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코, 속물은 아니다. 그래도 남자를 소개 받을 때 기본적인 조건은 미리 들어두자는 것이 나의 철칙이었다. 말하자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는 것이다. 물론 배기량 몇 cc 자동차를 모는지, 결혼 후 시부모에게 다달이 생활비를 보태드려야 하는지와 같은 민감한 사안까지는 묻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필수불가결한 체크 요소라고 믿는 내 친구 재인 같은 여자도 있으나, 차마 그 정도까지 대놓고 속되지는 못하다는 게 내 딜레마였다.)
하지만 적어도 출생연도가 언제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키가 큰 편인지 작은 편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기왕이면, 두산 베어스의 팬인지 엘지 트윈스의 팬인지, 혈액형이 O형인지 AB형인지 등등의 부가정보도 예습하고 나가는 것이 대화의 우월한 고지 선점에 유리했다.
하지만 안 이사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나와 만나게 될 상대남의 기본 정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안 이사 같은 사람들 눈에는 그저, 여기 ‘결혼하지 않은 나이 든 남자’가 있고 저기 ‘결혼하지 않은 나이 든 여자’가 있다, 라는 사실만이 중요한가 보았다. 그렇다면 그 둘이 짝이 되지 못할 이유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그 노총각 노처녀가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면, 저리 까다로우니 여태 저 꼬락서니로 남아 있는 거라며 혀를 차겠지. 어쨌거나 그가 건넨 쪽지를 주머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내일 중으로 김영수씨에게 꼭 전화를 하여 이번 주말을 넘기지 말고 만나보라는 것이 얼치기 마담뚜 안 이사의 신신당부였다.
▲ 그림=권신아 | |
“사실 우리 회사 여직원들 중에 누굴 골라야 하나 고민했어. 근데 역시 오은수씨만한 사람이 없더군.”
그는 마치 황태자비 간택 과정에 관여한 탐관오리처럼 생색을 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인데 오해는 하지 마. 오늘 아침 그 회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다른 직원들한텐 얘기 안 할 거지? 그럼 이제 은수씨와 나 사이에 둘만 아는 비밀이 생긴 거네. 흐흐.”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그 얼굴을 보자 하염없이 심란해졌다. 이 요상한 소개팅을 미끼로 나를 꾀어 프락치로 심어두려는 불순한 의도가 명백해 보였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복잡다단한 상념에 빠졌다.
자, 여기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둘은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각의 가족, 친구, 동료와 함께 전혀 별개의 추억을 쌓으면서 살아왔다.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걸어온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어느 날 처음 만난다. 호텔 커피숍에서, 정장을 떨쳐 입고, 서로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암호명처럼 숙지한 채 말이다. 그들은 매우 정중하고 약간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수인사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불과 얼마 뒤, 그들이 영원한 법적, 경제적, 성적, 정서적 공동체가 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그들의 가족, 친구, 동료에게 전해진다.
믿어지는가?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일이었다. 짐칸 가득 돼지들을 싣고 가는 트럭과 광화문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그날 밤, 메신저에서 만난 유희는 내 말에 코웃음을 쳤다.
‘모르니까 결혼하는 거지. 속속들이 잘 알면 지겨워서 왜 하겠니?’
나는 생고구마칩을 와그작거리면서 자판을 눌렀다.
‘말 되네. 근데 넌 안 해봤으면서 어떻게 알아?’
과자부스러기가 키보드의 ‘ㅂ’과 ‘ㅈ’ 사이에 점점이 떨어져 박혔다. 밤에 먹는 주전부리가 다이어트에 독약이라는 거,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이 육체만 가지고 사나? 가끔은 정신을 위한 웰빙도 필요한 법이다.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이 과자 한 봉지가 몇 kcal인지는 잠시 잊기로 한다. 어차피 딱 절반만 먹을 예정이니까. 아니, 운이 좋으면 3분의 1만 먹게 될 수도 있다.
‘바보야. 꼭 겪어봐야 아니? 남들 다 아는데 너만 모르는 거야 ㅋㅋ’
계집애. 한마디를 해도 꼭 덧정 없이 한다. 대꾸하고 싶지 않다. 그때 유희가 느닷없이 말했다.
‘은수야. 나 할 말 있어…. 비밀 지켜줄 수 있지?’
비밀? 궁금증보다 짜증이 먼저 몰려왔다.
남의 비밀은 듣고 싶지 않다. 저쪽에서 하나를 주면 이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건네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본규칙이다. 유희의 일급비밀을 듣게 되면 나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지? 원 나이트 스탠드에 대해서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하지 않겠다. 나는 불끈 결의를 다졌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까지 ‘인생 뭐 있나’이던 유희의 메신저 대화명이 어느새 ‘문제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용기다!!’로 바뀌어 있었다. 두 개 겹친 느낌표가 심상찮다. 무릇 메신저 대화명이란, 일상의 사건이나 심경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새로 써서 주변에 널리 알리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요즘 내 대화명인 ‘친절한 은수씨’는 사실의 반영일까, 이루고픈 소망일까, 아니면 교묘한 위장일까.
‘뭐야? 무슨 용기 필요한 일 있어?’
질문에 유희는 묵묵부답이다. 화장실에 갔거나 갑자기 급한 전화라도 걸려온 모양이다. 메신저로 대화하다 보면 흔히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제가 먼저 비밀을 털어놓겠다고 변죽을 올려놓고선 김빠지게 뭐야? 투덜대고 있는데 드륵 휴대폰이 진동했다.
‘-토욜 6시 대학로 어떠세여? 안토니오니 회고전이 있어여-윤태오.’
태오다! 주책없이 발가락 사이가 간질댄다. 몸이 알아서 먼저 반응하는 이 증세를 뭐라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메신저 창을 아래로 내리고 얼른 인터넷 지식검색 창에 들어가 검색해 보았다.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사진까지 뜨는 걸로 보아 꽤 유명한 할아버지인 듯했다. 토요일 저녁까지는 이틀이 남아 있었다. 승낙이든 거절이든 이번에는 반드시 답장을 해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일 터였다. 만날까? 말까? 아, 무슨 인생이 이토록 첩첩산중, 선택의 연속이란 말인가. 그때 뽀롱, 메신저 도착음이 들렸다. 유희가 돌아왔나 보았다.
‘은수야… 실은 나 오늘 회사 관뒀어.’
‘헉. 왜?’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유희는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중견기업 전산실의 과장이었다. 그녀는 우리 셋 중에 같이 잔 남자의 숫자도 제일 많고 돈도 제일 잘 벌었으며 승진도 제일 빨랐다. 그 번듯한 회사를 관두다니? 어디 더더욱 번듯한 데로 스카우트라도 된 게지.
‘나, 뮤지컬 배우가 될 거야.’
‘…………………………’
▲ 그림=권신아 | | 저 끝없는 말줄임표야말로 이 순간의 솔직한 심정이다. 뮤지컬 배우라. 멋지다, 멋져. 그렇지만 31세 미혼여성의 장래희망으로는 좀 너무하지 않은가? 차라리 알뜰 주부 선발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꿈이 현실적일 것 같다. 그래, 인정한다. 내 친구 강유희, 노래 잘한다. 댄스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에서의 일이었다. ‘가무’가 특기는 될 망정 어떻게 직업이 되겠는가. 10년 전이면 모를까, 두 달 뒤면 우리는 서른두 살이었다.
‘너 혹시 미친 거니?’
그러나 내가 키보드의 enter키를 누르는 것보다 유희가 좀더 빨랐다.
‘이해 안 되는 거 알아. 하지만 더 늦으면 정말로 후회할 것 같아서.’
그녀의 긴 대화명이 새삼 눈을 잡아챘다. ‘문제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용기다!!’ 느낌표 두 개가 안쓰럽게 꼿꼿했다. 나는 enter키 위에 놓여 있던 오른쪽 셋째손가락을 del 키 위로 조용히 옮겼다. 그리고 천천히 타이핑했다.
‘그래. 잘 해봐.’
막상 쳐 놓고 보니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뉘앙스가 풍기는 듯도 했지만 유희는 몹시 감격해했다.
‘ㅠ.ㅠ 정말 고마워. 너라면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어. 이젠 진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겠어.’
녀는 벌써 뮤지컬 배우 지망생을 위한 아카데미에 등록했으며 곧 재즈댄스와 연기레슨도 받을 거라고 했다. 나이는 좀 많은 편이지만 타고난 감각이 있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인생경험도 있으니 배우로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벅찬 희망을 늘어 놓았다. 모니터 가득 펼쳐지는 유희의 옹골찬 계획을 나는 멍하니 눈으로 좇았다. 재인의 결혼 발표를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둔하고 벙벙한 충격이 숨골을 내리눌렀다.
태오에게 ‘좋아요’라는 답장을 보낸 건, 유희가 ‘인생에 대한 용기!!’를 전염시켜 주어서일까? |
2부-선택의 시대
인생을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살다보면 내 의지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일어난다. 이를테면 하루에 두 명의 남자와 만나는 일. 따지고 보면 그렇게 부도덕한 것만도 아니다. 토요일 오후 두 시는 소개팅 하기에 딱 어울리는 시간이며, 토요일 오후 여섯 시만큼 데이트에 적합한 시간도 흔치 않으므로.
안 이사 와이프의 헬스클럽 동료가 소개해주는 남자 김영수는 휴대전화의 통화연결음을 따로 설정해두지 않았다. 통화연결음으로 어떤 음악을 깔아두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드러난다. 최신가요만을 골라 이틀이 멀다하고 바꾸는 사람에게서는 첨단유행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고, 처연한 클래식 연주곡만을 고수하는 사람에게서는 일말의 허영이 묻어난다. 컬러링 설정을 하지 않고 따르릉 소리를 그냥 놔둔 사람은 게으르거나 무심하거나 아니면 소심한 사람일 것이다.
김영수는 게으른 사람일까, 무심한 사람일까, 소심한 사람일까.
전화통화만으로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그의 전화매너는 딱 보통이었다. 깍듯하지도 않고 무례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목소리 역시 평범했다. 가늘지도 허스키하지도 않은, 특징 없는 목소리였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었다면 수업 내내 졸았을 것 같다. 우리는 토요일 두 시에 만나자는 데 쉽게 합의했다. 소개팅을 할 때에 식사시간을 슬며시 피하는 것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생활 상식이었다. 이번처럼 울며 겨자 먹기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김영수와 두어 시간 의무방어전을 때운 후에, 태오와의 약속장소로 옮기면 될 듯했다.
“그럼 어디서 뵐까요?”
“알아서 정하시죠. 저는 아는 데가 없어서.”
“어쩌지. 저도 아는 데가 없는데.”
말꼬리를 흐리고 나니 좀 우스웠다. 이 남자와 나는 지금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아는 데가 없긴 왜 없겠는가. 다만 자기가 선호하는 공간을 입 밖에 냄으로써 제 취향과 정체성을 노출하기가 싫을 뿐이다. 이럴 때는 여자가 좀 유리하다. 내가 잠자코 침묵을 지키자 하는 수 없다는 듯 김영수가 제안했다.
“신라호텔 커피숍 어떠세요?”
호텔이라니. 기를 쓰고 ‘소개팅’이고자 했던 만남이 졸지에 ‘맞선’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그래도 나는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순순히 동의했다. 어차피 회사 간부 사모님의 친구가 소개해주는 남자와 만나면서 ‘맞선’ 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편이 더 가증스러울지도 모른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서자마자 김영수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10%의 기대도 없었다. 안 이사에게 대충 면피만 하면 되는 것이다.
토요일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치열한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동네 사우나라도 갔다 와야 할 것 같았다. 물론 태오와, 또다시, ‘사건’을 벌일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인간사란 한치 앞을 모르는 법이 아닌가. 원룸의 코딱지만한 욕실에서 대충 샤워하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미진할지도 몰랐다.
옷은 어떤 걸로 입어야 하지? 신라호텔에 이어 곧바로 대학로까지 가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맞선용 옷차림으로 태오를 만나야 하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두 장소에 다 어색하지 않을 만한 옷을 필사적으로 골라야 했다. 첫 번째 후보는 청바지와 벨벳재킷. 이내 고개를 저었다. 김영수 씨는 분명 스리피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나올 텐데, 청바지는 곤란할 것이다. 두 번째 후보는 모직스커트와 니트 카디건. 호텔에선 무난하겠지만, 이 차림으로 태오와 나란히 길을 걷다가는 그의 막내고모쯤으로 보일 확률이 높았다. 안 되겠다. 겉옷은 일단 결정보류다.
서랍장의 마지막 서랍을 열어보았다. 브래지어와 팬티가 아무렇게나 뒤섞여 쌓여 있었다. 입을 만한 팬티로는 엉덩이에 미키마우스가 프린트된 것, 캘빈클라인의 회색 줄무늬, 고릴라에게 선물받았던 핑크색 땡땡이 정도가 눈에 띄었다. 어쩐지 다 마뜩치 않았다. 문제의 그날, 내가 무슨 속옷을 입었었는지 떠올려 보려 애썼다. 혹시 겹치기라도 하면 태오가 속으로 얼마나 무시하겠는가.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건지 아리송했다. 아니, 맞선 보러 나가는 여자가 당치 않게 웬 속옷 걱정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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