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녘글밭] 02월 02(금) '황병기의 미궁에 빠져'
엊그제인 1월 31일, 황병기 가야금 명인이 숨을 거두 셨읍니다.
많은 님들은 돌아가신 님에 대하여 아쉬움을 넘어 아름다운 추억을 들려 주십니다.
그 중의 한 분이신 김희선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님은 선생님을 이렇게 추억합니다.
‘창작국악의 길과 국악의 세계화를 열어주셨다’
‘국악계에서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여는 개척자의 역할을 하셨다’
‘특히 전통 안에만 남아 있던 국악을 동시대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시다’라고요.
이런 선생님은 1936년 5월 31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삼대 독자로 태어 나셨읍니다.
어려서부터 엄한 가풍으로 외갓집 아저씨를 모셔와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 졌읍니다.
바로 김소열이라는 님이십니다.
이 님은 어린 병기에게 공부하는 법을 알려 주셨다고 합니다.
스스로 탐구하는 즐거움에 빠져 깨달음에 긍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고 하네요.
선생님이 가야금을 만난 것은 16살 때인 1951년, 전쟁으로 부산에 피란을 갔을 때입니다.
천막으로 만들어 놓은 경기중학교 3학년에 다닐 때였다고 하네요.
가까운 곳에 가야금을 타는 노인이 사셨는데 그 노인의 가야금 소리를 듣고
마치 홀린 것처럼 가야금을 배울 작정을 하셨고 합니다.
바로 고전무용연구소의 김동민 선생님이십니다.
그 후 부산에 국립국악원이 세워져 김영윤 선생님께 배우게 됩니다.
그 후 김윤덕 명인에게 장남희제 가야금 산조를 익혔으며
김병호, 심상건, 함동정월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꾸준히 배웁니다.
부모님의 희망, 그 때의 삶 터를 외면 할 수 없어 서울대 법대를 입학합니다.
하지만 가야금은 황병기를 놓아 주지 않았읍니다.
법대 3학년 때에 KBS가 주최한 전국 국악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1959년, 우리나라 처음으로 서울대 음대에 국악과가 만들어 졌는데 이 때가 졸업을 할 때입니다.
이 때에 강사로 가야금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다른 여러 일을 같이 했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 후 한양대, 이화여대에 차례로 국악과가 만들어 지고 마침내 1974년,
이화여대에 교수직을 맡으면서 가야금에 매달릴 수 있었다고 하네요.
선생님은 가야금 연주자로, 국악 작곡가로 큰 발자국을 남겼읍니다.
선생님이 남긴 가야금 창작곡으로는 1963년에 숲, 1974년에 침향무, 1977년에 비단길,
1979년에 미궁 등이 있읍니다.
님은 삶과 죽음을 넘어 너무 좋아 한다는 채근담에 있는 이 말씀을 남기시고 홀연히 가셨읍니다.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불어오면 대나무가 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바람은 아무 소리도 남기지 않는다.
달밤에 기러기가 호수을 지나가면 그림자가 호수 위를 지나 간다.
하지만 기러기가 지나가고 나면 호수는 그림자를 담지 않는다.
금요일 새벽, ‘미궁’에 빠져 먼 발치에서 나마 선생님을 그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