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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사
54. 제4차 돌격전과 태평양분함대의 최후(1)
일본군 최고사령부는 11월 초에 제2태평양분함대가 이미 인도양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소식은 도고 장군과 오야마 이와오(大山嚴) 원수를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연합함대의 전함을 수리하여 로제스트벤스키의 분함대와 최후의 결전에 임해야 한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제4차 돌격전을 종용하는 오야마 원수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 장군과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장군이 제3군 참모부로 파견되었다. 노기 마레스케 장군은 갱도작업이 완료되지 않았지만 당시의 상황과 총참모부의 강력한 요구를 고려하여 새로운 돌격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공격은 11월 13일로 예정되었다. 공격목표는 포대 B, 쿠로파트킨 안경보, 항포격용보루 №.Ⅱ 및 보루 №.3 등으로 이전과 같았다. 제1, 9, 11사단 등 3개 사단과 제7사단 소속의 26연대가 공격을 담당했다. 공격에 앞서 공격대상이 된 보루는 물론 공격목표를 지원할 수 있는 모든 포대와 보루를 강력하게 포격하기로 예정되었다.
제4차 돌격전에 투입된 일본군의 병력은 약 5만 명에 달했다. 반면 돌격전 초기에 모든 육지전선의 수비대와 총예비대의 병력은 17,919명이었다. 공격목표를 방어중인 부대는 61개 중대에 총 병력수가 5,717명에 불과했다.
11월 7일에 러시아와 일본 양측의 선봉부대간에 이미 소규모 충돌이 시작되었는데, 일본의 입장에서는 첩보전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동시에 동부전선의 보루 앞에 위치한 일본군의 후방에서 이루어지는 부대의 재배치가 관측되었다. 이는 돌격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러시아군 지휘부는 관측된 바에 의거하여 일본군의 주공격 방면과 목표를 예측할 수 있었다.
11월 13일 오전 08시부터 일본 포병의 집중포격이 시작되었다. 포격대상은 동부전선의 모든 보루와 포대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약 11시경 일본 보병이 다면보루 №.1, 항포격용보루 №.Ⅲ 및 보루 №.3 지역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면서 포대 B에서부터 보루 №.3를 포함한 지역에서 일본군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하루종일 동부전선의 모든 보루를 공격했다. 일본군의 공격 형태는 동일했다. 일본군 병사들은 교통참호와 이전에 점령한 엄개물에 집결한 후, 그곳을 발판으로 삼아 흉장을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그들을 향해 소총으로 일제사격을 가하고 수류탄을 투척했으며, 이후 맹렬하게 백병전에 임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돌격 첫날 일본군은 수차례에 걸쳐 지뢰를 폭파했다. 12시에 항포격용보루 №.Ⅱ의 흉장 밑에 매설된 지뢰가 폭발했다. 만리장성을 공격할 때에도 3개의 원추형 갱도와 여러 개의 지뢰가 폭발했다. 이로 인하여 러시아군의 방어시설이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나, 일본군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15시가 되자 일본군 지휘부는 제4차 돌격전 역시 그 시작부터가 실패였음을 명확히 인식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에게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야간공격을 실행했다. 나카무라 마사오(中村正雄) 장군을 위시한 지원병 2,600명으로 구성된 특별분견대는 요새 내부를 돌파하고 동부전선 방어망을 관통해야만 했다. 나카무라 마사오의 분견대에 하달된 임무는 어둠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계곡을 따라 이동하여, 동부전선의 좌측을 점령한 후 포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기로 되었다. 포대를 점령하면 보루 №.3를 공격하고 이후 동부전선의 항포격용보루의 후방에 위치한 나머지 거점을 순차적으로 점령하기로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군 제3군의 주력부대가 동부전선을 재차 공격할 예정이었다.
출발에 앞서 나카무라 마사오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떠한 관등의 장교라 할지라도 모든 장교들은 스스로를 제2인자로 여겨야 한다. 적에 대한 공격은 백병전이 될 것이다. 적의 진지를 확고히 점령하기 이전에는 적군의 어떠한 화력에 대해서도 사격해서는 안 된다. 모든 장교들은 이유 없이 멈추어 서는 자, 자신의 위치를 방치한 자 또는 뒤로 물러서는 자를 지체 없이 사살하라. 이것은 명령이다.
약18시경 나카무라의 분견대는 남동 방면으로 이동했다. 일본군 공격종대의 이동이 곧바로 러시아군에게 발각되었다. 항포격용보루 №.Ⅳ에서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포대의 수비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전혀 탐지하지 못했다. 일본군이 불시에 포대를 침입한 후에야 유산탄으로 집중포격을 가했으며, 포대의 병력은 주변에서 증원된 2개의 수병중대(水兵中隊)와 합세하여 백병전을 치렀다. 일본군의 계속된 전진이 차단되었으며, 일본군은 만리장성의 흉장 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의 기습공격에 관한 보고서를 지참한 전령이 동부전선 참모부로 향했다. 동부전선의 지휘관 고르바토프스키 장군은 콘트라첸코 장군과 잠시 상의한 후, 포베다 호, 페레스베트 호 그리고 바얀 호에서 상륙한 3개 중대를 위의 포대로 증파했다. 나카무라 마사오 장군이 병력을 재정비한 후, 공격을 시작한 순간 보루 №.3에서 증원군이 도착했다.
일본군는 러시아 수병이 측면과 후방에서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지체 없이 일본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러시아군의 맹렬한 공격이 시작된 지 수분 만에 일본군은 협곡으로 격퇴되었다.
이로써 제4차 돌격전의 첫 단계가 종료되었다. 날이 밝을 무렵 포대 앞에서만 일본군 장교와 병사의 시체 780구가 발견되었다. 11월 13일의 하루 동안에만 일본군의 병력손실이 약 4,500명에 달했다. 러시아군의 손실 또한 막대하여 전사자만 1,500명 이상이었다. 여러 개의 중대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55. 제4차 돌격전과 태평양분함대의 최후(2)
동부전선에서 실패를 거듭한 일본군 지휘부는 주력부대를 남부전선의 203고지에 집중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산의 정상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분함대 군함을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는 이상적인 관측소였다.
9월의 돌격전 후 보강된 203고지의 보루는 엄개물이 갖추어진 깊은 환상참호(環象塹壕)로 이루어졌다. 이 참호는 깊숙한 내부 교통참호가 구축된 산의 좌측 정상과 6인치 대포용 포대가 설치된 산의 우측 정상을 연결하면서 감싸는 듯한 모양으로 구축되었다. 우측 정상의 포대는 보루로 개조되었으며, 야전포용 포대가 있는 참호를 지나 계속해서 좌측 정상의 다면보루로 이어졌다. 산의 뒤쪽 경사지에는 예비대를 위한 엄폐호가 구축되었으며, 환상참호의 앞 그리고 좌측 다면보루와 환상참호 사이에는 철조망과 같은 인공장애물이 설치되었다.
진지강화작업 또한 계속되었다. 위의 보루 외에도 폭발물을 이용하여 암벽에 넓은 동굴을 굴착하였다. 다른 진지와는 달리 203고지에 증기급수탑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러시아군 지휘부가 그 산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4차 돌격전의 초기에 203고지의 수비대는 제14, 제15동부시베리아보병연대 소속의 5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인근의 팔쉬바야 산, 플로스카야 산 그리고 디비지온나야 산을 방어하는 것 역시 203고지의 방어에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플로스카야 산의 수비대는 8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산 정상에는 참호로 연결된 4개의 야전보루가 구축되었으며, 그 중 보루 №.4가 가장 강력했는데, 암반 위에 구축되어서 채석장 다면보루라고 불리기도 했다.
203고지의 좌측에 위치한 팔쉬바야 산과 플로스카야 산의 우측에 위치한 디비지온나야 산에는 야전참호가 구축되었다. 이 산의 근접로에는 사각지대가 많이 존재했는데, 인근의 항포격용보루와 포대에서도 포격을 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방어에 매우 곤란한 지형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 외에도 시간상의 문제로 인하여 다면보루와 보루의 전방에 외부 굴강을 구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이곳을 손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11월 14일 일본군은 203고지의 하부참호로부터 약 150~200보의 거리까지 평행호를 접근시켰다. 새벽녘에 일본군의 11인치 유탄포와 포위포가 203고지와 플로스카야 산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17시경 203고지의 엄개물 22개와 산의 남서 경사면에 구축된 흉장이 파괴되자 제4예비여단 소속의 제38예비연대와 제7사단 제26연대 소속의 2개대대 병력으로 보강된 일본군 제1사단이 위의 산을 공격했다. 일본군의 월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 수비대는 21시까지 모든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공격이 끝난 뒤에는 파손된 보루시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11월 15일 05시에 집중포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08시 밤새 복구된 보루시설이 파괴되었으며, 곧이어 일본군이 2개 공격대형으로 203고지를, 1개 공격대형으로 플로스카야 산을 각각 공격했다. 일본군은 사각지대를 이용하여, 203고지의 환상참호 남서쪽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인근에 배치된 야전포병소대가 그들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1개 공격대형이 정오에 공격출발점으로 후퇴했다. 같은 시각에 다른 공격대형은 203고지에 구축한 보루의 북쪽구역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공격이 이루어지는 동안 침묵을 지키던 일본 포병이 재차 집중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5시경 수많은 엄개물이 파괴되면서 203고지의 수비대가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공격을 재개한 일본군은 16시 30분에 참호의 남서쪽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러시아군 수비대를 격퇴한 후, 다면보루를 공격했다. 트레치아코프 대령은 예비대로부터 지원받은 2개 중대의 도움으로 반격을 시도하여 저녁 무렵에 전세를 복구할 수 있었다.
노기 장군은 제1사단의 전력이 약화되자 11월 16일에 제7사단을 새로이 전투에 투입했다. 이날 일본군의 포격이 특히 강력해서, 발사된 11인치 유탄포탄만 해도 1천 발에 달했다. 그러나 11월 16~19일까지의 공격은 모두 실패로 끝을 맺었다.
러시아와 일본 양측은 뤼순 전투의 진행과 결과에서 203고지가 갖는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매우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11월 18일 남부전선 전체가 소강상태였지만 203고지는 예외였다.
수비대는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참호는 파괴되었으며, 43개의 엄개물 중 단 2개만이 온전했다. 아무런 엄폐시설을 갖추지 못한 채 일본군의 공격을 백병전과 수류탄으로 격퇴한 만큼 병력손실 또한 막대했다. 11월 18일 새벽까지 1,600명의 병력이 야전응급치료소를 거쳐갔다. 총 5일에 걸친 203고지의 전투에서 발생한 러시아군의 병력손실은 2,500명에 달했다. 트레치아코프 대령은 중상을 입었으며, 콘트라첸코 장군은 계속해서 지원군을 증파했다. 총예비대의 병력이 고갈되면서 다른 방어구역의 병력과 함대병력으로 증원군이 편성되었다.
플로스카야 산의 상황 또한 비관적이었다. 참호와 엄폐물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수비대의 손실은 막대했다. 노기 장군은 11월 19~21일 새로운 공격을 중단하고 상대방이 보루를 보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강력한 포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11월 22일 07시 55분 11인치 유산탄과 지뢰폭탄을 동원하여 203고지를 집중포격하기 시작했다. 제1차 포격 당시 콘트라첸코 장군은 제5연대 참모부에 도착하여 수비대를 통제했다. 08시 15분 공격이 재개되었으며, 곧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화력에 의한 병력손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진격해 들어갔다. 영국 <데일리 메일>지의 특파원이 후일 지적한 바와 같이 “가장 곤란한 장애물은 철조망이었다. 일본군은 철조망을 칼로 절단하거나, 손과 이빨로 비틀어 절단했다. 철조망을 지탱해주는 말뚝을 부수거나 굵은 밧줄을 묶은 다음 뽑아내기도 했다.”
15시 계속해서 증원대를 파견하다가는 다른 방어구역이 위험할 수 있게 되었던 반면 일본군의 공격은 약화되지 않았다. 11월 22일 아침부터 203고지에서는 네 차례에 걸쳐 정복과 수복이 반복되었다. 일본군은 실질적으로 두 산의 정상을 점령했다.
17시 30분 거의 9일간의 계속된 전투와 포격에 만신창이가 되고 피로에 지친 수비대가 요새로 후퇴했다. 같은 날 저녁 플로스카야, 디비지온나야 산으로부터 남부전선의 항포격용보루선 후방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수비대에 하달되었다. 203고지에서 후퇴한 장교와 병사들은 밤이 되자 증원군 2개 중대와 합세하여 진지를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미 기관총을 설치한 상태여서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203고지 전투는 제4차 돌격전의 정점이었다. 203고지와 플로스카야 산 전투에 투입된 러시아 병력은 독립부대와 분견대 등 총 80개 중대가 넘었으며, 그 중 대부분은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따라서 위의 부대는 후방으로 후퇴한 후에 모두 해체되었다. 제5연대에서만 23명의 장교, 26명의 소위보(오늘날의 준위) 및 1,805명의 하사관 중 각각 14명, 17명, 1,25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비대의 병력손실은 약 5천 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군의 손실은 러시아군보다 2배 많은 만 명이 넘었다.
제1태평양분함대는 실질적으로 내항에 고립되어 있었으며, 9월부터는 일본육군의 계속된 포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제4차 돌격전이 막바지에 달할 무렵 많은 군함은 심각하게 파손된 상태여서 점점 수리가 곤란해졌다. 결국 10월 말의 함장회의에서는 “최악의 경우, 즉 요새의 함락이 임박했을 때, 출항 가능한 모든 군함을 비롯하여 그곳까지 예인할 수 있는 모든 함선을 화선 옆에서 침몰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러시아 군함에 대한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11월의 초반이 끝나갈 무렵 각 군함에는 최소한의 포탄만이 남아 있었으며, 거의 모든 탄약은 육지 전선으로 이송되었다. 함대의 실질적인 전투력은 고갈되었다. 제4차 돌격전 당시 러시아 군함은 전투에 전혀 참가하지 않았다.
신시가지와 남부 및 동부 연안의 남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203고지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됨과 동시에 러시아 분함대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11인치 유탄포의 포격을 정확히 교정할 수 있게 된 일본군은 즉시 러시아 군함을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함 폴타바 호가 첫 번째 희생자였다. 11월 22일 13시 30분 폴타바 호의 좌현에 명중된 11인치 유탄포탄이 갑판을 관통하여 47㎜ 포탄이 저장되어 있는 창고에 명중했다. 포탄이 폭발하면서 전함의 밑바닥과 저장고의 격벽이 파열되었고 화재가 발생했으며, 12인치 포탄이 소실되었다. 다른 강력한 폭발이 계속되었으며, 여러 개의 방수용 칸막이가 파괴되었다. 승조원과 기선 실라츠 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함은 선미부터 가라앉기 시작했으며, 최상부 갑판이 침수되자 곧 침몰했다.
이와 동시에 레트비잔 호에 강력한 포격이 집중되면서 포탄 8발이 명중되었다. 운항이 가능했던 레트비잔 호는 서부 연안으로부터 보다 안전했던 동부 연안으로 이동하려 했는데 서부 연안에 대한 계속된 포격 때문에 이동할 수 없었다. 다음날 일본군은 500발 이상의 11인치 포탄을 발사하여 전함 레트비잔과 페레스베트 호를 침몰시켰다.
11월 24일 전함 포베다 호와 순양함 팔라다 호가 완파되었으며, 25일에는 순양함 바얀 호와 수송선 헤이룽장 호가 심각하게 파손되었는데, 26일에 바얀 호가 침몰되었다. 파손되지 않은 함선은 전함 세바스토폴 호와 포함 오트바즈늬 호, 수뢰정 7척 그리고 기선 실라츠 호뿐이었다. 세바스토폴 호는 함장 에센 해군대령의 주장에 따라 11월 26일 밤 정박지로부터 출항하여 새벽에 포함 오트바즈늬 호 근처에 정선했다. 에센 대령은 일본 함대의 봉쇄를 돌파하여 외해로 출항하려 했지만 함대장 비렌이 승낙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세바스토폴 호의 출항 사실을 즉시 눈치채지 못했다. 11월 26일 아침부터 동부 연안에 대한 11인치 유탄포격이 시작되어 약 300발의 포탄이 세바스토폴 호가 정박해 있던 지점을 향하여 발사되었다. 동부 연안에 대한 포격은 점심때 되어서야 중단되었다. 세바스토폴 호의 출항소식을 접한 도고 장군은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세바스토폴 호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은 6일간 계속되었다. 이 공격에는 10개의 수뢰정 편대(총 30척)와 기뢰부설함 2척, 함재수뢰정 3척이 참가했다. 본 전투에서 일본군 수뢰정 2척이 침몰되었으며, 수뢰정 9척과 함재수뢰정 2척이 파손되었다.
12월 2일 공격이 중단되었다. 일본군 지휘부는 세바스토폴 호가 심하게 파손된 만큼 곧 침몰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위의 전함은 아직 항해중이었으며, 뤼순 방어 최후의 순간까지 일본군의 육지진지를 향해 간접포격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