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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7. 묵상글 ( 연중 제16주일 목요일. - 허락되지 않은 저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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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7. 연중 제16주일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허락되지 않은 저들
어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말인데 이것은
하느님의 엄청난 차별이고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 되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어지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들”이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감각이 불능상태이고 마비 상태인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하늘나라에 대한 감각이 불능이거나 마비 상태인 이유는,
저들에게는 영적인 감각이 없기 때문이고 이 세상 감각만 있기 때문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육신의 두 눈 외에 제삼의 눈으로 ‘Eye of Wisdom’
곧 ‘지혜의 눈’ 또는 ‘혜안’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을 일컬어
‘저 사람 참 혜안이 있다.’라고 흔히 얘기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불교의 혜안과 같이 영안에 관해 말씀하시고,
이 영안이 있어야 하늘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떤 사람이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고,
어떤 사람이 영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을 바꿔서 얘기하면 본다는 사람에게는 보여주시지 않고,
보여주십사고 청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며,
슬기롭다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저는 철부지여서 잘 모릅니다.’라고 하는 사람에겐 보여주신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실로 안다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 알 뿐,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음을 알지 못하고,
특히 하늘나라의 신비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은 정작 알아야 할 것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고,
사실 하늘나라 신비와 비교하면 몰라도 되는 것들뿐입니다.
몰라도 되는 세상 것은 잘 알고 잘 보지만
정작 봐야 할 하느님 나라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영적 감각을 살아나게 하고,
교만은 영적 감각을 마비되게 하는 것임을 겸손하게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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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7. 연중 제16주일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고 가르치신 것이 “하늘나라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대한 것을 땅에서 가르치셨으니,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의 낯익은 사물이나 상황으로 예를 들어 쉽게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지 않고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마태 13,34)라고 할 정도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하고 여쭙자,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3,11)
참 이상한 일입니다.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는 군중들에게 하늘나라를 주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없는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의 신비”가 모두에게 가려져 있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곧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그 “신비”를 아는 일이 허락되어 있고, 반면에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 은혜를 거역하기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이는 마치 불공평한 처사처럼 여겨집니다. ‘가진 것을 나누어 아무도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사도 4,34)는 초대교회의 모습에 견주어보아도 너무도 빗나간 처사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공평한 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고 기적을 보여주시지만,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탤런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마태 25,28-29 참조),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에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 밝히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이사 6,9-10)
위의 두 번째 문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어가 “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로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원하지 않고 거부한 완고함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완고한 마음을 주신 것(탈출 4,21)이 이집트인들에게 당신이 ‘하느님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셨듯이(탈출 14,4.18).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백성의 눈과 귀를 닫는 것은 ‘진정한 하느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이는 이미 온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듣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믿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주님!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주시어
하늘나라의 신비를 제 눈이 볼 수 있고, 제 귀가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오늘도 도처에, 그리고 제 안에 벌어진 당신 사랑을 찬양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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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7. 연중 제16주일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속뜻을 헤아리는 지혜
세상 것에 눈이 밝으면 영적인 것을 놓칩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두면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왕이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영원히 귀한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는 중복장애인으로 살았던 헬렌겔러는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과 나의 일과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육을 넘어 영혼의 맑은 눈과 귀를 가졌습니다. 우리도 영을 갈망하는 가운데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에둘러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고, 때로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 편합니다.
상처받고 아파할 사람은 그만큼 관계의 형성이 덜 되었으니 비유가 편할 것이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이에게는 직접 얘기해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더 많은 사고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면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이 외에는 다른 이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이에게 비유로 말씀하시어 깨닫게 하시고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에게는 바로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듣느냐? 말과 표상을 통해 제시되는 실재를 파악하느냐는 분명 다릅니다. 분명 믿는 이들은 속뜻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 입맛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드러난 사실과 사실 안에 들어 있는 진실은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자로(子路)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염유(冉有)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公西華)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 대답하시되,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서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서 물러서게 하였다.’(論語-先進)” 비유를 통해서 진실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에 눈뜨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먹고 싶은 것만 먹음으로써 병을 만듭니다. 마음이 무디고 건성으로 보고 듣는 사람은 결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비유는 넘치는 풍요로움을 담고 있습니다. 풍요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능력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진정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은 보고 들은 것을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속뜻을 알았으면 뜻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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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7. 연중 제16주일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크루즈 여행 중에 ‘One Day More’라는 쇼를 보았습니다. 유명한 뮤지컬의 절정 부분을 모아서 공연하였습니다. “레미제라블, 팬텀오페라, 시카고, 미스사이공, 위키드‘와 같은 뮤지컬의 귀에 익숙한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화려한 무대와 멋진 의상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저도 오페라는 볼 기회가 없었는데 뮤지컬은 관심이 있어서 몇 번 보았습니다.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시카고, 미스사이공, 아이다, 팬텀오페라, 위키드, 라만차의 사나이, 알라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명성왕후, 몽유도원도, 광화문연가’와 같은 뮤지컬을 보았습니다. 뮤지컬의 본고장인 뉴욕에 살기 때문에 손님들이 오면 가끔 브로드웨이로 가서 뮤지컬을 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의 삶에 보는 것이 무척 많습니다. ‘영화, 연극, 뮤지컬, 오페라, 음악회’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여행을 가는 것도, 순례를 가는 것도 대부분 보는 것입니다.
저의 32년 사제생활을 뮤지컬로 만든다면 어느 부분을 만들까 생각해 봅니다. 8년간의 보좌신부 시절은 ‘질풍노도’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젊음의 패기와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기도와 성찰보다는 무모한 도전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8년간의 본당신부 시절은 ‘안정과 성숙’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결과를 볼 수 있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8년간의 교구청 시절은 ‘연대와 화합’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성가에 나오는 것처럼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은 기쁨입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처럼 동료 사제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8년간의 외국생활은 ‘다름’을 받아들이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지내면서 고정된 관념과 틀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One Day More’라는 말처럼 하루하루가 모여서 32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의 시대가 열리면서 저는 매일의 묵상을 통해 저 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의 묵상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그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사건은 창조의 시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는 시간이 있습니다.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시간이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입니다. 우리가 십계명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면 하느님과 함께 지낼 수 있고,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보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으로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가장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고, 가장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고, 가장 아픈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영어로 본다는 단어는 ‘See, Look, Watch’가 있습니다. 보인다고 할 때는 Se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수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검토하다, 살펴본다고 할 때는 Look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주의 깊게 한참을 본다고 할 때는 Watch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저는 본다는 것에도 3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목안(目眼)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은 심안(心眼)입니다. 신앙으로 보는 것은 신안(信眼)입니다. 눈으로 보아서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참된 진리를 얻기 어렵습니다. 마음으로 보아서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와 부활을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믿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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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7. 연중 제16주일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스승님은 왜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이 말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비유로 하지 마시고 조금 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면 우리가 더욱 잘 알아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비유로 해야지만 그들이 못 알아듣는다.’라고 말입니다. 알아듣는 사람과 못 알아듣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직선적으로 ‘너는 돌밭이다. 너는 가시덤불 밭이다.’라고 하셨다면 그 안에는 심판이 있을 뿐이지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심어 주려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비유는 그 자체로 희망을 품으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지금은 그럴지 모르지만 앞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변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희망을 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의 눈과 귀는 행복하다.”라고 말입니다. 행복의 이유는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비유로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이웃을 통해 가족을 통해 공동체를 통해 들려주십니다.
그 비유는 이제 우리가 해석해야 합니다. 이웃을 통해 내게 무슨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인지, 내 가족을 통해, 내 공동체를 통해 내게 무슨 말씀을 들려주시는지 우리는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즉 “깨어 기도하라.”라는 말씀의 근본정신일 것입니다.
사랑니
치과 좋아하시나요?
얼마 전 치과에 다녀왔습니다.
일 년에 한번, 스케일링하는 날이었습니다.
스케일링도 스케일링이지만
사실 요즘 이가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이것저것 물으러 간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니를 빼야 할 것 같습니다. 원인은 모두 거기서 오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아픔과 고통의 원인은 반듯이 존재합니다.
이름은 사랑니인데….
고통과 아픔의 원인이 바로 사랑니랍니다.
압니다. 사랑은 고통과 아픔을 수반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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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7. 연중 제16주일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초등학교 1학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종이에 사람을 그리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며 종이를 구겨보세요. 이제 좋은 말을 하며 종이를 다시 펼치세요. 어때요? 구겨졌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죠? 그래요. 나쁜 말을 하고 나면 나중에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답니다. 그러니까 친구한테 나쁜 말을 하면 안 되겠지요?”
아이들은 이 말을 듣고서 친구한테 나쁜 말을 쓰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로만 “친구한테 나쁜 말 하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냥 듣기만 하고 반대쪽 귀로 흘려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런 예는 아이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말이 아닙니다. 어른 역시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구겨졌던 흔적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나쁜 말과 행동을 통해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흔적은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서 이야기해주는 것과 그냥 서술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특히 상대방이 말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또 상대방이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예를 들어서 쉽게 설멍합니다. 특히 사랑한다면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손길이 이러했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가장 쉬운 비유 말씀을 통해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일상 삶 안에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쉬운 일상의 비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곧바로 알아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만이 구원의 대상이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가 구원되기를 원하십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주님의 이 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나의 이웃에게 사랑을 전해야 하며, 내가 깨달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 신비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할까요? 나쁜 흔적, 상처 되는 흔적이 아닌,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흔적을 만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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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천국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로버트 브라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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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7. 연중 제16주일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의, 회개의, 깨달음의 여정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파스카 예수님뿐이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동방그리스도교 영성을 공부하면서 크게 배우고 깨달아 강론에 자주 인용하는 주제가 마음의 병인 무지(ignorance)와 자기인식(self-knowledge)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해 참 많이 나눴습니다. 무지의 탐욕, 무지의 교만, 무지의 분노, 무지의 전쟁, 무지의 두려움, 무지의 불안, 무지의 허영, 무지의 태만, 무지의 어리석음등 무지한 인간, 인간의 정의라할 만큼 우리의 실존적 체험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계속 반복되는 무지한 인간의 죄요 악행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무지한 인간에 대한 묘사입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래서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이라 하는 것이며 궁극의 책임은 본인에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강조하는 회개요 깨달음이요 개안인 것입니다. 동방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소개하는 마음의 병에 대한 공부가 깊고 재미있습니다. 언젠가 나눴지만 다시 나눕니다. 우리는 자주 잊어 버리는 망각의 동물이기에 반복하여 기억하는 것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적은 마음의 병은 하느님께 대한 마음의 무지(ignorance)이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가 근원적 마음의 병이다. 다음은 무지와 관련된 병이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forgetullness)이다. 다음은 마음의 딱딱함(hardness) 또는 단단함(toughness)이다. 또 다른 두가지는 눈멈(blindness)과 오염(contamination)이다.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고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할 수 없는데 이것이 눈멈이요 오염이다. 다음은 경솔(imprudence)이다. 마음은 어리석음으로 고통을 받는다. 모든 마음의 병들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인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이 정말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참으로 겸손이요 지혜요 우리 인생은 무지에서 벗어나 자기를 알아가는 자기인식의 평생훈련, 평생공부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은 회개의 은총,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여정과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개안의 기쁨을, 놀라움을 노래한 고백기도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이래서 평생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개안을 회개를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는 무지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평생 훈련하고 공부해도 여전히 남아있을 무지의 어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계속 평생 훈련하고 공부해야할 하느님 공부, 나를 아는 공부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공부가 빠진, 지혜가 빠진 지식을 쌓아가는 세상 공부들 다 헛 공부입니다. 이상한 괴물이, 잔인한 야수가, 무기력한 중독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오늘 길을 잃고 해매는 교육의 난맥상亂脈相도 바로 여기 기인합니다. 옛 동서방의 공통된 참공부는, 평생공부는 참사람이 성인이 군자가 되는 공부였습니다. 인문학 공부는 사라져가고 실용학 공부가 대세가 된 무지한 교육 현실입니다.
평생 하느님 은총과 함께 가야 할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평생 훈련이요 평생 공부입니다. 인생 광야 여정,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하느님을 알아가고 자기를 알아가면 성인이지만 하느님을 잊고 자기를 잊으면 괴물도 되고 폐인도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 하여 다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은 무지가 아니라 말씀이자 사랑이라 함이 맞습니다. 무지를 깨우쳐 주기 위한 성서의 말씀 공부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늘 나라의 비유들입니다. 참행복은, 참자유는, 참평화는, 참기쁨은 무지의 어둠에서 해방되어 빛이자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 때입니다. 바로 이런 우리를 향한 주님의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정화와 성화의 변화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진리를 가르쳐 주는 오늘 탈출기입니다. 모세와 백성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엄한 순간에 대한 묘사입니다.
-“백성에게 가거라.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 셋째 날을 준비하게 하여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모세가 백성을 진영에서 데리고 나오자 그들은 산기슭에 섰다. 주님께서 시나이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셨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모세를 그 산봉우리로 부르셨다.-
주님의 집인 요셉수도원에 사는 우리 수도자들과 매일 미사에 참석하는 형제자매들 오늘 탈출기의 모세와 백성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산, 불암산 기슭 주님의 성전에서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 바로 이것이 전례의 궁극 목표입니다.
제가 늘 감탄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전례요 우리 수도원의 일과표입니다. 말그대로 무지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게 하는 기도와 노동과 공부가 균형과 조화를 갖춘 회개의 시스템, 깨달음의 시스템, 개안의 시스템같은 일과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또한 평생 하루하루 부단한 선택과 훈련과 습관을 목표로 합니다. 개안을, 회개를, 깨달음을, 주님을 선택하고 훈련하고 습관화하여 날로 주님과의 일치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단 하나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과 함께 가는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무지의 병에 대한 결정적 예방제이자 치유제임을 깨닫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마태11,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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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7. 연중 제16주일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에게 달린 겁니다>
볼 수 없는 눈은
어떻게든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은
무엇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들을 수 없는 귀는
어떻게든 들을 수 있지만
듣지 않는 귀는
무엇으로도 들을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입은
어떻게든 말할 수 있지만
말하지 않는 입은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습니다
건넬 수 없는 손은
어떻게든 건넬 수 있지만
건네지 않는 손은
무엇으로도 건넬 수 없습니다
갈 수 없는 발은
어떻게든 갈 수 있지만
가지 않는 발은
무엇으로도 갈 수 없습니다
품을 수 없는 마음은
어떻게든 품을 수 있지만
품지 않는 마음은
무엇으로도 품을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는 나는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나는
무엇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될 수 없는 나는
어떻게든 될 수 있지만
되지 않는 나는
무엇으로도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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