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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탁(李鐸)의 본명은 제용(濟鏞)이고, 호는 동우(東愚)이다. 자는 태연(跆然)이며, 1889년 3월 18일 평안남도 평원군1)에서 대지주인 이용규(李龍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성천군과 개천·강동 3개 군에 걸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부농이었다.
5살 때부터 한학을 배우고, 14살 때인 1902년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를 지냈고, 1907년 고향인 성천·개천군 유지들과 협력하여 10여 곳에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 평양 대성학교 속성사범과에 입학하여,안창호의 지도를 받았다. 이 때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재학 중 신민회의 사명을 띠고 남북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독립군기지를 물색하였다.
이탁의 독립운동 역정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국권 피탈 직후인 1910년 9월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이시영 등을 도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산을 정리하던 중, 체포령이 내려져 아우 이석(李錫, 본명 李濬鏞)과 재차 망명하여 유하현 제1구 야저구(野猪溝)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개간사업을 하였다.
1912년 부민단(扶民團)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또 신흥학교유지회(新興學校維持會)를 조직하여 신흥학교 운영기금을 모금했다. 1913년 국내의 가족들을 데려왔고 유하현 소재 일신학교(日新學校) 교장이 되었다. 1914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경영에 참여하다가 통하현(通河縣) 북쪽에 있는 무인지대로 옮겼다고 한다.
1917년 5월 의병장 이진룡이 체포되자 그의 부하들을 규합하여 독립군부대를 재편성하였고, 이해 이갑을 만나기 위해 시베리아를 왕복하였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인 1918년 두 차례 국내에 잠입하였으며, 1919년 이완용(李完用)을 포함한 매국 7적 응징을 목적으로 ‘27결사대’를 조직하여 서울에 잠입하였다. 매국 7적 성토문과 격문을 배포한 다음 만주로 돌아갔다.
1919년 9월 봉천성 내 천성여관(天成旅館)에 보관해 둔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국내로 반입하는 데 실패하였다. 11월 관전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를 조직하여 교육부장에 선출되었다.
1920년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표로 상해 임정에 파견되어, 서간도지역 임정의 군사기구로 광복군총사령부를 조직키로 결정하였다. 이 무렵 흥사단에 예비단원으로 입단하였고, 6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동삼성외교위원장(東三省外交委員長)에 임명되었다.
1920년 7월 미국 의원단이 상해를 거쳐 내한하는 것을 계기로 광복군총영의 오동진(吳東振)과 협의, 3개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항일·독립의 의지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결사대원들이 붙잡힘에 따라 이완용 등 암살미수사건 등과 병합한 죄명으로 1921년 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다시 상해로 와서 김규식·여운형·신익희, 중국인 오산(吳山) 등과 함께 등과 중한국민호조사(中韓國民互助社)를 조직하고, 문서과 부주임이 되었다.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무간사로 선임되었고,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상해 대한적십자사 감사로 선임되었다. 이어 국민대표회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가 조직되자, 서기로 임명되어 대회를 준비했으며,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해 재정분과위원에 선출되었다.
1923년 북경으로 옮겨 안창호와 함께 이상촌 건설 후보지를 물색하였다. 1926년에는 길림성으로 가서 재만 한인의 생활 안정을 위해 토지를 구입하고 개간사업을 벌이고자 했다. 또 민족유일당운동과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통합운동에 참여하였고, 농민호조사 발기(1927. 4. 1.)에도 합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1927년 1월 27일 길림성 조양문에서 열린 나석주 의사 추도회에서 강연을 하던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는 이 사건 직전 북경 행 열차를 탔기에 검거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북경에 도착해서는 중국사회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중국정부 당국을 상대로 이들의 석방 교섭을 벌여, 길림에 구금되어 있는 동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같은 해 11월 길림성과 봉천성에서 한인학교 폐쇄령과 한인 퇴거령이 내려지자 장기간에 걸쳐 중국당국과 교섭하여 이를 철회시켰다.
1929년 상해로 가서 한인학생을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4월에는 안창호의 지시로 평양·선천 등지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펼쳤다. 12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만주·간도지방 대표로 선임되었다.
1930년 5월 17일 상해 하비로(霞飛路) 소재 고려물산공사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니 향년 42세였다. 임정과 교민단 합동의 사회장으로 모시고, 정안사로(靜安寺路)에 있는 외국인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14년 봄 그는 이동희(李東熙)란 인물과 함께 유하현(柳河縣) 대사탄(大沙灘) 소재 한인학교(학생 수 30명)를 경영하였다.2) 같은 해 서리가 일찍 내려 흉년이 들자 미주동포들의 구호금을 받아 한인들을 구제했다고 한다.3)
1916년 상반기 일제 정보보고서에서는 그를 부민단(扶民團)의 ‘부회장’으로 파악하였다.4) 또 “1917년 여름 무렵 유하현 대사탄을 중심으로 조선인 거주자는 3〜400여 명을 헤아리는 데, 그 중 야저구(野猪溝, 大沙灘의 서남쪽 20中國里)에 거주하는 이탁(李鐸)이라는 자는 3천여 원의 자금으로 토지를 조차하여 많은 소작인을 가진 지방의 명망가로 두드러진다”5)는 일제 정보자료는 그가 유하현 일대 한인사회에서 경제력을 기반으로 지도적 인물로 역할 하였음을 알려준다.
1918년 봄 그가 유하현 삼원포 소재 남녀 180여 명의 신도가 다니는 기독교회의 ‘조사(助社)’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6) 박화남(朴華南)·박창렬(朴昌烈)·백인해(白仁海)·이탁(李鐸) 등은 중국인 유력자의 소개나 이관두(李寬斗)와 같은 통역의 소개로 관전현지사(寬甸縣知事)와 친교를 맺어 지원을 받고 있는데, 그들은 상해 임시정부 및 시베리아 북만의 동지들과 서로 연락하여 행동을 조율하고 있다7)는 1921년 봄의 일제 정보자료 역시 그가 서간도 지역 한인사회를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1918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유하현 삼원포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에서는 36개 학교와 서당, 3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운동회가 개최되었다. 운동회가 끝난 후인 6월 10일에 이탁은 이원(李元) 등 동지 26명과 함께 자단정신(自團精神)을 배양한다. 남만주 내에서 (친일)조선인조합(朝鮮人組合)을 해방시킨다. 이주한인 매호(每戶)로부터 1원(元) 5각(角) 씩을 징수하여 5연발총 및 탄약을 구입한다. 중국관헌과 교섭하여 귀화 사무를 이용하여 조합에 가입한 자에게 압박과 손해를 가한다. 일제 통화영사분관(通化領事分館)을 쳐부순다. 조선인조합의 직원을 모살한다. 모처의 일본인을 쳐부수는 모험단(冒險團)을 결사대(決死隊) 안에 설치한다. 유사시에는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만일 물러서는 자가 있으면, 내통자로 간주하여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살해한다는 것 등을 결의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였다.8)
이 같은 한인사회 및 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면모는 1918년 4월 11일자로 작성된 ‘반일 한인 주동자 명단(排日鮮人主領者人名表)’에서 그의 이름(본적: 평안도, 주소: 유하현)이 이동휘·양기탁·홍범도·조욱(조성환)·이범윤·유동열·이장녕·조맹선·이상룡·이시영·윤세복·신성(신규식)·김교헌·신채호·허혁·여준 등과 함께 등장하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9)
한인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지향한 이탁의 리더십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그가 안창호가 구상하고 추진한 ‘이상촌(理想村) 건설’ 사업 참여이다. 단편적인 자료이지만,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인 1923년 8월 그는 북경으로 이주하여, 안창호와 함께 북경·산해관·남구·서산 일대를 답사하여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촌 후보지를 물색하는 한편, 웅희령(熊希齡)이라는 중국인과 회담하여 한인학생의 중국학교 유학 문제와 한인 구호책을 협의했다.10)
1924년 11월 미국으로 떠나기 전 안창호는 이유필·조상섭 등 측근에게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임정 편입과 이상촌 건설의 후보지 조사를 계속하도록 지시하고, 이탁에게 이들 주무(主務) 역할을 맡겼다. 이탁은 평양 대성학교 시절에도 신민회의 사명을 띠고 북만주를 답사하여 독립운동기지를 물색하고 재만 동포의 생활실정과 토지 사정을 시찰한 바 있었다.11)
1926년 1월에는 논을 매입하기 위해 길림성 액목현(額穆縣) 교하(蛟河) 일대를 답사했다12)는 자료가 있고, 또 다른 자료에서는 흥사단 단장 안창호는 이탁과 공모하여 길림성 액목현 교하 부근에서 논을 매수 경영하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이탁은 금년(1926) 1월 중 실지답사를 한 다음 그 상황을 안창호에게 알렸다. 2월 중순 영구(營口)에서 선편으로 남경(南京)으로 가려했지만, 얼음이 얼어 배가 운행되지 않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대련(大連)에서 배를 타려 했으나 일제에 체포당할 우려가 있어 아직 길림에 머무르고 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남경으로 가서 안창호를 데리고 액목현으로 가서 논농사 경영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파악하였다.13)
안창호와 이탁이 구상한 ‘이상촌 건설’이라 함은 한인 경영의 논농사를 확대 강화함으로써, 재만 한인의 경제적 향상과 안정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독립운동의 경제적 기반 강화를 꾀한다는 구상이었다고 하겠다.
(2) 독립군 부대 인솔과 활동“서간도 방면 특히 집안·임강·통화·환인·관전현 내의 각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들은 금년 음 4월경 각 단체를 통일하기 위하여 동·서·남·북의 4로(路)를 설치하여 각 사령관을 두어, 동로는 자칭 정령(正領) 홍범도(洪範圖), 남로는 참장(參將) 이웅해(李雄海), 서로는 부령(副領) 최의경(崔義慶), 북로는 정령 이탁(李鐸)을 수장으로 하여 각 부서를 정하였다”14)
위의 일제정보자료는 1920년대 초반 서간도 지역 독립군 활동에 있어서 이탁의 비중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같은 평가는 “1918년 8월 7일자 및 10월 1일자로 작성된 ‘재만 한인 항일운동 지도자 명단(在滿鮮人排日首領者姓名)’표에서는 이시영·이범윤·이동휘·홍범도·양기탁·이동녕·이장녕·조욱(조성환)·조맹선·이상룡·윤세복·유동열·신성(신규식)·김교헌·신채호·허혁·박순(박찬익) 등의 이름과 함께 ‘이탁’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의 신상에 관해서는 ‘신분: 평민, 현주소: 유하현, 전직: 의병, 원적지: 평안도’로 파악된다”15)는 자료로 그 신빙성이 더해진다.
1920년대 초반 그의 독립군 활동은 서간도지역 임정의 군사기관으로서 광복군사령부의 설치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1920년 음력 정월(양력 3월) 관전현 지역의 독립군단체인 의용단(義勇隊)은 광복단(光復團)으로 개칭하였다. 이해 4월 이탁이 상해로 가서 안창호와 김희선 군무차장 등과 협의를 거쳐, 1920년 7월 1일에서 12일 사이 광복단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대한광복군사령부를 결성키로 결정하였다.
7월 26일과 8월 1일 임시정부는 「대한광복군참리부 규정」, 「대한광복군사령부 규정」, 「대한광복군영 규정」을 공포함으로써, 안동현을 중심으로 한 서간도지역 독립군단체의 통합체로서 (대한)광복군사령부를 (상해에서) 결성했다.16)
봉오동전투 승리 직후의 시점에서 서간도지역에 임시정부의 직할 군사기관을 설치하는 작업에 이탁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시기의 일제자료에서는 이탁이 “광복군사령부의 사령관인 셈으로, 병력은 230명을 헤아린다.”17)고 파악하였다.
1920년 4월 15일 직전 서간도에서 상해로 온 이탁의 목적은 대한청년단연합회 제2차 총회(1920년 4월 19일) 참석과18) “임시정부의 양해를 얻어 독립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구입”하는 데 있었다.19) 이후 이탁은 대한청년단연합회 제2차 총회의 결의사항을 위임받아 ‘파견대표’의 자격으로 임시정부와 광복군 조직에 관해 협의하였다.
5월 초 상해에서 안창호와 광복군 조직에 대해 의논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동지와 독립단 수뇌, 청년단 수뇌들과 오랫동안 협의한 결과로 각 수뇌인물이 연합하여 모험대를 조직하되, 그 이름을 광복군(光復軍)이라 하고, 특정단체에 부속하는 것이 아니고 정부에 속한 국가적 군인이 되게 하자 하여”20) 광복군을 조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광복군 조직에는 “이미 조직된 광복군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다.21) 이해 8월 대한청년단연합회·대한독립단, 국내의 의용단을 통합하여 광복군을 조직한 사실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일제 정보자료에서 파악되고 있는 그의 독립군 활동 사실을 살펴보면, “1920년 10월 26일 밤 통화(通化) 방면으로부터 돌아 온 어떤 한인의 말에 의하면, 상류 각 현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이탁은 약 3개월 전 안동을 경유하여 상해로 출장 중이다. 9월 상순 봉천을 경유하여 길림으로 가서, 다시 이번 달(1920. 10월) 5일 러시아식 총 200정, 권총 100정, 폭탄 20개, 탄약 1만 발을 소지한 독립단원 400명을 이끌고 통화에 잠입하여 상류 일대에서 일본 관민 및 부일한인을 격멸하였다. 각 단체와 결합하여 국내로 침입하려 계획 중으로 중국인들로 하여금 무기를 운반시키고 있었다.22) 1920년 10월 31일자로 작성된 일제 정보자료에서는 이탁이 윤창수라는 인물과 함께 관전현(寬甸縣) 부근에 잠복하고 있었다.”23)
이와 함께 “1921년 초 압록강 대안 관전현에 본거를 두고 이탁으로 사령관을 삼은 광복군영에서는 각 방면의 동지와 연락하여 활동을 개시할 계획을 세웠다. 이탁은 약 두 달 전에 상해에 가서 각 영수들과 만나보고 양해를 얻은 후, 각지의 독립운동단체와도 일치한 활동을 하자고 약속을 하였다. 그 후 폭탄과 육혈포를 가지게 하여 다수의 사람을 조선 내지에 파견하여 모든 관청을 파괴하고, 관공리와 친일파를 암살하고 또 많은 군자금을 강징하여 민심을 다시 소동시키자는 계획을 세웠다. 평안남도를 맡은 사람은 벌써 해로로 평원군 한천에 상륙하였다는 소문이 있고, 상해 가정부에서도 요사이 무슨 계획을 다시 하는 중이라더라”24)라는 국내 신문보도기사를 읽다보면 이탁의 존재감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3) 국내진공작전 지휘먼저 ‘강도예비죄’로 기소되어, 1920년 8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모든 증거가 충분치 아니하므로 형사소송법 제165조 제1항에 의하야 면소(免訴) 결정”이 내려진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에 관한 그의 예심종결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광복군총영에서 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시도한 이완용 등 부일배 응징의거의 지도자로 지목받고 있는 것이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4월에 소집된 대한청년단연합회 2차 정기총회 이후 광복단을 중심으로 민국독립단 등이 통합을 추진하여 7월 상순(1〜12일)에 조직됐다. 오동진이 총영장을 맡았고, 장덕진·조병준·윤하진·박태열 등이 참모 역할을 하였다.
한편 한 달 후인 8월, 임시정부에서는 대한청년단연합회·민국독립단과 국내의 의용단을 통합, 대한광복군사령부를 조직하여, 군무부 산하의 서간도 지방사령부로 삼았다. 광복군사령부의 사령장에는 조맹선, 참모장 겸 사령장대리에는 이탁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광복군사령부는 광복군총영의 존재감에 밀려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광복군총영이 임시정부의 서간도 지역 ‘지방사령부’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일제자료에서는 이탁을 광복군총영의 중심인물로 파악하고 있다. 광복군총영의 활동 중심지는 압록강 연안에서 가까운 관전현(寬甸縣) 안자구(安子溝)였다.25)
1920년 5월 하순, 미국의원단 일행이 7․8월 중에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갈 예정이라는 소식이 알려졌다.26) 임정 내부에서는 “독립에 대한 조선민족의 대결심을 내보임과 함께, 민심을 격동시켜 독립 실현을 촉진시킬”27)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대미국의원시찰단 주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다각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다. 6월 18일에는 필리핀에 정부요인을 보내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상해에서는 거류민단이 환영회를 개최하며, 국내에서는 시위운동 겸 환영행사를 개최한다는 방안을 마련하였다.28)
이와 함께 군무부 주관으로 의원단의 방한에 때맞춰 선전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작탄거사(炸彈擧事)’를 계획하였고, 광복군총영에 임무가 부여되었다.29) 이 시기 이탁의 동정을 전하는 일제자료에서는 미국 국회의원단 일행이 중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것을 기화로, “서간도 무송현(撫松縣) 방면으로부터 이탁의 명에 의해 80여 명이 결사대를 선내에 잠입시켜 여타 암살단과 협력하도록 하려 한다”30)고 기록하였다.
광복군총영에서는 제1대: 김영철(金榮哲)·김성택(金聖澤)·김최명(金最明) 등을 서울에, 제2대: 장덕진·박태열(朴泰烈)·문일민(文一民)·우덕선(禹德善)·김예진(金禮鎭)·안경신(安敬信) 등을 평양에, 제3대: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을 선천과 신의주 방면에 파견키로 하였다.
7월 12일 제1대 대원 김영철·김성택·김최명 등은 권총·폭탄 등을 휴대하고 관전현 본영을 출발하여 20여 일만에 압록강을 건넜다. 8월 16일 평북 자성군수를 사살한 다음, 황해도 장연으로 가서 친일주구인 군수를 살해하였다.
두 사건으로 인해 경계가 심해지자, 김영철 등은 함경도 쪽으로 가서 북포(北布) 장사를 가장하고 권총과 폭탄을 감춰 서울로 잠입했다. 그리하여 시내 청진동에 거주하는 친척 이승도의 집에 유숙하며, 베짐짝은 같은 동네 유경근의 집에 맡기고, 베짐 속에 숨겨둔 무기는 따로 감춰 두었다. 폭탄 2개는 의원단이 도착하기 전날 밤에 이완용의 집과 종로경찰서에, 나머지 1개는 의원단이 도착하는 당일 남대문역 앞에 도열해 있는 경찰대에 투척할 예정이었다.31)
8월 21일 밤 12시, 황금정 2정목(현재의 을지로 2가)에 있는 중국요리집 아서원 6호실에서 김영철·김성택·김최명이 본정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었고, 이어서 김영철의 친척집 창고에 숨겨 두었던 폭탄 3개, 육혈포 3정, 탄환 171발, 경고문 70여 매도 압수당하였다.32) 이로써 미 의원단 방한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반일 독립의식을 고양하려던 광복군총영 특파대의 의거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들은 9월 7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9월 9일 폭발물 위반 벌칙 위반으로 이탁(불구속), 오동진(불구속), 김영철(구속), 김최명(구속), 김성택(구속)이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을 거쳐 최종판결에서 각각 징역 10년 씩 언도받았다.
앞에서 살핀 이완용 암살 시도와 함께 이탁이 서간도지역 독립군의 국내진공전을 주도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1922년 초에 작성된 일제자료에서 “광복군사령관 이탁은 목하 관전현 광복군 대표 金昌市(希) 외 수명을 소집하여 국내 습격방법을 강구하고 있다”33)고 기록하고 있음은 그가 이끄는 독립군부대의 국내진격작전이 부단히 시도되었음을 뒷받침한다.
(1) 수립 직후 임정 활동 지원 : 안창호와의 관계먼저 「안창호일기」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알려주는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에 따르면, 이탁이 상해에 와서 안창호를 찾아간 시점은 1920년 4월 15일이었다. 이날 그는 동생 이석(李錫) 문제를 상의했다. 이석은 2월 8일 ‘폭탄 제조’ 혐의로 프랑스 공부국에 체포되어 있었는데,34) 이탁에게 있어서 안창호는 동생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존재였다.
이후 8월 1일 안창호가 광동(廣東) 및 홍콩 여행을 위해 상해를 잠시 비울 때까지 100여 일 동안에 이탁과 안창호는 수십 차례 만나 안동현에 임정의 군사조직으로 (대한)광복군사령부를 설치하는 문제 등에 관해 협의하였다.35)
4월 30일 이탁은 안동현에서 온 김동식을 안창호에게 소개했고, 김동식은 청년단연합회 및 안병찬·김승만 등이 보낸 안태국 조위금을 전달했다. 이날 이탁은 안창호에게 ‘비상(非常)한 비밀사건’을 얘기했다36)고 하는 데,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비상한 비밀사건’을 나눌 정도로 긴밀했음을 확인해준다.
안창호의 이탁에 대한 신임 및 이탁의 역할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들어 보면, 1920년 5월 10일 안창호는 김희선 군무차장·이탁과 상의하는 자리에서 “광복군사령부 설치 사업을 이탁(李鐸) 군에게 전적으로 위임”37)한다고 하였다.
또 5월 13일 서간도에서 온 최상봉(崔尙鳳)이라는 인물이 찾아 와 “자기와 몇몇 청년이 작탄행동(炸彈行動)에 관한 일로 왔는데, 선생의 고견을 듣길 원한다.”고 하자, 안창호는 “그런 사업을 단독으로 자의적으로 하지 말고 국가적 군인정신으로 정부방침에 의하여, 이에 관해서는 이탁(李鐸) 군의 지도하에서 행동하도록 하라”38)고 타일렀다.
위의 두 사례는 이탁에 대한 안창호의 신뢰도를 짐작케 한다. 1924년 봄 어느 날 저녁 무렵, 안창호는 북경 서산(西山) 밑에 사는 이탁을 찾았다.
안창호의 눈에 비친 이탁의 모습이다. 청소년기 평양 대성학교에서 안창호와 사제관계로 만나 안창호로부터 흥사단 및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성장할 동량(棟樑)으로 신망 받았던 이탁이었다. 대지주의 맏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북경의 빈촌에 둥지를 튼 검소한 모습을 통해 그가 기꺼이 구국애족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짊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위의 기록을 통해서는 그가 남에게 겸손하고 동지들을 우선시하는, ‘의리’와 ‘담대’함을 갖춘 이타적인 리더십의 소유자였음을 상상할 수 있겠다.
한번은 상해에서 안창호와 이탁이 중국신문 기자들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했을 때 중국기자 한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서 순원(孫文)을 보았고, 또 황싱(黃興)을 보았다”고 평하였다. 안창호를 보니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지도자 손문을 보는 듯하고, 이탁을 보니 손문의 최측근인 황흥을 보는 듯하다는 뜻이었다.39)
(2)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독립운동단체 활동1920년 봄 임시정부에서는 ‘간도지방 독립운동의 통일’을 위해 유동열·김희선 두 사람을 간도에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가, 김희선을 이탁(李鐸)으로 변경하고, 계봉우와 함께 파견키로 하였다고 국민회에 알렸다40)는 일제정보자료가 있다. 더불어 “임시정부에서는 한족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각 단체 통일을 위해 유동열·이탁을 노령 및 간도지방에 파견하였다는 보고가 있다”41)는 자료 또한 마찬가지이다.
위의 두 일제자료에서 파악하고 있는 정보는 1920년 4월 임시정부에서 간도지역에 임시정부의 대간도정책을 협의할 특파원을 파견키로 하였다. 안정근과 이탁을 ‘북간도 정부특파원’, 계봉우를 ‘서간도 정부특파원’으로 결정했으나,42) 5월 17일 최종적으로 북간도 및 노령에 파견할 정부특파원으로 안정근과 왕삼덕, 서간도 정부특파원으로 조상섭을 임명43)한 사실을 가리킨다.
또 1920년 7월 2일 안창호는 이탁을 만나 동삼성외교위원장 직을 맡아 줄 것을 제안하여, 그의 동의를 얻었다.44) 이후 10월 하순 무렵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동성위원장(東省委員長) 이탁(李鐸) 씨를 기타 소임(所任)의 관계로 면임(免任)시켰다”45)는 자료로 미루어 보면 그가 수립 직후 임시정부가 쏟고 있던 서간도 지역 독립군단체 및 한인사회에 대한 관심과 기대감을 담보해 줄 수 있는 인물로 기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과 대한적십자회 활동을 통해 상해지역 한인사회를 무대로 한 그의 존재감과 위상에 접근해 보기로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상해 대한교민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할조직으로서 일반적으로 ‘민단’ 혹은 ‘교민단’으로 불렸다. 1918년 가을 상해고려교민친목회란 명칭으로 조직되어, 상해대한민단(1919. 9. 22.) → 상해거류민단(1920. 1. 9.) → 상해대한인거류민단(1920. 3. 16.) → 대한교민단(1920. 10.)으로 변화 발전해 왔다.
1921년 9월 19일 대한교민단에서 의사원(議事員) 선출투표 결과, 이탁은 한진교·여운형·김철·김홍서·선우훈·김병조·옥성빈·송병조·서병호·김만겸·송현측·조상섭·안창호·나용균과 ‘본구(本區)’ 대표로 당선되었다.46)
또 1922년 8월 17일 대한교민단 정례 의사원 선거에서는, 김철이 사직한 이래 결원 상태였던 민단장에 여운형이 당선되고, 이탁은 여운형·서병호·이유필·한진교·안정근·김홍서·김종상·김구·조상섭·송병조·박진우·윤해·선우훈·양헌 등과 함께 ‘본부(本埠)’ 의사원에 선임되었다.47)
또 1919년 11월 23일 대한적십자회 ‘회원 대모집 경쟁회’에서 회원 모집 활동을 벌이는 ‘독립대(獨立隊)’ 대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48) 1919년 7월 1일 상해 장빈로(長濱路) 애인리(愛仁里) 39호에서 개설한 대한적십자회는 1905년 10월 27일 대한제국 칙령 47호에 의거하여 만들어졌다가 1909년 일본적십자회에 통합된 바 있는 대한제국정부 시기의 대한적십자회를 계승·복원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이어서 25일에 열린 총회에서는 회장에 안창호가 선임되었고, 그는 송병조와 함께 감사에 선임되었다.49) 1922년 4월 8일자 일제정보자료에서는 이탁을 옥성빈·송병조와 함께 대한적십자회 감사로 파악하고 있다.50)
(3) 국민대표회의 시 활동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는 125명의 각지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1920년의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전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가 자행한 경신참변에 대해 임시정부가 무기력한 리더십을 보이게 되자, 서북간도·북경·상해·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임시정부의 개혁 내지는 새로운 독립운동 지도부의 조직을 표방하며,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독립운동세력의 ‘총회’가 소집되기에 이르렀다. 1920년 9월 박용만·신채호·신숙 등 15명이 북경에서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조직하고 군사통일회의의 개최를 추진함으로써, 반임정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이에 1920년 말 미국에 있던 이승만대통령이 상해에 도착하여 자구적인 노력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이동휘 국무총리 등이 사임함으로써 ‘통합임정’으로서의 면모가 약화되었다.
이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1921년 2월 북경과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존재에 대한 문제 제기가 본격화되면서, 박은식·원세훈·최동오·왕삼덕·김창숙 등이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제창하였다. 1921년 4월 17일부터 6월 22일까지 북경에서는 군사통일회의가 개최되어 상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부인하고, 새로운 ‘정부’ 조직을 천명하였다. 이에 유동열·남형우·김규식·안창호 등 임정각료들이 사임하고, 서간도 지역의 유력한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와 서로군정서의 주요간부인 여준·이탁·김동삼 등이 임시정부의 개조 필요성과 위임통치청원의 당사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1921년 5월 19일 ‘평안남도지방 대표’ 자격으로 이탁은 차리석·송병조·남형우·여운형·서병호·도인권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기성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또 이 무렵 그는 안창호·신규식·이동녕·이시영·여운형·김인전·손정도·조완구·신익희 등과 함께 태평양회의(워싱턴군축회의) 개최를 계기로 한 외교활동을 모색하기 위해 조직된 외교연구회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51)
한편 1921년 8월 상해·북경·천진지역 독립운동세력들이 국민대표회의주비회를 조직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은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9월 15일경 개최를 목표로 7월 16일 이후 비밀리에 준비회를 열어 왔는데, 준비위원으로는 상해 측에서 김규식·원세훈·여운형·윤현진·이탁 5명, 북경 측에서 박건병·최목 2명이 출석하였다.
이러한 정황과 관련하여 일제정보기관은 국민대표회의 개최 장소를 남경·북경의 어디로 할 것인가, 종래 사용하고 있는 ‘민국(民國)’ 연호를 폐지하고 ‘기원(紀元)’ 연호를 사용할 것의 여부 등이 당면의제로 제기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아울러 김규식이 안창호의 관여에 반대하였기에 안창호는 고립된 국면을 맞이하였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가 버림에 따라 ‘상해에서 제1인자’를 자임하고 있는 안창호의 마음이 자못 편안할 수 없어 목하 무언가 구상 중인 듯한데, “안창호의 유일한 부하인 이탁이 준비위원으로 존재하기에 그의 이상은 이탁에 의하여 대행될 것이라고 관측하는 자가 있다.”52)라고 분석하였다. 이탁을 ‘안창호의 유일한 부하’로 평가하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띤다.
이후 워싱턴회의(1921. 11.)와 극동인민대표회의(1922. 1. 22. ∼ 2. 2.)를 거치며 일시 주춤하였다가, 1922년 5월 10일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선언」을 발표하고 1922년 9월 1일 회의를 소집키로 계획하였다.
이 무렵 이탁의 동정을 전하는 일제자료에서는 1922년 3월 15일 밤 프랑스조계 오흥리(吳興里) 67호에서 안창호·김철·이탁·박은식·김보연의 5인이 모여, ‘대한국민대표준비속진회(大韓國民代表準備速進會)’ 명의로, 현 임시정부는 박약하여 국민의 신용을 해치고 있음에 따라, 도저히 우리들 국민대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에, 신속히 이를 개조하는 동시에, ‘政府’라는 명칭을 없애고, ‘위원제’로 조직을 변경해야 한다고 결의한 다음, 임정 측·미주·러시아령·북만 및 상해고려공산당으로부터 4인의 대표를 선발키로 했다53)고 보고하였다.
대표들이 충분히 모이지 않아 수차례 연기한 끝에, 1923년 1월 31일 오후 2시 상해 공동조계 소재 모이당(慕爾堂)에서 개막식을 거행하였고, 2월 2일부터 공동조계 침례당에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 2월 5일 그는 강구우·이상호·백낙현·윤정현·왕삼덕·손정도와 함께 재정분과위원에 선출되었다.54)
그러나 3월 9일 윤자영 등이 제출한 제의안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헌법제도 및 기타 일체를 실제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조할 것”이라는 내용을 둘러싸고 이른바 ‘창조파’와 ‘개조파’의 갈등과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결국 5월 16일 회의에서 개조파 대표들이 탈퇴를 성명하였고, 6월 2일 창조파를 중심으로 한 잔류대표들은 국호를 ‘한’, 연호는 ‘기원’을 쓰기로 가결하고, 6월 7일 회의에서는 국민위원회 위원 33명과 국무위원 5명 중 4명을 새로 선출하고 폐회하였다.
(4) 한·중 연대활동이탁이 관여한 한·중 연대단체로는 중한국민호조(총)사(中韓國民互助(總)社, 中韓互助社總社로도 등장) 활동을 꼽을 수 있다. 1921년 5월 28일 상해 프랑스조계 민생여학교(民生女學校)에서는 중한국민호조(총)사 발기총회가 개최되어, 학조선(郝兆先)·황경완(黃警頑)·이대년(李大年)·유종주(兪宗周)·김붕(金鵬)·왕길인(王吉人)·심중준(沈仲俊)·손경아(孫鏡亞)·하세초(何世梢)·유육지(喩育之, 이상 중국인), 김규식·여운형·이탁·한진교·김철·윤현진·김문숙·김홍서·서병호·이원익(이상 한국인)을 평의원으로 선출하였다.55)
이들의 활동 중 밝혀지는 사실로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제출한 제안(1921년 8월 15일자)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제안에서는 한국의 절대독립, 일본은 마땅히 1905년의 불법 보호조약 및 1910년의 불법 합병조약을 취소해야 한다. 일본이 한국에 설치한 정치·경제·군사상의 시설은 철거해야 한다. 한국 및 원동공화국 대표의 회의 출석을 허락해야 한다.
중·한 양국의 주권 및 동아시아 평화를 방해하는 영일동맹을 폐기해야 한다는 등의 11개 조항을 주장하였다.56)
1922년 9월 5일 오후 2시부터 프랑스조계 팔선교(八仙橋) 3·1리 삼일예배당(三一禮拜堂)에서 간부총회를 열고 장정의 개정 등을 협의하고 임원을 개선하였는데, 이탁은 문서과 부주임에 선임되었다.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