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25
3월10일[사순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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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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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l6xwyIWDfU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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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스라엘의 역사는 충실하신 하느님에 대한 반역과 불충실의 역사였습니다!>
축구 시합을 관전하다보면 팀의 승리를 위해 탁월한 기량의 선수들도 중요하지만, 감독의 용병술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냉철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고,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이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전반전을 뛰고 나서 그 결과에 따라 라커룸을 향하는 감독의 머릿속에는 벌써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됩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 그래서 최대한 빨리 교체해줘야 하는 선수는 누구인지? 그 포지션에 누구를 투입하면 좋겠는지, 등등. 그리고는 구상한 대로 가차없이 교체를 실시해야 합니다.
교체 대상인 선수의 성격이 아주 과격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물병을 발로 걷어차거나 욕을 해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때로 팀웍 상승을 위한 선수 길들이기 차원에서 일부로 빼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낡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옛 백성과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어떻게 교체되는지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반전에 출전했던 과거의 옛 백성들의 처신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참다 참다 인내심에 한계에 도달한 하느님께서 즉시 선수 교체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포도밭 노래’를 통해 옛 백성의 그릇된 처신과 그에 따른 하느님의 진노에 대해서 잘 예언하고 있습니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이제 내가 내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울타리를 걷어치워 뜯어 먹히게 하고 담을 허물어 짓밟히게 하리라.”(이사야서 5장 2~5절)
이스라엘은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포도밭을 선물로 받았으나,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셨으며, 엉뚱한 곳에 신경 쓰느라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밭은 정직합니다. 주인이 조금도 관심도 가지지 않는데, 풍성한 소출은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버린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이중적인 처벌을 받게 됩니다. 자신들이 임대한 포도밭은 다른 소작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죽인 결과로 주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충실하신 하느님을 향한 반역과 불충실의 역사였습니다. 그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깊은 탄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너희는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너희는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너희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미야서 7장 24~26절)
하느님의 말씀도 무시했던 그들은 메시아로 보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 역시 무시했습니다. 사악한 소작인들이 한 것처럼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죗값을 톡톡히 받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선물은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백성들의 손에 넘어갈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은 심판의 말씀인 동시에 희망 가득한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옛백성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새로운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을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옛백성의 실패와 멸망은 새로운 아들이신 예수님을 처형함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계약의 피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출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의 불충실과 실패로 인해 무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영광스런 부활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탄생한 것이고, 그 백성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구원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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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QUdFOcW1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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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위한 ‘제때’의 중요성>
『어린 왕자』에서 사막여우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어린 왕자에게 관계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은 참으로 의미 깊습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제때’입니다.
어린 왕자는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난 아주 쓸쓸하단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우는 “난 너하고 놀 수 없어. 난 길들어 있지 않으니깐”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왕자는 길들인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여우는 “그것은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이야”라고 말합니다. 아직도 궁금해하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말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넌 아직 수많은 아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내아이일 뿐이야. 그리고 네게는 나라는 것이 수만 마리의 여우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아쉬움을 느끼는 사이가 될 거야. 내게는 네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것이고, 네게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어린 왕자는 그럼 어떻게 하면 서로 길드는가에 관해 묻습니다. 여우는 상대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한에서 조금씩 다가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말합니다.
“아주 참을성이 많아야 해. 처음에는 내게서 좀 떨어져 그렇게 풀 위에 앉아 있어. 내가 곁눈으로 너를 볼 테니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이란 오해의 근원이니까. 넌 매일 조금씩 가까이 다가앉게 될 거야.”
다음날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제때’의 중요성에 관해 말해줍니다. “같은 시간에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을 느끼겠지. 네 시가 되면 안절부절못하고 걱정이 되고 그럴 거야.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될거란 말이야. 그러나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나는 몇 시에 마음을 곱게 치장해야 할지 알 수가 없잖아. 친해지는 데도 의식이 필요하거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못된 포도밭 소작인들에 대해 말씀하시며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라고 하십니다. 소출은 에덴동산의 선악과이고 우리가 바치는 교무금이며 십일조입니다. 내 집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소출을 “제때”에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 집에 얹혀산다고 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제때에 음식을 해서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의 주인이라고 하면 나는 제때에 음식을 바쳐야 합니다. 음식을 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때에 바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그분과 나는 서로 길들여져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주인이신가요, 손님이신가요? 나의 집은 주님의 집입니다. 어떤 교구장님이 한 본당에 방문하러 갔는데 주임신부가 이렇게 소개했다고 합니다. “저희 본당에 주교님께서 방문해주셨습니다.”
사실 성당을 지으면 그 키를 예수님의 대리자인 주교님께 봉헌합니다. 실제로는 사제와 신자들이 그 성당을 짓기는 하였지만, 그 주인은 주교님과 예수님이고 그 안에 사는 우리는 종들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지었으니 나의 것이라고 여기면 주교님과 예수님은 손님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되고 주인을 손님 취급합니다. 아니 자신들의 집을 차지하려는 적으로 여깁니다. 그렇게 여기지 않으려면 소득의 ‘10분의 1’을 바쳐야 합니다. 구약의 요셉이 자신이 마련한 베텔이라는 성전에서 주님께 어떤 약속을 하는지 봅시다.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10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2)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손님이 되십니다. 손님과 주인은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일방적 관계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싶다면 받지 말고 잘해주기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가 부담스러워 알아서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도 일방적인 주는 관계가 아닌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주고받음은 제때가 있어야 합니다.
저에게 찾아오는 신자분들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정해진 때에 규칙적으로 오시는 분들이 있고 자신이 원할 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누구와 관계가 오래 지속될까요? 때를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왠지 그들의 외로움을 채워주기 위해 이용당하는 느낌도 들고 그렇게 갑자기 연락하면 거의 시간이 되는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성전으로 봉헌하기 위해 제때 예물을 봉헌하는 주님의 종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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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기시감(旣視感, 프랑스어: Déjà Vu 데자뷔)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만났는데 예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 가는 곳인데 예전에 와봤던 곳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전혀 다른 공간과 장소인데 비슷한 전설과 신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인드라망처럼 어쩌면 우리는 모두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된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숙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처음 가는 장소인데도 예전에 와 봤던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는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신경과 혈관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는 하나의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몸의 여러 지체를 통제하고 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생각의 지평을 더 넓게 보았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이라고 보았습니다. 교회는 여러 곳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보다 2000년 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수님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막내로 태어났던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은전 스무 닢에 팔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은전 서른 닢에 팔렸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였고, 가족들에게 편안한 집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요셉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잘못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를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기시감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소작인은 주인의 포도원을 잘 가꾸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은 포도원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소출을 거두려고 주인이 종들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주인은 아들까지 보내서 소출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아들을 상속인이라고 생각하고 죽였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의 소작인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소출을 잘 내는 다른 소작인들로 바꾸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쁜 소작인들과 기시감을 느끼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교회의 부끄러운 역사를 인류와 역사 앞에 깊이 사과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 교회의 분열, 합리적인 지성에 대한 단죄, 마녀사냥, 권력과의 야합이 있었습니다. 나쁜 소작인의 모습을 보이는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도 나쁜 소작인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2000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유혹했던 악의 세력인 사탄을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닮아야 할까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빌라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께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했던 군중을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굳은 믿음을 보여주었던 백인대장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던 자캐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자캐오의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았다는 기시감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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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성인은 신학교에 갔지만 2번이나 신학교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성적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인의 인품을 잘 알고 있었던 본당 신부님의 도움으로 다시 신학교에 들어갔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세상의 기쁨에 취해있던 사람들이 복음의 기쁨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시골 동네인 아르스에 기차역이 생겼습니다. 동료들로부터 질시와 모함을 받았지만 신부님은 성인품에 오르셨고, 사제들의 주보성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형들은 동생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죽이지 않고 이스마엘의 상인들에게 팔았고,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요셉 역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들어 주십니다.
요셉은 성실하였고, 정직하였고, 꿈의 해몽을 잘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성공하였습니다.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형들,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넘겼던 형들은 요셉에게 곡식을 구걸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안배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형들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가족들을 이집트로 데려와서 함께 살았습니다.
본당 공동체에서 수도자, 보좌신부님들과 어렵게 지내는 본당 신부님이 더러 있습니다. 성격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사목의 방향이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도자도, 보좌신부님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합니다.
문득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소작인이 생각납니다. 본당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주교님을 통해서 본당 신부에게 맡겨주신 포도원입니다.
본당에 파견된 수도자와 보좌신부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비록 실수를 한다고 할지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주면 좋겠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4곳의 본당에서 지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본당 신부님들께서는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성실함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따뜻함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강론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성실한 포도원 소작인은 아니었음에 부끄럽습니다.
아름다운 글을 읽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매일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는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결석을 많이 하는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였던 선생님이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난 아침에 혼자 밥을 먹는데 시간이 되면 함께 밥을 먹자고 하였습니다. 한 학생이 학교에 갔습니다.
선생님은 학생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하였습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자신을 위해 기다려주는 분이 있다는 것이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한 선생님이 제안하였고, 한 학생이 응답하였습니다. 지금은 백여 명의 학생이 아침을 먹으러 학교에 온다고 합니다.
세상은 분명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라는 포도원의 소작인입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좋은 지면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업무입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웃들과 만남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포도원의 소작인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이가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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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3-43.45-46: 저 자는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자!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해야 했을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 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하느님께서는 끈기 있게 그들을 기다려 주셨다.
밭 주인은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순종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찾아온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에게는 완고하게 굴었을지라도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다는 의미다.
소작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할 시간이 있었지만, 예전에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를 짓는다.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 대답한다. 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그리스도께서 ‘돌’로 불리시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분께서 놓으신 기초는 튼튼하여 그분 위에 서 있는 이는 거짓스러운 속임수에 넘어가거나 박해의 폭풍에 흔들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악한 자들은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파멸하기 때문이다. 돌과 부딪히는 것은 산산조각이 나지만 돌은 멀쩡하다. 돌 위에 떨어지면 스스로 부서지고 만다. 그들의 파멸은 돌의 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떨어진 그들의 잘못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 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 어떤 소작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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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특권과 영예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 말씀’은 확정된 일을 통보하신 말씀이 아니라, 끝까지 당신 말을 안 들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조건부 예고’입니다.
결국 이 경고 말씀은, 너무 늦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는 호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끝끝내 예수님 말씀을 안 들었습니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안 믿었습니다.)
유대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선택된 백성’이라는 지위를 잃었고, 그들이 누리던 특권과 영예는 그리스도교로 넘어왔습니다.
만일에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도 유대교처럼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종교이니, 예수님께서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교를 향한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19-22) (여기서 잘려 나간 가지들은 유대교를 뜻하고, 접붙여진 ‘그대’는 그리스도교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5-6)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도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마태 7,21)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고, 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머무르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즉 구원받지 못합니다. 신앙인이라는 신분 자체가 구원을 보장해 주는 특권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신앙인으로서 살 때에만 특권이 됩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마태 21,33-36)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구약시대 역사를 요약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각 개인에게 주신 인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로서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인생으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잘 가꾸고 보살펴서 많은 열매를 맺은 다음에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몫의 소출’은 ‘내가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느님께 드린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전부 다 가져가시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바꿔서 우리에게 돌려주십니다. 따라서 내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실하게 사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래 하느님께서 고용하신 소작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여기서 소작인이라는 표현은, 자녀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소작인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어떻든, 나의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나는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막 살아도 되는 권한이 없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뜻합니다. 예언자들이 한 일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한 일, 즉 ‘큰 죄’를 지은 일이었습니다.
소작인들이 포도밭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이야기는(마태 21,37-39),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이야기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소작료를 징수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살고 싶으면 나를 믿고 따라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앞장서서 가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고, 회개도 안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않겠다고, 즉 허무하게 죽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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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요약합니다. 비유에서 말하는 포도밭은 하느님 백성을 상징합니다.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땅을 일구는 것만이 아니라 울타리와 확과 탑을 마련하는 구체적인 과정은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소작인은 이 백성을 이끌어 갈 책임을 맡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밭의 주인은 소출을 받아 오도록 종들을 보냅니다. 비유에서 이 종들은 구약의 많은 예언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악행을 일삼습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다시 자신의 아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마저 죽여 버립니다. 짧은 내용이지만, 복음서는 이렇게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그분의 삶을 요약합니다. 하나의 비유이지만 그 안에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중요한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비록 종교 지도자들이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백성을 위하여 당신의 종들을 파견하십니다. 그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백성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전하는 많은 이야기도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백성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말합니다. 모든 것을 시작하신 분도 하느님이시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종들을, 마침내는 사랑하는 아들마저 백성을 위하여 내주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분을 믿는 이들의 역사는 사랑과 자비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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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세상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욕심이라는 감옥입니다. 욕심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고 때로는 가두어 옴짝달싹 못하게 합니다. 그중에 가장 고약한 것이 ‘질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질투의 예가 사라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라는 자신에게 아기가 없으므로 자신의 몸종인 하가르를 첩으로 아브라함에게 붙여줍니다. 하가르는 아브라함에게 자식 하나를 낳아 주는데 그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사라 자신도 임신하여 이사악을 낳게 되자 하가르와 그 아들 이스마엘을 구박하기 시작하다가 끝내는 그 모자를 사막으로 내쫒아 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딱한 처지에 놓인 그들을 보살펴주십니다.(창세기 21장 8절-21절)
구약의 창세기에서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의 대상입니다. 요셉은 곡식단이 자기에게 다 인사를 하는 것과 해와 달, 별들이 모두 자기에게 인사하는 꿈 이야기는 형들과 아버지에게 야단도 맞습니다. 거기다가 빌하와 질파 어머니들의 아들들, 그러니까 요셉에게는 형들의 목자 일을 거들 때, 일일이 그들을 아버지께 일러바쳐서 그들에게도 따로 미움을 샀던 것입니다.(창세기 37장 2절)
아버지 야곱은 특별한 사랑의 표시로 ‘긴 저고리’를 해 입혔는데 이것이 형들에게는 질투를 불러 일으킵니다. 1) 아버지 심부름으로 그 먼 스켐을 지나 토탄까지 길을 물어물어 형들에게 갑니다. 그런데 동생에 대한 형들의 미움은 가시지 않고 그를 마른 물구덩이에 처넣게 합니다. 형들은 결국 길앗에서 이집트로 향하는 미디안 상인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전 스무 냥에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깁니다.
형들은 동생을 동물에게 찢겨 죽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이 묻어나는 요셉의 긴 저고리에 염소의 피를 묻히게 합니다. 형들의 마음에 가득한 미움과 아버지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가 그들이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창세기 37장 28절)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포도밭 주인과 소작인들에 대한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맡기고 멀리 떠나는데, 포도 철이 되자 종들을 보내어 자신의 소출을 받아 오게 합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니까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들은 결국 아들마저 죽이는 끔직한 일을 저지릅니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예언자들이며 외아들은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포도밭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 외아들은 비유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 밖에서 죽게 되시지요.
주님께서는 군중에게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질문하십니다.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21장 41절)
주님께서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오 복음 21장 43절)
예수님께서 이어서 구약을 인용하시면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오 복음 21장 42절)2)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두고 하는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두려워 행동에 옮기는 못합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사실 아무 죄도 없이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런데 창세기 저자도 뒷 문장에서 요셉과 형들과 만남을 전하며 그 모든 것이 야곱의 가족을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커다란 배려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가족을 극심한 가뭄과 죽음에서 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다가오는 수난과 죽음을 아시고 포도밭 비유를 통해서 아들의 죽음이 바로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으실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이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으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에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농부는 봄이 되면 겨울 내내 얼었던 땅을 파고 씨를 묻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씨에서 생명을 움트게 하고 자라게 하십니다.
서로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한 순간까지도 하느님께서는 버리지 않고 모으셨다가 큰 그림으로 구원이 이야기를 전개하십니다.
사순절에 주님의 수난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결백하신 주님의 침묵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변명도 합리화도 아닌 오로지 아버지 뜻에 순명하신 주님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1) 야곱이 늘그막에 얻은 아들 요셉에게 특별히 ‘긴 저고리’를 입혔는데(창세기 37장 3절) 형들에게 질투심을 일으키게 한다. 이것을 ‘편애’라고들 하는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녀에는 큰 상처를 주고 그것은 남은 삶에도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결국 야곱의 질투가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물구덩이 던지게 했고 다시 꺼내서 그를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기게 했다.(창세기 37장 28절) 주님께서 은전 서른 닢에 팔리는 신세가 되신다.(마태오 복음 26장 15절) 군중으로부터 특별히 사랑을 받는 예수님에게 종교 지도자들은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했고 결국은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편애는 질투를 불러일으키고, 종래에는 부정적인 파멸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버려진 돌(리톤 혼 아페도키마산 Λίθον ὃν ἀπεδοκίμασαν)이 “‘모퉁의 머릿돌로(에이스 케팔렌 고니아스 εἰς κεφαλὴν γωνίας)’ 되었다.”라는 구약 시편(118,22-23)의 구절을 인용하셨다.
이스라엘 종교지도들이 비록 예수님을 버렸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놀랍게도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그들이 짓고 있는 건물의 ‘중요한 머릿돌’이 되게 하셨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고통과 구원의 놀라운 신비를 설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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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모든 사건 안에 하느님의 큰 섭리가 감추어져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복음 환호송)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네."(영성체송)
오늘 미사의 복음 환호송과 영성체송이 복음 속 비유를 요약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운명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마태오 복음 21장 37절)
소출을 받아 오라고 앞서 보낸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의미합니다. 악한 소작인들에게 학대 받고 죽임까지 당한 종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스러진 참 예언자들을 가리키지요.
그런데도 주인은(하느님은) "마침내" 외아들을 보내십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당신 모상을 나누어 받은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까닭이겠지요.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오 복음 21장 39절) 포도밭 주인이 보낸 아들의 운명은 예수님께서 받아안으실 운명입니다.
불보듯 뻔한 비극적 결말을 아시면서 어떻게 하느님은 성자를 보내시고, 왜 예수님은 이 계획에 순종하신 걸까요? 그 답은 오늘 제1독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창세기 37장 28절)
오늘 창세기의 대목은 평온한 마음으로 읽어나가기에 너무 험악합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던 요셉이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이복형제들에 의해 광야에서 구덩이에 던져지고 죽음까지 당할 위험에 처합니다. 그 와중에 요셉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이집트에 종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지요.
"땅에 기근을 불러일으키시고 모든 양식을 끊으셨을 때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린 요셉이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와 함족의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시편 105장 16절-17절. 23절)
어떤 사건 앞에서 우리는 그저 한 단면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나마도 어떨 땐 왜곡해서 보기까지 하지요. 한 사건 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지만, 우리의 시야는 평면적이고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에게 그처럼 처절히 버림받은 요셉은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이집트에서 재상 자리에 오르고, 결국 야곱 집안을 기근에서 구합니다. 그리고 "사백삼십 년 후"(탈출기 12장 40절 참조)에 무수히 번성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민족적 정체성의 근간이 될 엄청난 사건을 체험하게 됩니다. 한 형제들 안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에도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 답은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에 들어 있습니다.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21장 41절)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분께 치욕스런 죽음을 안긴 십자가 사건은 도리어 구원의 지평을 온 세상으로 확장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임금을 넘어서 온 세상의 임금, 그리스도 왕이 되시지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시는 구원의 섭리를 우리는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유한하고 우매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인생길의 희로애락, 길흉화복, 생로병사의 온갖 파도를 맞으면서, 겸손히 주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몫일 겁니다.
벗님! 구원의 그날까지, 주님 얼굴 뵈옵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날까지,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닙니다. 지레 겁먹지 말고 미리 절망하지 말고 시간과 공간을 주인이신 주님께 피신처를 두고 그분만 믿고 나아갑시다. 주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면서도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섭리하는 분이시니까요. 믿음으로 그 섭리 안을 걸어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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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아>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써의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시며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속을 들켜버린 것을 알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옛 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면(마르 6,14-29),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장엄하게 죽어가는 예언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헛된 약속을 하는 바람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요한의 목을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의인은 당당하고 불의한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주님 앞에서 항상 떳떳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죽음을 통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희생을 통해 다른 이를 이롭게 합니다.
신상옥 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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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코로나19 팬데믹 전, 이탈리아 성지 순례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때 특별히 한 성인이 인상 깊었습니다. 바로 베네딕토 성인이었습니다. 수도생활을 하셨던 수비아코, 서방교회 수도원의 발생지라고도 말하는 성인께서 직접 건립한 몬테카시노 등을 순례하면서 베데딕토 영성에 큰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순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베네딕토 규칙서’ 책을 샀습니다. 혹시 잘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규칙서의 주석서를 구매했지요. 그만큼 성인의 영성을 알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끝까지 다 읽는 저입니다. 그러나 이 규칙서의 머리말을 읽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웠고 그만큼 지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작년 말에 사제 피정을 신청하라는 인천교구 공문을 받았습니다. 여러 피정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중에 ‘베네딕토 영성과 가르침’이 보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피정 지도 신부님은 제가 구매한 책의 저자였습니다. 이 피정을 신청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피정 강의를 통해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규칙서에 대한 지도 신부님의 설명을 통해 성인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이었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신부님께 왜 ‘베네딕토 규칙서’를 읽기 힘들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책은 베네딕토 성인을 잘 아는 사람을 위한 해설서입니다. 따라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어려운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피정을 마치고서 이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성인의 기본 영성을 알고 난 뒤에 이 책을 이해하기는 훨씬 편했습니다. 책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전해주십니다. 밭 임자가 맡긴 소작인들은 포도원이 자기 것인 양 행동합니다. 그래서 소출을 받으러 온 종들을 오히려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아들까지 죽여 버립니다. 그들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소작인들이 해야 할 포도밭을 직접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등의 일을 직접 한 주인의 자비와 사랑은 잊어버리고, 마치 자기 것인 양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악한 자들을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줍니다.
알고 모르고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알려는 시도와 또 알아가면서 그 사랑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력을 과연 계속해서 하고 있을까요? 혹시 주님의 사랑을 몰라서 계속해서 불의한 소작인들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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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두 개의 길>
마태오 21,33-43.45-4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두 개의 길>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보내신 분 따르는
베풂과
돌봄과
살림의 길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보내신 분 거스르는
움켜쥠과
내침과
죽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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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약하다고 악하지 않은 우리>
오늘 독서의 요셉은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집 짓는 자들이 내 버렸지만, 하느님께서 모퉁이 돌로 삼으신 돌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런데 여기서 내 버렸다는 것은 필요 없으니까 버린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제거라는 표현이 맞고 정적을 죽이듯이 죽여버렸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저로서는 생각이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짓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파리도 함부로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저나 여러분이 누굴 죽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고 생각 넘어 마음먹고 마음먹은 것을 실행하고 그것도 같이 모의하여 단체로 실행하는 것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선의 파괴와 모든 생명의 파괴는 악입니다. 물론 자연 순환적인 죽음은 파괴가 아니라 생산이기에
여기서는 악심에 의한 파괴를 말함인데 이들의 악심은 아주 대단합니다.
근현대사의 히틀러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처럼, 그리고 가깝게는 우리나라나 미얀마에서 학살을 저지른 군부 독재자들처럼, 눈 깜짝하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들의 악심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우리,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이런 자들에 대해 하느님은 어떻게 하실지 궁금합니다.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 모퉁이 돌로 삼으시는 주님은 죽게 된 요셉을 형제들로부터 구출해내시듯, 죽게 된 사람을 악심을 품은 자들에게서 구출해내시는 분일 뿐입니까?
그런데 창세기의 요셉 얘기는 악심을 품은 자들에게서 요셉을 구하시고, 그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얘기로 끝나지만 복음의 주님은 악심을 품은 자들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징벌하신다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이다.”
어제 가난한 라자로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고 회개 없이 죽은 것만으로도 부자를 천국 명부에서 이름을 빼시고 지옥행의 벌을 내리신 하느님께서 힘없는 사람들을 모의하여 죽이는 이 회개 없는 작당을 그대로 두실 리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것만이 아니고, 악한 자에게 약한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약한 사람에게 너그럽고 자비로우시지만 악한 사람에게는 엄하고 강하시며, 회개를 요구하시고 벌도 내리시는데 그것이 이들에게 걸맞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하다고 해서 악하지 않을까요? 약하기에 큰 악은 못 저지르고 작은 악을 저지르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작은 악에 대해서도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은 크든 작든 악에 대해서는 회개를 끝까지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작은 악이기에 회개하는 것이 덜 어려울지 어쩌면 더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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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꿈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승리>
-요셉, 예수님, 성인들-
제가 예전은 물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이 꿈입니다. 꿈을 소재로한 시도 많습니다. 꿈이 있어야 비로소 산 사람입니다. 꿈이 없을 때 사람은 참 거칠어지고 사나워집니다. 요즘 사람들 보세요. 너무 거칠고 사나워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꿈을 잃으면 사람은 괴물이,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꿈의 사람들에게서 꽃처럼 피어나는 시들입니다. 꿈에서 피어나는 시의 꽃입니다.
이런 이들이 궁극의 승리자가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비롯한 성인들입니다. 왜냐? 하느님이 꿈꾸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꿈이 현실화된 분들이 성인들입니다. 예전 제 자작 짧은 애송시 몇 편을 나눕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 눈
덮여있다
흰 눈 덮인 하얀 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그 당시 장면입니다. 이 시 덕분에 그해 겨울은 따뜻한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봄꿈’에 이어 ‘별꿈’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며
잠못 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 방울들”-2000.10.1.
요즘 산책하며 자주 부르는 제18번 노래 아침이슬 노래중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이란 대목이 연상되어 더욱 애착이 가는 별꿈이란 시입니다. 별꿈을 꾼 후 강론을 쓰는 새벽 고요한 시간입니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
죽어있는 것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봄꿈의 나무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2009.4
문득 과로로 지금 입원중인, 윗 시가 속한 시집들을 곱게 편집하고 제본해준, 20년 이상 물심 양면 헌신적으로 수도원과 저를 도와준 고마운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은 참 사랑스런 하느님의 딸, 자매님에게 주님의 치유의 축복을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어제 사촌 누님의 장례미사시 깜짝 놀랐습니다. 자녀들이 모두가 신자들인데 냉담중인 듯 한사람도 영성체를 하지 않고 연령회 회원 몇분만이 했습니다. ‘믿음이, 꿈이 없구나. 위로부터의 끈이, 하느님의 끈, 믿음의 끈이 단斷! 끊어졌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무관한 삶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의 단절, 믿음의 단절, 꿈의 단절이 오늘날의 대체적 보편적 현실같습니다. 참으로 자녀들에게 물려 주어야 할 최고의 유산은 믿음이자 하느님 꿈임을 깨닫습니다. 조카들의 잠든 믿음의 씨앗이 초록빛 믿음의 꿈으로 활짝 피어나는 파스카의 봄철이면 참 좋겠습니다.
문득 어제 끝기도후 신선한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누구보다 꿈의 사람들이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평생 날마다 함께 바치는 아름다운 시편 성무일도의 은총이 꿈의 수도자들로 만들어 줍니다. 한 형제가 집무실 밖에서 서성이다 저를 보자 청했습니다. 작년 꿈같은 아이디어로 제주도 여행을 주선했던 수사입니다.
“수사님, 올해 저와 함께 전주 부근의 아름다운 성지에 성지순례휴가합시다. 아주 아름다운 성지들입니다. 끝 기도 때 꿈처럼 꽃처럼 떠오른 생각입니다.”
요지의 고운 생각과 말에 “고마운 생각입니다. 염두에 두고 생각하겠습니다.” 화답했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강론을 인터넷에 올릴 수 있고 매일 미사만 드릴 수 있으면 언제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휴가는 이미 잊은 지 수십 년이 됩니다. 하루하루 일하면서 꿈꾸듯 휴가하듯 아름다운 나날을 살고 있는데 새삼 무슨 휴가이겠는지요!
오늘 창세기의 요셉은 제가 참 좋아하는 꿈의 사람입니다. 참 매력적인 사람이,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꿈의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꿈이 없으니 질투에 눈멀어 저렇게 모질고 사납게 요셉을 사지로 몰아넣는 형제들이 아닙니까? 꿈을 잃으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사나운 괴물같은 사람들이나 무기력한 폐인들입니다. 악한 형제들의 단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그러자 형제들 중에 하느님의 첩자(?) 르우벤과 유다가 있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나니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의 꿈은 요셉을 통해 서서히 무르익어 가다가 언젠가는 꽃으로 활짝 피어날 것이며, 아무도 이런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의 섭리를 막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요셉입니다. 궁극엔 꿈의 사람들의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은 꿈이 없어 욕심에 눈이 멀으니 사납기가 야수같고 괴물같습니다.
오늘날 정가에도 꿈을 잃은 권모술수의 괴물같은 정치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정치가’가 아닌 ‘정치업자들’이라 하더군요. 고 김대중 토마스 대통령을 모 정치 평론가는 정치가를 넘어 ‘정치의 신’이라 칭했고 저 역시 공감했습니다. 정치의 신하면 김대중 대통령의 절친이었던 남아프리카의 대통령까지 했던 역시 평화 노벨상 수상자 만델라가 생각납니다.
다음 소작인들의 말이 방금 제1독서 창세기의 사악한 요셉 형제들은 연상케 합니다. 인간 역사는 이처럼 반복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아, 무지한 사람이 꿈을 잃으면 이처럼 사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의 사람, 파스카의 예수님을 좌절시킬수는 없습니다. 다음 예수님 말씀은 후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체험에 배어 있는 시편을 통한 체험적 고백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아무도 하느님의 꿈을 막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파스카의 꽃으로 활짝 피어납니다. 꿈의 사람,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화두는 하늘나라였고 부활을 통해, 매일 미사은총을 통해 서서히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꿈, 하늘나라입니다. 궁극엔 꿈의 사람, 예수님의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임을 뜻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꿈의 사람으로, 파스카의 꽃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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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
<머릿돌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21,33-43.45-46)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소작인들인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구해주시려고 수많은 예언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그들은 수많은 예언자들의 신탁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들은 그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안으로 파견되어진 '사제와 같은 수많은 또 다른 예언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처럼 내버려야 할, 빨리 보내드려야 할 걸림돌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 구원을 위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형제들의 시기(질투)와 미움 때문에 이집트 상인들에게 팔려간 요셉도 이스라엘을 기근으로부터 구해 낸 그런 머릿돌이었습니다.
우리도 머릿돌이 됩시다! 세상을 살리는 머릿돌, 가정과 본당과 머무는 공동체를 살리는 머릿돌이 됩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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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rURyWgMZJ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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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마태 21, 38)
우리를
찾아오는
봄에게
참으로
죄송합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욕심에서
시작하고
욕심으로
끝이 납니다.
사랑의 약속을
파기하는 쪽은
언제나
욕심으로 가득찬
피조물인
우리입니다.
빼앗을 수 없는
것을 빼앗을 수
있다 착각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끝내 우리의
욕망은
하느님마저
죽일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욕망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뻔뻔함의
극치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날들이
우리의 탐욕으로
여기저기서
죽어갑니다.
욕심의
숨고르기가
필요한
사순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너무도 멀리 와 있는
우리 마음입니다.
탐욕은
복음이 아닙니다.
신앙은 욕심에서
더 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진실하고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 부스러기 까지
빼앗아 채우고
싶은 헛된
욕심에서
벗어나는
사순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에게
잠시
건네준 생명이
움켜쥐는 욕심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뜨겁고 따뜻한
기도이며 봉사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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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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