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2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18,9-18
요한 16,20-23ㄱ
주님의 시선에만 근심하기로 결심해야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경북 대구의 근교에 ‘지산교회’라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 재정적으로 한몫을 담당하던 ‘오 부자’가 있었습니다.
성이 오씨가 되어 오 부자라고 지칭되는 것이 아니라 5형제가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는 집안으로, 모두가 부자이기 때문에 일괄하여 오부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 오 부자가 사업 관계상 지산을 떠나 대구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오 부자가 한꺼번에 이사하게 되자 지산교회의 재직들은 적잖게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교회를 꾸려 갈 수 없다고 생각한 재직들은 대구로 선교사 안두화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선교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재정적으로 지원을 좀 받아 볼까 하는 약삭빠른 속셈에서였습니다.
그들은 선교사 앞에 앉아서 한숨만 푹푹 내 쉬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안 목사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왜들 그러십니까? 교회에 무슨 걱정되는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이때로구나 하고 “예, 목사님! 아 우리 교회의 오 부자가 글쎄 한꺼번에 이사하였지 뭡니까? 그러니 우리 교회의 유지가 문제입니다.” 라고 눈치를 보아 가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안 선교사는 “그래요? 그것참 문제로군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이 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재직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니 또 무슨 걱정이 생겼다는 말인가?’
그들은 놀라서 안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왜요? 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자 안 목사는 조용히 웃으면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요. 문제지요.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지산교회의 여러분들은 주님은 믿지 않고 오 부자만 믿고 계시니 그게 어떻게 문제가 아닙니까?”
삶이 기쁘지 않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이 ‘근심’입니다.
근심은 누구를 믿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도 실제로는 나 자신과 나 자신이 믿는 것을 믿으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곧 ‘근심’과 연결됩니다.
자신을 믿어도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근심하고, 하느님을 믿어도 근심할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근심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에 두 근심이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계속 ‘성령의 오심’과 연결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인데, 어떻게 그 기쁨을 주시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상반된 ‘근심’과 그에 따른 ‘기쁨’에 의해 언급하십니다.
세상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근심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더는 보이지 않으시면 세상은 기뻐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세상이 기뻐할 때 근심에 쌓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면 세상은 근심에 쌓이지만, 제자들은 기뻐합니다.
이렇듯 세상에 속한 사람의 근심과 주님께 속한 사람의 근심은 반대입니다.
하나가 기뻐할 때 다른 것은 근심하고, 하나가 근심할 때 다른 것은 기뻐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 근심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으면 세상 것 때문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것 때문에 근심하면 주님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누구나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압니다.
그러면 주님 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빈센트 빌 박사가 거리를 걷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매우 괴로운 표정을 하며 인사를 합니다.
빌박사 : “자네 무슨 근심이 있나? 왜 그렇게 죽을상이 되어있나?”
젊은이 : “말씀 마십시오, 요즘은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하나가 지나면 또 하나가 꼬리를 무니 견딜 수가 없군요.
빌박사님 어디 근심 걱정이 없는 곳이 없을까요?”
빌박사 : “있지. 딱 한 군데가 있지.”
젊은이 : “그곳이 어딘데요?”
빌박사 : “왜, 그곳에 가겠나?”
젊은이 : “가고말고요. 그런 곳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가죠.”
빌박사 : “그래? 그럼 설명하지, 공동묘지라네.
그곳에 누워있으면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이 없지.”
젊은이 : “그럼 나더러 죽으란 말씀인가요?”
빌박사 : “그런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네.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보다는 오늘 만나게 될 그분 때문에 더 근심하게 될 걸세.
오직 그 방법을 통해서만 자네가 하는 근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
우리는 누구 때문에 근심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잘살고 있는지 알고 싶거든 지금 그리스도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고 느껴보십시오.
그분이 미소짓고 있다면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시선을 바라보고 눈을 맞추는 이에게만 당신이 준비한 기쁨의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신랑이 자신의 아기를 낳아준 여인에게 돈을 벌어 가져다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인은 아기를 낳아야 해서 근심하지만,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주님 때문에 근심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주님의 시선 때문에 지금 당장은 근심스럽더라도, 그 열매 때문에 주어지는 성령으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2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18,9-18
요한 16,20-23ㄱ
예수님 안의 참 기쁨은 한 인간을 치유하고 고무(鼓舞)시키는 힘입니다!
놀랍고도 영웅적인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을 오늘도 계속됩니다.
오늘 소개되고 있는 장면은 바오로 사도가 각별히 염두에 두고 있었던 도시, 당대 나름 잘 나간다고 자부하던 도시 코린토에서 펼쳐집니다.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바오로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헤치지 못할 것이다.”
(사도행전 18장 9~10절)
당시 한 마리 들짐승처럼 이리저리 내쫒기며 갖은 박해와 고초 속에 있던 바오로 사도,
내일의 생사를 기약하기 힘들 정도로 코너에 몰려있던 바오로 사도에게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큰 위로요 희망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주님께서도 요구가 참 많으신 분입니다.
이방 선교에 전념하느라 몸과 마음이 모두 너덜너덜 해진 바오로 사도, 여기 저기 쑤시고 아파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는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 그간 고생 많았다!
어디 한적하고 안전한 곳으로 가서 몇달간 푹 좀 쉬거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주님께서는 잔뜩 웅크리고 있던 바오로 사도에게 잠자코 있지 말고 군중들이 운집한 광장으로, 사람들이 모든 회당으로 나가라고 재촉하십니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지 말고 계속 말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에게 무엇을 말하라고 요청하셨을까요?
예수님 당신의 운명과 사명을 외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얼마 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떠나 처참한 몰골로 돌아가셨습니다.
더 이상 이 지상에서 그분을 뵙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우리 모두 울며 통곡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의 온화한 얼굴, 따뜻한 미소, 그윽한 눈길을 뵐 수 없다는 생각에 깊은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분께서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돌아오셨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신 그분의 얼굴은 부활의 영광에 빛나는 광채로 찬란했습니다.
잃었던 주님을 다시 찾은 우리 모두는 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떠나시기 전 우리에게 예고하셨던 스승님의 말씀이 글자 한자 틀림없이 우리들 눈앞에
실현되었습니다."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2~23절)
예수님 안의 참 기쁨은 한 인간을 치유하고 고무(鼓舞)시키는 힘이자 에너지입니다.
그 기쁨은 생명력을 낳습니다.
그 기쁨은 절망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하게 합니다.
그 기쁨은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미소 짓게 합니다.
그 기쁨은 결국 우리를 생명과 구원에로, 창조자이신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나날이 늘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나서 돌아보면 많은 기쁨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삶 자체가, 하루하루가 기적이며 가장 큰 기쁨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월22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복음: 요한 16,20-23 :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는 것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되겠지만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산모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 진통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다는 말씀이다. 새 생명을 탄생시킨 후에는 새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그 진통의 고통을 잊고 기쁨을 느끼게 된다고 하신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승을 잃는다는 고통은 두려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에는 고통이나 두려움은 모두 잊게 되고 다시 만난 기쁨만 남게 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다.
산통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되겠지만, 그 고통은 기쁨을 낳는 고통이다. 이는 그분의 부활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태 안에 있다가 밝은 대낮으로 옮겨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도 말씀하시는 것이다. 새 생명이 태어날 때도, 내가 새로이 태어날 때도 그 기쁨이 하도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산모가 기뻐하는 것은 한 생명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기뻐하듯, 우리도 장차 우리가 차지할 세상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기뻐한다. 교회는 우리 신자들이 그렇게 태어나도록 현세에서 수고하고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한다. 교회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천상 탄생으로 이야기 한다. 아기가 어머니 태에서 나와 빛 속으로 오는 것을 태어난다고 하는 것처럼, 사람이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태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다. 우리는 성인들의 축일을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을 천상탄일로 표현하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22절) 희생과 고통이 지불되지 않은 다른 사람이 주는 기쁨은 내 마음 안에 오래 남지 못하고 없어진다. 내가 취한 기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희생과 고통을 지불한 결과로 기쁨을 갖는다면 그 기쁨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께서 완전한 분이시고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기쁨도 완전하며 영원히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하신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이 기쁨은 그러기에 자기가 지불한 고통을 잊게 하고, 자기가 지불한 고통보다도 더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기쁨을 간직하고 살 때,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23절) 하신 것 같이,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지혜로 충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알아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 즉 복음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야 한다. 복음에서 나의 마음에 드는 구절 하나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참된 기쁨을 체험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말씀도, 성서를 깊이 있게 알아듣게 된다.
복음의 말씀은 모두가 사랑으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남아있다는 것은, 그분과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며, 사랑으로만 하느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하느님과의 더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인간은 항상 편한 것을 바라며,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고통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 고통과 희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실천하기 위한 고통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고통은 내가 극복해야할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나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큰 희생이며,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고통을 지불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생명인 기쁨이 우리에게 태어날 것이고, 우리의 고통을 모두 잊게 할 것이며, 새 생명은 나를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이끌어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