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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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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김왕노 시집 / 시작시인선 0301 / 주. 천년의시작(2019.08.09)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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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
할머니가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간다
바람이 불자 백 년을 기념해 팡파르를 울리듯
공중에 솟구쳤다가 분분히 휘날리는 복사꽃잎, 꽃잎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가는 할머니의 미소가
신라의 수막새에 그려진 천년 미소라
유모차에 유머처럼 앉은 늙은 개의 미소도 천년 미소라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 천년 미소가 복사꽃처럼 피어나간다
그리운 쪽으로 한 발 두 발 천년이 간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 앞에
지퍼가 열리듯이 봄 길 환히 열리고 있다
말 없는 입
저 수심 깊은 곳에 언젠가는
불을 뿜을 휴화산 같은 다문 입들이 있다
해협에도 섬에도 도심에도 말이 없는 입들이
핵탄두처럼 압축됨 말을 머금었으나 결코
말을 하지 않는 입들이
말미잘처럼 강철의 괄약근을 가진 입들이
나는 침묵 속으로 걸어간다
푸른 말의 예감 속에 무수한 말 없는 입들이
이렇게 그리울 수 없는 것이다
분명 입이 맞으나 말 없는 입들이
낙과
한때 떫었다는 것은
네게도 엄연히 꽃 시절이 있었다는 것
네가 환희로 꽃 필 때 꽃 피지 못한 것이
어디나 있어 너만 영광스러웠던 것
너를 익히려 속까지 들어차는 햇살에
한때 고통으로 전율했다는 것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를 본다
숱한 네 꿈을 꼭지째 뚝 따버린 것이
미친 돌개바람 탓이기도 하지만
꼭지가 견디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
한때 나도 너와 같은 푸른 낙과였다
점박이
저렇게 피가 섞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개 밥그릇 바닥까지 닳도록 끝없이 삭삭 핥는
왕성한 식욕의 저 혓바닥은
홀레붙어 피를 섞다가 돋아난 붉은 이파리 같은 것
황구니 똥개니 뭐라고 불러도 꼬리 치는
걷어차여도 욕해도 다가오며 꼬리 치는 철면피
앉으면 민망한 줄 모르고 삐져나오는 붉은 생식기
먼 암캐를 찾아가 뒤를 붙이고 싶어 날마다 앓는 좆
지워도 지울 수 없는 판에 박은 우리의 자화상
월출이 형
월출이 형 까치로 형수인 암까치 데리고 아파트 단지 참죽나무 숲에 무허가 집 한 채 짓고 사는 것 안다. 사람 좋은 월출이 형 원양어선 탔다는 소문도 있고 월북하다가 죽었다는 소문도 있으나 구구단 하나, 글자 하나 못 읽어 동네 애경사나 궂은일을 담당하던 월출이 형. 무학에 무식에 현역도 방위도 되지 못했지만, 개구리복 입고 싶어 개구리복 입고 다니다가 간첩으로 오인받아 죽도록 맞아 반병신 된 월출이 형. 실연해 날마다 아카시아 숲에서 트럼펫을 밤하늘로 불러 올리다 끝내 음독한 친구 동규보다 더 슬펐던 월출이 형. 저렇게 돌아와 살 줄 알았다. 형수와 가까스로 나뭇가지 물어다가 지은 월출이 형 집, 눈대중으로 배웠지만 바람이 불수록 더 단단히 다져지는 공법으로 지은 집, 한 배의 자식을 낳고 또 어디로 가려는지 자꾸 행적이 궁금해지는 월출이 형. 오늘은 나를 알아보고 형수와 함께 울어댄다. 고맙다. 월출이 형. 아파트 사람들 공손히 인사해도 시큰둥해 모두가 낯설어지는데 대놓고 안다고 떠드니 기분 좋다. 월출이 형. 그리고 형수님
그리운 봉준이에게
꽃 한번 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데
녹두꽃이 핀단다
어렵게 어렵게도 광음을 헤치면서 핀단다
큰 산보다 더 큰 산, 왕보다 더 큰 왕인 봉준이
봉준이가 보고 싶다고 봉준아, 봉준아 하며
저 궂은 날씨 속에서도 제 빛깔로
어렵게 피는 녹두꽃들, 봉준이가 아꼈던 인내천도
녹두꽃처럼 피어나 저리도 환한데
나는 정신도 뭐도 이념도 없이 흐리멍덩한데
어둠이 목 죄어도 비바람이 시샘해도
봉준아, 봉준아 우리 봉준아 하며 녹두꽃이 핀다
삼남에 고부에 완산에도 죽창처럼 깎아지른
정신으로 보리가 푸른데 녹두꽃이 핀다
봉준이 찾아 헤매는 봉준이 어머니 목소리도
무너지는 하늘을 떠받치며 어렵고 어렵게
녹두꽃으로 노랗게, 노랗게 피어난다
진수성찬
이근배 선생님 고향 당진 기행 갔다가
귀한 해나루 쌀 3킬로 얻어 돌아왔다
이밥에 고깃국인지라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잡곡밥만 먹어 늘 허기진 나에게 아내가
모처럼 이밥을 지었으나 소고깃국은 없으니
소가 좋아하는 아욱국을 끓이자 했다
가난한 내 몸을 늘 챙기는 아내라
그러자 해, 모처럼 진수성찬을 먹었다
경칩이 울음 속에 누워 콧소리 흥흥 내는
아내도 오랜만에 진수성찬이었다
꽃
오, 저것을 대체 어찌할 것이냐
꽃은 식물의 생식기라는데
다 큰 풀과 나무는 다소곳한 처년데
밑을 허공 향해 쩍쩍 벌려놓고
벌겋게 달아올라 뭄부림치는데
꼴린 태양이라도 들이닥치면
오, 저 사태 어떻게 끝낼 것이냐
봄이면 애정결핍으로
끝없이 미쳐가는 이 땅의 꽃들을
민들레 꽃씨
머리가 허옇게 세어서 봉두난발로
쑥대머리로 담 밑에 모인 저 노인들
허깨비같이 가벼워진 몸
자식이 바람 속에 내버리려는 줄 모르고 있다
바람이 훅 불면 바람에 실려서
고려장당할 것을 모르면서
봄 햇살에 꾸벅꾸벅 졸기까지 한다
유리
언젠가 유리를 노래하리라. 보이지만 갈 수 없는 나라가 저 편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유리를, 쨍그랑 유리창을 깨뜨려 날 선 유리로 배를 북북 그으며 유리를 노래하리라. 유리에 갇힌 순이를 위해, 유리가 막장인 도시에서, 투명하지 못한 유리를, 유리를 꿈꾸는 유리를, 유리를 노래하리라. 더러우면 속이 보이지 않는 유리의 맑음을 노래하리라. 유리창에 비친 아니 유리창에 갇힌 모든 풍경을, 비뚤어진 북방 여치 얼굴 같은 내 자화상을 유리보다 더 투명하게 그릴 수 없으나, 유리를 노래하리라. 한때 내가 꿈꾸었던 유리 흐린 유리창에 써보던 먼 이름도, 유리창에 남아있던 닦지 못하고 간 누군가의 지문도 유리창을 통화해 가지 못하는 나를, 불투명해져 간유리 같은 슬픈 나를 끝없이 노래하리라. 존재란 부력으로 유리에 다시 떠오르지 못하는 나를 노래하리라. 유리창이 있는 한 유리의 표면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새와 목마와 숙녀를 마리아 릴케의 시를 노래하리라. 바라보면 언제나 나를 바라보는 유리를, 노려보는 유리를 노래하리라. 유리에 비친 내 눈과 유리창에 부딪혀 내게 되돌아오는 웃음을, 가보지 못한 유리를, 불타는 유리를 언제나 유리한 유리를 노래하리라. 보이지만 갈 수 없는 사랑이 저편에 있다 속삭이는 유리의 한철을 노래하리라. 유리를 노래하다 유리창처럼 와장창 깨져도 좋으리라.
눈이 잘 보이는 저녁
눈이 잘 보이는 저녁에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읽는다네.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나도 처량한 목마 소리를 들으려 하네. 눈이 잘 보여 개밥바라기마저 찾아내고 환호를 지르고서 한 잔의 술을 마시며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나도 이야기하려 하네. 무엇이 갑자기 나의 눈을 잘 보이게 해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읽고 가을바람 소리가 쓰러진 술병 속에서 울듯 추억 속에 쓰러져 울게 하는지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듣듯이 내 뼈저린 추억의 끔찍한 현장으로 고개 돌리는지, 눈이 잘 보이는 저녁, 어린 짐승이 내게 빙의된 저녁 왜 나는「목마와 숙녀」를 읽으며 세월 저편으로 달아나려 몸부림치는지. 잘 보이는 눈 속으로 끝없이 별똥별이 아름답게 지는 밤인데도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여전히 왜 찰랑거리는지
해변에서 시간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 해변이구나
말들이 날뛰는 해변에서 권태로운 고흐가 귀를 자르고
해바라기 끝없이 즐비한 언덕을 스쳐 유성처럼 흘러가는 장대 열차
나는 보이는 세상만 세상인 줄 알았으나 이 몽환의 시간이 좋구나
바다를 향해 선 수목장한 나무에서 커다란 이파리가
얼굴로 돋아나 해풍에 파닥이는 이 신화 같은 날에
내 허기는 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애정결핍의 가슴으로부터 온다
난 숨어서 하는 은밀한 키스보다 긴 머리카락 나부끼는
바람 속의 키스를 오래전부터 꿈꿔 왔다
이룬 사랑보다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경전처럼 읽으며
그리움의 아슬아슬한 난간을 지나왔다
보이는 일로 바빴던 것보다 보이지 않는 일로 바쁜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흘러가는 구름이나 꽃, 비나 비행기 배보다
보인다 하면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다 하면 보이는 이몽환의 세상
모래에 묻힌 하얗게 부푼 네 복숭아뼈처럼 아름답구나
두 개의 세상
엄연히 두 개의 세상이 있다
네온의 거리를 지날 때 네온에 섞이지 못한
네온 밖에 오래 서성이는 한 청춘의 탄식을 들었다
물에게는 물의 세상이 기름에게는
기름의 세상이 있기에 섞이지 못한다
한 사람이 자신이 가지지 않은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
긴 여정에 오르고 돛을 높이 세운다
볼 수 있는 세상과 볼 수 없는 세상
나는 내가 볼 수 없는 세상을 향해
구두끈 단단히 조이고 구름의 보폭으로 흘러왔다
옥수수 이파리에 닿아 따끔거리는 오후를 앞세우고
전방을 지나 다른 세상으로 전역해 가기를 꿈꾸었다
두 개의 세상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
우리가 머무는 곳이란 가진 세상을 두고 가지지 못한
세상으로 떠나려는 푸른 항구인 것이다
허공 궁전
저 까마득한 허공은 빈 것이 아니다
곤줄박이의 울음과 할미새의 울음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짜여 있다
내 가슴에서 나부끼는 노래는 다 허공에서 얻었다
너는 너의 그리움을 허공에 풀었고
그리움이 스민 구름은 천천히 눈앞에 흘러가므로
난 그리움을 감상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나
허공 속은 보이지 않는 것이 떡하니 들어서 이룬 허공 궁전
모든 소리가 순례 왔다가 허공에 떠도는 자작나무 파닥이는 소리에
반갑다 인사하며 소리의 길을 따라간다
언젠가 나도 옥수수 서걱거리는 소리 같은
푸른 노래를 허공으로 메아리치게 한다
보이지는 않으나 한때는 아우성이 들끓던 허공 궁전은
모국어로 부르는 내 노래에 화답해
하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는 우레 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시집과 그것을 하다
시집은 요염하게 삼베옷을 입은
여인처럼 온다. 곡비처럼 온다
두 번째 페이지 하얀 속살에는
내 이름을 문신으로 새기고 온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깊어가는 밀애
우리 사랑 오르가슴에 닿았는지
멀리서 달려오는 까마득함
시집이 온 다음 날은 무리했는지
걸을 때마다 휘청거린다
술의 노래
-칠부七部의 사랑
지금은 압니다. 당신이 내게 다소곳이 술잔을 채울 때
당신이 따라주는 것이 당신의 사랑이라는 것을 압니다
당신의 가슴에 바다보다 넓고 깊은 사랑이 있으나
그 사랑 넘치지 않게 알맞게 채워준다는 것도 압니다
한꺼번에 당신의 사랑을 내게 준다면 그 사랑 잔마다 넘쳐
세상에 큰물 지고 나마저 사랑에 휩쓸려 가버릴 것입니다
사랑 한 방울만 더 따르더라도 넘칠 듯 말 듯한
그런 위태한 사랑이 아니라 칠 부 정도 채워주는 사랑
가득 채워주지 않으므로 마실수록 더 그리워지는 사랑
그런 사랑에 취한 우리 늦은 노래가 세월의 노래가 됩니다
당신이 내 잔에 조심스레 따라 주는 맑은 소주가
당신의 지고지순한 사랑인 줄도 압니다
당신의 끓어오른 영혼으로 방울방울 얻은 사랑
티 하나 없고 어둠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증류된 사랑
소중한 그 사랑을 내게 따라주는 당신의 눈부신 손
지나치게 채워질까 조용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당신의 사랑이 술로 올 때 함께 온다는 것도 압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칠 부로 채워지는 당신의 사랑
망설임 없이 단숨에 당신의 사랑을 마시라는 뜻
단숨이나 영원히 당신에게 취하라는 당신의 뜻도 압니다
당신이 빈 내 잔에 칠 부로 따르는 단숨의 사랑
단숨의 사랑에 취하여 당신을 끝없이 불러봅니다. 당신
서천 간다
풀뿌리마저 끙끙 앓는 엄동
빙판의 길을 지나간다
서천 간다
여기서 꽃 피지 않으면
그 어딘가 단호히 꽃이 핀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믿으므로
여기는 무화의 시절이므로
서천엔 꽃이 아니면 따뜻한 별꽃이라도
차가운 눈꽃이라도 소금꽃이라도
단호히 피고 지고 있을 것이므로
먼 네가 꽃으로 피는 곳을 찾아
가서는 쫄딱 망하더라도
서천 간다. 서천 가는 중이다
수국의꽃 나라
어머니는 수국꽃의 어머니였습니다
집을 비우고 멀리 갔을 때는 나의 안부보다
마당의 수국꽃을 물었습니다
수국꽃이 하얗게 잘 피었냐고
이번 가뭄에는 시들거나 상한 것이 없냐고
바람에 고생하지 않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수국꽃 마당에 두고
나보다 더 수국 편이었던 어머니 돌아가시자
어머니 그리운지 더 하얗게 타오르던 수국꽃
모처럼 고향에 와 평상에 드러누우니
집 안 가득 진동하는 수국꽃 냄새
어머니 이런 날 오라고 수국 심으셨나 봅니다
어머니 저승에 가셔도 수국꽃을 심으셨는지
별도 수국을 닮았고 은하수도
수국꽃 무더기처럼 밤하늘로 흘러갑니다
먼 밤새 울음도 수국 수국 수국 들여옵니다
어머니 수국꽃을 사랑한 힘으로
수국꽃 나라 하나 우뚝 세워주고 가셨습니다
절교도
절교도의 강력한 교주 아버지를 맹신한 어머니도 세상과 절교를 하고
자식을 아비어미 없는 고아로 만들었다
태교로 내가 세상을 조금씩 느낄 때마다 아버지가 절교를 선언한 구름이
밤하늘 참죽나무 끝에 떠돌고 아버지가 절교를 선언한 먼바다는
혼자 철썩이다가 고래와 함께 잠들었다
아버지는 명절에 모인 자식에게 사자로 제삿밥 드리서 와 촛불을 가만히
흔들어대는 할아버지가 유언 한마디도 없이 침묵으로 선언한 절교에 대해
그때 대청마루까지 들이찬 막소금 같은 눈발에 대해 나직하게 말씀해 주셨다
이별은 만남이 전제되기에 절교보다는 낮은 단계의 수순
강력한 절교가 우리 집에 누대로 이어져 내가 어머니와 탯줄을 끊고
어머니 육신과 절교를 선언했듯이 결국 혈연도 지연도 절교 앞에는 무능력
무기력하다며 어머니도 단호하게 절교를 선언하고 내 곁을 떠나셨다
따지고 보면 절교를 선언하는 오늘의 바람 속에 풍경 속에 자작나무 숲 곁에서
먼지같이 떠도는 나여서 무엇이 먼저 절교를 선언하기에 앞서
절교도 교주인 아버지의 강력한 후계자라 절교의 선수를 칠 수밖에 없다
절교를 선언해 버린 이름 몇 무덤 상석에 앉아 검은 새로 울더라도
잘 가라 하루를 이루었던 것들아, 내일이 있지만 오늘은 여기서 절교라고
그리운 심부름
나는 아버지가 잔에 따르는 쪼르르 소리가 좋아
아버지 술심부름 여우가 운다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도 좋았다
달리면 넘쳐 쏟아질 것 같고 넘치지 않게 하려면 느리게 걷고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뻐꾸기 울음 그치고 산 그림자 짙어져도
아버지 심부름하니 무섭지 않았고 아버지가 심부름 값으로 주는
용돈을 조금만 더 모으면 어머니 생일날 선물할 것 같다는
늦게 쓰는 일기장 속으로 앵두꽃이 하나둘 똑똑 지고 있었다
오늘은 왠지 아버지 술 취해 부르던 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 라는 그 노래 더럽게도 듣고 싶다
달동네
오늘은 만월이라 달 아래 빙 둘러앉아
달동네 아래서 가져온 이야기 도란도란 나누면
풀벌레도 귀담아 듣는다고 울음 뚝 그치고
달마저 귀 기울인다고 달동네에 오래 머물고
밤참인 달 같은 호박전을 나누다 보면
뭐 하나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달동네
달동네 이야기가 시들해지기 전에 일찍 자리 뜬
새신랑 새색시 달덩이 같은 엉덩이 들썩이며
달이 점지해 주는 아이를 얻는다고 바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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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고집에 세다, 똥고집이다.
역대급 고집이다.
죽음도 고집을 꺾지 못한다.
첫 시집을 천년의시작에서 내기 시작해
벌써 6번째 시집마버 천년의시작에서 낸다.
시집을 천년 우물물 같은
푸른 시로 채우는 고집도 부렸다.
푸른 시로 채우기 위한 고집은
끝내 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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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詩集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 해설 ] -
울음과 타자를 위한 푸른 고집
이형권. 문학평론가
1.
김왕노 시인은 자신을 고집쟁이라고 부른다. 시집을 열자 “시집을 천 년 우물물 같은/푸른 시로 채우는 고집도 부렸다”(「시인의 말」)는 문장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시인이 말하는 “푸른 시”는 그가 이제까지 만들어온 시적 이력과 관계 깊다. 그는 그동안 『슬픔도 진화한다』『말달리자 아버지』『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게릴라』『이별 그 후의 날들』등의 시집을 간행해 왔다. 이들 시집에서 가장 빈도 높게 등장하는 시적 상상은 사랑과 그리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만나고 이별하고 슬퍼하는 등속의 일반적 문법이나 감상적 정념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이 시에서 사랑은 인생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 그리고 우주 만물에 대한 통찰에 도달하게 하는 인식론적 매개이다. 그의 사랑은 이성애적인 에로티시즘에 근간을 두면서 존재와 생명, 자아, 가족, 타자 등에 대한 필리아를 향해 열려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은 시적 자의식의 차원으로까지 깊어지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러한 사랑과 시에 대한 “고집”이 바로 상록수처럼 늘 “푸른 시”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늘 “푸른 시”를 고집하는 이유는 세상이 푸름을 상실하고, 문명의 이기와 속악한 욕망으로 갈변된 곳이기 때문이다. 하여 “푸른 시”의 밑바탕에는 항상 세상을 향한 비판적 결기와 부정적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의 시에서 간혹 거친 언어와 직정적인 표현이 등장하는 경우는 대부분 그러한 인식과 관계 깊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늘 “푸른” 세상을 향한 시적 상상의 모티브로 작용한다. 이때 그의 시는 비로소 심오한 사유와 세련된 표현을 획득하면서 시적 진실에 다가간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거짓의 빛바랜 세계를 버리고 진실한 푸름의 세계를 지향해 가는 일이다. 즉 진정한 시인은 “푸른 시”(「심야극장 앞을 지나며」)로 명명된 시적 진실을 찾아 떠도는 영원한 보헤미안으로서, 항상 “가진 세상을 두고 가지지 못한/세상으로 떠나려는 푸른 항구”(「두 개의 세상」)에 서성이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푸른 시”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역설의 원리이다.
때가 되면 푹푹 썩는 시를 쓰라고 어머니 말씀하셨지요. 시보다 더 고운 꽃도 때가 되면 시들고, 떨어지고, 썩어서 흙이 되어 다음 해 더 좋은 꽃을 피운다고, 좋은 시도 때가 되면 푹푹 썩는 시여야 한다고, 시인도 아니고 소설가도 아닌 어머니가 말씀하셨지요. 시는 썩을 수도 없고, 썩어서도 안 된다는 나는, 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머니 말씀의 진위를 알고 싶어, 어머니에게 되물었지요. 그러면 썩은 것은 거름이 된다는 것, 흙이 된다는 것, 호박 구덩이에 겨울이어도 생똥을 늘 들이부은, 상복이네 호박잎이 왜 다른 집보다 더 넓고 푸르지. 호박도 왜 크고 단지를 아느냐고 물어왔을 때야, 어렴풋이 어머니 말씀의 뜻 짐작했지요
-「푹푹 썩는 시」 부분
이 시의 핵심은 “때가 되면 푹푹 썩는 시를 쓰라”는 “어머니 말씀”이다. 이 “말씀”은 “고운 꽃”도 썩어야 “다음 해 더 좋은 꽃을 피운다”는 자연의 원리를 “시”의 원리와 동일시한 것이다. “호박 구덩이에 겨울이어도 생똥을 늘 들이부은, 상복이네 호박잎이 왜 다른 집보다 더 넓고 푸른디, 호박도 왜 크고 단지를 아느냐”는 질문도 그러한 원리를 비유하고 있다. 이는 한 생명이 죽음으로써 새 생명이 탄생한다는 역설적 존재론, 일상의 언어를 버려야 시적인 언어를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시론의 경지와 다르지 않다. “나”에게 이러한 원리를 깨닫게해 준 이가 “시인도 아니고 소설가도 아닌” 농사꾼 “어머니”라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어머니”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자연 원리와 인생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시를 쓰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왕노 시인이 말하는 “푸른 시”는 바로 그러한 시를 의미하는 것일 터, 화려한 수사나 관념적 작위를 거부하면서 체험적 진솔성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김왕노 시인의 시를 ‘푸른 고집’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2.
이 시집에 들어서면 어디선가 길고 깊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시인은 “어제도 울었다. 슬프지 않은데도 울었다. 울 때가 아닌 데도 울었다. 울음 한철이 아닌데도 울었다. 울다 잠들면 잠들어도 울었다. 꿈속에 나가 울음이 강물을 이룰 때까지 울었다. 내 안에 수천수만 톤의 울음이 출렁이는 것에 놀라며 울었다. 울려고 태어난 것처럼 울었다. …(중략)…시도 때도 없이 운 것이 아니라 사실 그리울 때마다 울었다”(「그리울 때마다 울었다」)고 고백한다. “울음”은 “울음이 강물을 이룰 때까지”“울려고 태어난 것처럼”울었다는 고백으로 보건대 항상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울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울 때마다”라는 전제에 의해 그리움의 항상성과 연관된다. 시인은 언제나 그리움 속에서 살았고,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항상 울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움이 “울음”과 한 몸이라면 그것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뱀이여, 네가 원죄로 철철 우는 붉은 밤
네 울음을 채찍으로 들고 나를 후려쳐라
온몸에 감기며 벌겋게 남겨 주는 살점 묻어난
뱀 무늬로 원죄로 우는 너만큼 나도
내 죄를 울며불며 붉은 밤을 건너고 싶다
걸어온 날을 뒤돌아보면
원죄로 우는 것보다 더 울어야 하는
더 아파해야 하는 나인 것을
울음의 채찍으로 피 걸레가 될 때까지
끝없이 나를 내리쳐라, 참혹에 거침없이 이르게
지금은 붉은 밤의 시간, 원죄로 울기 좋은 밤
너만 울고 나는 울지 못하는 밤이어서
너만 아프고 내가 아프지 않은 것이
더 살 떨리고 뼈저린 일이기에 뱀이여
울음의 거대한 채찍을 쇠사슬처럼 들고서 쳐라
휘청거리다 맥없이 내가 쿵 넘어지게
끝없이 후려쳐라, 사정없이 후려쳐라, 뱀이여
-「붉은 밤」 전문
“나”는 “뱀”을 호명하면서 울음을 울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다. “원죄로 철철 우는 붉은 밤”은 실존적 인간 존재를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원죄를 짓고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뱀”은 자신의 그러한 운명을 자각하고 그것을 “울음”으로 성찰하는 존재이다. 중요한 것은 시의 주인공인 “나”가 그러한 “뱀”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기 자신도 “울음”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점이다. 하여 “울음의 거대한 채찍을 쇠사슬처럼ㅁ 들고서 쳐라”고 요구하고 있다. 왜? “나”는 자신이 울어야 하는 이유를, “걸어온 날을 뒤돌아보면/원죄로 우는 것보다 더 울어야 하는/더 아파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죄 때문에 우는 “뱀”보다 자신이 “더 울어야”한다는 고백은 “나”의 삶이 “원죄”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사실 인간의 죄 가운데 원죄보다 근원적인 죄는 없을진대 자신이 그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는 말은 지나친 과장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은 고백의 진정성을 고양시켜 준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원죄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살아온 삶의 과정이 죄였다고 고백하면서 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나”의 “울음”은 외부 세계의 자극에 의해 발생하는 “울음”이 아니라 자발적인 울음, 즉 실존적인 울음이 된다. “나”는 울음을 자신의 비루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의 매개로 삼은 것이다.
한편 울음은 사랑의 깊은 감각과도 관련된다. 사랑과 관련된 이야기는 보통 ‘사랑-이별-울음’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가고, 그에 대한 그리움에 울음을 우는 것이 보편적인 울음의 생리학이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의 사랑과 울음은 그런 것과 다르다. 이 시집에서 들려오는 울음은 단지 슬픈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깊고 넓게 하는 정신적 기제이다. 이러한 울음은 감정의 발산을 넘어 인간다운 삶의 감각을 풍요롭게 해주는 매개체이다.
사랑이라면 가볍더라도 구름 정도로 오래 흘러가야 하는데
세상에나 겨우 십 일이라니 십 일 동안 꽃일 너를 사랑해야 한다니
그 십 일을 위해 너를 꽃이라 불렀기에 너는 내게 와 꽃이 되다니
꽃에 취하다 보니 꽃그늘을 보지 못했다니 너를 꽃이라 부르고
핏빛 꽃잎 같은 입술을 깨물며 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에메랄드, 진주, 비취, 사파이어, 마노, 자수정, 남옥, 사금석, 혈석, 카넬리안, 공작석, 오팔, 장미석, 루비도 있는데 너를 때 되면 시드는 꽃이라 부르고 울었다
지는 꽃보다 더 흐느끼고 이별의 사람보다 더 깊고 길게 울었다
-「너를 꽃이라 부르고 열흘을 울었다」 부분
나 어릴 때 돌아가신 네 아버지 부르며 비린 눈물 좀 흘리며
속이 후련하도록 울고서 집으로 돌아올게
너는 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곡도 울지도 잘 못하더니
불효막심한 놈 같더니만 네 심정 알아, 울어본 사람이 우는 거야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 너를 위해 내가 울 날이 있을지도 몰라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뭐 별 뾰족한 수가 있느냐
울 때 울고 웃을 때 웃고 눈물을 보일 때 보이는 거야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은 울고불고하며 생에 눈물 조금 보태는 거야
-「만추」 부분
앞의 시구는 “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하무십일홍이란 말 앞에서 울었다”로 시작하는 시의 뒷부분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꽃”이라고 부른 스스로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별의 사람보다 더 깊고 길게 울었다”고 고백한다. “나”가 “너를 꽃이라 불렀”다는 것은 사랑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을 함의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은 말 그대로 속세를 지배하는 부귀영화나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뜻인데, “나”는 사랑의 대상인 “너”를 그러한 꽃으로 명명하고 살았음을 후회하고 있다. 더구나 “꽃에 취하다 보니 꽃그늘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사랑을 화려한 외양으로만 생각하고 그 이면의 진실을 망각하고 살아온 어리석음 때문에 울고 있다고 한다. 이때 주목할 것은, “나”의 울음이 외부적인 상황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는 데서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울음이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자발적, 성찰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뒤의 시에 등장하는 어머니 역시 자발적 울음의 주인공이다. 이 시는 화자인 어머니가 청자인 “나”를 대상으로 하여 시적 진술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집을 나서면서 “네 아버지 부르며 비린 눈물 좀 흘리며/속이 후련하도록 울고서 집으로 돌아올게”라고 말한다. 보통 울음이란 죽은 이의 무덤에 가서 그를 회억하면서 드러나는 정념의 표현일 터인데, 어머니는 미리부터 울음을 작정하고 집을 나서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주목할 것은 울음이 어머니의 “속이 후련하”게 해주는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자발적 울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고 세상을 사는 지혜와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은 울고불고하며 생에 눈물 조금 보태는 거”라는 시의 결구는 의미심장하다. 어머니는 “눈물”혹은 울음이 속 깊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 시집에서 울음을 운다는 것은 또한 ‘나’의 안에 깃들어 있는 타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이다. 울음은 자아에 대한 과도한 고집이나 나르시시즘의 정서를 극복하고,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타자와의 공감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타자는 ‘나’라는 주체와는 다른 존재이지만,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타자는 서구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우열 관계라고 곡해되어 온 인간/자연, 남성/여성, 정신/육체, 이성/감정, 의식/무의식, 서양/동양 등의 이항 대립에서 후자의 계열체를 의미한다. 탈구조주의 철학은 이러한 타자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인간정신을 풍요롭게 해왔는데, 이 시집에는 이러한 타자를 호명하여 그들의 존재 가치에 공감하는 시상이 빈도 높게 나타난다. 먼저 내 안의 타자를 성찰하는 모습을 살펴본다.
어느 날 밤 먼 하늘을 건너오는 외로움을 못 견뎌 울부짖는 소리는 또 다른 내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한때 나도 내가 너무나 외로워 벽에 머리를 짓찧는 자학으로 길고 깊은 겨울밤을 먼 나를 부르며 보낸 적이 있다. 먼 나란 나와 다른 나이지만 분명 하나의 뿌리를 가진 나이다. 인생이 이렇게 외로운 것은 잃어버린 나를 내가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나는 내게서 또 다른 나를 세상 저편으로 보냈으며 나는 나로부터 또 다른 내가 되어 어떻게 어성초 푸른 이 밤으로 떠나왔을까. 서로가 떠나므로 반쪽의 나와 반쪽의 또 다른 내가 되어 불완전하므로 남은 생이란 원형의 복구로 하나의 나를 이뤄야만 하는 것
나는 또 다른 나와 수시로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내가 울적할 때 또 다른 나도 울적한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감정의 끈을 본능처럼 흔들어대므로 나와 또 다른 나와의 감정이 합일점에 이른다. 내가 또 다른 나를 떠나왔으므로 껍질인 듯 남은 또 다른 내 안으로 귀환하는 꽃 피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합체에 이르러 비로소 별을 향해 발돋움하거나 하지 감자꽃 필 무렵 비로소 하나가 된 우리가 도시 외곽으로 아유회도 갈 것이다. 지금은 다만 볍씨 같은 꿈을 가슴에 묻고 움츠려야 할 때 그리움만 나무처럼 일어서서 또 다른 나에게 끝없이 몸을 털어대며 푸른 텔레파시를 보내야 할 때
-「도플갱어」 부분
이 시에서 “도플갱어”는 “나”의 타자이다. 인간의 내면세계는 주체라고 일컬어지는 “나”이외에 이질적인 타자들이 다양하게 공존한다. 가령 선한 나와 악한 나, 이성적인 나와 비이성적인 나, 진실한 나와 거짓된 나 등이 공존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이성적이고 진실하다고 믿는다면, 그러한 믿음은 아집이 되고 편견이 되어 자신의 삶을 왜곡하고 기만하기 마련이다. 오히려 악하고 비이성적이고 거짓된 나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인간적이고 진실한 자신의 실체에 다가가게 한다. 이 시의 “나”는 그러한 이질적인 속성을 공유한 자신의 실체를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내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먼 나는 나와 다른 나이나 분명 하나의 뿌리를 가진 나”라고 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생이 이렇게 외로운 것은 잃어버린 나를 내가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진술은 흥미롭다. 가령 현실에 지나치게 얽매어 사는 “나”가 낭만적인 자아를 찾아서 함께 살아가는 것은 외로움에서 탈출하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또 다른 나에게 끝없이 몸을 털어내며 푸른 텔레파시를 보내야 할 때”라는 진술은 “나”의 안에 존재하는 타자의 가치를 충실히 인식했음을 증명한다.
타자는 ‘나’의 안뿐만 아니라 ‘나’의 밖에도 존재한다. 어느 사회이든 다수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소수자로서의 타자가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다수자 혹은 주류 계층의 사람들이 타자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타자는 스스로 사회의 주체 혹은 주류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도 필요 불가결한 존재이다. 타자와 소통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주체의 삶이 타자를 배척하는 주체의 삶보다 훨씬 풍요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사회적 타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늦은 저녁을 준비하는 집에 어둠이 왔다 자주 생살구가 지붕에 떨어져 살아있나 죽었나 안부를 묻고, 지병인 그리움이 또 도진 참죽나무 숲은 뒤란에서 아프다, 꼭꼭 여며도 바람 드는 세월, 삼꽃 피는 날, 백 년 우물물을 길어 벌컥벌컥 마시면 오늘의 갈증은 말끔하다. 탁발을 나섰던 동지들이 저무는 골목을 따라서 돌아오고, 산제비는 깎아지른 절벽의 둥지로 돌아갔다. 생각하면 눈시울 젖는 살림살이, 별빛의 온기마저 가만히 거두어 구들장 식은 안방으로 들이고 싶은 마음, 켜켜이 포개어 담든 어둠마저 어린 자식처럼 정겨운데, 단수와 단전이 된 집이지만 늦은 저녁상을 물리면 단 하나 남은 촛부 f로 환해진 집, 밤이 깊어지자 캄캄한 집, 한 땀 한 땀 사랑을 박음질하는 소리만 새싹처럼 돋아나고 있다
-「몽환의 집」 전문
이 시는 가난한 집에 찾아드는 역설적인 행복감을 노래한다. 시의 배경인 “늦은 저녁을 준비하는 집”은 “단수와 단전이 된 집”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나듯이 매우 가난한 집이다. 그러나 가난한 집이라고 해서 인간다운 삶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병인 그리움”을 “아프”게 감각할 수 있고, “삼꽃 피는 날”처럼 아름다운 시절도 있고, “백 년 우물물”이 “오늘의 갈증”을 해소해 주기도 한다. 그 집 주변에서는 저녁이 되면 “탁발을 나섰던 동지들”과 “산제비들”도 저의 집으로 돌아가는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비록 “단수와 단전”으로 생활이 힘겹지만, “늦은 저녁상을 물리면 단 하나 남은 촛불로 환해진 집”에서는 “사랑을 박음질하는 소리만 새싹처럼 돋아나고 있”는 곳이다. 가족들을 위해 늦은 밤까지 쉬지 않는 아낙의 재봉틀 소리가 오히려 “사랑”의 메아리로 들리는 것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가족과 생명과 인간을 위한 “사랑”이 넘치는 “집”, 그 “집”은 분명 어떤 부잣집보다도 행복한 역설적인 “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유사한 타자는 다른 시에서도 “월출이 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즉 “월출이 형 까치로 형수인 암까치 데리고 아프트 단지 참죽나무 숲에 무허가 집 한 채 짓고 사는 것 안다. 사람 좋은 월출이 형”(「월출이 형」)이 그 사람이다. “월출이 형”은 비록 가난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우직하고 인간성이 풍부한 사람인데, 시인은 이러한 사회적 타자를 호명하여 세상에 대한 시적 인식을 확장하는 매개로 삼고 있다.
타자는 역사적 차원에서도 존재한다. 근대적 역사관에 의하면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주체의 역할을 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에서의 승자 혹은 주류 계층이었다. 지배 계층들은 스스로 역사의 주체라고 명명하면서 타자인 민중을 역사의 중심에서 추방하고자 했다. 지배 계층은 자신들의 부패와 무능과 독선에 의한 역사의 시련을 언제나 민중에게 떠 맡겼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 계층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발전을 이루어온 것은 타자의 정신 혹은 혁명의 정신이었다. 이 시집에서 호명된 “봉준이”는 그러한 역사적 타자이다.
꽃 한번 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데
녹두꽃이 핀단다
어렵게 어렵게도 광음을 헤치면서 핀단다
큰 산보다 더 큰 산, 왕보다 더 큰 왕인 봉준이
봉준이가 보고 싶다고 봉준아, 봉준아 하며
저 궂은 날씨 속에서도 제 빛깔로
어렵게 피는 녹두꽃들, 봉준이가 아꼈던 인내천도
녹두꽃처럼 피어나 저리도 환한데
나는 정신도 뭐도 이념도 없이 흐리멍덩한데
어둠이 목 죄어도 비바람이 시샘해도
봉준아, 봉준아 우리 봉준아 하며 녹두꽃이 핀다
삼남에 고부에 완산에도 죽창처럼 깎아지른
정신으로 보리가 푸른데 녹두꽃이 핀다
봉준이 찾아 헤매는 봉준이 어머니 목소리도
무너지는 하늘을 떠받치며 어렵고 어렵게
녹두꽃으로 노랗게, 노랗게 피어난다
-「그리운 봉준이에게」 전문
이 시의 “봉준이”는 갑오농민전쟁의 영웅이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을 지시하고, “녹두꽃”은 그가 희생을 무릅쓰고 지키려 했던 혁명 정신을 상징한다. 그는 “죽창처럼 깎아지른/정신”의 소유자로서 부정한 역사에 대한 준엄한 저항과 타도를 위해 행동한 실천적 혁명가였다. 그는 조선말기의 무능한 왕권과 외세에 대항하여 민중이 주인 되는 새로운 역사를 쓰려고 했던 인물이다. 가령 “무너지는 하늘을 떠받치며 어렵고 어렵게/녹두꽃으로 노랗게, 노랗게 피어난다”에서 “녹두꽃”은 정의의 “하늘”을 추구했던 혁명가 전봉준의 정신을 상징한다. “큰 산보다 더 큰 산, 왕보다 더 큰 왕인 봉준이”라고 호명하는 것은 그의 정신과 행동의 위대성을 반영한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해 “봉준이”라고 호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정신도 뭐도 이념도 없이 흐리멍덩한데”라는 고백은 전봉준의 위대한 혁명 정신을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이 시는 역사의 변두리에서 타자로만 맴돌던 민중의 가치, 인간 존중(“인내천”)의 가치를 옹호하고 있다. 역사 속의 타자를 발견하여 역사에 대한 인식을 풍요롭게 한 셈이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타자의 영역은 심미적 낭만의 세계이다. 그곳은 냉철한 이성이 지배하는 현실세계의 타자로서 예술혼이 살아있는 세계이다. 그곳은 예술가들이 인생이 덧없음을 자각하면서 꿈과 환상을 통해 인생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곳이다. 예술세계는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진리의 비은폐성이 현현되는 곳으로서 예술가들은 그곳에서 심미적 감성과 새로운 상상을 통해 인생의진리를 발견하고자 한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 해변이구나
말들이 날뛰는 해변에서 권태로운 고흐가 귀를 자르고
해바라기 끝없이 즐비한 언덕을 스쳐 유성처럼 흘러가는 장대 열차
나는 보이는 세상만 세상인 줄 알았으나 이 몽환의 시간이 좋구나
바다를 향해 선 수목장한 나무에서 커다란 이파리가
얼굴로 돋아나 해풍에 파닥이는 이 신화 같은 날에
내 허기는 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애정결핍의 가슴으로부터 온다
난 숨어서 하는 은밀한 키스보다 긴 머리카락 나부끼는
바람 속의 키스를 오래전부터 꿈꿔 왔다
이룬 사랑보다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경전처럼 읽으며
그리움의 아슬아슬한 난간을 지나왔다
보이는 일로 바빴던 것보다 보이지 않는 일로 바쁜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흘러가는 구름이나 꽃, 비나 비행기 배보다
보인다 하면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다 하면 보이는 이몽환의 세상
모래에 묻힌 하얗게 부푼 네 복숭아뼈처럼 아름답구나
-「해변에서 시간」 전문
이 시에서 “해변”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 초현실적 세계이다. 이때 “죽은 사람”이 현실 너머의 예술적 초월자라면 “산 사람”은 현실 논리에 얽매여 사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은 예술적 감각이 살아있는 사람이므로 일종의 역설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가령 “권태로운 고흐가 귀를 자르”는 것은 현실의 상식에는 어긋나지만, 현실의 비루함과 답답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예술가의 광기로 이해할 수 있다.“나”가 이러한 “고흐”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말하는 것은 “보이는 세상만 세상인 줄 알았”던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성찰을 위한 것이다. 이때 “보이는 세상”은 현실 논리와 투명한 이성이 지배하는 곳으로서 인간의 영혼이나 세계의 진리가 현현할 수 없는 각박한 세계이다. 그래서 시인은 “몽환의 시간”과 “신화 같은 날”이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현실 너머의 세계를 주목한 것이다. 그곳은 인상파 화가인 “고흐”가 “몽환”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고 했던 예술 세계이자 “이루지 못한 사랑”을 호출하여 반추해 보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고흐”가 실제로 고갱과의 불화, 창녀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 광기와 자학의 삶을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광기”와 “자학”이 “고흐”의 개성적인 예술 세계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즉 “보인다 하면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다 하면 보이는 이 몽환의 세상”에 대해 “좋구나” 또는 “아름답구나”와 같이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인간 정신의 타자인 광기와 자학을 타락한 현실에 대한 저항 혹은 자기 갱신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에너지로 본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시의 세계이기도 해서 “노 시인이 별을 깎고 새벽으로 담금질해 시를 만드는 애련리”(「애련리」)와 다르지 않다.
3.
이 시집을 읽으면서 우리는 많은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를테면 원죄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속죄의 울음, 사랑의 실패로 인한 자책의 울음,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난 자로서의 실존적 울음, 곡절 많은 삶의 이력에서 오는 번뇌의 울음, 가족의 죽음에서 오는 관계적 울음 등이 깊은 공명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런 울음소리들이 결코 슬프거나 고통스럽게 들리지는 않는다. 울음이 단순히 슬픈 감정을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생에 대한 성찰과 카타르시스를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생산적 역할을 한다. 이러한 울음은 내 안이나 내 밖에 존재하는 타자의 것이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타자는 내 안의 또 다른 나,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회적인 소수자, 현실 법칙을 초월한 예술가나 시인 등이다. 이들은 이 시집이 더 넓고 깊은 시 세계를 구축하게 해준다.
진정한 타자의 세계는 ‘나’의 내부뿐만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서도 타자와 주체의 구분이 없이 하나로 어우러진 세계이다. 그곳에서는 인간과 자연, 시간과 공간의 경계마저 넘어서는 조화로운 경지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가 무갈등과 탈경계의 심미적 이상향이라면 아래의 시는 그러한 세계를 표상한다. 그곳은 타자마저 스스로 타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면서 다른 타자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세계이다.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
할머니가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간다
바람이 불자 백 년을 기념해 팡파르를 울리듯
공중에 솟구쳤다가 분분히 휘날리는 복사꽃잎, 꽃잎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가는 할머니의 미소가
신라의 수막새에 그려진 천년 미소라
유모차에 유머처럼 앉은 늙은 개의 미소도 천년 미소라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 천년 미소가 복사꽃처럼 피어나간다
그리운 쪽으로 한 발 두 발 천년이 간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 앞에
지퍼가 열리듯이 봄 길 환히 열리고 있다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전문
이 시는 “복사꽃 나무” “할머니” “늙은 개”가 모인 일련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전개한다. 이 이미지에 등장하는 것들은 현실의 시선으로 보면 모두 타자들이다. “복사꽃 나무”라는 자연과 “늙은 개”라는 동물은 인간의 타자이고, “할머니”는 젊은이의 타자이다. 그런데 이들 타자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아름답고 웅대하다. 그 웅대함은 타자들 사이의 경계와 시간의 층위가 사라졌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가령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할머니가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간다”는 광경은 인간과 자연, 동물의 경계가 사라진 모습이다. 나아가 현실과 “유머”의 경계, 시간과 공간의 경계마저 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고 가는 할머니의 미소”와 “신라의 수막새에 그려진 천년 미소”, 그리고 “유모차에 유머처럼 앉은 늙은 개의 미소”는 모두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의 공간 속에서 “천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탈경계의 세계에서 “지퍼가 열리듯이 봄 길 환히 열리고 있다”는 결구는 의미심장하고 아름답다. 이 세계는 빈부, 귀천, 남녀, 종족, 세대, 지역 등에 따라 경계의 벽으로 인한 갈등과 비극이 사라진 세계이다. 이것은 절대적 아름다움의 세계 혹은 시적 유토피아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시적 유토피아를 향한 김왕노 시인의 푸른 고집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다.그 고집은 “보이지는 않으나 한때는 아우성이 들끓던 허공 궁전은/모국어로 부르는 내 노래에 화답해/하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는 우레 소리를 들려줄 것”(「허공 궁전」)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듣고자 하는 “우레 소리”는 비루한 현실세계를 버리고 심미의 세계를 얻는 데서 오는 시적 희열의 순간, 즉 에피파니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저 까마득한 허공은 빈 것이 아니다/곤줄박이의 울음과 할미새의 울음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짜여 있다/내 가슴에서 나부끼는 노래는 다 허공에서 얻었다”(「위의 시」)는 시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때 “허공”은 현실의 논리로 보면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시의 감성으로 보면 “빈 것이 아니”라 “궁전”만큼이나 소중한 것들로 가득 차있는 곳이다. 이러한 “허공 궁전”에 대한 믿음은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역설의 세계, 즉 시의 세계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다르지 않다. “허공 궁전”을 향한 이 고집스런 믿음, 이것은 시적인, 너무도 시적인 믿음이어서 믿음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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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좋은 시는 깊은 미궁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독자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그 미궁의 근원을 찾아가면서 현란한 환희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시를 만나면 눈이 환하게 밝아진다. 김왕노 작품들 속에서 그런 시편들을 만난다.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이라는 표제의 시를 한 편 보기로 한다.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할머니가 백 년 복사꽃 아래로 간다” 이 시의 첫 2행은 퍽 돌발적이면서도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에서 이런 ‘익살’의 근원이 드러난다. 유모차에 실린 것이 유아가 아니라 “늙은 개”이며 늙은 개를 “모시고” 할머니가 꽃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의 서두가 의미론적 변용을 겪는다. 그리고 이런 의미론적 변용은 뒤에 보이는 “신라의 수막새에 그려진 천년 미소”와 이어지면서 전후의 맥락이 아주 너른 함축을 지니게 된다. 늙은 개를 모시고 가는 할머니의 골계 풍경은 신라 천년의 수막새의 웃음과도 치환되는 것이다. 할머니에게서 보이는 ‘익살’이 천년의 시간을 거술러 가서 천년 전 “수막새”의 웃음과 합일된다. 천년의 시간과 풍상을 한 편의 시 속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은 퍽 귀한 것이다. 김왕노의 시편들이 보여 주는 깊은 인식과 견고한 구조력에 놀란다. 시집 간행을 축하하며 한국시사에 확연한 개성을 이뤄주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 이건청. 한국시인협회 평의원, 한양대 명예 교수
조선후기 판소리 팔 대 명창 가운데 한 분이 주덕기이다. 그의 별호는 벌목정정伐木丁丁이었으니 소리를 익히던 그의 정성과 장함이 이와 같았다는 뜻이리라. 시단에서 김왕노의 시가 바로 벌목정정의 그것이다. 좌충우돌 진창의 이미지를 힘차게 헤쳐 나아 창랑滄浪에 이르는 그의 시편들은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그가 내리찍는 이미지들은 살아서 꿈틀대며 도망을 가다가 다시 붙들려 와 선연한 상처를 남긴 채 문자화된다. 그 모든 상황을 그의 시를 빌려 말하면 “단숨의 사랑”이라 할 것이다. 그 “단숨”을 영원으로 끌고 가려는 지고지순하면서도 철없는 김왕노의 시편들이 ‘감감감 북을 치며(坎坎鼓我) 덩실덩실 춤을 추는(舞我)’ 지경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사람을 벌처럼 불러 모아 술을 한잔 내시라
- 우대식. 시인, 숭실대 국문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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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시인∥
∙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말달리자 아버지(문광부 지정도서)』『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위독(박인환문학상 수상작)』『사진속의 바다(해양문학상 수상집)』『그리운 파란만장(세종도서선정)』
∙디카시집 『게릴라』『이별 그 후의 날들』등이 있음
∙ 제8회.한국해양문학대상, 제7회.박인환문학상, 제3회.지리산문학상, 제2회.디카시작품상, 제4회 수원시문학대상, 제24회.한성기문학상, 2018년.올해의좋은시상(웹진시인광장) 수상
∙ 현대시학회 화장. 글발단장. 현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시와경계』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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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김왕노 시인의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이 시작시인선 301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1992년《매일신문》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시집으로『슬픔도 진화한다』『말달리자 아버지』『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위독』『사진 속의 바다』『그리운 파란만장』 디카 시집 『게릴라』 『이별 그 후의 날들』 등이 있다. 시인은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가 주조主潮를 이루는 시편들을 발표하면서 충일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확립하였고 문단으로부터 그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아 제8회 한국해양문학대상, 제7회 박인환문학상, 제3회 지리산 문학상, 제2회 디카시 작품상, 제4회 수원시문학대상, 제24회 한성기 문학상, 2018년 올해의좋은시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은 저자가 시인의 말에서 밝혔듯이 “천년 우물물 같은 푸른 시로 채우는 고집”의 결실이다. 시인은 스스로를 고집쟁이라고 말하지만 그 고집이 ‘푸른 고집’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호기심과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고집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이전 시집들에서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를 시적 상상력으로 승화시켜 우리를 문학적 감동이 범람하는 시의 장으로 초대한 바 있는데, 이는 시인이 노래하는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가 일반적 문법이나 감상적 정념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인생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사랑이라는 주제는 우주 만물에 대한 통찰에 도달하기 위한 인식론적 매개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그의 시에서 사랑은 시적 자의식의 차원으로까지 깊어지는 면모를 보이면서 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더불어 김왕노 시의 기저에는 세상을 향한 비판적 결기와 분노가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번 시집에서 간혹 거친 언어와 직정적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시인이 추구하는 “푸른 시”의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해설을 쓴 이형권 시인의 말을 빌리면 시인이 늘 “푸른 시”를 고집하는 이유는 “푸름을 상실하고, 문명의 이기와 속악한 욕망으로 갈변된 곳”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표4를 쓴 이건청(한국시인협회 평의원, 한양대 명예 교수)은 이번 시집에 대하여 “좋은 시는 깊은 미궁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독자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그 미궁의 근원을 찾아가면서 현란한 환희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김왕노의 작품들 속에서 그런 시편들을 만난다”라고 평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김왕노 시에서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가 하나의 의미체계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갈래로 의미망을 확장시켜 나간다는 점을 환기시켜 준다. 요컨대 시인은 시를 통해 비루한 현실 세계를 버리고 심미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며, 누구보다 시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이를 실현시키고자 한다. 이를 “시적인 믿음”이라 부른다면, 해설의 말처럼 그의 시가 “시적인, 너무도 시적인 믿음”이어서 믿음직스러우며, “시적 유토피아를 향한 김왕노 시인의 푸른 고집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다.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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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Puccini, Opera 'Tosca' (Vissi d'arte, vissi d'amore)
Giacomo Puccini 1858∼1924
*출처: 관악산의 추억(http://cafe.daum.net/e8853/KVTB/1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