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미국의 對北정책은 북핵문제 해결을 주안점으로 하고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문제 해결, 그리고 남북통일을 목표로 접근했다. 또 북한에 대한 단독 접근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 중국의 영향력을 지렛대로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미국의 전략은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중국을 6자회담 의장국으로 하고 중국을 믿었던 미국이 이제야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미국의 국제 전략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살펴봐야 한다.
1947년 3월12일 선포된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이전에는 미국의 對外정책 기조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우 공산주의 국가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례로 1945년 2월12일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對日 선전포고를 권했으며, 1945년 12월 모스크바 3相(상) 회의에 미국이 참가했고, 1946~1947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美蘇공동위원회를 열어 소련을 한반도 문제의 파트너로 여겼다.
트루먼 대통령의 반공외교
1945년 4월12일 루즈벨트의 서거로 당시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전임자의 잔여 임기를 채우기 위해 대통령이 됐다. 그는 소련이 터키와 그리스를 침략하고 위성국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파악한 후 소련의 팽창주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트루먼은 세계 자유주의 국가 보호를 위해 1947년 3월12일 트루먼 독트린을 주창했다. 그리고 이 독트린이 동서냉전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됐다. 이후 미국은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으로 본격적인 반공외교를 시작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공산화된 중국을 포기하고, 패전국인 일본을 재건해 경제육성에 힘을 실어주었다. 자유진영의 힘을 키우는 데 정력을 다한 것이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이 남침하자 UN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미군을 주력으로 하는 UN군을 파송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 앞에 조성된 한국전 기념비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미국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국가의 부름에 응한 우리의 딸과 아들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트루먼 이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1953년부터 그는 한국동란으로 어려워진 국제정세를 쉽게 풀기 위해 新개입주의(New Look Policy)를 내세우고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제한적인 외교를 시도, 소위 냉전시대에 조심스러운 화해정책(Detente)으로 세계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한동안 세계 여러 국가들로부터 미국의 우유부단한 외교정책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미국의 이러한 대외정책은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한 견제를 유지하면서 유화정책을 병행하게 되는데 클린턴 대통령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유화정책의 절정은 지미 카터 대통령 때이다. 그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무능한 외교대통령으로 간주된다. 그의 대표적인 실수는 민주주의와 인권 등을 내세워 친미국가인 이란의 팔레비 국왕을 축출하고 이란을 호메이니에게 내준 것이다. 그 결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리며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1977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비난하면서 주한미군을 철수하려고 했으나 美 국방부의 강력한 반발로 그 계획을 취소한 일이 있었다.
1994년 4월 북핵 위기 때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을 선제공격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지미 카터가 나서서 김일성을 만나고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했다. 인기주의에 도취했던 김영삼 대통령과 지미 카터가 만류해 클린턴이 작전개시 2시간 전에 계획을 취소했다. 그런 지미 카터가 후에 북한을 다시금 방문했을 때 우리는 모두 불안해했다.
끝나지 않은 냉전
1986년 10월11일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사이의 美蘇정상회담으로 미국이 20세기 최고의 외교승리를 거두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공산주의 ‘골리앗’ 소련을 붕괴시켰다. 그는 웃으면서 미국의 SDI(Space Defense Initiative)를 선포하고 고르바초프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내심 소련 해체를 결심했다. 1991년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주창했고, 이후 연방 15개 공화국이 모두 분리 독립해 민주국가로 변신했다. 그 가운데 많은 나라들이 지금 미국과 긴밀한 경제 및 군사 외교를 맺고 있다. 그 결과 국제적으로는 동서냉전이 종식된 것으로 간주됐다.
1994년 7월8일 김일성의 사망으로 한반도 안보정세는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세계의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에도 민주화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예견했다. 그런데 김정일은 김일성보다 더 악랄하고 극악무도한 독재자로 나타났고, 그의 무능과 아집으로 자국민 300만 명 이상이 餓死(아사)했다. 북한은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회생 불가능한 생지옥으로 변했다.
김정일은 1983년 10월9일 아웅산 테러, 1987년 11월29일 KAL-858기 폭파사건, 2010년 3월26일 천안함 사건의 주범이다. 그는 모순된 체제와 권력을 유지하려고 선군정치를 내세워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한반도와 지역안보와 세계평화를 위협했다. 북한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며 최악의 인권 말살국가이다. 그러면서 김정일 자신은 39호실을 통해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보유, 상상을 초월한 초호화판 사생활을 즐겼다.
남한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이후 안보감각이 둔화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이후로 左傾(좌경)세력이 雨後竹筍(우후죽순)같이 일어났다. 소련의 붕괴로 동서냉전이 끝났다는 구실로 남한에서는 북한의 위협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경제부흥으로 이룩한 풍요와 자유를 남용하고 방종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左傾세력들은 끊임없이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세력을 확장했다. 1997년에는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뽑고 ‘민주화의 승리’라고 엄청난 착각을 했다.
김대중이 비겁한 방법으로 북한에 엄청난 돈을 줘가면서 성사시킨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은 대한민국의 체제와 헌법을 송두리째 부정한 反국가행위였다. 이는 與敵罪(여적죄)로 극형을 받아 마땅하나 우리나라 정부는 그가 죽었을 때 國葬(국장)을 치러 주었다. 그가 2003년 임기를 끝내고 노무현이 그의 親北노선을 승계해 국가안보를 파괴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韓美동맹을 와해하기 위해 전작권 전환과 韓美연합사 해체를 추진한 것이다. 또 국내의 親北·反美세력 옹호육성,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利敵(이적)행위를 자행했다.
미국을 敵(적)으로 돌린 중국의 실수
2001년 9월11일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두 건물을 공격해 미국은 안보정책과 외교정책을 새로운 각도로 전환했다. 냉전시대에는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공산주의와의 대결이었으나 9·11사태 이후로는 ‘테러와의 전쟁’이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할 때 이라크, 이란, 북한을 국제사회와 미국의 주적으로 정의했다.
이후로 미국의 對北정책은 북한을 냉전시대의 공산국가로 보지 않고 테러 불량국가로서 북핵문제 해결에 최대역점을 두고 있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테러와의 전쟁이었으며 향후 모든 對北정책의 기준은 테러와의 전쟁방식이 될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세계적으로 문명파괴 세력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헤즈볼라, 하마스, 탈레반, 알 카에다 조직보다 더 강력한 테러조직을 갖고 있는 집단이 북한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절대로 미국의 표적(Target)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2010년 3월26일 발생한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정찰총국이 저지른 만행으로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9·11테러와 KAL기 폭파사건보다 더 중대한 이유는 ‘군사적 도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대한 이유는 북한의 만행이 분명한데 중국이 세계평화의 편에 서지 않고 북한의 입장을 옹호했다는 점이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새로운 국제 전략의 길을 가고 있다. 북한은 미국의 직접적인 적대국이다. 사실 중국은 미국의 첨예한 직접 적대국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이 중국을 적대국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했다. 《손자병법》에 ‘적을 사로잡기 원하면 그가 탄 말을 쏘라’는 말이 있다. 이제 미국은 북한을 제압하기 위해 중국을 옥죄일 수밖에 없다. 그 정책이 지금 눈에 가시화되고 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 직후 미국은 국제 전략의 우선순위가 과거 NATO에서 중동으로 이동한 것을 다시 한반도와 동북아로 이전한 것을 공식 발표한 일이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북한은 지금 철두철미한 미국의 감시를 받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조이기 위해 두 개의 무서운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첫째는 방대한 무력(군사력)의 우위이다. 미국이 중국 근해에서 무력시위를 하게 되면 중국의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어 있다. 미국이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장악한 水路權(수로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충돌할 경우 중국은 고르바초프처럼 쓴웃음을 지으면서 미국에게 순종해야 할 것이다. 지금 중국이 군사력을 키워 미국에 저항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나 망상에 가까운 국력낭비로 끝날 것이다.
또다른 무기는 금융압박이다. 미국은 지금 중국이 이란과 북한에게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는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다. 이것을 이유로 중국에게 금융압박을 가하게 되면 중국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등소평이 죽기 전 남기고 간 유언에 “향후 100년 동안에는 절대로 미국과 대결하지 말라” 했는데 후진타오는 그의 유언을 무시했다. 그는 韜光養晦(도광양회)의 國是(국시)를 大國崛起(대국굴기)로 무리수를 두어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미운 오리 새끼’로 만들었다.
눈앞에 다가온 통일시대
지금 북한 내부의 사정은 김정일 사후 3대 세습으로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하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다. 특히 39호실과 38호실 비자금 관리를 둘러싼 갈등으로 2013년 12월12일 나이어린 김정은이 자신의 張子房(장자방, 漢나라의 건국공신)인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했다.
북한은 ‘예측할 수 없는 뜨거운 감자’로 한국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건국 이래 처음으로 ‘방어적 대북정책’에서 ‘공세적 대북정책’으로 선회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종말을 예감하고 남한 주도 남북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통일 후 북한지역 개발을 위한 투자계획 등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가속도를 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이슈는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해 韓美양국이 연합사의 ‘작전계획 5029’를 정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숙원이던 ‘통일의 시대’가 눈앞에 다가온 느낌이다. 우리 국민들은 이때를 위해 마음의 준비와 각오를 확실하게 다져야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의 對北정책은 분명히 통일준비를 위한 적극적인 자세이다. 박 대통령은 “통일시대를 열자”고 공식 선언하고 ‘통일준비위원회’를 2014년 7월15일 발족했다. 남북통일의 비용을 염려해 통일의 당위성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통일은 대박'이라고 도전장을 제시했다. 이 새로운 정책 기조와 거의 같은 시기에 국제적으로 남북통일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한반도 통일이 5년 이내에 이루어지면 한반도는 최적의 투자 대상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 통일 이후의 대한민국이 수년 내에 영국과 프랑스를 제치고 G7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세계적인 투자회사의 총수인 짐 로저스는 남북통일이 시작되면 자신의 전 재산을 북한지역 개발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했으며 한반도가 통일이 되면 중국과 러시아에 ‘스타 기업’이 줄줄이 탄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은행 총재 김용 씨도 통일이 되면 북한지역에 투자할 돈이 준비되어 있다고 발표했으며 북한개발이 시작되면 엄청난 자원강국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통일연구원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향후 20년간의 통일비용은 약 3600조 원이 될 것이며, 통일 후 국가수익은 약 6800조 원이 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통일 후의 경제 변화는 국방비 감축효과가 매년 300조 원이고, 국민의 실소득이 매년 89조 원 증가할 것이며, 사회갈등 해소에서 오는 소득이 188조 원이 추가될 것이라고 했다. 관광공사의 발표에 의하면 북한지역 관광자원 개발에 4조 원을 투자하면 매년 40조 원의 돈을 벌게 된다고 전망했다. 필자는 이미 10여 년 전 향후 남북통일이 되면 북한지역 개발로 인하여 내수경제의 불길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며, 전 세계에서 투자의 물줄기가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고 잡지 《민족정론》에 기고했으나 그때는 아무도 나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세 번째 기적이 될 남북통일
2014년 3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제5차 아시안 리더십 콘퍼런스(ALC)에서 토의된 주제는 ‘One Korea, New Asia’로서 ‘하나의 대한민국, 더 좋은 아시아’를 구축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어떻게 협력해야 하느냐는 것을 화두로 삼았다. 다시 말해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은 한반도 통일이 선결조건이란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제 남북통일은 대한민국만의 일이 아니며 국제사회가 공동책임을 느끼는 시대적 추세이다. 대한민국은 일류국가 건설을 위해 통일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적극적으로 주도해야 하는 민족사적 사명임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 정부는 이러한 시류를 외면해서는 안 되며 비장한 각오로 도전해야 한다. 그리고 통일은 경제적인 시각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같은 민족이 저렇게 생지옥에서 시달리고 있는데 우리만 잘살겠다고 저들을 방관한다면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후일 역사는 우리가 잘못된 문명파괴 세력과 동조한 공범자였다고 기록할 것이다. 통일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 세대가 꼭 완수해야 하는 성업이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주목해야 할 세 가지 큰 그림이 있다. 첫째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대한민국의 건국이요, 둘째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경제 부흥이요, 셋째는 그 누군가에 의한 남북통일 대업이다. 필자는 세 번째의 영웅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믿어진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사이에는 어떤 숙명적인 연속성이 있어 보인다.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대업을 딸에게 맡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정희 대통령의 5·16군사혁명과, 박근혜 대통령이 유권자의 51.6%의 지지로 당선이 된 것에 ‘516’이란 숫자가 일치된다. 5·16군사혁명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까지는 51년 6개월이 지났는데, 여기에 또 516이란 숫자가 일치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18년간 집권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61세에 서거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61세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 건국 이래 처음으로 통일지향 정책을 들고 나와 온 국민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반공을 국시로 삼았고,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시대를 열자’고 외쳤다.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재임 기간에 ‘통일의 문’이 열릴 것을 믿는다. 온 국민이 결연한 마음의 다짐과 각오로 단결·참여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끝>
2014년 8월 3일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2014년 8월 3일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좌절과 시련 속에서 흐느껴 울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나의 인생은 벅찬 회한으로 얼룩지어 있다. 그러나 내게 험난한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더 가까운 거리에 계신 것을 느꼈고, 더 많은 것과 더 높고 깊은 세상의 이치와 인생의 의미를 배웠다.
내가 태어난 조국은 거의 1세기 동안 일제의 침략과 민족분단과 이념의 갈등으로 고난에 시달렸다. 대한민국은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투쟁과 승리를 거듭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성장과 발전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겁도록 자랑스럽다. 역사와 사랑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자라고 흠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것이었기에 소중하게 생각하자.
우리가 진심과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자. 우리 민족은 한맺힌 세월을 살아오면서 더욱더 강인하고 지혜로운 민족이 됐다. 그러나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앞에 놓여있다. 민족분단의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남북통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적 사명인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더 밝고 평화롭고 풍요한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 이것이 나의 사랑하는 조국을 위한 기도이며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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