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의 계략과 천사의 개입
1요한 1,5-2,2; 마태 2,13-18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2023.12.28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던 헤로데의 못된 계략에 희생된 아기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헤로데의 계략과 천사의 개입
구세사에서 이런 일은 또 있었습니다. 아주 먼 옛날 이집트에서도 못된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이 두려워서 히브리인 가정에서 사내 아기가 태어나면 모조리 죽이라고 산파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장차 히브리인들의 해방을 이끌 지도자요 일꾼으로서 모세를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어머니로 하여금 갓 태어난 모세를 왕골 대나무로 짠 상자에 태워 나일강에 띄워 보내려는 지혜를 주셨고, 파라오의 공주로 하여금 마침 그 시간에 나일강가에 나와 있다가 모세를 구하게 하셨습니다. 공교롭게도 남편과 일찍 사별한 후 아들이 없었던 그 공주는 이 아기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길렀습니다. 아마도 공주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선물로 알고 지극정성으로 키웠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임을 당할 뻔 했던 모세는 이집트 왕실에서 최고의 환경에서 극진한 보호를 받으며 왕자로 자라났습니다. 그후에 출생의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추방당해 양치기로 지내다가 하느님께서 동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라는 소명을 받고 이 소명을 죽을 때까지 성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이 수행 과정에 이집트 왕실에서 왕자로서 터득한 리더십이 요긴하게 쓰였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파스카 과업은 이렇게 악인의 계략과 하느님의 개입, 그리고 부르심 받은 이들의 성실한 순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지속되어야 할 새로운 파스카 과업의 요체도 이 최초의 파스카 사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시대의 사회악을 역이용하는 전략이요, 사회악의 구조와 에너지를 공동선의 시스템과 기운으로 활용하는 작전입니다. 사실은 모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집트를 숙주(宿主)로 삼아 기근을 피해 인구를 불리고 억압을 피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 난 운명을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살게 된 계기는 어이없게도 야곱의 아들들이 동생 요셉을 이집트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일이었고, 요셉은 그 이집트에서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했으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가 거기서 만난 파라오의 고위 관리의 꿈을 해몽해줌으로써 파라오에게 추천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집트의 재상 자리에까지 올라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들과 동생은 물론 아버지 야곱까지 이집트로 불러들임으로써 아직은 집안 규모의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일가족을 정착하게 한 땅은 이집트에서 가장 비옥한 곳 중의 하나인 나일강 하류의 고센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열세 명의 일가족이 450여 년 동안 사는 동안 장정만 해도 60여만 명이 넘는 큰 무리로 불어났습니다.
그러자 불어난 이스라엘이 혹시 반역이라도 할까봐 잔뜩 겁이 난 후대의 파라오가 요셉의 선정과 공헌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요셉의 일가 후손들을 노예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악한 처사를 하느님께서 역전시키십니다. 모세를 극적으로 살아남게 하여 이집트 왕실에서 지도자 훈련을 받게 한 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가 되게 하시고는, 드디어 시나이 산으로 불러들여 동족을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지도자 훈련에 사십 년, 양을 치면서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는 데 또 사십 년이 걸렸고, 히브리인 동족들을 빼내어 시나이 광야에서 하느님 백성으로 훈련시키는 데 또 사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집트 생활에서 몸에 배인 노예근성을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서 자라기까지 그만한 세월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로, 죄 없는 아기들을 무차별 학살한 헤로데의 끔찍하고 잔인한 계략을 피해서 천사가 요셉에게 알려준 계획도 역시 이집트로 피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가 죽고 나서야 천사는 다시 요셉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갈릴래아로 돌아가도록 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아기 시절부터 민족이 겪었던 파스카 경로를 압축하여 학습하신 셈입니다. 그리고 공생활 내내 더욱 보편적인 규모로 그리고 더욱 영적인 깊이를 더해서 모든 민족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사도로 양성하시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여받은 본연의 사명인 파스카 과업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시대의 사회악을 역이용하고 사회악의 구조와 에너지를 공동선의 시스템과 기운으로 변화시키는 기본 전략은 유효하기 때문에 이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악인들은 잔머리를 굴려서 하느님의 계획에 맞서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악인들의 계략은 천사들의 개입으로 멋지게 역이용당하고 악인들이 세워놓은 사회악의 틀이 오히려 공동선을 키우는 요람이 됩니다.
모세의 고사(古事)와 아기 예수님의 위기에 대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모세도, 아기 예수님도 위기에서 구출하셨을 뿐만 아니라 위기를 기회로 삼아 큰 인물로 키우신 분은 이 위기에도 함께 하셨던 하느님이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잔악한 헉살로 인해 무죄한 이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례는 역사상 숱하게 일어났고 이러한 사정은 아시아 대륙에서도 근세 이래 복음이 전해진 나라에서 어김없이 일어났었습니다. 특히 평신도 유학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신앙 공동체가 세워진 이 땅에서도 이벽, 김범우, 윤지충, 권상연을 비롯하여 천진암 강학에서 천주학을 천주교로 받아들인 젊은 선비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형을 받아 교회가 쑥대밭처럼 초토화되었고, 이렇게 시작된 피어린 박해는 무려 백년 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복음이 전해진 동아시아 여러 나라, 즉 중국과 베트남, 일본 등지에서 모두 일어났는데, 특이하게도 조선에서 박해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박해가 전국적으로 번지면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등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겠다고 조정과 유림이 온통 나서서 학살을 자행했었으나, 신자들은 전국 심산유곡으로 숨어 들어 교우촌을 백여 군데 이상 세우고 신앙 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이 교우촌 현상은, 지도부가 와해되고 선교사들이 모조리 처형당하는 와중에서 부녀자들과 천민 신분 출신의 입교자들이 더욱 늘어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기에, 예수 아기와 마리아, 요셉이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가야 했던 사정을 연상시킵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 교회가 받은 박해 양상과 달리 진행되었던 이 교우촌 현상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5천 년 기까이 민중의 종교적 심성 속에 연면히 흘러오던 하느님 신앙과 이를 그리스도 신앙으로 조명하여 일깨워주면서도 기복적인 무속을 배척함으로써 식별해 준 사상적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진암 강학회에서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배운 정약종은 마테오리치가 쓴 ‘천주실의’를 참고하고 이벽의 ‘성교요지’를 쉽게 풀어 쓴 ‘주교요지’를 저술하여 명도회 조직을 통해 신자들에게 배포하였습니다. 이 때 정약종에게는 황일광이라는 조력자가 있었는데 그는 백정 일을 하던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두뇌가 명석하고 쾌활안 성품을 지닌 신자로서, 양반이자 유학자로서 지식인 언어에 익숙한 정약종에게 민중의 언어와 정서를 전해 주었습니다. 이 덕분에 정약종의 ‘주교요지’는 한글로 쓰여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누구나 쉽게 암송할 수 있는 독자적인 가치체계를 담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사를 시켜 헤로데의 마수를 피하도록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손길을 연상케 하는 역사 장면입니다.
이 비결을 계승하는 일이야말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구화된 논리로 전해진 천주교 교리와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토착화시키는 핵심입니다. 악한 계략에 굴뷱하지 않고 선한 의지를 더욱 키워 주시는 하느님의 작전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갈망, 이를 인간의 지성으로 알아듣고자 하는 진리 추구의 의지, 이 진리를 온 몸으로 체험하고자 하는 성사적 갈망, 그리고 이를 겨레에게 전하고자 하는 복음화의 갈망이 그 작전의 요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