932년, 권병덕은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을 추진한 천도교 구파에 가입하였다. 권병덕은 1932년 12월 23일 오전 천도교당에서 개최된 임시대회에 경성종리원의 대표자로 참석하여 규칙 변경, 예산 확정 등에 대하여 토의하여 결정하였다.38) 그리고 권병덕은 1933년 5월 천도교 황해도 안악교구가 운영하는 양성강습소가 위기에 봉착하여 교사를 판매하려고 하자 중앙교회의 심계원장(審計院長)으로 이곳에 가서 지역의 유지들과 협의하여 양성강습소를 유지시키기도 하였다.39)
1930년대 중후반 일제가 민족말살통치를 강화하여 우리의 민족성을 약화시키려 하자, 권병덕은 우리의 역사에 관한 내용을 기고하거나 책을 간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권병덕은 1935년 『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를 간행하였고,40) 1938년 5월 박제상(朴堤上)의 충절, 김방경(金方慶)의 무용(武勇), 병합 당시의 이면사와 최익현·민영환·전명운·장인환 등 당시 지사의 활약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글을 담은 『조선총사(朝鮮總史)』를 발간하려다가 소위 출판법에 의해 삭제 처분을 받았다.41) 이 외에 권병덕은 『궁중비사(宮中祕史)』를 간행하기도 하였다.42)
권병덕은 1943년 7월 13일 오후 경성부 신설정 309번지 12호 자택에서 향년 76세로 별세하였다. 영결식은 15일 오후 2시 반 천도교당에서 거행되었다.43)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조선이 독립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