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문화 정체성 바로 세우기'의 하나로 '민족사 인물 우표 발행' 환영
우정사업본부에서는 '우리 문화 정체성 바로 세우기' 특별우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역사의식을 높이기 위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신라, 백제의 건국이야기를 담은 특별우표로 2008년 부터 발행되어 오고 있다고 하는군요. 일단 취지는 좋군요.
문제는 바른 역사내용을 우표로 담아 내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할 것입니다.
부여 해모수 황통(고추모)=>고려(고구려)
부여 동명성왕 황통(구태)=>백제(일본)
부여 황족 줄기(박혁거세)=>사로(신라)
일본은 백제다
백제의 건국과 전성기,그리고 일본으로 다시 태어나는 멸망까지를 간단히 개요적으로 요약하면 백제는 부여왕 구태집단이 촉.오.위 3국 쟁탈전이 벌어지는 후한 말기에 요동태수 공손강집단이 요동에서 황해도 대방으로 이주하여 대방국을 세우고 왕이라 칭할 때 100가를 거느리고 망명하여 세운 나라로 웅진에 해상거점을 두고 마한 해상세력을 통합,
고이대왕-비류대왕-근초고대왕-근구수대왕 시기를 정점으로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한강지역의 온조 십제와 마한,열도을 통합한 후에 요서로 진출하여 산동성에 거발성을 짓고 중국 동해안 지역을 점유하였다.
한성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웅진으로 천도하여 동성대왕 시기에는 서백제 지역을 침공한 북위와의 1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해상백제를 회복하였으나, 동성대왕이 암살당한 후에는 백제국론이 분열되자, 고구려 문자태왕이 서백제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에 서백제세력은 남한으로 이주하여 본국백제에 합류하여 나제동맹을 파기한 신라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나당연합군에 백제가 멸망당하자, 열도로 망명하여 의자대왕의 조카인 칸무천황 때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고 역사도 한반도중심의 백제사를 열도중심으로[일본서기/일본은 백제담로가 낳았다고 창세신화 기술]를 편찬하여 오늘날 일본의 역사왜곡을 가져 왔다.
토착마한집단이 대거 이주하여 살고 있던 열도세력을 야마토왕조 중심으로 통합시킨 근구수대왕의 황후(아이부인)가 되는 야마토왕조의 신공왕후가 마치 한반도남부를 정벌한 것으로 날조된 기록이 그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근초고대왕이 마한.신라.가야 등 남한지역을 정벌할 때 야마토왜군의 지원을 마치 신공왕후가 정벌한 것으로 기술한 것이다.
백제대왕은 황도인 한성-웅진과 거발성에 머무르며 백제강역을 통치하였다. 구태.온조.근초고대왕.근구수대왕.성왕을 조상신들로 제사지내고 있는 지금의 일본황실은 백제황족이다. 일본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촉진시킨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정한론집단의 군부가 백제황족을 열도통합과 일본군국주의에 철저히 이용했다
고구려에서 나온 온조집단은 마한의 제후국/십제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 편]"백제 왕실의 세계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씨를 '부여'라고 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하였다. "생각해보면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악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이 바라다 보이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그 천연의 요충과 토지의 이로움이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 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다 하여 위례로 돌아와, 도읍이 탄탄히 안정되고 백성들은 태평한 것을 보더니 마침내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 죽고 말았으며, 그이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속하였다....13년 봄 2월에 왕도에서 늙은 할미(소서노)가 남자로 변하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궁성으로 들어 왔다. 왕의 어머니(소서노)가 죽으니 이 때 나이가 61세였다. .국모(소서노)마저 세상을 뜨시니, 형세가 이대로는 안도할 수 없으므로 필시 나라를 옮겨야 겠다. 내가 어제 나가서 한수의 남쪽을 돌아 보았는데 토양이 기름졌다. 그 곳에 도읍하여 길이 편안할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를 따라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겼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를 따라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다고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획정하니,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까지였으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에 성과 궁궐을 세웠다.
..24년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질책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곳조차 없어 내가(마한왕) 동북쪽 1백 리의 땅을 베어 안주하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인데 이제 나라가 완정되고 백성이 모여 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대거 성과 못을 설치해서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이 어찌 의리라 하겠는가?" 왕이 부끄럽게 여기고 그 목책을 헐었다. "
백제 개국시조는 부여왕 구태
[수서]"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가 있는데, 인자하고, 믿음이 있었다. 처음 나라를 대방의 옛땅에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에서도 강국이 되었다. 처음 100가의 집이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 불렀다." - 온조 십제를 통합한 백제시조가 부여왕 구태임을 알 수 있다.
[수서]"그 나라(백제)는 동서가 450리이고 남북이 900여리이다. 남쪽은 신라에 닿고, 북쪽은 고구려가 버티고 있다. 그 도읍을 거발성이라 한다." - 백제가 산동에 거발성을 두고 중국 동해안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성대왕이 황도인 웅진성을 떠나서 산동성 거발성에 머물렸기 때문에 도읍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백제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일찍이 마한의 옛 땅으로서 경사(장안)에서 동으로 6,200여리 밖에 있으며,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또 왕이 사는 곳에는 동, 서 3개 성이 있다." - 백제는 서남해 마한에 도읍하고,영토가 서해를 건너 월주지역에 이르렀고, 백제대왕을 포함한 좌.우현왕이 거주하는 성은 동-서로 황도인 서남해지역의 한성-웅진를 포함하여 서백제를 다스리는 우현왕이 거하는 거발성과 동백제를 다스리는 좌현왕이 거하는 야마토성이였음을 알 수 있다.
[양서(梁書)/백제열전]“진(晉)나라 때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남제(南齊) 천감시대에 고구려(문자태왕 시기)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그 후 남한(南韓)지역으로 옮겨 갔다.”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서 고구려 문자태왕이 백제군을 폐하고 신라인들을 천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백제는 서백제 지역을 회복한 동성대왕이 거발성에서 임류각을 짓고 돌아 오지 않자, 백가를 앞세운 웅진토호세력에게 암살을 당하게 되면서 백제가 내분에 휩싸이자, 고구려 문자태왕이 서백제 지역을 차지해 버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북사(北史)]‘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居拔城)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웅진성)이다." - 백제가 웅진성(곰=고마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중국 동해안지역은 백제가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백제대왕은 본국황성(한성-웅진)을 떠나서 거발성에도 머물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2013년에는'우리 문화 정체성 바로 세우기'의 하나로 백제 온조 특별우표가 발행되었다고 하는군요.
백제 온조 특별우표는 2008년 ‘고조선 단군왕검’을 시작으로 2009년 동부여 금와왕, 2010년 고구려 주몽, 2011년 대진국 발해 대조영, 그리고 2012년에 발행된 신라 박혁거세 특별우표에 이어 여섯번째로 발행되는 우표입니다. 해모수의 직계 할아버지가 되는 부여시조 해모수와 부여 동명왕 고두막 우표도 제작했으면 좋겠군요. 동부여를 북부여로, 해모수를 고추모 아버지로, 고무서 부여 단군천왕의 둘째 따님인 부여공주 소서노를 무역인의 딸로 착각하는 사학계의 역사관점을 속히 시정해야 합니다. [환단고기]만 우리 정통사서로 인정하면 99%가 풀리는 문제입니다.
아직도 우리 민족은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는 한국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그것은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으로 한민족을 비하하는 중국과 일본이 바라는 역사의식입니다. 한인-한웅-한검 단군시대를 상징적으로 축약한 역사의 [단군신화]속에서 곰은 곰을 토템으로 삼는 곰족을 의미하고, 호랑이는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았던 호랑이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한웅족이 시베리아 지역에서 남하하여 만주의 곰족과 호랑이족과 잘 통합해서 살아 보려고 했으나, 호랑이족은 한웅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거지요. 우리 한민족사에서 수렵족으로 중심역할을 하였던 한웅족을 맥족이라 할 수 있고, 이탈하여 수렵-어로-유목생활을 했던 호랑이족을 예족이라 할 수 있고,
농사-어로생활을 했던 곰족을 한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반도 남부의 농경족은 한족이고 한반도 북부는 예족입니다. 그러나, 맥족.예족.한족 모두 마고성에 뿌리를 둔 황궁.유인.한인을 조상으로 삼는 한민족입니다.
백제시조 온조 특별우표 전지에는 백제 온조의 건국 이야기가 재미있게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요. 한편의 역사책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백제사를 연구해 보면 백제의 실질적 시조는 고구려에 나온 온조 십제를 통합한 부여왕 구태임을 알 수 있고,
백제사에서 4국 중에서 가장 먼저 중앙집권국가를 실현한 고이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이왕 구태는 장인이 요동태수 공손탁이고, 처남이 황해도에 대방군을 세우고 왕이라 자처한 공손강입니다. 그래서 대방은 백제의 장인국가인데, 고구려 미천왕 때 고구려에 통합됩니다.
백제 비류-근초고왕 시기에 대방땅을 놓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는데, 결국 근초고왕 시기에 대방땅을 차지하고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킴으로써 백제가 황제국을 선언하며 한강변 군사열식에서 노란깃발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국원왕의 전사는 결국 손자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백제공격과 정벌로 백제가 한강지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하고, 결국 고구려와 야합한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지금까지 발행된 '우리 문화 정체성 바로 세우기' 특별우표 6종에는 모두 이렇게 건국의 역사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해요. 이 특별우표 6장만 있어도 우리나라 최초국가인 고조선 부터 부여, 고구려, 대진국 발해, 신라, 백제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2013년 우표는 십제(백제)를 세운 온조의 건국 이야기였습니다
동부여에서 골본(동명)부여로 온 주몽은 골본부여 고무서 단군천왕의 둘째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골본부여의 왕위를 잇고 고리(고려)라고 국호를 바꿉니다. 이 때 반기를 든 부여집단이 바로 한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에 항거하며 백제를 건국한 구태집단입니다.
추모왕 고추모이 소서노와 혼인을 할 당시에는 소서노는 남편과 사별하고 비류.온조 두 아들을 둔 과부였는데, 소서노와 사별한 남편은 해모수의 손자로 북부여의 4대 단군천왕이 되며, 한나라 침략을 크게 물리치고 부여민심을 얻은 고두막에게 황위를 물려 주고 부여의 제후가 될 것임을 맹세하고,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여 오늘날 동부여로 불리우는 가섭원 부여를 세우게 되는 해부루의 손자가 되는 해우태입니다.
고추모가 동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인 유리가 증표로 남긴 칼자루를 들고 고추모를 찾아 와서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소서노는 자식들간의 권력투쟁으로 고구려가 망국으로 가는 것을 막고자,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지금의 대릉하 하류지역에 정착하여 10년간 해상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어하라'라는 이름의 새로운 왕국을 세우고, 고추모에게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겠다고 하자, 고추모가 매우 기뻐합니다. 소서노는 고추모를 매우 사랑한 여인이였으며, 여장부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유리에게 고구려 왕위를 양도한 비류의 마음을 위로해줄 겸 소서노는 비류에게 왕위를 물려 줍니다.
이 때 온조는 한반도남부의 마한의 국운이 쇠망해지고 있으니 마한땅에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추종무리들의 말을 듣고 배를 만들어 발해만을 건너 인천 소래포구에 도착, 마한왕에게 영지를 부여받은 후에 서울로 이주하여 북악산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펴 보았습니다.
신하들은 서해 바다로 나갈 수 한강을 끼고 침략을 방어하기에 용이하고 농경지가 있는 한강이남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하여 강동구 지역에 성을 쌓게 되니 풍납토성이라 불리우는 위례성입니다. 이 때가 서기전 18년이었습니다.
온조는 국호를 10명의 신하 무리들과 함께 세운 나라라 하여 '십제'로 정했습니다. 이 온조 '십제'를 통합한 부여집단이 바로 요동반도에서 100가의 무리를 이끌고 황해도 대방땅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남하하여 한강지역의 온조 십제를 통합한 부여왕 구태집단입니다.
이들 부여집단은 서남해 웅진을 군사기지로 삼고 서남해 마한해상세력을 통합하여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봉쇄한 후에 십제와 마한나라들을 통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가 대향로 꼭대기에 마한의 상징인 봉황을 새긴 것만 보아도 백제가 해상강국으로 성장하는데 마한이 기반이 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강동구 지역에는 응신.인덕천황릉 같은 열도의 전방후원분보다도 거대한 전방후원분들이 10여기가 넘게 존재하는데, 이는 백제가 마한 해양세력의 토착무덤인 전방후원분을 무덤으로 사용할 만큼 백제성장에 마한의 해양세력이 큰 토대가 되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강동구 지역의 거대한 전방후원분들은 아직도 발굴이 안 된체 그저 산이라며 진실을 감추려는 점에도 친일식민사관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장수왕에게 한성백제가 정벌당할 때 웅진으로 쉽게 천도한 것을 보면 이미 웅진은 구태집단의 중요한 거점지역이였음이 증명됩니다.
비류의 경우 요동지역에서 '어하라'왕에 즉위하였는데, 백성들이 따르지를 않았습니다. 자신이 왕위에 올렸어야 했는데, 동부여에서 돌아 온 유리가 왕위에 오르자, 본전생각이 나서 고추모 사후에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려 하자 비류를 따라 온 고구려백성들이 따르지 않고, 고구려로 돌아 가거나 온조 나라로 망명을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민심을 상실하면 패망이기 때문에 [삼국사기]기록에도 결국 비류는 후회하다가 죽었습니다. 소서노도 백성없는 나라의 왕으로 전락한 비류를 동생 온조가 잘 보살펴 주기를 바랬는지 모릅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소서노가 온조를 만나러 위례성으로 잠입하려는 중에 죽습니다. 잠입을 할 정도면 온조를 추종하는 신하들이 권력내분을 우려하여 위례성문을 닫고 비류를 받아 들이지 말라고 간언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에 분노한 소서노가 모성을 발휘하여 온조을 만나기 위하여 경계를 뚫고 위례성으로 들어 가려다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서노 죽음 후에 수도까지 한산으로 삼시 천도한 것을 보면 온조는 형과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젖었을 것이고, 잠시 국정에서 손을 떼었을 것입니다.
서기전 18년에 세워진 백제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해상 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들여 이를 백제 고유의 문화로 발전시키고 다시 일본에 전수하는 등 주변국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고대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백제는 군사강국, 영토대국과 함께 세련되고 수준 높은 문화를 통해 문화강국을 이루었습니다. 훗날 당나라와 군사연합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한 법흥왕 이전에만 해도 백제 사신을 따라서 중국을 방문할 정도로 백제의 연방국 수준의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실제 남3한의 상국이였던 마한을 통합한 백제는 스스로 마한의 계승국가임을 자임하며, 남한의 주인국가 행세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 문화 정체성 바로 세우기'의 하나로 발행되는 특별우표,백제 온조 특별우표가 2013년도에 5종, 총180만장이 전국 우체국에서 발행되었군요. 백제의 실질적 건국자인 고이왕(부여왕 구태)도 우표인물로 선정되야 합니다.
그리고, 백제가 한반도 서남해 지역에 갇힌 작은 나라라고 아직도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을 것인데, 이는 사학계를 장악한 반도식민사관론자들의 잘못된 역사교육때문입니다.
속히, 공정한 인식론을 가진 사학자들이 국사편찬위를 구성해서 강단.재야사학을 뛰어 넘은, 문헌과 고고학이 결합된 가장 공정한 관점으로 우리 한민족사가 바르게 정립되기를 바랍니다. /윤복현
[자료]백제 개국과 도읍지 문제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의 고대문헌기록은 백제의 시조는 온조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반하여 ‘주서(周書)’ 49권 백제전, ‘수서(隋書)’81권 백제전 등 중국 사서 가운데 일부는 백제의 건국시조를 부여왕 구태(九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백제의 초기역사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 준다.
수서, 구당서 백제전 원문과 번역본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1 ◉<百濟>之先, 出自<高麗國>. 其國王有一侍婢, 忽懷孕, 王欲殺之. 婢云: 「有物狀如雞子, 來感於我, 故有娠也.」 王捨之. 後遂生一男, 棄之廁溷, 久而不死, 以爲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高麗>王忌之, <東明>懼, 逃至<淹水>, <夫餘>人共奉之. <東明>之後, 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歷十餘代, 代臣中國, 前史載之詳矣. <開皇>初, 其王<餘昌>遣使貢方物, 拜<昌>爲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
백제의 선조는 고려국에서 나왔다. 그 나라의 왕에게 여자 시종이 한명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를 임신을 하자 왕이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여자 종이 말하길, “달걀 같은 상긴 것이 나에게 내려와 닿으면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고 하자, 왕이 이를 내버려 두니, 후에 남자아이를 하나 낳았다. 왕이 죽으라고 뒷간에 이를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겨 아이를 기르도록 명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동명이 장성하자 고려왕이 이를 시기를 하므로, 동명은 두려워하여 엄수에 이르렀는데, 부여 사람들이 그를 모두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가 있는데, 인자하고, 믿음이 있었다. 처음 나라를 대방의 옛땅에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에서도 강국이 되었다. 처음 백가의 집이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 불렀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2 ◉其國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南接<新羅>, 北拒<高麗>. 其都曰<居拔城>. 官有十六品: 長曰左平, 次大率, 次恩率, 次德率, 次杅率, 次奈率, 次將德, 服紫帶; 次施德, 皂帶; 次固德, 赤帶; 次李德, 靑帶; 次對德以下, 皆黃帶; 次文督, 次武督, 次佐軍, 次振武, 次剋虞, 皆用白帶. 其冠制並同, 唯奈率以上飾以銀花. 長史三年一交代. 畿內爲五部, 部有五巷, 士人居焉. 五方各有方領一人, 方佐貳之. 方有十郡, 郡有將.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 亦有中國人. 其衣服與<高麗>略同. 婦人不加粉黛, 女辮髮垂後, 已出嫁則分爲兩道, 盤於頭上. 俗尙騎射, 讀書史, 能吏事, 亦知醫藥․蓍龜․占相之術. 以兩手據地爲敬. 有僧尼, 多寺塔. 有鼓角․箜篌․箏․竽․箎․笛之樂, 投壺․圍棊․樗蒲․握槊․弄珠之戱. 行<宋>《元嘉曆》, 以建寅月爲歲首. 國中大姓有八族, <沙氏>․<燕氏>․< 氏>․<解氏>․<貞氏>․<國氏>․<木氏>․<苩氏>. 婚娶之禮, 略同於華. 喪制如<高麗>. 有五穀․牛․猪․雞, 多不火食. 厥田下濕, 人皆山居. 有巨栗. 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 國西南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
그 나라(백제)는 동서가 450리이고 남북이 900여리이다. 남쪽은 신라에 닿고, 북쪽은 고구려가 버티고 있다. 그 도읍을 거발성이라 한다. 관직에는 16품이 있는데, 최고는 좌평이라 하고, 다음은 대솔, 은솔, 덕솔, 우솔, 내솔, 장덕인데, 자색 띠를 두른다. 다음은 시덕으로 검은색 띠를, 다음은 고덕으로 붉은띠를, 다음은 이덕으로 청색띠, 대덕이하로, 모두 황색띠를 하는데, 문독 무독 좌군, 진무, 극우는 백색띠를 두른다. 관은 모두 같은데, 오직 내솔 이상은 은으로 꽃을 만들어 꾸민다. 장사는 삼년에 한번씩 교대로 한다.
경기(수도에서 5백리 안)에는 다섯 개의 부가 있고, 부에는 다섯 개의 항이 있어, 사람들이 거처한다. 오방에는 각각 방령이 한명씩 있고, 방좌가 2명이 있다. 방에는 열 개의 군이 있고, 군에는 장수를 둔다. 사람들은 신라, 고려, 왜 등이 섞여 있는데, 중국 사람도 있다. 의복은 고구려와 대략 같다. 부인은 화장을 하지 않고, 여자들은 머리를 뒤로 드리우고, 시집을 하면 두 갈래로 나누어 머리 위로 틀어 올린다.
풍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며, 옛책과 역사책을 읽고, 관리의 일도 잘 본다. 또 의약, 거북점과 옛날 점치는 법도 안다. 두 손을 땅에 대는 것으로 공경함을 표시하고, 승려와 비구니가 있고, 절과 탑이 많다.
고각, 공후, 쟁, 우, 호, 적 등의 악기가 있고, 투호, 바둑, 저포, 악삭, 구슬놀이 등의 놀이가 있다. 송의 원가력을 사용하여 호랑이 달을 한 해의 머리 달로 삼는다. 나라에 큰 성씨인 8족이 있는데, 사씨, 연씨, 협씨, 해씨, 정씨, 국씨, 목씨, 백씨 이다. 결혼하는 예의는 중국과 같고, 상을 당한 제도는 고구려와 같다. 오곡과 소, 돼지, 닭이 있으며, 화식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토지는 낮고 습하여 사람들은 모두 산에 거한다. 큰 밤이 나오고, 매 계절의 가운데 달에 왕은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도성 안에 세워 놓고, 해마다 4번 제사한다. 나라의 서쪽과 남쪽의 사람들은 15개의 섬에 거하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1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 所置內官曰內臣佐平, 掌宣納事; 內頭佐平, 掌庫藏事; 內法佐平, 掌禮儀事; 衛士佐平, 掌宿衛兵事; 朝廷佐平, 掌刑獄事; 兵官佐平, 掌在外兵馬事. 又外置六帶方, 管十郡. 其用法: 叛逆者死, 籍沒其家; 殺人者, 以奴婢三贖罪; 官人受財及盜者, 三倍追贓, 仍終身禁錮. 凡諸賦稅及風土所産, 多與<高麗>同. 其王服大袖紫袍, 靑錦袴, 烏羅冠, 金花爲飾, 素皮帶, 烏革履. 官人盡緋爲衣, 銀花飾冠. 庶人不得衣緋紫. 歲時伏臘, 同於中國. 其書籍有《五經》․子․史, 又表疏並依中華之法.
백제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일찍이 마한의 옛 땅으로서 경사(장안)에서 동으로 6,200여리 밖에 있으며,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또 왕이 사는 곳에는 동, 서 3개 성이 있다.
그 나라에 설치된 내관으로 내신좌평은 왕명출납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내두좌평은 창고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내법좌평은 예의에 관한 일을 맡아 복, 위사좌평은 숙위군의 일을 맡아 보고, 조정좌평은 형옥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병관좌평은 재외의 병마에 관한 일을 맡아 본다. 또 외관으로는 6대방을 두어 10군을 총괄케 하였다. 그 형법을 적용함에 반역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만든다. 살인한 자는 노비 3명으로써 속죄케 한다. 관인으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한 자는 그 물건의 3배를 추징하고, 이어서 종신토록 금고에 처한다. 모든 부과와 세금 및 풍토의 물산은 대개 고구려와 같다. 그 나라 왕은 소매가 큰 자주색 도포에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오나관에 금화로 장식하며, 흰 가죽띠에 까만 가죽신을 신는다. 관인들은 다 붉은 옷을 입고 은화로 관을 장식한다. 서민들은 붉은 옷이나 자주색 계통의 옷을 입을 수 없다. 세시와 절기는 중국과 같다. 서적으로는 5경과 제자백가의 서적 및 역사책이 있으며, 또 표문과 상소의 글도 중화의 법에 의거한다.
허광웨는 ‘동이원류사’에서 부여족의 발전경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부여는 바로 구이의 하나였던 부유의 후예다. 일명 부유(浮楡), 어여(於余)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산둥 린이 일대에 살다가 뒤에 한 갈래는 서진하여 하남성 내향의 어중으로 옮겨 갔고, 다른 한 갈래는 동북지방으로 옮겨가 부여국을 세웠다. 이것이 북부여(北夫餘)다. 북부여는 전연(前燕)에 의해 멸망했다. 북부여의 다른 한 갈래는 동쪽으로 나아가 졸본천(卒本川)으로 옮겨갔는데 이것이 동부여(東夫餘), 또는 졸본부여라 칭한다. 동부여는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부여왕족의 또 다른 한 갈래는 남조선 지역으로 건너가서 백제국을 세웠는데 뒤에 당태종에 의해 멸망했다.”
잃어버린 백제사를 복원하기 위해선 백제의 뿌리인 부여에서 실마리를 풀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부산과 역산(繹山)을 차지하고 마침내 서국(徐國)의 영토를 짓밟아 해방(海邦)에 이르니 회이(淮夷)와 만맥(蠻貊)과 저 남쪽 이족들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감히 순응하지 않는 이가 없어 노후에게 순종했다.”
노송이란 동방의 동이족을 몰아내고 노나라를 세운 주공(周公)을 칭송하기 위해 자손들이 쓴 글로 여기에 나타나는 부, 역, 서택, 해방, 회이, 만맥, 남이는 노나라 건국 당시 오늘의 산둥성,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 푸젠성 일대 동남방 지역에 분포해 있던 동이족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부(鳧)는 9이(九夷)의 다섯 번째인 부유(鳧臾)로 바로 부여국의 전신이다. 이순의 ‘이아석지주’와 형병의 ‘논어주소’는 “동북지역 구이의 다섯 번째가 부유”라 했다. ‘자회보’에는 “부유는 동방의 나라 이름인데 바로 부여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논어’ 자한 편에도 “구이의 다섯 번째인 부유는 바로 부여”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고대 문헌을 통해 오늘날 취푸를 중심으로 한 산둥성 일대가 노(魯)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 부여의 발상지였음을 알 수 있다. 서백제의 치소인 커발성이 세워진 중국 산둥성의 부산이 부여의 발상지라는 사실은 중국 고대문헌에서 쉽게 확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현대 역사학자들도 널리 인정하는 바다.
예컨대 중국 역사학자 허광웨(何光岳)는 그의 저서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에서 “‘후한서’ 등 사서에 이미 부여, 동명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동명 고두막이 나라를 세운 것은 동한시대 중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명 이전에 이미 부여족이 존재했다. 이 부여족은 어느 지역에서 기원했는가? 묻고 “사료로 보건대 동한 이전 부여족의 발원지는 산둥성 추현 부근에 있는 부산, 즉 부유”라고 했다.
배달국 태우의 한웅천왕의 아드님과 따님으로 백두산 신시지역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복희.여와의 역사활동무대는 산동지역이다. 치우천왕이 중국지역으로 신시를 천도한 이후부터 단군왕검이 만주지역에 단군한국을 건국하기 전까지 배달국의 역사무대는 중국이 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일부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우리 한민족사의 뿌리가 중국지역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동방(한국)은 뿌리다."는 [후한서/동이전]기록대로 그 뿌리와 근원은 한반도-만주 중심의 동방 한국이 되는 것이다.
사마천이 쓴 중국 역사 ‘사기’는 황제(黃帝)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공자는 분명히 ‘황제 이전에 신농씨(神農氏)가 있었고 신농씨 이전에 복희씨(伏羲氏)가 있었다’고 했는데 사마천은 왜 황제를 출발점으로 삼았을까. 그것은 복희를 한족의 시조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지지(輿地志)’의 다음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산은 추현에 있다. 살피건대 어대(魚台)지방의 지형이 마치 오리가 날아 가는 모양과 비슷하다. 세상에서는 복희가 이곳에서 팔괘(八卦)를 그었다고 한다.”
중국이 한족의 시조로 받드는 황제보다도 훨씬 앞선 시기에 동양 인류의 시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복희가 있었고, 복희의 활동무대는 다름 아닌 부여의 발원지 부산이었다는 기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 산동성 줘청(鄒城)시 이산(繹山)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산호(微山湖)부근에 실재 부산이 있으며 복희의 사당을 비롯한 유물유적들이 집중해 있다.
이처럼 고대 문헌기록과 유물유적들은 산둥성 부산이 동이 부유의 근거지이고, 부유가 부여의 발원지이며 곧 복희의 주요 활동무대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희가 동이족의 시조이고 부산이 동이문화의 발상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복희 시대는 고대국가 수립단계에 진입하기 이전 씨족사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세기’에 의하면 동이 9족이 모여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은 고조선이다. 그러니까 부유에서 9부족으로 발전하고 9부족이 모여 고조선을 세운 것으로, 단군은 동이의 국조(國祖)이고 복희는 동이족의 시조(始祖)이며 부유는 동이 역사의 출발점이 된다.
백제의 발상지가 지금의 산둥성 추현의 부산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백제 국명의 유래도 제수와 연관지어 찾아야 옳다. 부여족은 옛 산동성 ‘제수’로부터 유래한 그 뿌리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가 요서(遼西)를 지배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송서(宋書)’ 97권 백제전에 실려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지배하고 백제는 요서를 지배했는데 백제의 소치(所治)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백제의 소치(所治)’라는 표현이다. ‘치(治)’는 고대사회에서 도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군치(郡治) 현치(縣治)일 경우에는 지방장관이 거주하는 군청, 현청 소재지를 뜻하고 국가의 소치(所治)는 소도(所都) 즉 국도를 의미했다.그런데 ‘흠정만주원류고’는 거발성이 바로 요서의 진평성(晉平城)이라고 적시했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이런 고기록을 근거로 ‘백제의 국도는 요서에 있었다(國都在遼西)’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한국사학계는 그 동안 ‘도성'이 아닌 통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는 요서 진평군은 과연 중국의 어느 지역일까?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통고(通考)’에는 그 지역을 ‘당나라 때 유성과 북평의 중간지 ?繭?했는데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다시 마단림의 견해를 기초로 이곳을 청나라 때 금주, 영원, 광녕 일대라 추정했다.
그러면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역에 국도를 정했다가 한반도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흠정만주원류고’는 그 시기를 양나라 천감(天監)시대로 보았다. 천감이란 중국 양나라 무제의 연호로 천감 1년은 서기 502년이며 신라 지증왕 3년, 고구려 문자왕 11년, 백제 무령왕 2년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백제 수도가 본래는 요서에 있다가 무령왕 때 비로소 남쪽 한반도로 천도해 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양서(梁書)’ 백제열전에 있다. “진(晉)나라 때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남제(南齊) 천감시대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그 후 남한(南韓)지역으로 옮겨갔다.”
‘삼국유사’는 ‘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왕의 거처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했다. ‘북사(北史)’의 백제국에 대한 설명 가운데는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居拔城)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고마성의 고마는 곧 곰(熊)을 뜻하므로 웅진성의 우리말인 ‘고마나루’의 ‘고마’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거발성은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삼국유사’는 ‘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왕의 거처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했다. ‘북사(北史)’의 백제국에 대한 설명 가운데는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居拔城)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고마성의 고마는 곧 곰(熊)을 뜻하므로 웅진성의 우리말인 ‘고마나루’의 ‘고마’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거발성은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흠정만주원류고’는 거발성이 바로 요서의 진평성(晉平城)이라고 적시했다.
양나라 때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양직공도(梁職貢圖)’를 보면 ‘백제국기(百濟國記)’를 인용하여 ‘백제는 옛날의 내이(萊夷)이며 마한족이다’라 했다. 내이는 우이와 함께 청주(靑州), 즉 오늘의 산둥성 일대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하나다(‘서경’ 우공편). 산둥성 내산(萊山) 밑에 살아서 그들을 내이(萊夷)라 불렀는데 내산은 바로 오늘의 칭다오와 옌타이 일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71년에 북제(北齊)가 백제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의 직을 수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동청주는 오늘날 산둥성 자오저우완 일대에 해당된다. 역사학자 허광웨는 ‘부유인이 본래는 산둥성에 있다가 차츰 이동하여 춘추시대에 요서에 도달하고 전국시대에 다시 오늘의 길림성 부여지역에 도착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록들을 미루어 볼 때 원래 한반도 지역에 있던 백제가 중국의 요서에 진출하여 요서, 진평을 잠시 경략했다기보다, 대륙의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백제 세력이 나중에 차츰 남하하여 한반도에서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첫댓글 백제란 나라는 참 측은한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이 되어버린 백제가 한반도에 다시 오고 싶어하는 이유를 마냥 미워 할수만은 없는 노릇이지요 신라가 백제에게 했던 짓은 잊고 어찌 일제시대때 만행민 따져 묻겠습니까 ;;;
역사양심에 솔직한 말씀이시다...역사라는 것이 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일이니 말입니다..
남북 그리고 일본까지 통일을 해야 진정한 통일 인가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