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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의 틀을 깨자"
여러분은 토끼와 거북이의
이솝우화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당연히 토끼가 이겨야 하지만, 달리기 경주에서의 승리자는 거북이였습니다. 토끼가 자만에 빠져 잠을 잔 사이 거북이는 포기하지 않고 달려 결승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현재에 와서 다시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한다고 하면 토끼가 방심 하지 않는 이상 거북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토끼를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왜 꼭 육지에서만 경주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경주 장소를 바다로 바꾸어 보는 건 어떨까요. 토끼가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해도 바다 위에서 거북이를 이기기는 힘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육지에서만 경기를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요? 틀을 깨보세요! 생각을 변화 시켜보세요! 새로운 세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생각의 틀을 깨기란 참 힘듭니다.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우리는 항상 정해진 방식과 틀에 갇혀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때입니다. - 나의 변화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 "생각의 뒤집기, 가지치기" 작은 의약소재기업을 경영하는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연구원 두 사람에게 신제품 개발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 회사의 신제품 개발은 화학방정식 개발에서 시작된다. 즉 방정식을 얼마나 많이 개발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의약품의 원료는 식물이나 동물에서 추출하기도 하지만 화학원소를 이용하여 방정식을 만들고 이 방정식이 물질이 되는지,그리고 그 물질이 유효한지 여부가 관건이다.
결과적으로 한 연구원은 다섯 개의 방정식을 개발했고 다른 연구원은 서른 개가 넘는 방정식을 개발했다. 상상력의 차이라고 친구는 말했다. 뭔가를 만들어 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운동하는 물체는 지속하여 한 방향으로 운동하려는 속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관성의 법칙은 운동만이 아니라 생각에도 적용된다. 문제해결을 위해 어떤 한 방향으로 생각하다 보면 그 방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답은 다른 방향에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생각의 관성을 깨는 것, 생각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것, 이것이 상상력이다. 벤처기업을 하는 그 친구의 방식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우선 문제를 뒤집어 본다. 한 번 뒤집고 한 번 더.앞에서 보고
뒤에서도 보고 밖에서 보고 안에서 보고, 가까이 보았다가 멀리서도 보고,
잠시 쉬었다가 보기도 하고, 이게 '생각의 뒤집기'다.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뇌의 영역에서 문제의 해법을 찾는 것이다. 그 가운데 분명 답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상상력의 시대다.
상상력을 기르는 '생각의 뒤집기'와 '생각의 가지치기'는 참 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준훈 님 / 시인, 산업은행
금융팀장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회장 이야기(3)"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 1984년 일본의 전화통신사업 자유화 당시, 이나모리가 제2통신회사를 창업하려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를 무모한 돈키호테로 비유하며 비웃었다. 100년 동안 전화 사업을 독점해오던 일본전신전화공사(NTT)에 맞서 전화 산업을 시작하겠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이나모리는 이전부터 꾸준히 정보통신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하고는 있었다. 창립 20주년인 1979년엔 정보통신사업의 기술 토대가 되는 트라이텐트사와 사이버네트공업을 인수했다. 1982년에는 교토세라믹에서 교세라로 사명을 바꾸며 세라믹 기업에서 정보통신 기업으로 변신했다. 이듬해에는 세계 최초로 일렉트로닉스 카메라를 만든 야시카까지 합병했다.
하지만 NTT는 민영화 당시 연간 매출액 4조엔 규모에 종업원 수만도 33만명에 이르는 공룡기업이었다. 반면 교세라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매출액 2200억엔에 직원 1만1000여명이었다. 마치 골리앗과 다윗처럼 보였다. 게다가 이나모리는 전화사업엔 문외한이었다. 그는 화학을 전공했으며, 통신기술 지식은 거의 없었다. 그런 그가 NTT에 도전한다는 것은 마치 돈키호테가 창하나 달랑 들고 풍차에 맞서 싸우는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듯했다.
당시 NTT는 메이지유신 이후 통신회선을 전국 구석구석까지 깔아 놓고 국내 전화를 독점하고 있었다. 경쟁이 없는 독점기업이었기에 일본 전화요금은 세계적으로 비싼 수준이었다. 이나모리는 새로운 전화 회사가 등장하면 경쟁을 불러오게 되고, 비싼 전화요금도 내려갈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누구도 이 공룡 기업과 맞서는데 나서지 않았다. 리스크가 너무 컸다. 어느 회사도 제2통신회사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제2통신회사가 잘못되면
모회사도 휘청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나모리는 6개월 동안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스스로 자문자답을 했다.
‘세상에 나를 드러내기 위한 사심은 없는가? 내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것 때문인가? 국민의 이익을 위한다는 생각은 순수한가?’
마침내 이나모리는 세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뜻이 확고부동하다고 확신하고 공룡 NTT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교세라는 창업 이래 쌓아 놓은 잉여금 1500억엔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1000억엔을
쓸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나모리는 1983년 교토세라믹 이사회에서 제2통신사인 DDI(다이니덴덴) 설립을 제의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여겼던 통신사업진출, 현재 KDDI의 모태가 된 DDI 창업은 이 이사회에서 결정됐다. 이나모리는 도쿄에서 열린 한 경제인 모임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면 내가 참여할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자, 소니 사장 등 많은 경제인들이 선 듯 찬성해 주었다. 교토세라믹이 중심이 되고, 우시오전기, 세콤, 소니, 미쓰비시상사 등 4개사가 발기인이 되어 총 25개사가 주주로 참여했다. 이나모리는 발기인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통신사업은 메이지유신 이후 정부에서 직접 관리했습니다. 이제 100년 만에 대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민을 위해 일본의 통신요금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번 살다 가는 인생, 나는 목숨을 걸고 이 사업을 성공시킬 것입니다.” 통신사업에 새로운 역사를 쓰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내걸고 출발했지만, 직원은 겨우 20명이었다. 그럼에도 이나모리가 통신사업에 진출한 것은 ‘경쟁을 통해 전화요금을 내리면 국민에게 이익이 되고, 그것이 공익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굳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경영전략을 수립할 때마다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그 결과 그의 신념을 믿은 20명의 통신 분야 전문가가 모여든 것이다. 이런 움직임에 NTT는 처음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일본 최대 기업에 다니고 있다는 뿌듯한 자부심에 안주했던 그들은 교토의 일개 전자부품 회사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나모리와 20명의 기술자들은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쳐 뚝심 있게 미지의 사업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나모리 앞에는 또 다른 역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가을 일본 국철(JR)과 니혼도로공사가 통신사업에 뛰어들었다. 국철은 신칸센을 따라 광섬유를 깔 수 있었고, 고속통신은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 광섬유를 매설할 수 있었다. 통신선로를 확보하는 게 성패의 관건이었다. 이나모리는 국철 CEO를 만나 “선로주변에 회선을 깔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돌아온 건, 정중한 거절이었다. 이나모리는 “국가 시설이자 국민의 재산인 국철 선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항의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니혼도로공사에서도 거절당했다. 주변 사람들도 처음엔 “제2전전이야말로 통신 자유화의 첨병”이라고 추켜세웠으나, 몇몇 회사가 새로이 참여하자 거품론을 들먹이며 우려했다. 이듬해 6월 DDI는 시외전화 사업권을 확보했다. 이나모리는 철도망과 도로망을 따라 통신선을 까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방안을 찾아냈다. 무선으로 통신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지국을 세워야 했다. 도쿄-나고야-오사카를 핵심 축으로 삼고 그 사이를 잇는 8개의 중계기지국을 건설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계획 추진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땅을 사기 위해 협상을 벌여야 했고, 파라볼라 안테나 설치와 무선장치 건설 등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업무였다. 전문가라도 제대로
해내기 힘든 아주 고된 일이었다. 경쟁회사는 이미 확보된 선로와 도로를 따라 통신선을 깔기만 하면 됐다. DDI는 상황이 달랐다. 만약 중계기 완공이 늦어져 서비스 개시가 뒤처지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이나모리는 “100년 만에 한번 올까 말까한 대변혁기다. 반드시 성공해서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중계기가 들어설 터에는 길조차 없는 곳도 있었다. 겨울에는 눈이 5미터 이상 쌓여 일대가 눈에 묻혀 있기도 했다. 여름에는 모기에 물려가면서 밤낮없이 공사를 진행했다. 철골이나 시멘트는 헬리콥터를 이용해 수송했고, 작은 물자는 인부들이 어깨에 지고 산길을 걸어서 날랐다. 이런 노력 끝에 이나모리와 그 직원들은 3년 걸릴 것으로 예측됐던 기지국을 2년4개월 만에 개통시켰다. 본격적인 서비스에 앞서 기업을 상대로 한 전용 시외전화 사업을 했다. 쉽지 않았다. JR과 니혼도로공사에 견줘 DDI는 기업 영업에서 압도적으로 분리했다. 당연히 계약건수도
최하위권이었다. 승부는 기업이 아니라 일반인을 상대로 한 서비스로 정했다. 서비스 개시일인 1987년 9월4일 자정, 이나모리는 도쿄의 DDI본사에서 전화 다이얼을 눌렀다. 교토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축하합니다, 이나모리 회장님!”
사무실에 있던 직원 모두가 환성을 질렀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NTT와 신생 통신 3사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도쿄-오사카 간 통화료는 NTT가 3분 기준으로 400엔이었다. 반면 신생 통 3사는
300엔으로 책정했다. 제2통신사를 이용해 시외전화를 걸면 0077 같이 네 자리 숫자를 먼저 눌러야 했다. 사람들은 이걸 불편해 했다. 이나모리는 요금이 낮은 전화회사를 자동으로 선택해주는 DDI어댑터를 개발했다. 그 뒤 0077을 누를 필요가 없는 편리성을 무기로 시장 공략에 나섰다. 자본과 기술, 인력의 열세는 물론 성공할 수 없을 것이란 냉담한 여론 속에서 비싼 전화요금을 내려 그 혜택을 국민들에게 돌려주자는 대의명분을 갖고 시작한 통신사업이었다. 결과는 더디지만 성공적이었다. NTT의 독점으로 3분에 400엔을 웃돌던 도쿄-오사카 간 전화요금은 DDI의 등장으로 경쟁구도로 바뀌면서 불과 몇 년 뒤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그 뒤 DDI는 설립 10년 만에 일본 최대 민간 통신회사로 성장한다. 몇 년 뒤 휴대폰 사업 역시 경쟁체제로 바뀌게 된다. 이나모리는 DDI 이사회에서 “맨 먼저 진출하자”고 제안했다. 당시만 해도 휴대전화는 전화벽돌마냥 컸고, 부유층들이 쓰고 있는 사치품의 일종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휴대폰 사업으로 수익을 내는 기업은 없었다. 때문에 DDI 이사회에선 이나모리와 한 사람을 제외한 전 임원이 휴대폰 사업 진출에 반대했다. 이나모리는 눈 깜짝할 새 기술 개발이 진행돼 왔던 반도체 분야의 IC패키지를 개발해 왔기 때문에 정보통신 분야에서 스피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나모리는 “통신사업에서 스피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확신했다. 이때 일본고속통신도 휴대전화사업을 신청했기 때문에 사업인가를 맡고 있던 우정성은 서비스 지역을 나누기로 했다. 하나는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지역과 나고야를 중심으로 한 도카이지역이었다. 다른 하나는 홋카이도와 규슈, 오키나와 등 일본 북부와 남부 지역이었다. 두 지역 중 어느 곳을 얻느냐를 놓고 DDI와 일본고속통신은 의견 접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도쿄와 나고야를 잇는 지역은 대도시가 집중해 있고, 수요가 큰 지역이어서 두
회사 모두 이 지역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싶었다. 이나모리는 “이대로 서로 대립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이라며 한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수도권과 중부권을 경쟁사에 넘겨주고 홋카이도와 규슈, 오키나와 지역을 할당받았다. 경쟁상대의 시장규모의 5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나모리가 결과를 DDI 이사회에 설명하자, 이사회 위원들은 “이나모리씨, 당신은 만두 속의 맛있는 것은 상대방에게 빼앗기고, 껍데기만 받아 돌아왔단 말이오!”라며 질타를 퍼부었다. 이에 이나모리는 이렇게 대응했다.
“껍질이라도 먹으면 죽지는 않는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모두 힘을 다해 그 껍질을 황금피로 만들겠다.” 교세라의 통신사업 진출은 다각화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사실 교세라는 다각화 경영으로 성장을 반복해 왔다. 한편에선 인수ㆍ합병(M&A)으로 돈을 벌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에 이나모리는 “도의에 따라 회사를 떠맡았을 뿐 결코 사냥꾼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실제로 교세라는 성과 좋은 기업을 인수해 주가차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적자로 부도위기에 처한 기업을 M&A해 흑자로 만들었다. 이나모리는 M&A 뒤 인원삭감 없는 고용보장을 통해 조직원의 역량 발휘를 이끌어냈다. 이나모리는 인수 기업을 기존 사업과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이끌어 냄으로써 어려움에 처한 기업들의 부활을 돕는 동시에 수익 창출 방법을 모색해 오고 있는 것이다.
교세라와 도요타의 M&A로 KDDI가 탄생하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의 소속팀이었던 교토퍼플상가 프로축구팀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에서
J리그가 출범하기 직전, 이나모리는 프로축구팀을 지원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사실 이나모리는 축구의 ‘축’자도 모를 만큼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일본의 최고 인기 스포츠는 프로야구였다. 프로축구가 창설되더라도 젊은이들이 좋아할지는 의문이었다. 게다가 교토는 스포츠와 그리 인연이 깊은 곳도 아니었다. 인근 오사카만 해도 한신 타이거스 같은 프로야구단이 있었지만, 교토에는
프로야구단도 없었다. 그러나 교토 시민들은 프로축구단 설립을 간절히 바랬다. 체육회 인사들은 25만명의 시민 서명을 받아 이나모리에게 가져왔다.
‘교토에는 프로 팀이 없다. 교토의 젊은이들이 열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결국 이나모리는 프로축구단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교세라는 교토퍼플상가의 메인 스폰서 됐다. 같은 교토기업인 닌텐도 등과 함께 출자하기로 하고, 자본금
18억엔 가운데 10억엔을 교세라가 맡기로 했다. 막상 J리그가 출범하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나모리는 교토 퍼플상가 홈게임이 열릴 때마다 자주 경기를 보러 갔다. 이기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지만 지면 분해서 참을 수 없었다.
“회사 경영이라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축구만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경영인 이나모리가 한 때는 종교인 이나모리가 된 적도 있다. 1997년 9월 그는 교토의 한 사찰에서 출가의식을 치렀다. 그는
‘다이와’라는 법명까지 받았다. 그는 종교인으로 변신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인생이 80년 정도라고 여겼다. 태어나서 20년은 사회 진출을 위한 준비기간, 다음 40년은 사회와 자기 계발을 위해 일하는 기간, 마지막
20년은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20년을 맞기 위해 종교에 귀의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 스님에게 그 문제를 상의했다. 그 스님은 “삭발하고 출가하십시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사회로 돌아가 공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의 출가에는 개인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해 1월 건강진단을 받았다. 위에서 이상이 발견됐다. 위암이었다. 위의 3분의2를 잘라냈다. 수술이 끝나고서도 그는 한 참 동안 물 몇 모금만으로 식사를 대신해야 만했다. 차츰 호전되자 미음을 먹었는데, 갑자기 손에 진땀이 날 정도로 고통이 시작됐다. 다시 검진을 받자, 위와 장의 봉합 부분에서 미음이 새어나온 것이었다. 만약
미음을 많이 먹었다면 복막염까지 일으켜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고 의사는 말했다. 완전히 치유된 몸은 아니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가능한 빨리 출가를 하고 싶었다. 그는 주주총회에서 교세라, DDI 회장직을 모두 물러나고 출가 수행하기로 한다. 늦더위기 한창인 그해 9월 가족과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드디어 출가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11월에는 절에서 수행을 한 적도 있었다. 초겨울 추운 새벽 3시에 기상, 밤 11시에 취침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식사도 ‘1즙1채소’로 소박한 죽과 무국 한 그릇이 전부였다. 위를 잘라낸 뒤여서 그것조차 다 먹을 수 없었다. ‘일어나
다다미 반장, 누워 한 장’이라는 좌선 삼매경을 체험했다.
수술 뒤 몸으로는 어려운 수행이었다. 탁발(도를 닦는 승려가 경문(經文)을 외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동냥하는 일)도 했다. 탁발은 어두운 남색 무명옷에 삿갓, 맨발에 짚신 차림으로 신도의 집들을 돈다. 문 앞에서
경문을 읽고 어깨에 걸친 바랑에 보시로 쌀을 받았다. 짚신 밖으로 삐져나온 발가락이 아스팔트 지면에 스쳐 피가 흔건해 진적도 있다. 할 수
없이 지팡이에 중심을 실어 걸으면 이번에 팔이 아파왔다. 저녁때쯤 무거운 바랑을 늘어뜨리고 지친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길에
떨어진 낙엽을 쓸고 있던 한 부인이 다가왔다.
“힘드시죠? 이걸로 빵이라도 사 드세요.”
100엔짜리 동전이었다. 그것을 받았을 때 이나모리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행복감으로 눈물이 나오려 했다. 그 부인은 결코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이나모리에게 보시한 아름답고도 고운 마음은 그때까지의 삶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전신에 퍼져 나가는 행복감을 느꼈다. 애초 일본 정부는 민영화를 위해 공룡기업 NTT를 분리 분할한다고 밝혔다. 장거리전화 회사와 지역전화 회사로 분리해 공정한 경쟁을 유도한다는 게 그
뼈대였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NTT의 막강한 로비를 받아 이런 계획을 무산시켜 버렸다. NTT를 지주회사로 만들어 장거리 회사와 지역전화 회사를 거느릴 수 있도록 했다. 오히려 독립적으로 경영해왔던 휴대폰 서비스 사업 업체인 NTT도코모를 산하에 거스르게 했고, 국제통신
서비스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정부는 공룡 NTT를 분리해 민간과 경쟁을 시키기는커녕 ‘ 공룡 이상의 공룡’으로 NTT를 독점 기업화 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민간
통신 기업들은 새로운 대책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공룡과 맞서 싸우려면 그에 맞는 덩치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NTT에 대항하는 세력끼리 힘을 합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여기저기 분산돼 있던 민간 기업들이 서로 한데 모여야 했다. 인수합병(M&A)이였다. 위기감을 느낀 이나모리는 M&A에 시동을 건다. 국제전화와 시외전화 사업에서 NTT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전신전화주식회사(KDD)와 접촉을 해야만 했다. 휴대전화 사업에서도 힘을 키워야 했다. 한때
서비스 지역을 놓고 싸웠던 일본이동통신(IDO)과 협상할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KDD는 일본에서 국제전화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NTT가 국제전화사업에 뛰어들 수 있게 되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양측은 M&A 협상을 벌였지만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KDD는 일본에서 국제전화를 처음 시작했다는 자긍심으로 자신들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 특히 KDD는 합병 뒤에도 회사 이름을 KDD로 하자고 요구했다.
“DDI는 설립된 지 15년 밖에 안 됐죠? 미국의 AT&T, 영국의 브리티시텔레콤(BT), 일본의 KDD라고 부를 정도로 우리는 기술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합병
뒤에도 반드시 KDD 브랜드가 돼야 합니다.”
IDO의 최대주주는 도요타자동차였다. 도요타자동차는 협상의 선결조건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요구해 왔다. 즉
경영권을 공동으로 가져가기 위한 선제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에 이나모리는 대등 합병에 반대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나모리는 대등 합병으로 잘 된 기업은 단 한번 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은행 간 합병은 경영권을 누구도 일방적으로 확보하지 않은 대등합병이 대부분이었는데, 자리
나눠먹기만 있었고 책임 경영은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이나모리는 협상을 할 때마다 일본의 정보통신산업을 건전하게 발전시키려면 무엇보다 NTT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이기심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뜻을 합치자는 말을 했다. 한 기업의 이해에 집착하지 말고 대의에 따르자는 것이었다. 통신업계는
변화가 급격하기 때문에 신속한 의사결정도 불가피했다. 밀고 당기기 여러 차례 드디어 역사적인 합병이 이뤄졌다. IDO, KDD, IDO 등 통신 3사는 2000년 4월1일에 합병 계약서에 조인한다고 밝혔다. 새 회사
이름은 KDDI였다.
합병 충격은 엄청났다. 언론은 NTT에 대항할 축이 실현돼 통신업계는 NTT와 KDDI의 2강 구도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나모리의
3년에 걸친 끈질긴 교섭 결과, 과거에 없는 역사적인 합병을 완수한 것이었다. 물론 이나모리가 통신사업에서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리듐 사업에선 톡톡한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1991년 5월 모토로라의 로버트 갈빈 회장이 교세라 본사를 찾았다. 이리듐 계획에 협력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77기의 통신위성을 쏘아 올려,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통화할 수 있는 휴대전화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모토로라는 전 세계에서 투자자를 모으고 있었다. 교세라는 오래 전부터 모토로라에 전자부품을 납품하고 있었다. 또
휴대전화 사업을 개시했을 때 모토로라 방식을 도입했기 때문에 갈빈 회장과는 가끔 만났다. 이나모리는 처음 애기를 들었을 때 그 가능성에 머리를 꺄우뚱했다. 하지만 위성을 이용해 휴대단말기로 통신할 수 있게 되면 통신 인프라가 정비되지 않은 개발도상국 등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흔쾌히 응했다. 1993년 4월 DDI와 교사를 중심으로 소니, 세콤, 우시오전기 등의 출자로 일본이리듐이 설립됐다. 유럽이나 중동, 인도, 러시아 등지에서 잇따라 회사가 만들어졌다. 1998년 11월 서비스가 시작됐다. 통신시설이 없는 산악지대, 사막, 외딴 섬 등이나 종래 휴대전화가 통하지 않는 선박, 소형비행기 등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서비스 개시 9개월 만에 사업은 파탄을 맞이했다. 개도국에서가 아닌 선진국을 타깃으로 한 전략의 실패가 최대 원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휴대전화의 급격한 보급, 서비스 가격하락을 예측할 수 없었던 점도 작용했다.
‘살아있는 경영의 신’, 적자 항공에 날개를 달다 “일본항공(JAL)은 그동안 관료적 경영을 해왔다. 앞으론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한 체질로 바꿔 놓겠다.”
2010년 2월1일 이나모리 가즈오가 JAL 신임 회장 취임 기자회견에서 밝힌 일성이다. 이나모리는 '하늘의 일본'으로 불리는 일본의 대표적인 공기업 JAL이 파산 위기에 처해 법정관리
수순을 밟고 있는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나섰다. 일본 총리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적자로 망가진 JAL을 회생시키기 위해 회장직을 받아들였다. 이나모리는 '국가에 대한 마지막 봉사의 기회'라며 무보수 봉사를 자임했다. 그는 JAL의 회생에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항공 분야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초보자다. 하지만 ‘수입을 늘리고 비용을 줄인다'는 기업 경영의 기본 원칙은 제조업과 다를 게 없다. JAL을 반드시 되살릴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JAL의 부채 총액은 2조3221억엔으로 자산보다 부채가 8700억엔이나 많아, 자본이
완전 잠식된 것으로 사실상 파산 상태였다. 일본의 대형 항공사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은 JAL이 처음이었다. 일본의 자존심으로 여겨졌던 JAL이 경영 파탄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은 뿌리 깊게
박힌 공기업 체질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51년 설립돼 일본을 대표하는 국적 항공사이자 아시아 최대 항공사였던 JAL이 몰락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일본 경제가 1990년대에 주가,집값 폭락으로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하면서 JAL에겐 위기가 찾아왔다. 이후 2001년 9.11테러와 이라크전,사스(SARS:급성호흡기증후군)로 항공 여행 수요가 위축되면서 경영난은 가중됐다. 결정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시자이 붕괴되면서다. 세계경기 침체로 여행 수요가 감소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종플푸가
확산돼 항공 여행 수요가 격감했다. 게다가 국내선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본 2위 항공사인 전일본공수(ANA)는 물론 고속철인 신칸센과의 경쟁이 심화돼 JAL의 항공기 탑승률은 지속적으로 내려갔다. JAL의 국내선 탑승률은 6년 연속 65%를 밑돌았다.
항공 수요 감소는 JAL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JAL이 유독 경영난에 빠진 것은 방만 경영 때문이었다. 과거 자민당 정권은 지역 주민들의 표를 의식해 JAL에게 채산성 없는 지방 공항에도 취항을 강요했다. JAL은 국토교통성 관료 출신을 부사장에 앉히는 해묵은 관행까지 있었을 정도로 조직 내 '아마쿠다리(낙하산 인사)' 문제가 심각했다. 경영진에는 관료 출신 낙하산 인사가 투입됐고 경영실적은 고려하지 않고 퇴직자들은 두둑한 연금을 챙겼다. JAL은
1987년 완전 민영화됐지만 껍데기만 민영화일 뿐이었다. 금융회사들도 정부가 뒤에 버티고 있는 JAL이 망하기야 하겠느냐며 묻지마 대출을 해주었다. JAL의 부실은 관료주의에 사로잡힌 정부와 무능한 경영진, 금융회사, 경영진의 방만한 경영과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나모리는 그해 4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관료들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낙하산 인사로 JAL 경영진이 된 전직 관료들이 JAL을 공기업인 마냥 방만하게 운영하면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낙하산'으로 망가진 회사를 내 손으로 반드시 살리겠다"며 JAL
회생에 대한 강한 의지도 피력했다. 그는 구조조정 강도를 더욱 높이라는 채권단의 압박에 대해 “현재 추진 중인 구조조정 계획 외에 어떤 추가 감원이나 노선 축소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맞섰다. 그는 "JAL의 회생은 단순히 회사 하나 죽이고 살리는 차원이 아니라 일본의 자존심이 달려 있는 중대한 문제"라며 "정부와 채권단에선 좀 더 극적인 구조조정을 원하고 있지만 JAL의 위상을 지키려면 원래
예정된 구조조정 수순을 따르는 게 최선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JAL은 전체 인력 가운데 3분의 1인 1만6500명을 정리해고하고, 국제선 29개와 국내선 30개 노선을 감축했다. 하지만 일본정책투자은행 미즈호은행 등 채권은행들은 현재 적자를 내고 있는 미주와 유럽 노선을 대부분 폐지하고 사실상
아시아에 특화하는 항공사로 탈바꿈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나모리는 회장에 오른 뒤 비행기 노선과 인원을 대폭 줄이는 비용 절감에 착수했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노선에 비행기를 띄우며 조직의
덩치를 불리는 데 집착한 끝에 회사를 망쳤다는 반성에서다. 이나모리의 노력결과 2010년 JAL의 영업이익은 1460억엔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객실
승무원에게 청소까지 맡기는 등 피 말리는 비용 절감 노력도 어느 정도 효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80살의
이나모리는 일본의 자존심이라는 JAL을 회생 시기키 위해 다시 한 번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의 인생은 도전의 역사 그 자체다. 규슈 남단 가고시마의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폐결핵으로 고생하기도 했으며 두 차례의 중학교 낙방, 한 차례의 대학 낙방을 딛고 일어섰다. 취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어떤 것을 해도 잘 되지 않는다’라는 자학에 시달리기도 했다. 대학 졸업 뒤 무너지기 직전의 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동기들이 모두 떠나 버린 회사에서 마음을 다시 잡았다.
“언제까지 세상을 원망하기만 한다고 해서 내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라고 마음먹고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상사와 제품 개발 문제로 충돌해 회사를 나와야 했다. 그런 그가 27살 때인 1959년, 다른 회사의 한 공장 한 구석을 빌려 종업원
28명을 데리고 세라믹 제품 등을 만드는 교세라라는 벤처 기업을 창업했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풍토다. 대기업과 하청기업이 밀착돼 다른 기업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거의 없다. 신생업체가 좋은 부품을 대기업에 납품하려 해도 딱지를 맞는 게 보통이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고 심하다. 이나모리는 도쿄와 지방도시의 대형업체를 찾아다니며 납품하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나모리는 기죽지 않았다. 그는 국내시장 대신 미국 시장을 개척했다. 1966년 IBM에서 대량주문을 수주하는데 성공했다. 해외 시장에서 신용을 얻어 일본 시장을 뚫는 우회 전략으로 단단한
진입 장벽을 한 번에 뚫어버렸다. 이나모리는 아메바 경영, 카르마 경영 등 독창적인 조직 관리를 통해 창업 당시 초심으로 돌아가 전 사원에게 경영자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혁신적인 조직 관리로, 일본 열도가 불화에 허덕이고 있을 때 교세라는 오히려 약진했다. 벤처기업이 성장하기 힘든 풍토에서 이나모리는
벤처의 성공 신화를 쓴 것이다. 통신사업 진출 역시 마찬가지로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통신시장 진출에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거대 기업인 NTT에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매출액 2200엔, 사원 1만명 규모의 교세라가 통신시장에 나온 것이다. 당시
NTT는 매출 4조원에 사원은 33만명에 이르렀다. 그 뒤 그는 매년 흑자를 냈고 교세라를 6만3000여명의 직원과 212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그 중간에 그는 암에 걸려 위를 3분의2나 잘라내야만 하는 등 개인적으로
힘든 고통도 이겨냈다. 이나모리의 기업가 정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교세라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열정적으로 도전했고, 도발적으로 일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살아 있는 경영의 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돈 만들기의 핵심 기술" 이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지만 사실 도,레,미,파,솔,라,시 라는 7가지의 음계의 혼합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색상이 있지만 흑,백,적,청,황 5가지 색깔의 변조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많은 숫자들이 존재하지만 1부터 9까지 아홉 개 수의 조합에
불과하다. 돈에는 <이자율> <물가상승률> <경제성장률> 이라는 3가지 기본재료가 있다. 그리고 이 재료를 가열하는 화로불로 <단리이자> 와 <복리이자>라는 열이 존재한다. 이 5가지 개념을 잡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다르게
표출시킨다. 세상이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들을 졸자(拙者)라고 한다. 이 들은 의욕 그리고 야망만 있다. 성공하기도 힘들지만 성공을 했다 해도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재기하기
어렵다. 필자는 2000년 국내 재벌급에 속하는 자녀들의 경제선생을 한 적이 있다. 그 집 부모는 그 자제들에게 각기 금융기관등에 가서 돈을 빌리라고 했다. 보증은 부모가 서준다는 조건이 있었다. 2000년도그 집 자녀가 은행에 가서 빌린 대출이자는 12%였다. 이 이자율을 극복하고 돈을 더 벌면 <부자>가 될 자격이 있고, 이 이자율을 감당하지 못하면 <서민>이 된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은 교자(巧者)라고 할 수 있고, 세상이치에 정교하게 맞추어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이 사람들이 소위 중산층은 된다. 통상 이자율은 <단리>다. 그렇지만 물가상승률은 <복리>로 움직인다. 아무리 은행에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물가상승률이 복리로 올라가는데 자신의 돈은 단리로 늘어난다면, 이 사람은 점점 가난해지는 것이 세상이치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공무원, 군인, 선생님, 그리고 기업체에 넣으려고 하는 이유는, 샐러리맨의 월급은 보통 <복리> 로 상승하기에 적어도 취직을 하면 <서민>에서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중산층과 달리 또 하나의 허들(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 것이 경제성장률이다. 결국 부자가 되려면 <이자율> <물가상승률> 그리고 <경제성장률> 만큼의 재산증식 노하우가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경제성장률도 물가상승률과 마찬가지로 복리로 움직인다. 녹록치 않다. 그러나 이 장애물을 넘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비슷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부자가
된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뒤따라야 하는 인생살이의 멋진 모험이다. 겸손하게 배우고, 배우기를 즐기면서 세상을 따라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까?>
이런 질문에 답으로 부르는 노래가 있다. 필자가 10대 시절 많이 들었던 어느 간장회사의 CM 송이다. 인생살이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1997년 프랑스의 유명한 재벌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인들이 미국인이나 영국인 보다 잘 살아야 한다고 했으며, 돈 버는 방법을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그가 죽기 전에 전 국민을 상대로 문제를 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맞추는 사람에게 모두 100만프랑을 준다고 광고했다. 신문광고를 본 많은 사람들은 “돈이 부족하다” “주위의 도움이 부족하다” “지식이 부족하다” 혹은 “지혜 식견이 부족하다” 등등 다양한 답을 적어냈다. 답은 ‘야심’이었으며, 100만프랑을 받아간 행운의 주인공은 9살짜리 소년이었다. 어떻게 그 답을 알게 되었는지를 물었고 아주 재미있는 답을 들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언니가 남자친구에게 “너는 야심이 부족해“. ”야심있는 남자와 결혼 해야 행복한거야“ 등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자주 들었으며, 그래서 ‘야심’이 뭔지는 잘 몰랐지만 그것이 없으면 친구도 없고, 결혼도 못하고, 심지어 불행해진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지식’ 과 ‘정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지식과 정보는 신문이나 방송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진실로 필요한 꿈을 이루기 위해 그 답을 찾아야만 얻을 수 있다. 그래야만 필요한 것이 안테나에 잡히고, 해야 할 일과 순서가 잡히게
된다. 서산대사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서산대사는 국가에 변고가 있을 것을 알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부터 사명대사 등 스님들을 모아 무술을 가르쳤으며, 이율곡 선생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조선의 그나마 발전된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무기, 그리고 명나라의 도움 덕으로 이 땅에 쳐들어 온 왜군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 만약 서산대사와 율곡 선생이 국제 정보 수집을 했다면, 일본 조총보다 우수한 총과 대포를 서양에서 수입하고, 심지어 서양식 대포를 자체 제작하지 않았을까? 물론 공맹사상에 젖어 공리공론과 당파 싸움을 일삼던 유림이 반대했을 것이고, 왕이었던 선조 자신이 싫어했을 것이며,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 명나라가 싫어하기에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이 득세했을 것이다. 구교 선교사들을 통해 대포를 제작, 풍신수길 잔당을 항복시켰다는 역사를 접하면 우리 역사가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진다. 의문은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힘을 갖게 해 준다. 서양에서 과학이 발달된 것은 “어떻게 해서 파리는 천장이나, 메끄러운 유리나 거울에 붙어 있을 수 있나‘? 라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현미경이 생기면서 수많은 학자들이 달라 붙었지만, 그래서 테이프회사가 수없이 생기고, 3M같은 세계적인 기업도 나왔지만, 아직도 파리의 접착기술 노 하우는 300년이 넘도록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파리 발에서 점성이 나오는데 정지시에는 고체, 운동시에는 액체로 바뀐다는 정설에 가까운 학설이 나왔지만 아직도 100%정답은 아니다.
”궁금해서 못살겠다“라는 생각이 학문과 일거리와 돈 벌이를 만든 것이고, 그것이 사회와 국가를 부강하게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궁금한 것이 부족하다.
‘야심’만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되는데 그것이 부족한 사람이 가난해진다는 것이다. 필자가 스스로를 돌아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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