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임대 郭臨大, (1885 ~ 1971)】 「1911년 105인사건으로 체포」
1885년 9월 9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아버지 곽재명(郭在明)과 어머니 전주 이씨 슬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국외로 망명하기 전까지 자(字)는 임대(林大), 이름은 태종(泰鍾)이었다. 1896년 해주에서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의 여동생 안태희(安泰喜)와 혼인하였다. 이러한 혼맥은 훗날 안중근·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배경이 되었다.
1905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교장 맥큔(George S. McCune, 尹山溫)의 권유로 선천(宣川)의 신성학교(信聖學校)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09년에는 안창호가 조직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11월에는 이른바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약 2년간 옥고를 겪은 뒤, 1913년 10월 9일 무죄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국외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미국에 갈 배편을 구하려고 길진형(吉鎭亨) 등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길원·임초(林超)·윤필건(尹必建)·오종현·왕세진 등과 함께 1914년 9월 2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1914년 9월부터 1917년까지 대한인국민회가 한인 2세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학생양성소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였다.
1916년 4월 27일 민찬호(閔贊鎬)·임초·길천우 등과 함께 국어 교육를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유년 하기 국어강습소를 발기하였다. 하기 국어강습소에서 국어 교육과 함께 상무 교육도 실시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삼국지(三國志)』·『열국지(列國志)』 등을 즐겨 읽었으며, 신성학교 교사 시절에도 병식 체조 등의 훈련을 실시한 경험이 있었기에 하기 국어강습소에서 잠수 기술·병식 교육 등의 상무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5년 대한인국민회 클레어몬트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17년 8월 13일부터 안창호의 권유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표원으로 활동하였다. 안창호가 1919년 4월 1일 중앙총회에서 모금한 6,000달러를 소지하고 상하이로 떠나자, 9월 15일 윤병구(尹炳求)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0월 14일 총무로 임명되었다.
1920년 4월 노백린(盧伯麟)이 운영하던 비행사 양성소의 지원금을 둘러싸고 총회장과의 이견으로 중앙총회 총무를 그만두었다. 조병옥(趙炳玉)·천세헌(千世憲)·임초·하희옥 등 흥사단에서 같이 활동하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1921년부터 뉴욕으로 이주하여 뉴욕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 초까지 워싱턴회의가 개최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외교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뉴욕을 중심으로 공동회가 조직되자, 공동회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공동회 준비위원으로 천세헌·이원익(李源益)·허정(許政)·조병옥·임초, 총재무로 서재필(徐載弼)을 선정하였다. 하지만 후원금 모집 주체를 두고 서재필(필라델피아 통신부)·흥사단·구미위원부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뉴욕지방회장 자격으로 공동회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1928년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정착하여 한인 2·3세대들의 국어 교육을 위해 야간 강습소를 개설하였으며, 1930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내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1930년 1월 30일 김종림(金宗林)·김헬나·한영대·김강 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공동회를 조직하였다. 공동회에서 10개조로 구성된 공동회 규칙을 제정하고 위원장 김종림과 함께 서기로 활동하였다. 미주 각지에 산재해 있던 공동회의 선전 활동과 재정력을 집중하고자 대한인국민회와 여러 공동회 관계자들은 1931년 3월 10일부터 11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재미 한인 중앙선전부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중앙선전부가 별다른 성과 없이 해체되자 공동회 활동도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이후 흥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흥사단보』 발행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였다는 소식이 미주에 전해지자 로스앤젤레스 공동회에서 다시 활동하였다. 미주 각 지역의 공동회와 대한인국민회 관계자들은 12월 5일부터 7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원탁회의를 열어 미주한인연합회의 14개조 규칙과 임원을 선정하였다. 미주한인연합회는 집행부와 입법부로 구성하며, 집행부는 로스앤젤레스에 두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과 안석중·손승조 등과 함께 후원금을 모집할 수전(收錢)위원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대한인국민회가 1933년 4월 미주한인연합회에서 탈퇴하자, 그동안 몸담아 왔던 대한인국민회와 결별하였다.
1937년 12월부터 로스앤젤레스에서 변준호·김강·이경선 등과 함께 중국후원회를 조직하였다. 1938년 9월 대한인국민회가 중일전쟁 이후 미주의 독립운동 방향을 다시 설정한다는 취지에서 토론회를 개최하자, 변준호와 함께 참석하여 동아시아 지역에 미주 독립운동의 실상을 전달하기 위한 특파원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대한인국민회 관계자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세력으로 조선의용대가 10월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조직되자, 1939년 9월 신두식·최능익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중국후원회를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The Korean Volunteers Corps Aid Society in China)로 개편하는 작업에 앞장섰다. 조선의용대의 군사 활동과 무장투쟁 노선을 홍보하기 위해 『의용보』를 창간하였으며, 일화(日貨) 배척, 군수품 일본 수출 반대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1942년 6월 30일 김원봉이 중심이 된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군사 활동을 후원한다는 목적으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로 개편하고 서기로 활동하였다. 1943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의 기관지로 『독립』을 창간하였으며, 여기서 장재(掌財)·영업·이사부장·부사장·편집인 등을 역임하였다. 『독립』에 각종 논설 등을 기고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이승만(李承晩)의 대미 외교 활동의 한계점을 지적하는 한편, 무장투쟁 독립운동 노선을 부각시켰다. 미주 지역의 13개 단체가 1944년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관에서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문제를 논의하자, 이 회의에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대표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여기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해줄 것으로 요청하였으나, 김구(金九)가 대한인동지회가 불참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논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해 12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참여를 결정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에서 서기를 맡아 군사 활동 후원금 모집을 담당하였다. 자서전으로 『못 잊어 화려강산(華麗江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