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주셨으니
(갈라디아서 5 : 1-12)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 광주학생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평북 압록강 근처인 영변까지 이르렀으니 가히 천국이 다 학생운동에 참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변의 숭덕 여학교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 시위를 진압하던 이 아무개 형사는 여학생 하나에게 몽둥이와 총대를 휘두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시집이나 가서 아이나 낳지 네가 뭘 안다고 독립 운동이냐?
가소롭다"
그 학생은 일본에 충성하는 우리 나라 형사를 노려보더니 이렇게 쏘아 주었습니다. "나도 시집을 가고 싶지만, 너 같은 자식을 낳을까봐 두려워서 안가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그 형사는 얼굴을 싸매고 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가 있고 교회가 있고 나라가 있고 가정이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율법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의 생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자유인에게 다시 종의 멍에를 메게 하는 것일 뿐이며, 그러한 가르침의 동기는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불순한 동기를 지적하면서, 사도바울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본문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갈라디아서 1-4장을 통해서 신학적으로 변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중간에 자신과 갈라디아 성도들의 관계도 나왔고,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고, 복음을 위임 받았는지를 말해서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 주님의 복음이라고 논증하였습니다. 이 근거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갈라디아서 5-6장에서 서술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복음에 대한 선언적으로 시작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는 소식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종노릇하였던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주장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조차도 율법을 따라서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율법의 정신에 맞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표현은 바울이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이 회심 이전에 메고 살았던 ‘초등학문의 멍에’와 비숫한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고 성령께서 역사하는 바른 믿음의 눈으로만 하나님의 역사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은 소녀는 공부도 열심히 해 미션스쿨에 들어갔습니다. 미션스쿨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부모님을 향한 공경, 그리고 나라를 위한 애국을 중요하게 가르치며 매주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소녀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 간절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소녀는 지나가다 들리는 기차소리가 ‘대한 독립’으로 들린다고 친구에게 말할 정도로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이후 10대의 어린 나이에 천안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소녀는 순사에게 잡혀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매일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 어떤 고통보다도 조국의 독립을 바란다고 생의 마지막까지 고백한 소녀는 1년 뒤 삼일절에는 옥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고문 후유증과 극심한 영양실조로 순국한 소녀의 나이는 고작 19세였습니다. 매년 삼일절마다 숭고한 희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준 유관순 열사의 독립을 향한 열정의 원동력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으로 빛을 비추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호세아 6장 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2.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립니다.
본문 5-6절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요약적으로 설명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의로움’의 은총이 미래형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 있는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얻게 될 모든 은총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과 ‘이미와 아직’이라는 이중적 종말 구조 속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의로움이 하나의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안에’ 거하면서 그 의로움이 자라가고 궁극적으로는 완성될 날을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같은 절에서, 바울은 미래적 의로움을 기다릴 수 있는 현재적 증거와 수단이 바로 ‘성령’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이 받게 될 복들 중 상징적 복이기도 한 성령의 임재는 종말의 영으로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은총을 매개합니다. 정상적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인 의로움도 성령이 매개해주는 은총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의로움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 의롭게 되심’(디모데전서 3:16)으로 성취되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은총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할례의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할 뿐입니다. 정상적인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통해 역사’합니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닮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폴랜드의 유명한 천재 음악가 쇼팽은 피아노를 위시하여 작곡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인 사람입니다. 그가 20살에 예술의 나라 불란서로 유학을 떠날 때 그의 아버지가 부탁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폴란드의 자랑이 되어다오.”
아들의 마음 속에 국가를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쇼팽의 선생님 역시 훌륭한 분이어서 떠나는 그에게 조그마한 은컵에다 폴랜드의 흙을 넣어 정성스럽게 싸서 주며, “어디를 가든지 조국을 잊지 말게. 이 한 줌의 흙을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해 주기 바라네”하며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부하는 동안 힘들 때마다 “나는 폴랜드 사람이다. 폴랜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지”하며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누구보다 폴랜드의 이름을 높이며 산 생애였습니다.
그의 유언은 “나는 폴랜드 흙이 담긴 이 컵을 나의 무덤 속에 넣어주시오”라고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죽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오직 당신의 이름이 나의 생명을 통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일군들이란 아무리 진리를 위하여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한다고 해서 메달을 수여하거나 훈장을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란과 조롱과 핍박으로 낙심케 하려는 도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군들을 위해서 돕는자를 붙혀 주시고 함께 일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시편 71편 14절에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3.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 되었습니다.
본문 11절에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할례 문제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전하고 싶어하던 십자가의 은혜를 만약 그가 할례 문제만 양보하였다면 유대인들은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였기에 그가 전하는 십자가에 걸림돌이 되어도 그는 할례를 반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2)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례를 좋아하면 표피를 제거하는 할례만이 아니라 아예 거세를 해 버리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들이 하는 일이 당시 우상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하던 거세를 연상하면서 그들을 아예 우상신의 제사장으로 취급하는 마음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구약 율법은 거세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그것을 생각하며 공동체에서의 제거를 생각하며 말합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에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막 병아리들이 삐약 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탉은 죽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도 그 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받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는 그 뜻을 깨닫고 즉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습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에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바울은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의를 소망'하면서 사는 오늘의 삶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과거로 돌아가는 십자가의 걸림돌이 되며 불신앙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이야기 같지만 실상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믿음의 삶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