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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불언(桃李不言)
복숭아 자두나무는 말을 하지 않는다, 덕이 있으면 사람이 모여 든다.
桃 : 복숭아 도(木/6)
李 : 오얏 리(木/3)
不 : 아닐 불(一/3)
言 : 말씀 언(言/0)
복숭아나무와 오얏, 요즘의 자두나무는 그 열매나 꽃이 아름다워 합쳐 말한 도리(桃李)로 자주 쓴다. 시에도 자주 인용됐다. 백낙천(白樂天)의 장한가(長恨歌)에는 봄바람 산들 불어 복사꽃 오얏꽃 피는 밤(春風桃李花開夜)에는 그리움이 더욱 사무친다고 했다.
남이 천거한 어진 사람이나 사제지간의 뜻도 있다. 도리만문(桃李滿門)이라 하면 재주나 풍모가 뛰어난 제자가 문하에 가득하다는 이야기다.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桃李)는 말을 하지 않는다(不言)는 뜻의 이 성어는 뒤에 하자성혜(下自成蹊)라는 말이 따라야 완전한 뜻을 이룬다. 이들 나무의 아래에는 길이 저절로 생긴다는 뜻이다. 성혜(成蹊)라고 줄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복숭아꽃과 자두꽃은 매우 아름다워 오라고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투어 찾아오게 되므로 그 아래에 길이 저절로 생겨난다. 덕이 있는 사람은 조용히 있어도 사람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따르게 된다는 뜻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떠벌리지 않고 꾸준히 갈 길만 가는 것을 일컫기도 한다. 이 성어는 사기(史記)의 이장군(李將軍) 열전이나 한서(漢書)의 이광소건전(李廣蘇建傳) 등에 예부터 내려오는 말이라며 이광(李廣) 장군을 평가하는데 썼다.
전한(前漢) 초기의 장수 이광(李廣)은 말타기와 활쏘기에 출중한 재능을 지녀 바위를 호랑이로 알고 쏘았더니 화살이 박혔더라는 중석몰족(中石沒鏃)의 주인공이다. 또 이광은 변방의 흉노(匈奴)가 침입할 때 70여 차례나 물리쳐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리며 두려워했다.
인품도 훌륭해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눌변(訥辯)인데다 조정에 줄도 없어 중용되지 못하던 중 대장군 위청(衛靑)의 핍박으로 자결하고 만다.
사마천(司馬遷)은 그를 가리켜 ‘몸이 바르면 영을 내리지 않아도 실행되고, 몸이 바르지 못하면 영을 내려도 따르지 않는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면서 속담에 이르기를 ‘복숭아와 오얏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래 저절로 길이 생긴다(桃李不言 下自成蹊)’고 높이 기렸다.
돈이나 권력이 있을 때는 그 집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 그러나 그것을 잃고 나면 사람들이 썰물같이 빠져나가 휑하게 된다. 세태를 탓하기 쉽지만 잘 나갈 때 어떤 몸가짐이었는지 생각해야 한다. 덕으로 사람들을 대했다면 그 집 앞의 길은 계속 붐빌 것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 집에 많은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 여겼다. 공자는 인(仁)을 설명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이 대하고, 담당하는 모든 일을 중요한 제사를 받들 듯이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상을 모시는 제사와 손님을 맞는 일을 동격으로 다루고 있는 것만 보아도 손님이 갖는 의미를 잘 알 수 있으리라.
논어(論語)에 나오는 먼 곳에서 친구들이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말도 연관되어 있다. 이미 친구인 사람만 오는 게 아니라 이전에는 친구가 아니었으나 찾아와 교류를 한 이후 친구가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가 눈과 귀로 확인한 후 실망하지 않고 결국 친구가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기쁜 일인가.
향기에 끌려 나무 아래로 모여들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 떠날 줄 모른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은 꽃나무의 친구가 된다. 모이라고 소리 지르고 압박하고 명령하거나 교묘히 꼬드겨 모여들게 하는 것은 동원(動員)이지 자원방래(自遠方來)가 아니다. 또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은 친구가 되지 않는다. 친구가 되지 않으면 큰일을 이뤄낼 수도 없다.
먼 곳이란 지리적 거리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생각의 거리, 신분의 거리, 재산의 거리도 포함된다. 가난하고 가방 끈이 짧으며 초라한 사람까지도 곁으로 다가오게 만들어야 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만 잔뜩 모여드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민담(民譚)을 보면 큰 부자였다가 망한 집안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런 이야기에는 하나의 코드가 존재하는데 그게 바로 손님맞이에 관한 것이다. 시주를 온 스님을 주인이 박대하여 돌려보내거나 손님치레에 힘겨워하던 하인들이 주인의 명을 어기고 손님들을 박대하여 찾아오는 손님이 점점 줄었다거나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더니 결국 망했다는 게 결론이다.
내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말 없는 가르침
중국 한나라 초기의 명장 이광(李廣)은 말타기와 활쏘기의 명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를 거쳐 무제(武帝)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평생을 흉노와 전쟁을 치른 역전의 맹장이었다. 흉노는 이광의 용맹함과 지략을 두려워했고, 한나라 병사들은 누구나 명망 높은 이광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길 희망했다.
이광은 솔직담백했다. 자신이 받은 상은 모두 부하들에게 나눠주며 병사들과 함께 먹고 잤다. 40년 동안 여러 자리를 전전했지만, 평생 재산 따위를 모으는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아 재산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행군 중에 병사들이 모두 물을 마시기 전에는 물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병사들이 모두 먹지 않으면 밥 한술 입에 넣지 않았다. 병사들에게는 가혹하지 않고 너그럽게 대했다. 그는 말재주도 없고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병사들은 기꺼이 그의 명령에 따랐고 그를 존경했다.
그는 60이 넘는 고령을 무릅쓰고 흉노와의 전투에 참가했다가 수세에 몰렸고, 이 때문에 정치군인들의 박해를 받고는 끝내 자살하고 말았다. 당시 모든 장수와 병사는 비통하게 울부짖었고, 이 소식을 들은 일반 백성도 슬픔을 참지 못했다.
사마천은 사기(권 109) 이장군 열전에서 이광의 일생을 소개한 다음, 맨 마지막에 이런 평가를 덧붙였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자기 몸이 바르면 명하지 않아도 시행되며, 자기 몸이 바르지 못하면 명을 내려도 따르지 않는다(논어 자로편)고 한다. 이는 이광 장군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내가 이 장군을 본 적이 있는데, 성격이 소박해 촌사람처럼 말도 잘 못 했다. 그가 죽자 천하의 사람들은 그를 알든 모르든 모두 그를 위해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의 충직한 마음씨가 정말 사대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속담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아래로 저절로 길이 생긴다(桃李不言 下自成蹊)고 했는데, 이 속담은 보잘 것 없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 자체로 큰 것을 비유하는 말일 수도 있다.”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자신을 선전하지 않지만, 그 나무 아래를 지나는 사람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나무 아래에 자연스럽게 길이 생겨난다. 그것은 이 나무들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으며 묵묵히 사람들을 위해 공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떠벌려 자랑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이다.
도리불언(桃李不言)은 통치술에서는 말 없는 가르침을 가리킨다. 통치술의 원칙에서 보자면 리더가 끊임없이 부하를 교육시키는 말에 의한 교육 외에, 말하지 않고 부하를 깨우칠 수 있는 가르침도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몸을 원칙으로 삼아 병사들과 동고동락하고 운명을 같이하면서, 병사들을 자기 주위에서 단단히 단결하도록 주의를 환기하면 부하들은 불 속이라도 뛰어들고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한다. 통치 과정에서 청산유수와 같은 능란한 말재주로 지지를 얻는 것도 좋지만 떠벌리지 않고 도리불언의 방법을 채용해야만 대중을 제대로 설득할 수 있다.
부하들을 자기 몸처럼 아꼈던 명장 이광은 강직한 성품 때문에 늙도록 승진도 하지 못하고 정치군인들의 구박을 받았다. 이들은 이광의 사소한 실수를 구실 삼아 부하 병사들을 군법에 회부했다. 이광은 부하들을 위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고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혹리들에게 가혹한 심문을 당하는 것이 수치스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군인의 명예를 지켰다.
이런 이광을 사마천은 다른 정치군인들과 구별하여 이장군(李將軍)으로 높여 부르면서 그에 관한 열전(列傳)을 남겼다.
이광의 일생과 인품, 그리고 그의 죽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일신의 영달에만 목을 맨 채 온갖 불법과 편법을 밥 먹듯이 하고, 잘못은 아랫사람에게 떠넘기고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우리 지도층의 추한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지도층들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도덕 불감증이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보면 ‘사람을 가르치려면 반드시 부끄러움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못 할 짓이 없다.’고 했다. 자신의 언행이 남과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만 그릇된 언행을 일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계시를 받은 청나라 때의 학자 고염무(顧炎武)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청렴하지 않으면 안 받는 것이 없고(不廉則 無所不取),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못할 짓이 없다(不恥則無所不爲)고 했다.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이 천지에 널리게 된 것은 부끄러움을 가르치지 않은 우리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최근 사마천이 이광 장군을 두고 인용한 속담 도리불언 하자성혜를 거론하는 정치 지도자가 종종 눈에 띈다. 부디 빈말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평생 헛된 명예와 욕심부리지 않고 한 길을 걷는 고고한 인품을 가진 사람은 존경받을 수밖에 없다. 아랫사람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넉넉한 가슴으로 품어주는 그런 사람은 스스로 뭐라 하지 않아도 오래도록 타인의 칭송을 받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광과 같은 지도자, 이광과 같은 군인을 갈망하고 있다. 그런 사람을 주변에서 좀체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 桃(도)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兆(조, 도)로 이루어졌다. 桃(도)는 복숭아, 복숭아나무, 복숭아(열매)를 뜻한다. 용례로는 복숭아와 자두를 도리(桃李), 복숭아 나무 숲을 도림(桃林), 복숭아의 털을 도모(桃毛), 복숭아나무의 열매를 도실(桃實), 복숭아 밭을 도원(桃園), 복숭아씨의 알맹이를 도인(桃仁), 복숭아 나무 가지를 도지(桃枝), 복숭아 껍질을 도피(桃皮), 나무에 달린 채 겨울을 나서 저절로 마른 복숭아를 도효(桃梟), 복숭아 빛깔과 같은 빛깔을 도색(桃色), 복숭아 꽃을 도화(桃花), 복숭아 나무의 잎을 도엽(桃葉), 복숭아와 오얏이 천하에 가득하다는 도리만천하(桃李滿天下), 복사꽃이 아름답게 피는 때라는 도요시절(桃夭時節),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다는 도원결의(桃園結義), 속계를 떠난 별천지를 도원경(桃源境), 이 세상과 따로 떨어진 별천지라는 도원향(桃園鄕), 도화원이 세상과 따로 떨어진 별천지라는 도화원(桃花源) 등에 쓰인다.
▶ 李(리/이)는 형성문자로 䤚(리/이)는 (동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子(자, 리)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李(리/이)는 오얏나무(자두나무), 성(姓)의 하나이다. 용례로는 자두나무의 꽃을 이화(李花), 오얏의 즙을 짜 말려서 빻아 만든 미숫가루를 이초(李麨), 자두나무를 이수(李樹), 복숭아와 자두를 도리(桃李), 자두나무의 열매를 자리(紫李), 자두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면 자두 도둑으로 오해받기 쉬우므로 그런 곳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오이밭과 오얏(자두)나무 밑이라는 과전이하(瓜田李下), 길가에 있는 쓴 자두 열매라는 도방고리(道傍苦李), 봉숭아에 대한 보답으로 오얏(자두)을 보낸다는 투도보리(投挑報李) 등에 쓰인다.
▶ 不(부/불)은 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란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不(부)는 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이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도달하지 못함을 부도(不到), 서로 같지 않음을 부동(不同), 정당하지 않거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부당(不當), 어떤 일이나 힘이 활발하게 움직여 떨치지 못함을 부진(不振),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 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경기가 좋지 못함을 불황(不況), 허락하지 아니함을 불허(不許), 어떠한 자리에 참석하지 아니함을 불참(不參), 순수한지 않음을 불순(不純),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言(언)은 회의문자로 辛(신)과 口(구)의 합자(合字)이다. 辛(신)은 쥘손이 있는 날붙이의 상형(象形)이고, 口(구)는 맹세의 문서의 뜻이다. 불신이 있을 때에는 죄를 받을 것을 전제로 한 맹세를, 삼가 말하다의 뜻을 나타낸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말씀 화(話), 말씀 설(說), 말씀 어(語), 말씀 담(談), 말씀 사(辭), 말씀 변(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글월 문(文), 호반 무(武),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말의 구절을 언구(言句), 어떤 일과 관련하여 말함을 언급(言及), 말과 행동을 언동(言動), 말과 글을 언문(言文), 말로써 옥신각신 함을 언쟁(言爭), 말과 얼굴빛을 언색(言色), 입담 좋게 말을 잘 하는 재주를 언설(言舌), 말로 한 약속을 언약(言約),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입으로 나타내는 소리를 언어(言語), 여러 말을 서로 주고 받음을 언거언래(言去言來), 두 가지 값을 부르지 아니한다는 언무이가(言無二價), 말하고 웃는 것이 태연하다는 언소자약(言笑自若), 서로 변론하여 말로 옥신각신함을 언왕설래(言往說來), 들은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는 언유재이(言猶在耳), 너무나 엄청나거나 기가 막혀서 말로써 나타낼 수가 없음을 언어도단(言語道斷), 말과 행동이 같다는 언행일치(言行一致)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