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민주화운동](10)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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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민주화운동](10)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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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민주화운동](10)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경향신문 입력 : 2003-06-22 18:24:31
“우리는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과 소명을 믿는다”.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이 낳은 가장 큰 결실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출범하면서 발표한 성명서 ‘제1시국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1974년 9월26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순교자 찬미 기도회’에서 사제단은 단순히 지학순 석방만을 요구한 게 아니라, 유신정권을 반대하고 민주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기로 집단적으로 결의하였다. 교회는 “기본권이 짓밟히고 침해당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피해자가 누구이든 그의 편에 서서 그를 대변하면서 유린당한 그의 권리를 회복해 주기 위하여 가해자와 침해자가 누구이든 그를 거슬러 항변하고 저항하고 투쟁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고 밝혔다.
74년 7월23일 지학순이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구속되자, 전세계 천주교회는 ‘주교 구속’이라는 사실에 먼저 놀랐다. 프랑스와 벨기에 대사가 외무장관 김동조를 만나서 지학순과 민청학련 관계자들의 선처를 바란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교황청도 8월6일 “이 재판이 공정한 해결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정작 한국교회 주교단의 입장은 상당히 애매하였다. 지학순 구속 직후인 7월25일 주교단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8월6일 주교단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성명서를 발표한 뒤로 이렇다 할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교구장 주교의 구속에 몸 닳아하던 신부 신현봉은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석방운동을 호소하였고, 마침 서울에서 유학 준비를 하던 신부 최기식은 거처를 아예 명동에 있던 가톨릭출판사로 옮겨 신현봉과 보조를 맞추었다. 또한 원주교구에서 활동하던 골롬반회 소속 외국인 선교사들도 지학순이 석방될 때까지 이발과 면도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 과정 중에 최기식과 연배가 비슷한 서울대교구 신부들이 합류했다. 로마 울바노 신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함세웅과 김택암·양홍·오태순·안충석·장덕필 등이 그들이었다. 지학순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국기도회가 전국을 순회하며 진행되었고 인천교구의 김병상·황상근, 전주교구의 문정현, 수원교구의 장덕호, 대전교구의 이계창, 부산교구의 송기인, 안동교구의 류강하·정호경 등이 열심이었다.
한편 감옥에 갇혀 있던 지학순은 자신이 책임을 맡고 있던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를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정의평화위원회는 이름만 있을 뿐 조직도 체계도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지학순은 책임자로 신부 박상래를 정하고, 거친 갱지에 정의평화위원회의 정관을 써서 비밀리에 감옥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에서 그런 공식적인 기구를 통해 일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고,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결국 8월29일 서울대교구의 사제 23명이 명동성당 사제관에 모여 지학순 사건에 대한 공식 태도를 결정하고, 주교단에 명확한 입장을 밝혀달라고 건의한 뒤 공동행동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그 결실은 9월23일 원주에서 맺어졌다. 9월26일 서울에서 열릴 순교자 찬미 기도회에 앞서 미리 23일 원주에서 열린 성직자 세미나에는 300여명의 사제들이 참석하였다. 당시 한국인 평사제가 모두 639명이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전국의 웬만한 신부들은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결성을 합의하고 인권회복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사제단 이름의 첫 기도회를 다음날 원주교구 원동성당에서 갖기로 했다.
원동성당 기도회에서 사제들은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시국기도회에선 없었던 일이다. 71년 지학순이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할 때 가두로 진출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원주에서 기도회 진행을 실무적으로 맡고 있던 장일순과 김영주 등은 가두시위가 오히려 지학순의 석방을 더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정작 수백명의 젊은 신부들은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밀어붙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결국 원주시청을 지나 로터리까지 시내를 한 바퀴 돌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틀 뒤인 9월26일 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주교 황민성의 집전으로 순교자 찬미 기도회를 열고,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을 전면에 내건 제1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사제들은 명동파출소 앞까지 시위를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신현봉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사제단은 연이어 제2시국선언(11·6), 사회정의 실천선언(11·20)을 발표하였는데, “어떤 기존 정권도 하느님 나라의 이름과 기준에 따라 비판받아야 하며 여기에는 그 합법성 여부는 고사하고라도 어떠한 민주정권도 면제될 수 없다”고 함으로써 교회가 공식적인 유신 반대운동에 나섰음을 만천하에 밝혔다.
사제단은 공식적인 대표도 없고 회원 명단도 따로 없는 유기적이며 자발적인 결사였다. 중심을 이루었던 젊은 신부들은 열살 정도 나이가 많았던 신현봉을 대표격으로 여겼다. 정치적 사안은 서울지역, 특히 명동성당을 무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가톨릭신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함세웅과 서울대교구의 동료 신부들이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사제단 소속 신부들은 74년 12월25일에 결성된 전국적 규모의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국민회의는 71명의 종교계·학계·언론계·재야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는 김택암·박상래·신현봉·양홍·함세웅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부 윤형중이 상임대표를 맡았고 함세웅이 대변인으로 일했다. 75년 1월6일 윤형중은 연두 기자회견을 열어 마침내 박정희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1월9일 사제단은 80여명의 성직자와 2,000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권과 민주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갖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지난 한해 동안 암흑 속의 횃불을 높이 들고 우리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이 땅에서의 인간회복을 위해 애타게 기도해 왔고 목메어 외쳐 왔다. (…)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집권자에 의해 유린되었고, 진리와 양심을 외면하고 거역하는 집권자의 죄악은 오히려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 하느님의 말씀은 거부되고 독재자의 말은 신성시되며, 교회는 감시당하고 독재권력은 성역화되며 신앙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박해받고 권력자의 폭력은 난무하고 있다. (…) 하느님의 말씀은 왜곡되었으며 인간의 보편적 양심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여 권력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박정희는 74년 10월1일 국군의 날 치사를 통해 ‘환상적 낭만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어 11월19일에는 김종필이 한국기독교실업인회에서 주최한 ‘국무총리를 위한 기도회’에서 로마서 13장을 인용하여 “교회는 정부에 순종해야 하며 정부는 하느님이 인정한 것”이라고 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그리스도교인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하겠다고 윽박질렀다. 75년 2월 박정희가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하려고 했을 때 사제단이 거부운동을 벌이자, 2월7일 문화공보부 장관 이원경은 담화를 통해 “최근 일부 종교인들이 종교 본연의 위치를 벗어나 정치활동에까지 지나치게 관여하고 법질서를 혼란시켜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언행을 거듭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한편 국민투표가 끝나고 지학순이 석방되자, 천주교 주교단은 춘계 주교회의를 갖고 2월28일 메시지를 발표하여 “이제 정부가 긴급조치를 폐지하고 구속인사들을 석방하고 폭넓은 대화를 모색”하고 있으니, “교회도 교회 나름대로 그 동안의 행동을 반성하고 앞으로 유사한 사태에 대처할 자세를 정립함으로써 교회 안의 일치를 도모하고 외부로부터 오해를 제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요컨대 앞으로 정치참여는 사제단이 아니라 주교단과 주교단 산하의 정의평화위원회에 맡겨두라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사제단의 활동이 본격화하면서 민주화를 염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비신자 가리지 않고 성당에 모여들었지만, 한편으로 이런 움직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주교단은 그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그러나 사제단은 이미 교권 수호 차원에서 지학순 석방운동을 하던 성직자들이 아니었다. 기도회를 하기 전에 주기적으로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시국에 대한 강의를 듣고 토론하면서 어둠 속에 갇힌 진실을 발굴하는 광부로서, 현실문제에 몽매했던 터널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민주회복을 외치는 동안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을 만났으며, 사회변혁을 교회의 일차적 사명으로 깨달았다. 그들은 성탄절 때 달랑거리는 자선 냄비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 스스로 해방하는 교회가 되기를 자청했던 것이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진실 밝히는데 큰공헌
인권 회복과 사회정의 실현을 목표로 일어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내년 창립 30돌을 맞는다. 인간의 기본권이 짓밟히던 암울한 시대에 굴하지 않고 올곧은 소리를 외쳐온 사제단은 그동안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환경운동 등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 왔다.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한 사제단의 시국미사와 성명서 발표 등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사제단은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크게 공헌했다.
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수사를 받던 도중 사망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당국은 경찰관 2명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고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구치소에 수감된 해당 경찰관들은 자신들만 처벌되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했고 이 이야기가 같은 곳에 수감된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 이부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부영은 이같은 내용을 담은 쪽지를 밖으로 내보냈고 결국 5월18일 사제단은 당국의 사건 축소·은폐 사실을 폭로했다. 사제단의 폭로에 국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으며 이것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사제단은 명확한 회칙이나 강령이 없이 사제들의 자발적 참여를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회원 가입과 탈퇴의 형식적 절차가 없기 때문에 사제단 회원은 ‘명시적 회원’이 아닌 ‘잠재적 회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제단은 결성 당시 300여명으로 시작하여 70~80년대 활동을 통해 400~450명 정도로 늘었지만 80년대 후반 시민사회의 성장과 가톨릭 교회의 보수화 등으로 인해 다소 감소한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문규현 신부가 대표를 맡고 있는 사제단은 14개 교구별 대표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와 상임위원회에서 의사를 결정한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이영진(시인)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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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종합기획부(02-3701-1156~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46)
[출처] [실록민주화운동](10)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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