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오보입니다.
우정은 교수의 아버님은 주일공사, 경제기획원 기획차관보, 한국플래스틱 사장 그리고 쌍용사장을 지내신 우용해(禹容海,1925~ )씨이십니다. 아직 건강하게 살아계십니다. 우교수님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이니 빨리 기사 수정 부탁드립니다.
<우장춘 박사 딸, 버지니아대 학장 임용>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4.26 06:46
(워싱턴=연합뉴스) 고승일 특파원 =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한인 정치학자인 우정은(49) 미시간 주립대 교수가 명문 버지니아대의 문리대학.대학원 학장을 맡게됐다.
우 교수는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딸이자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인 미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교수(시카고대)의 부인. 한인 여성이 미국 유수대학의 학장에 임명되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버지니아대는 25일 홈페이지를 통해 우 교수의 학장 임용 사실을 우 교수 사진을 곁들여 소개했다. 앞서 존 캐스틴 3세 버지니아 대학 총장은 전날 문리대 교수진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사실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 교수는 콜롬비아 대학과 콜게이트 대학, 노스웨스턴 대학을 거쳐 2001년부터 미시간 주립대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 석좌교수이자 사회과학대 부학장을 맡아왔다.
그는 1996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에 의해 백악관 자문위원회(the Presidential Commission) 위원으로 임명돼 미국과 태평양 지역의 무역 및 투자 정책에 대해 조언을 했다. 그는 미 무역대표부(USTR),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아시아 재단, 맥아더 재단 등의 정책 자문에도 응했다.
우 교수는 커밍스 교수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ks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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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상원 |
| 상태가 좋지 않고 또 작지만 사진을 자세히 봐 주십시오. 사진 가운데 흰 두루마기를 입은 분이 세계적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입니다. 민비 살해를 돕고 일본으로 도망간 부친과 일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지요. 부친의 매국을 사죄하고자 말년에 귀국, 원예기술원을 만들어 한국 원예육종학을 한단계 발전시킨 분이지요.
우 박사님 오른쪽으로 군복 같은 옷을 입고 계신 분이 농진청에서 원예육종을 연구하던 전 선생님이고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꺼벙 머리에 작업복을 입으신 분이 역시 농진청에서 육종을 연구하신 고 박사님 입니다.
뒷줄 맨 왼쪽에 계신 분이 원예기술원에서 우 박사의 조교노릇을 하시며 창경원 식물원장을 지내셨던 제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이십니다. 가벼운 풍을 맞으셨는데 사진 인물 중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색 두루마기를 입고 수염을 기르신 어른이 제 부모님을 결혼시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한국 정부로부터 때늦은 독립운동 훈장을 수여받은 지운 김철수 선생이십니다.
일제시대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시고 해방을 맞으신 분입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분으로 동아일보 주필을 지내신 양운모 선생 등과 동창이시기도 하지요. 지운 선생은 한국민족이 바르게 사는 길을 사회주의에서 찾으셨던 분입니다. 동양 3국 중 공산당 활동을 조선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신 분이지요. 조선노동당 2차 전당대회 책임비서를 지내신 분으로 소련 코민테른의 조직자금을 들여와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한 분이기도 하구요.
일제시대 이승만의 목숨을 살려준적이 있어 군정 이후 이승만 정권당시 지방 일간지에 정치 은퇴선언을 하는 조건으로 정권의 보호를 받은 유일한 사회주의 계열인사입니다.
북에 있는 자제분들 중에는 부상, 그러니까 남한으로 치면 장관을 지낸 양반이 2분이나 계십니다. 그 덕에 지운 선생은 해방이후 외국 나드리 한번 못하시고 아흔 셋 평생을 남한땅 부안 백산에 손수 지은 운막에서 칩거하며 보내셨습니다.
바로 이 분 때문에 이 사진도 오랜세월 은밀하게 숨겨져 있어야 했습니다. 친분관계만으로 북한 간첩으로 몰릴 수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이씨 조선 이후 일제시대 지식인들은 그 어떤 이상주의적 사회주의를 꿈꾸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지향점도 유럽식 사회주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직 어느것이 최고다 단정할순 없지만 지운 선생같은 사상적 행동가들이 있어 한국 사회가 그나마 평등성을 향해 나갈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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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4 11:43 |
ⓒ 2005 OhmyNew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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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우장춘 박사 씨 없는 수박·제주도 감귤 개발 등 우리 나라 농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탄생시킨 과학자입니다. 우 선생은 1950년 우리 나라의 농업 발전을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해 부산시 금정산 자락의 한국농업과학연구에서 우리 나라 육종 발전을 위한 첫발을 내딛습니다. 선생은 이후 씨 없는 수박을 비롯해, 배추와 무가 함께 자라는 채소ㆍ제주도 감귤 등 다양한 육종 상품을 내놓습니다.
◇ 나라의 부름 받고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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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없는 수박. 1953년 한국에서 이 수박을 처음 만들어 재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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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구청에 자리한 우장춘기념관. 박사가 육종 연구 때 썼던 현미경과 유품 10여 점이 전시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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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감자. 줄기에서는 토마토가 자라고 뿌리에서는 감자가 자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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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모은 부의금으로 원예시험장 안에 우물을 파 '자유천'으로 이름지었다. 박사는 매일 아침 여기서 나온 물로 세수를 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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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귀국 환영 대회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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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의 묘. 수원 농촌진흥청 안 여가산 기슭에 있다. | 광복 당시 우리 나라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80 %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배추나 무 등 채소의 씨를 만들 수 있는 사람과 회사는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으로부터 채소 씨앗을 들여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광복 후 우리 나라는 일본과 교류를 단절했기 때문에 채소 씨를 일본으로부터 수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한국이 일본에서 육종학자로 널리 알려진 우장춘 박사에게 육종 개발을 부탁한 것이지요.
“일본에서 태어나서 여태 사신 분이 왜 한국에 가시려고 합니까?”
“비록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지만 한국은 나의 고국입니다. 조국의 동포들이 내가 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야지요.”
우장춘 박사는 동료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에서 급히 귀국했습니다.
◇ 일본서도 늘 고국 잊지 않아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명성 황후가 시해되던 당시 별기군 훈련 제2대대장이었습니다.
그는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 명성 황후의 시해를 방조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 파천’이 일어나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그는 여기서 사카이와 결혼, 우장춘을 낳습니다. 하지만 고영근에게 암살 당해 우장춘은 일본 국적을 갖고 살았습니다.
“너는 조선인이다. 성은 우씨이고 이름은 장춘이다.”
어머니는 어린 우장춘이 항상 조선인임을 잊지 않도록 성심껏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에 동생이 태어나자 우장춘은 3 년간 고아원에 맡겨집니다. 어머니 혼자서 형제를 키우기에는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묘터를 팔아 우장춘을 집으로 데려옵니다.
우장춘은 나중에 도쿄 제국 대학 부설 농학실과를 일본인이 아닌 조선 유학생 신분으로 당당하게 입학했습니다. 조선인으로 남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육종 연구소에 근무하며 이름을 알립니다.
◇ 육종 연구에 많은 업적 남겨
일본에서 30 년을 육종 연구에 바친 선생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귀국해 부산 금정산 기슭 ‘한국농업과학연구소’에 보금자리를 틀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우장춘 박사를 서울로 불러 격려했습니다.
“우 박사, 대한 민국에 와서 고생이 너무 많소이다.”
“학자는 옷이나 고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연구에 몰두할 많은 시간과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소만 바랄 뿐입니다.”
우장춘 박사는 이처럼 자신의 불편한 환경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육종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심지어 일본에 사는 장녀 결혼식에도 참석치 않았고, 어머니의 장례식조차 가지 못했습니다.
우장춘 박사가 일본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우리 정부에서 못 가게 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조국을 위해 내가 가족을 버리고 왔단 말인가! 하지만 조국이 나를 알아 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우장춘 박사는 한국에 살면서 때로는 비통해 하며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애국심으로 온갖 고민과 어려움을 이겨 내고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1959년 8월 10일 많은 업적을 남기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생은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나라의 농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널리 존경 받고 있습니다.<끝>
☆ 우장춘 박사 연보 ☆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남. 1902년 아버지가 자객에게 암살 당함. 1919년 일본 도쿄 제국 대학 농학부 졸업. 1920년 육종학의 연구 시작함. 1950년 귀국함.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이 됨. 1954년 어머니 세상을 떠남. '자유천' 만듦. 1957년 제1회 부산시문화상(과학상)을 받음. 1958년 농사원 원예시험장 책임자가 됨. 1959년 세상을 떠남. 수원 농촌진흥청 안 여가산에 묻힘. |
/김남석(작가)
입력시간 : 2005-02-2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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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박사님이 '씨없는 수박 (일본인 육종학자 `키하라 히또시`)'을 만들었다는 건 낭설입니다. 우장춘 박사님은 식물육종학의 아버지로 '겹빼쭈니아'를 육종하신 분입니다. 홀꽃잎 빼쭈니아가 겹꽃잎으로 피는데 전후 일본농촌을 원예강국으로 만든 분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