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19,46)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인간 의식의 정화이며 참된 성전인 몸과 마음의 정화를 위한 촉구이자 초대입니다. 오늘 복음 성전 정화를 들으면서, 공자와 안회의 「심재」에 관한 논의가 먼저 떠오릅니다. 어느 날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가 공자에게 감히 마음의 재계를 물었습니다. (敢問心齎) 그러자 공자께서는 심재를 묻는 안회에게 생뚱맞게도 심재의 반대쪽인 좌치坐馳를 언급합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공자는 좌치를 알고 깨우치면 심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곧 마음의 재계란, 『날개 달고 날았다는 말은 들었어도, 날개 없이 날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을 걸세. 지식으로 사물 이치를 안다는 말은 들었어도 무지로 모든 것을 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겠지. 저 텅 빈 것을 보게나, 휑하니 빈 방이지만 환하게 밝지 않는가. 좋은 것은 빈 마음에 모인다네. 그쳐야 할 곳에 그치지 않으면 이를 몸은 앉아 있어도 마음은 달린다, 라고 이름하지.(是之謂坐馳)』 (장자. 인간세) 좌치란 몸은 그대로 있으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이익이나 명예, 불필요한 관심, 감당하기 어려운 일로 인하여 생기는데, 이 때문에 본래 마음의 상태가 어지러워지게 되며 결국엔 본성(=장자가 말하는 심재)까지 침해되어 혼란스럽게 된다는 것으로 장자는 이를 매우 경계한 것입니다. 따라서 좌치의 상황은 욕망에 미혹하여 당연히 유지되어야 할 본성을 침해하게 되고 마침내 그 본성조차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재란 좌치’에서 회복을 의미하듯, ‘강도들의 소굴’에서 정화가 ‘하느님의 기도하는 집’으로 회복인 이치와 같다고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곧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며, 자기 말과 행동을 통해 여기 우리 가운데 아빠 하느님이 계시며,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아버지의 구원의 표지이시다, 라는 점을 환기하시고 되돌리시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당연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12살 때, 자신을 찾아 사흘 길을 헤매신 부모님께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2,49)라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바로 성전이었고, “아버지에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요2,17)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성전을 다시 찾기 이전부터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불타올랐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런 예수님이셨기에, “성전에 들어가시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쫒아내기 시작하시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19,4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돌발적인 반응이나 행동이 아니라 늘 예수님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에서 성전이 성전으로 회복을 위해 때를 기다렸던 겁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정화하신 성전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성전이나 성지라는 곳이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다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는지 감히 묻습니다. 성지순례를 가 보신 분들이라면 공감하시겠지만, 거의 모든 성지와 모든 곳의 성전이 상업화되고 세속화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싶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 정화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본래 회복! 근본으로 돌아감! 본래本來라는 말은 처음부터, 원래, 근본 등의 의미로서 천성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전의 본래 기능과 역할을 온전히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참된 성전 정화의 의도일 것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성전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 곧 나의 집이라 말씀하신 것은 지금까지 사람들은 성전하면 하느님의 집이었다고 생각했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자신의 강생과 현존을 통해서 사람들은 이제 성전은 바로 당신의 몸을 두고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임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2,21) 이로써 자신이 있는 곳에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고, 아버지 계신 곳에 당신 또한 함께 있다, 는 말씀을 통해 아버지의 집은 이제 당신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이, 본래 성전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끊임없이 정화를 반복해야 하며, 이는 우리의 과업이며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전 정화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본을 보여 주시고 솔선수범하신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19,47) 지금도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 아닌 기도의 집이 되도록 날마다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를 본받아 교회는 스스로 자정과 함께 늘 마음의 재계를 위한 반동으로 좌치에서 벗어나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잃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즐겨 하시는 아빠 하느님과 예수님이 아니시며 오히려 성전의 본래 몫을 다하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시며 안타까워하심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간직해야 합니다. 성전의 정화, 본래 회복을 부단히 노력할 때,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3,16.17) “주님, 당신께서 말씀하신 ‘성전을 허물라’는 말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날마다 성전을 정화하면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 육신의 감실에 머물러 주십시오. 아멘,”
(** 성녀 체칠리아 축일 맞는 분들, 모두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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