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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푸른 노트와 벙어리 가수의 서가 외
구효경
다루기 힘든 약대처럼 발굽으로 밀어내고 싶은 책들을 밀어낸다.
고전의 역사서를 서가 뒤쪽에 처박으면 고전시대가 구석지로 밀려나는 것 같고
낭만파의 화집을 다락방에 감추면 낭만주의시대가 어둔 뒤안길로 암전해가는 것 같다.
책상과 손바닥에 놓인 종이의 혁명이 세계를 싣고나가는 트럭이 된다면
월세 방을 옮기며 이삿짐에 고물상으로 실어 보낸 책들로 인해
오늘날의 모든 시대는 종말을 맞을 것.
팔이 무한한 안으로 굽는 시대.
혼자 비좁은 바깥으로 뻗어가는 괴물의 팔 같은 방 한 칸에서
요절한 사람들을 찬양하는 진부한 노래를 불렀다, 불렀다, 불렀다.
덧없는 노력을 쏟았다.
지난 달 제출한 이력서는 줄줄이 퇴짜를 맞았고,
팔목엔 푸른 피와 냄새로 밴 수음의 흔적들이 선연하다.
염통을 과녁으로 들고선 저녁, 제 팔자에 적합한 비난의 화살이 穴을 관통했다
너와 내가 공유한 구멍 속으로 빗방울 전주곡이 흐르고, 비로 습작의 음표들을 잇댄다.
시를 모르는 여인아, 나는 너의 심장보다 염통을 더 사랑한다.
이미 관통당한 피를 줄줄 흘려보내며
사라진 악사들을 몸 안에서 빼내오는 흑기사가 되려는지.
기사도의 정신은 죽었고, 너의 염통마저 결핵에 옮기 전 어서 내 몸에서 도망치길 바랄게.
혼자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교실, 하프시코드와 쳄발로가 죽은 묵상을 연주하는 복도,
요컨대 그 자리에서 너는 말 없는 얼치기 가수다
어눌한 언변 대신 폐활량 높은 단조의 음을 뱉어 대화를 걸어오지
너는 아름다운 죽음을 맞고 싶었다고 했지만 과거형의 발언은 이미 네가 죽은 사람이며,
그 광경이 아름답지 못했다는 치부의 고백 같았지
창문을 열며, 이런 날의 쇼팽 에튀드는 축축한 느낌이야, 이별의 곡도 추격도 꺼내지마.
버려진 피아노가 죽었을까……
벙어리 소프라노와 나이 어린 카운터테너는 반주 없이 대화할 수 있을까.
사실은 정작 궁금한 건 푸른 노트를 버린 자리에 피어날 곰팡이의 안부였다.
사라져야할 것은 반주나 말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있었는데, 왜 버벅거리고 있는 거지.
휴지통에 구겨 넣은 사직서처럼 몇 번씩 돌출했다가도 폐기되는 지겨운 그림자들,
발에서 떼어내어 서가 창고에 가둔다.
나 없이 그림자만 책들을 먹고 잠들며 책들을 찢으며 자라길. 피아노의 시인이여.
유일하게 남겨놓은 시대의 유언장처럼 마지막 역설을 토해낸다.
절대로 독서 따위는 하지 마.
길은 책 밖에 있어 비상구도 탈출구도 절대 책 안에 존재하진 않지.
늙은 영감처럼 쉰 소리를 거창하게 씹어대면서도 민망한 줄을 몰라
젊은 날 유기했던 콘스탄티아라가 뛰어나와 눅눅히 젖은 노트를 뒤적일 때
거미의 입에서 나온 실뿌리 같은 침을 뱉는다.
벙어리 가수 흉내에 익숙한 푸른색이 점철한다.
나이만큼 쌓인 악보들, 우울에 대한 짤막한 단상, 실어증과 폭언증 사이의 틈새,
문턱을 굴러다니는 활자들, 비로 쓸어내린다.
천재론
누가 천재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하기에
나는 ‘어떤 금메달리스트’의 얘기를 꺼냈어.
그는 내가 무척 어여뻐한, 좋아한, 레스포스 섬의 비너스 거품 같이 순결하고
사포의 영혼처럼 정열적이고 결백한 우정을 보여주고파 했던 친구의 후배라지.
그는 처음에는 별 뜻 없이 ‘운동’에 임했고, 이 운동은 르네상스나 프롤레타리아
문예부흥운동 사회주의 혁명 운동과 같은 그런 뜻의 운동은 아니었고
육체를 능률적으로 활용하는 운동이었지.
그러니까 그는 실질적 실증적이 아닌 실제 금메달리스트였네.
나는 그가 처음에는 별 뜻 없이 운동에 임했다기에 그의 안에서 우연처럼 발견된
뜻밖의 거대한 능력을 그의 성취에 빗대어 천재의 것이라 하였건만
여기저기서 힐난이 날아들었다.
패배자들이여! 아니, 패배론자들이여!
나의 천재론을 헐뜯는 자들을 조롱하고 돌아섰다.
내가 약간 흠모했던 선수가 있지.
그는 나와 동갑내기로 ‘어떤 금메달리스트’의 1년 선배였건만,
애석하게도 나와는 한 마디 밖에 나누질 못했다.
그가 나의 연극동아리 소속 미모의 여자 후배와 사귀었기에 나는 다가가지도 못했지.
그들은 여느 때와 같이 강당에서 훈련에 몰입했고,
난 강당 안 무대에 올릴 공연을 위해 조명을 손질하다가, 여차해 모든 불을 꺼버렸다.
캄캄해 기합소리가 사라진 정적 속에서 그가 걸어 나왔고
그 옆에 누가 있었건만 그게 누구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네.
그들은 내 실수를 수습하고 돌아갔다.
그때 단 한마디를 나누었을 뿐인데,
내가 흠모했던 그 선수는 ‘어떤 금메달리스트’가 되진 못했지.
‘그렇지만, 나는 믿었어요. 나와 동시대를 보낸 이들 중에서 그 누군가는 거대해지리라는 것을!’
우리는 믿었다. 우리와 동시대를 보낸 누구는 매우 거대해지리란 것을!
강당의 불을 꺼버린 그 날 후로 어느새 십년이 흘렀고,
나는 인문학 청년 동아리 소속 귀여운 여자 후배와 함께 시립교향악단의 송년 음악회에 왔네.
불 꺼진 무대 위에 연주자들이 나와 불협화음과 실험정신의 모범률 같은 조율을 선보이고
지휘자는 능숙하게 그들을 선두하며 슈트라우스를 서곡했다.
타임 투 세이 굿 바이, 타임 투 세이 굿바이, 소프라노의 앙코르가 끝난 후 15분여의 휴식 시간에
우리는 교대생 친구들의 이야길 나눴다.
나는 뭔가 이뤄낼 것 같았던, 매우 거대해질 것 같았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했다.
학창시절 내내 전교 1등을 단 한 번 놓쳤을 뿐인 친구의 근황과
수학 과학 올림피아드를 휩쓸며 매번, 다친 다리를 또 다쳐 절름절름 목발을 짚고 다녔기에
더욱 불구와 천재의 아우라를 풍겼던 친구의
그 몇 번에 걸친 교통사고까지 미화될 수 있을 것 같았던
소박한 시절의 희박한 예감들을, 모두 비껴가버린 그 동창생들을!
‘너는 뭔가 이뤄낼 것 같았어, 아마 내가 언젠가 너의 문학작품을 연구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귓전에 울리던 국문과 대학생 동창의 목소리,,,,,,.
나는 일용직 노동자라는 직분마저 잃어버려 쓸쓸한 청년기를 지나고 있다.
나의 천재론이 힐난에 헐뜯긴 그날,
저명한 문학평론가는 ‘문학과 천재’라는 주제로 팟캐스트를 진행했다.
‘시간을 무력화하는 재능’이란 무엇일까,
유년에서 지금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동굴에 갇혀있는 박쥐의 날개 같은 것.
나는 단 한 번도 거꾸로 가는 괘종시계 추나 노래하는 뻐꾸기시계에 매달려본 적이 없네.
몰락하는 자여! 몰락하는 자들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피를 썰어 ‘중세의 여름, 그 부활’을 탄생시키고 싶다.
각혈과 가래침을 뱉으며 나는 감히 다빈치를 내 라이벌 삼고 싶다.
아니, 나는 고대의 탯줄을 다시 받고 태어나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내 라이벌 삼고 싶다.
‘완전한 언어의 스승이여, 내 입에 아름다운 문장의 태엽을 감아주세요.’
이것은 단지 바람일 뿐이지만, 소설은 그렇게 탄생하는 게 아니야
이것은 단지 바람일 뿐이지만 시와 희곡은 그렇게 탄생하는 게 아니야!
바람만으로도 살 수 있는 것은 부는 바람뿐이다.
인생은 그렇게 허투루 사는 게 아니다. 허투루 살아지는 게, 아니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생은!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고 김밥차를 나르고 병원 계단을 닦으며
우는 아이를 업고 도망치려다 먹일 젖이 없어 돌아오며 살아온 생은……
*저들은 데모로 변화 가능한 세상을 살지만 내가 살아온 생은……! 말을 말자.
내 왼발은 성당에 가고 싶고 내 오른발은 교회에 가고 싶고, 내 몸뚱어리는 절간에 가고 싶다.
수녀원이나 기도원이나 법당엔 가고 싶지 않다.
어떤 욕망의 발현도 열망하기 어려운, 어지러운 세상이다.
누가 말했지.
< 근대 이후 천재는 불가능하다.
홀로코스트 이후 우리에게 서정이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것처럼, 더 이상의 천재는 없으며
천재라 불리는 동시대인들은 잘 깎이고 다듬어 만들어진 목각인형 복제인간일 뿐이다.>
그 말에 나는 반대하지 않지만 완전히 동의하지도 않는다.
내게 남은 창조의 세계를 염탐꾼이 발견하기 전 먼저 정복할 수 있다면 좋겠어.
호텐토투의 비너스, 그 참극을 살고 싶진 않지만 사르키 바트만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고는 싶네.
그렇지만 난 모자라지, 지지리도 머저리 같이 모자란 증상에 허덕일 뿐이지.
나는 너무 긴, 말을 많이 하고 있어,,,,,,. 시가 될 수 없을 거야.
평론가는 육체적, 기술적, 기능적 숙련성을 얘기하네.
그 어떤 금메달리스트가 모두 갖췄을 그 모든 것을!
그것과 문학의 차이성을 말하네. 그는 랭보의 ‘나쁜 혈통’과 글렌 굴드를 말하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혼연일체를 위해!
내가 작품이 되고 작품이 내가 되는 순간을 위해서
나는 지금 죽어야 합니까 아니면, 시대의 무엇과 야합하고 목숨을 담보로 결탁하여
비루한 생을 이어가야 합니까?
나는 그 어떤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겠으며, 쓰지 않을 것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맹세하며!
결국에야 암탉의 모가지를 비틀며, 누가 *전라도 독립!을 외친다면 경상도 국권 피탈! 응수하여
선동과 분열을 대놓고 소리치는 변태 짓을 하다가 총에 맞아 뒈지지도 못할 겁니다.
인정받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인정은커녕 등단도 못한 채로 늙고 죽어갈 까봐 매우 무섭습니다.
무, 서, 웁, 다, 이게 솔직한 맘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채로 서른을 넘기고 서른을 넘겨서도 그럭저럭 살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미 엉겅퀴와 독약을 삼킨 좀비가 된 상태일 것입니다.
나의 창작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유년에 꿀을 따먹던 소중한 아카시아 나무라도 과감하게 잘라버릴 것입니다.
피를 몇 번 썰었는지 알 수 없어요.
성실하고 바른 모범율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갈수록,
일주일 주기로 나의 입술은 파리해지고,
파삭파삭 살갗의 내부가 건조해지고 혈관이 좁아지며
온몸이 헐떡헐떡 갈증 나고 손이 덜덜 떨리는 경련에 시달립니다.
쓰는 것에 대한 금식은 왜 이리 불가능합니까.
가슴의 통증이 온몸으로 번지고 꺼이꺼이 신음을 토해낸 후에야
덜덜 떨리는 손에 펜을 쥐어 잡고 간신히 숨을 뱉습니다.
마치 알코올을 찾는 술꾼처럼!
평론가는 김승옥과 황석영을 말하고, 최인호의 ‘술꾼’을 예찬합니다.
나는 읽어본 적도 없는, 불에 타 버린 ‘벽 구멍으로’를 찬양합니다.
마치 그것을 넋 홀려 바라본 적 있는 사람처럼! 불 타버린 한 줌 재를 만졌던 사람처럼!
벽 구멍은 나의 내부에도 많지만 그 안으로 흘러드는 것들의 이름을
나는 무어라 명명할지 몰라 서성거립니다.
질 구멍에 처박아둔 열쇠를 꺼내 달 구멍에 넣으면 흑암의 자물쇠가 열려
우주의 비밀을 조잘조잘 들려줄까요?
달과의 삽입 흑암의 잉태 우주의 해산…… 자궁 속에 새벽 별이 뜨고 집니다.
불 타버린 그림들이 있던 집을 뛰쳐나온 행려병자 나혜석처럼 비틀비틀 거립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들으며 늙어가는 여류화가의 초상화를 나는 그리지 못합니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 그는 이름을 짓는 자!
식물들의 라틴어 학명을 주구장창 외우던 짧은 대학시절,
동물의 학명까지도 외울 수 없다는 참담한 자각 앞에 나는 사람의 후손이 되길 포기했습니다.
악수를 하지 않는 글렌 굴드처럼 나는 아무 타협점도 찾지 못했습니다.
반점과 온점의 사용마저도 오선지를 벗어나선 안 된다는 계율을
어떤 노랫말을 지으며 생각해봤습니다.
범위를 벗어난 슬픔과 환희와 이도 저도 아닌 뒤죽박죽 감정들은
육선지나 칠선지를 만나지 못하고 다른 기호로 표시될 뿐이지요.
터키의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예술가가 아니라 장인이고,
원근감이 없는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은 자꾸 자꾸 탄생했대요.
전통과 관습은 혁명을 만나기 전까지는 고귀하고 고유한 것
나는 내 몸의 쿠데타를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나는 나쁜 혈통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선한 사마리안이 되고 싶고, 좋은 게 좋은 것인 삶을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승계보다 고귀한 건 창조입니다.
엉터리 손재주를 가진 주제에 감히 피그말리온의 여인을 만나고 싶어요.
파포스의 남편을 창조하는 게 내 몫이라고 믿지요.
모든 죽은 천재들의 부활, 아틀란티스의 부활, 모든 산 자들의 요절, 이 땅의 멸망!
*남무여신의 물이 흐르는 공간을 내가 흘러온 시간에 기워 맵니다.
평론가는 문학천재란 ‘절대인생감’을 가진 자라합니다.
아, 언감생심 그것을 갖고 싶습니다. 더는 상처 받기도 주기도 싫어, 그럴 힘도 없습니다만
그게 가능한 곳은 이승에서 절식한 금욕가들이 영원한 숫처녀들과 동침한다는
이슬람 경전 속 천국에나 있을 겁니다.
숫처녀를 망쳐도 성인이기에 용납 가능한 예술가들의 세계
망쳐졌어도 재생 가능하기에 순결에 미련 따위는 없는 예술가들만의 세계
대게는 종교가 예술을 탄압하지만 예술은 그 자체로 종교입니다.
평론가는 말합니다. ‘인간은 이상하고, 인생은 흥미롭다.’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눈동자가 가렵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너는 모를 거야.”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 응, 나는 모르겠어.”
안과의사는 내 증상이 별 거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화가 났지만,
그는 나보다 더한 환자들을 많이 봤을 겁니다.
사후심판 받는 시와 희곡과 소설을 바라지 않습니다만,
생전에 이토록 아픈 시와 희곡과 소설을 원치도 않았습니다.
동시대인과 비슷한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면
나는 애써 내가 중립임을 밝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정치적 커밍아웃과 엉터리 예술을 즐겨하지 않을 겁니다.
극좌와 극우의 사잇길에서 예술의 진보와 보수 그 막다른 길에서
어떤 갈래꽃도 내 안에선 국화 꽃잎이 된다는 사실을 휘파람 불겠지요.
그리지 못할 나이테는 없음을 속리산 정이품송 보듯 즐겨할 테지요.
카타르시스를 달라고 기도한 적 없건만 신은 카타르시스라는 축복을 주겠다며
먼저 고통을, 앞선 고통을, 비극을 자꾸 자꾸 내렸습니다.
질병과 약한 아기들, 게딱지같은 운수,
내 머리 위에서 어떤 이들이 나의 인생을 두고 내기 장기 두는 걸 느꼈습니다.
인생개론 인생총론 이런 과목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살아 백년을 죽어 천년을, 억만 항하사, 아승기, 나유타, 불가사의, 무량대수 겁
그 이상을 해산의 고통에 시달리겠지요.
천재는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 아니라,
천 개의 습작과 천 개의 눈물로 이뤄진 자라고 바득바득 우겨봅니다.
나는 등에다가 제 3의 눈을 새겨 넣었습니다.
내 뒷모습만 바라보는 자들을 지켜봅니다.
전생의 나는 승천 못한 이무기였고 그 보다 훨씬 이전인 전생의 나는
호모 하발리스의 유산아였습니다.
어머니는 썩어가는 날 차가운 자궁 밑바닥에 방치했고 나는 황홀하게 죽어갔습니다.
현세의 나는 그저 범부입니다.
저임금 노동자의 세계에서 나는 녹슨 불량품이었고, 그래서 백무산을 좋아했지요.
온몸의 통증이 낫도록 온몸을 빌려 쓴, 온몸 그 자체인 걸작 하나 낳고 싶습니다.
예술가라면 으레 마땅히 외쳐야할 모든 것들을 위해 이 피를 건배!
모든 개인의 실존적 자유와 만유의 평화 평등과 세계의 구원을 위해 브라보! 외치며
그저 무겁고 비루한 이 한 생의 사소하고 결연한 행복을, 원해요.
운명이 내게 말하기를,
“사소한 불행 따위에 물러서지 않는 네가,
사서 한 불행들을 왜 내 탓으로 돌리니?”
그 모든 業이 견고한 나를 앙모하고 질책하며
내 등에 착생해 낙타 굽을 만들며 우는 딱 그만큼만을
나는 증명하고 살아낼 겁니다. 그 후에 사라지겠지요.
사라짐으로써 영원의 초월로 향하겠습니다.
이 모든 바람은 부는 태풍보다 강하고 그 눈처럼 고요하며
카오스처럼 혼돈하며 침묵합니다.
누가 나의 맨발에 키스하기를 기다리며 미라처럼 누워있지요.
덜덜 떨리는 손과 파리한 입술을 뉘어놓고 신음하며
이 질긴 부패 이 후 부활을 감히 기다려요.
글쎄, 언제일지 모르는 찰나와 찰나 사이를!
* 영화 ‘변호인’의 대사 인용.
* 보수를 자청하는 소수의 무리가 ‘전라도 왕따’라는 뜻으로 쓰는 은어적인 말. 그들은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위해 전라도
와 경상도를 대치시킨다.
* 수메르 신화의 여신. ‘바다’를 뜻하는 남무(Nammu)는 원래 뱀의 여신으로 그려져 왔다. 우주적인 물로서 남무는 안-키
(An-Ki), 즉 하늘과 땅을 낳는다.
보내지 않는 연하장
그래요, 부치지 않을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 글이 발송자 없이도 혼자서 제 수취인을 찾아갈 때까지
그대에게 묻는 안부는 그저 혼자 듣는 노크며, 음향 없는 앰프며
타종이 끝난 후 보신각 안에 묻은 침묵이며,
이미 울린 종소리가 박물관에 납관된 옛 종의 후생을 긁어대는 짓입니다.
오늘로 우리는 나이를 한 살 더 들었습니다.
나이 든다는 것은, 계단을 밟는 것과 달라서 뒤돌아 내려갈 순 없습니다.
철든다는 것, 무거운 철을 드는 것보단 편한 일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밟는 순간 사라지는 계단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사라진 계단이 또 다시 눈앞에 펼쳐져 헐떡거리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두 이십대였습니다.
내가 초코렛과 함께 보라색 장미를 접어주었던 것을 기억하시겠죠.
나는 그 꽃말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찾아보았습니다.
‘불완전한 사랑’ 혹은 ‘영원한 사랑’이래요.
이것은 설마 영원히 불완전한 사랑입니까?
그림자가 커져 사물을 뛰어넘는데도, 빛을 장악할 수 없듯이
그대 앞에서 나는 멈췄습니다.
당신은 일출의 방면으로 나는 일몰의 방면으로 돌아서 떠나갔습니다.
두 개의 달, 하나의 거울, 태양을 쪼개 반반 씩 그대와 내 심장에 넣었습니다.
달이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반해 몰락을 감수하며 내려온다거나
아니면 그것을 제 자식으로 착각해 첨벙 뛰어들어 구원하러온다거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결단코, 전설 속에서도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피리 부는 광인과 현악기를 켜는 거인이 나타나도 나를 설복할 수 없습니다.
천상에 있는 호메로스가 그러더라며,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며,
내가 신탁꾼의 계시를 받았노라며 들려줘도 믿지 않을 겁니다.
그대와 나의 경계에는 아름답고 위태로운 유리 막의 축제가 흐릅니다.
유리 인형이 동그랗게 중력을 견디며 회전화고
암끝검은표범나비의 무늬를 베낀 스테인드 그라스가 빛나고
나의 우울한 청춘은 시든 모란 잎처럼 저물어 갑니다.
극단 ‘청춘’을 떠나올 때의 맨발처럼
더럽고 야위고 때 국물 낀 시절을 쉰 목소리로 말합니다.
어느덧 그대는 삼십대가 되었고,
나는 아직 여남은 이십대를 수집할 준비도 자세도 갖추지 못한 채
부러진 아킬레스건을 주무르며 멈칫 앉아있습니다.
지금 이 의자가 내게 꼭 맞네요. ‘자기만의 방’을 벗어난 의자,,,,,,.
그런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천장도 벽도 문도 없는 야생의 산에서 해오름만을 파수하는 낡은 의자에게
내가 겪은 해거름들은, (……)이랬단다.
늙은 소녀 흉내를 내며 들려주고 아무 답신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누군가 들려주리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가령, 설마 아니기로 그대의 님프여인이 뱀파이어 분장을 하고 춤추던
그 어느 궁전의 턱시도 남자가 나타나 먼 곳에 있는 자들의 소식과 안부를
들려줘도 내 대답은 시큰둥한 ‘그렇군요’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 어떤 날의, 내 세상의 이야기를
의자와 바람과 솔방울과 지평선에게 들려줘도
그들 역시 ‘그렇군요.’하고 말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압니다마는……
내가 밟아 사라져온 계단들이 뭉쳐 눈앞에 펼쳐져있는 보라색 풍경을 사랑합니다.
흔히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도 부르는 그것과 흡사한
주황빛 일출을 스물여덟의 방에서 보고 있지요.
쓰디쓴 커피를 삼키며, 언젠가 알코올을 배우고 싶었던 소녀 시절을 반추하며
나의 쓸모없는 젊음을 생각합니다. 덧없이 생생한 젊음이여!
탄식은 비관과 희열과 그것들에 대한 하잘 것 없는 예우를 동반합니다.
누군가 목발을 쥐어줄까요?
그리하여 계속 사라지는 계단을 밟아 그대에게로 당도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태양을 만들 수 있도록…… 나눠 가진 심장을 기억합니다.
이를테면 저는 꿈을 꿉니다. 자각몽도 아니어서 매우 날쌔고 견고하고 두려운 꿈
안에서, 저는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을 봅니다.
미쳐버린 까미유 끌로델의 얼굴에서 내 이름 석 자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얗고 어지러운 병실에 누워 의욕과 생기에 안녕하고 있는
나의 말년이 불행할 것을 전주하는 오르간을 마구마구 부서트리고 있는 자가 있고,
그가 누구인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이 꿈 속에서 나는 면회 오지 않는 누구를 기다리고, 다시 밝은 아침을 기다립니다.
눈 뜨면 보라색은 사라져있고, 그저 방에 누운 내 몸을 봅니다.
나는 로뎅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도 모릅니다.
사랑, 희망, 꿈, 이런 거창한 추상명사들을 모를 만큼 야위어있습니다.
그렇다 한들 아직 의자는 부러지지 않았고 난쟁이들을 좋아하며
천년에 한 번 뿐인 개기일식과 월식 금환식을 좋아합니다.
과달카날의 어떤 폭발물을 내 심장에 투하한들
그대에게 맡기고 온 반쪽 심장은 살아남을 겁니다.
그 때 무대에 날 위한 레퀴엠을 올릴 건가요? 춤추는 레퀴엠.
중세 아라베스크 문양의 드레스를 입고 뱀파이어로 분장한
그대의 님프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대는 모를 겁니다.
끝끝내 내 황홀을 전할 수 없었기에.
샬럿 무어먼의 첼로 소리를 들으며 난 젊음의 안팎에서 늙어갑니다.
기필코, 나는 로뎅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나의 어린 애인은 내 발톱과 손톱 안에 숨어있고,
그대에게 부치지 않는 이 안서를 나는 고이 접어둡니다.
맨 마지막 나중에, 일출도 일몰도 아닌 어떤 때, 불현 듯 그대를 찾아갈 겁니다.
비둘기는 아직 날아가지 않습니다.
가려운 날개를 긁으며 하늘과 포옹하고 있을 뿐입니다.
올랭피아 연회곡
춤추는 육체를 구경하러 오세요.
빛과 어둠이 절취선 없이도 서로를 도려내는 경계,
알몸으로 누운 여인이 말을 겁니다.
곧 시들 꽃다발을 든 흑인 노예는 순백의 여인을 응시하고 있어요.
체념한 듯 누워있는 여자에게서 옆집 고아의 어미 냄새가 나기도 하고
아무 느낌 없이 스친 거리의 아가씨 냄새도 납니다.
오늘의 연회는 불편한 자리
엇박자의 미뉴에트와 파트너 없이 추는 왈츠를 선보이겠어요.
역겨운 신 포도주 멜랑꼴리 쥬스를 팔겠어요.
검은 고양이가 식탁 위에 올라 옆집 여자의 사생활을 읊어주기도 하겠죠.
인류가 궁금하지 않은 침대의 역사,
그게 있다면 소개시켜 주실래요?
내 배꼽을 낳은 배꼽의 여자와 아버지가 춤추듯 합궁하다 산란한
음악과 책력과 화분과 호주머니를 ‘누이’라고 부릅니다.
파리의 골동품 상가에 있는 그릇의 문양과 이 육체를 바꾸지 않습니다.
센 강은 말없이 샹젤리제를 지나가는데,
콩코르드 광장에서 길 잃은 소년이
호객꾼의 손에 이끌려가며 억지로 청년으로 변해버린 광경을
이 육체는 고발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나무라지 않고 아무도 모욕하지 않고 순합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아니라서 외면한 곳에 문득
내 아버지와 동침한 옆집 여자의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파트너도 없이 추는 왈츠, 엇박자 미뉴에트
오늘의 연회곡은 선량한 시민들에 걸맞게 무죄입니다.
파리지앵의 취향은 우아하고 밤과 낮처럼 또렷합니다.
사과
사과를 깎기 위해선 먼저 사과에 상처를 내어야한다.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네 온몸을 삼키고 싶었다.
에덴의 실낙원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열매처럼
허물을 벗는 뱀의 뱃가죽에 눌린 흙에 덮여 썩어도
그것이 악마와의 귀접이거나 육체간의 성교라고 믿진 않아
우리 여인은 꼭두각시 인형과 간음을 나누었지
염탐하고 욕망할 대상이 없었기에 택한 모형은 산 것보다 더욱 정교하고 세련됐지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에 등장하는 백조의 모형 날개보다
옆 마을에서 날아온 참새의 날개가 더 사과나무 가지에 앉기 적합한데
소박하고 진정한 숨결보다 화려하고 죽어버린 숨결이 익숙한 것은
아직 사과나무 뿌리가 박힌 흙 속에서 아담의 흔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뱀은 자꾸 똬리를 트며 번식하는 공간을 늘려가고
그 허물 만지는 것만으로도 부정 탄 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열 살짜리 소녀에게 가르쳐주진 않았지
그런데 너는 왜 자꾸 내게 사과를 건네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니?
우리의 실낙원은 상처가 패어낸 굴곡 속에 협곡과 습곡을 지어 번성하고 있어.
상처를 꼭 나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꼭 화해를 해야만 이해 가능한 사이란 서글픈 관계다.
멀리서 애증하며 덮어놓아도 좋을 사람아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길 밖에 없었지
내가 만들어준 상처가 좀 더 곱다, 네가 만들어준 상처는 아름답다
칼처럼 손톱을 잇대던 그 흔적을 우리 관계의 증표라고 부르며
아파하는 스스로에게 도취하며 온 감정을 삼키려 했다
‘인형에겐 상처를 낼 수 없어서 저는 영구적인 혼자만의 통증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상처를 낼 수 없는 관계라니, 지독한 짝사랑이라니,
그러니 몇 번 몸을 던져도 그것이 불륜에 성립할 수 없다는 말, 내겐 모형뿐인 거죠.’
원죄는 사랑의 역설을 드러내며 나타났습니다.
깨어진 약속, 버림받은 세계, 태초 이전의 열매
이미 우리가 나기 전 사랑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화해의 가능성은 속죄의 범위를 넓혀놓고 떠난 옛날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서로를 용서치 않고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별에 아파하진 마세요.
잠언과의 이별, 혁명과의 이별,
데모와의 이별, 시와의 이별, 민중과의 이별
오페라와의 이별, 씻김굿과의 이별, 편지와의 이별
강물과 남극 빙하에 녹은 얼음과의 이별
그 모든 사소한 이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상처가 있기에 사랑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진 않겠지마는
그 자리에서 돋아나는 우리들의 에덴을 봅니다.
아담도 없는데 모형을 만들어 성교를 나눈 우리는
눈을 감고 말없이 서로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지요
우주의 입에 온몸이 삼켜지는 종말을 예감하며
선악과와 생명과의 모습을 ‘사과’라고 부르지요.
화해라는 종말이 오기까지 먼 곳의 모습을 그토록 미워하며 그토록 그리워하죠.
열 살짜리 소녀가 키득키득 웃곤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잠들지요.
‘사랑하는 사이엔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는 거래’
구효경
1987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
전남과학대학 화훼원예과 중퇴.
(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 소속.
첫댓글 읽는 데 열나게 오래 잘 읽었습니다.. ㅎ
인내심이 필요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