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규-여백의 존재성
-분야: 어문 > 수필 > 중수필/평론
-저작자: 고석규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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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에게!
시간에 뒤쫓기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가끔 정지된 공간을 눈여겨 봅니다.
그것은 볼수록 움직여가는 어떤 내재의 화면이올시다. 그 화면에는 무수한 물상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구름과 비둘기와 시내와 과수원들이 그리고 방카와 보초와 철망과 주검들이 무슨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각기 마련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정적에 싸여 있습니다. 정적! 그렇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음운도 들을 수 없는 것이나 사실 그들의 침묵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독한 위치와 경건한 자세를 바라볼수록 정적이란 다만 들을 수 없는 소리에 절로 상태한 것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소리와 같은 파문을 던지며 저 무한한 공백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떠나기 위하여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들려올 듯한 그들의 환한 울림, 그것은 차라리 이름할 수 없는 빛깔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보일 수 없는 내부에서 자꾸 흘러가는 빛깔의 고민이 있을지언정 왜 빛깔은 저 여백의 하찮은 부면(部面)에 자기를 물들이는 것입니까. 한결같이 밝은 빛과 보염하게 울리는 빛과 또는 얼룩진 빛과 그 밖의 많은 빛문(紋)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빛깔이란 우리들 눈으로 가리지 못할 조화 속에 이루워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그것들은 모다 괴로워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적은 하나의 표현이올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빛이올시다. 빛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한한 것입니다. 저 많은 빛깔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직관적이며 신비적이며 또 원시적인 것입니까. 이 화면의 여백에 엷고 강한 감동을 남기면서 몸부림치는 그들의 자세를 열심히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 일어나는 〈정적의 소리〉를 그들의 영원한 흐느낌으로 들을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처참하여지는 공간에 저마다 그리고 있는 이 밝고 어두운 고민을 우리는 또 다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눈이란 독실한 영혼의 창이며 광야에 일어나는 여명과 같습니다.
L여!
이것은 릴케가 나에게 알린 사상이올시다. 나는 릴케의 존재성이 얼마나 이 〈들리지 않는 소리〉를 위하여 괴로워하였는가를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데 아름다움이 따로 있다고 남과 같이 말할 순 없습니다. 스스로를 넘을려는 유용의 힘을 위한 충동에 따라 자기 작품에 아름다움이 걸어 올 수 있는 어떤 조건의 존재를 믿을 따름입니다. 나의 사명이란 이 조건을 밝히는 것과 그러한 조건을 내기 위한 힘을 기르는데 있습니다.“
어렴풋한 부유의 인상이 떠오릅니다. 빛깔같은 선조(線條)가 그 부유되는 층적간에서 가끔 비쳐 나올듯 합니다. 그는 흥미와 경악의 단계에서 다시 모순의 발견으로 자기의 주시를 확대시킵니다. 마노(瑪瑙)빛 선조는 적어도 〈이당티떼〉를 가진 것이며 일층 명확한 원근의 위치와 영상의 고정을 위하여서만 한 초점에서 눈을 버리지 않습니다. 층적의 주변이 풀려가는 오랜 고뇌속에 폐쇄된 채, 백광과 같은 폭상의 전망을 이어나가는 그것은 차라리 원상에의 〈불가시적 동기〉이며 영원의 이주가 아니겠습니까.
이렇듯 릴케의 시는 아름다움을 모셔오는 최고의 순결이였습니다. 마음대로 지울 수 없는 감동의 파문을 조심히 엿듣는 일이였습니다. 릴케는 그러한 파문을 내는 물상의 주변을 하나의 심연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심연은 두려운 것입니다. 어두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둠은 얼마나 밝은 어둠이였던 것입니까. 심연은 절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형상에 가까운 절망은 어찌 절망일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심연의 신비로운 음율을 릴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든 본질은 이 외연의 빛깔 속에서 더 또렷한 것이였습니다. 따라서 릴케의 절망은 절망에서 떠나는 것이였습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릴케의 시선은 말할 수 없이 투명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물상(Ding)은 있는 물상이 아니라 변하는 물상으로 되었습니다.
L여!
나는 여기서 또 가장 귀중한 인식을 배웠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끊임없는 기적과 같이 하나의 무에 하나의 날랜 윤곽 속에…… 너무나 미묘하고 귀한 까닭에 자연 스스로가 벗어 놓은 것과 같은 윤곽의 또다른 윤곽 속에 짙은 것입니다."
거장 로당의 찬란한 정복을 말함에 있어서 릴케의 눈은 얼마나 부시게 떠 있는 것입니까. 사실 로당의 〈면(面)〉(Oberflache)은 처신(處神)의 고독이였습니다. 그것은 공간 속에 비공간을 마련하는 그 엄숙한 의지였던 것입니다. 〈다나이드〉와 〈카데드랄〉과 〈사상〉과의 그 숭고한 배경을 우리는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릴케는 이러한 〈협력상태〉를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세계경험의 전영역을 오늘날 우리들의 경험범위를 넘고 있는 영역까질 포함하여 그 모든 권상(圈相)에 따라 표상한다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이 닿을 수 없는 범위로 나타난 저 어두컴컴한 문짝꼴(扉形[비형])의 부분은 우리들 감각의 탐조등에 적합하도록 가지런치 못하게 밝으례히 도려낸 부분과 비하여 얼마나 크나큰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미 알려진 것과 이미 알려지지 못한 것이 한 점에 모일 수 있는 그러한 마당에서 그는 모든 개별성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 내부에 있어서 「관계가 실재인 것과 같은 존재」를 그러한 변전을 동양의 노자는 또한 95언의 시지불견(視之不見)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視之不見[시지불견], 名曰夷[명왈이],
聽之不聽[청지불청], 名曰希[명왈희],
搏之不得[박지부득], 名曰微[명왈미],
此三者不可致詰[차삼자불가치힐],
故混爲一[고혼위일]. 其上不曒[기상불교],
其下不味[기하불미], 繩繩兮不可名[승승혜불가명],
復歸於無物[복귀어무물], 是謂無狀之狀[시위무장지장],
無象之象[무상지상], 是謂惚恍[시위홀황],
迎之不見其首[영지불견기수], 隨之不見其後[수지불견기후],
執古之道[집고지도], 以御今之有[이어금지유],
能知古始[능지고시], 始謂道紀[시위도기].
대개 이념의 선택을 위한 동양화의 배경은 이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였습니다. 〈무명(無明)〉이란 한결 즉자(卽自)로부터 대자(對自)로 옮아갈 그 실현적 과정에서 더욱 완전한 유(有)의 체계입니다. 의미의 체계입니다. L여! 무엇이 우리에게 남을 것입니까. 나는 전장에서 공포를 제압하던 침묵의 기간을 지금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사직전에 있었던 우리를 굴복시키던 위대한 강요였습니다. 그것은 평온한 대기기간에도 우리들의 피로와 권태를 사정없이 박탈한 것이였습니다.
나는 전쟁보다 이 여백의 지배를 사실 불가피하였던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하늘에 대한 우리들의 전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남과 같이 피살되지 않은 경우가 어찌하여 나에겐 그다지 신랄한 것이였던지. 죽음보다 더 어려운 목숨의 체험이란…….
"우리는 전쟁 속에 전쟁을 하고 원인 속에서 찾아 헤메었다."
칼·샤필로는 〈시인의 심판〉의 주제를 이것으로 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또 무엇을 이야기할 것입니까. 이와 같은 샤필로의 〈레캬프트레이숀!〉 로당의 피비린 감동의 역사, 노자의 허무적 도기(道紀)를 그리고 나의 기적만을 이야기 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다만 나의 공간으로 나보다 먼저 살아 있는 나보다 뒤에 살아 있을 그 공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이즈러진 물상들의 무명한 주변에 그 눈물겨운 여백의 저항에 나의 눈과 입과 귀와 신체의 모든 부분을 더 가까이 닿을 수 있어야 겠습니다. 아! 나는 그들이 부정한 부재의 공간에서 어떻게 떠날 것입니까. 그들의 부재적 아름다움! 그들의 부재적 울음을…… 그것은 릴케가 생각한 물상의 정적, 〈소리없는 소리〉와 서로 하나의 의미였습니다. 바렐리는 "아름다움의 이데에는 아름다움이 존재치 않는 것이 더 확실한 것이라"하였습니다. 〈악극 암피옹〉에 나타난 뮤우즈들의 이야기…….
〈나는 보노라, 지금에 없는 것을〉
〈나는 아노라, 일찍이 없는 것을〉
〈나는 만드노라, 또 있어지는 것을〉
이리하여 나는 그들이 배제한 것을 그들이 부르는 것을 그들과 동일한 것을 어찌합니까. 그때 여백은 그들의 영원한 갈망의 표적입니다. 여백이란 부재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되므로입니다.
L여!
이 젖어내리는 얼굴을 누구에게도 나는 보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월식과 로뎅의 면과 릴케의 전진은…… 내가 분명히 말할 것 같으면서도 뜻되지 않는 이것은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나와 그리고 당신이 달려가는 이 공간의 전면에 보면 볼수록 익어오는 소리와 같은 저 위대한 물결을 우리는 어떻게 전하여야 할 것입니까. 저 물상의 주변에서 주변과 주변의 교착에서 불가시로 인식되는 여백의 진동을 나는 정녕 거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반한 혈전의 모습이 올시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아득한 지대일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내가 보지 못한 그리고 느끼지 못한 모든 것을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동양의 하늘에 뼈저리게 낡아오는 우리들 크나큰 고인도 결국은 이 아득한 지대에서 그대로 혼미해진 것이 아니겠습니가.
T.S엘리어트의 『칵텔·파아티』에도 부재의 저항이 나타나 있습니다.
〈의인적 아라바이의 상태!〉 엘리어트는 신을 증명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이것을 택한 것입니다. 여백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부재의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들 부정 속에 내재되는 새로운 긍정을 위하여 L여! 우리는 다만 진실한 우리들의 작업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이 글은 내가 생각하였던 단편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의 여백을 한동안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절박한 시간을 극복하는 나의 안정이라 할 것 같으면 나는 나의 불투명한 여백과 부재의 사고에서 새로운 투명과 새로운 존재를 다시 발견할 것이 아닙니까.
《1954. 1. 20. 초극》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