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 겨울 여행지
국보가 있는 여행지는 특별하다. 가장 범상치 않은 명당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 국보에 등재된 삼척 죽서루를 비롯한 국보급 겨울 여행지 4곳을 소개한다. 글 문유선 여행작가 사진 한국관광공사, 문화재청, 삼척시, 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자연암반 위에 건축된 삼척 죽서루 전경 나라의 보물, 국보(國寶)는 여행에서 중요한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상대방이 잘 모르는 뭔가를 보러 가자고 했을 때 유네스코 문화유산과 더불어 가장 잘 먹히는 타이틀이 바로 국보다.
국보가 있다는 것은 그 장소가 특별하다는 뜻이다. 궁궐, 산사, 고택, 폐사지부터 해안 절벽, 산꼭대기(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처럼 범상치 않은 곳, 그중에서도 가장 명당자리에 국보가 자리 잡는다. 이는 어느 계절에 가도 특별한 풍경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국보를 검색하면 총 358건의 문화재가 나온다. 이들 국보는 유형문화재 가운데 그 역사적 가치가 특별히 크고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대상들을 국가에서 지정한 것이다. 국보 1호가 숭례문(남대문)이라면 가장 최근에 등재된 국보 삼척 죽서루는 몇 호일까?
과거에는 ‘국보 83호 무엇’ 이런 식으로 지정번호로 부르고 안내판에서도 그렇게 표시했지만, 지정번호 순서가 문화재의 중요도 순서로 착각된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논의 끝에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에서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이후 새로 지정 및 재지정한 문화재에 대해서 번호를 부여하지 않게 됐다.
건축의 백미 죽서루 새로운 국보 지정으로 핫한 여행지 삼척 죽서루
지난해 연말 국보로 지정된 삼척 죽서루는 올해 상반기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핫한 여행지다. 문화재의 멋과 겨울바다의 낭만을 즐기고 주변 포구에서 살 오른 대게 한 마리를 쪄먹을 수 있는 기가 막힌 겨울여행 코스다.
‘관동제일루’ 죽서루는 관동팔경의 제1경이자 자연주의 건축의 백미로 평가되는 대표적 건축물로 오십천이 흘러드는 해안 절벽에 그림같이 걸려 있는 정자의 처마 끝 선이 날아갈 듯 경쾌하다.
창건 및 중건 기록과 문학·회화작품이 다수 있는 역사적 가치, 건축물의 수리 등 변화과정 기록이 잘 보존된 기록적 가치, 누정의 다양한 문화성과 지역성을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가치, 자연과 인공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건축적·경관적 가치 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죽서루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조선전기에 재건된 이후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되었으나 관련 기록이 잘 남아 있다. 1403년 정면 5칸(측면 2칸)의 규모로 중창된 누정이었으나, 1530년 남쪽 한 칸(측면 3칸)이 증축되었고, 1788년 북쪽 한 칸(측면 2칸)이 증축되면서 현재와 같은 팔작지붕 형태가 되었다.
겸재정선의 관동명승첩 속 죽서루 삼척 죽서루의 기둥은 절반 이상이 자연 암반 위에 올라서 있다. 22개의 기둥 중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기둥이 13개이고, 9개는 자연석 초석을 두고 받쳤다. 내부는 벽과 창호가 없는 개방된 평면으로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어 보이는 연등천장과 우물정자 모양으로 마감된 우물천장으로 설치되어 있다.
삼척 죽서루에는 조선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御製詩)를 비롯하여 유명한 시인과 명신들의 한시가 새겨진 현판이 많았으나, 1959년 태풍 사라의 영향으로 많이 유실되고 현재는 28점이 남아 있다. 이외에도 죽서루의 절경을 표현한 정철의 관동별곡 등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시인, 묵객 등 다양한 계층이 죽서루를 소재로 수많은 시문, 가사 등을 남겼다.
죽서루의 정면에 걸린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현판은 1710년 (숙종 36)에 삼척 부사로 왔던 이성조의 글씨이다. 삼척 죽서루를 표현한 그림도 많이 남아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겸재 정선(1676~1759)의 관동명승첩에 있는 죽서루의 그림이다. 이외에도 김홍도(1745~), 강세황(1713~1791) 등도 그림을 남겼다. 무량수전, 석등, 조사당 등 볼거리 가득 영주 부석사
영주 부석사는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지은 호국사찰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다양한 국보와 보물 등을 보유하고 있어 웬만한 국립박물관 부럽지 않은 곳이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부석사의 유명세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통해 만들어졌다.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무량수전은 바로 앞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 석등과 함께 부석사의 ‘원투 펀치’ 역할을 한다. 이외에도 경내에는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조사당 벽화 등이 국보로 지정돼 있고 다양한 보물급 문화재도 즐비하다.
부석사의 이름을 직역하면 ‘땅에서 뜬 돌’이란 뜻인데, 이는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을 갔을 때, 그를 사모하던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의상은 승려라서 끝내 선묘의 애정을 거절했고,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자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서 의상의 귀국 뱃길을 안전하게 지켰다고 한다.
이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지역의 도적떼들이 이를 방해하자, 선묘가 큰 바윗돌이 되어서 하늘을 떠다니며 도적들을 물리쳤다. 그 바윗돌이 부석사 뒤뜰에 잇는 큰 바위인데, 지금도 땅에 살짝 떠 있어서 바위 밑으로 줄을 넣으면 통과된다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이 뜰 부(浮), 돌 석(石)을 써서 부석사라고 전한다. 이 설화에 따라, 부석사에는 선묘에게 제례를 지내는 선묘각이 있다.
눈 덮인 부석사의 겨울
배흘림 기둥으로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
갑진년 용 기운 쾌척 여행지 부안 내소사와 동종
부안 내소사 동종 역시 죽서루와 마찬가지로 지난해 12월 국보로 승격됐다. 국보 동종은 총 5건이며 고려시대 동종으로는 세 번째다(2건은 통일신라시대). 내소사 동종은 단정하고 우아한 몸통에 화려한 용뉴(용 모양의 걸이)가 두드러진다.
용은 입을 쩍 벌린 채 보주(보배로운 구슬)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까지 정교하다. 몸통 높이 104.8㎝, 입지름(원통 모양으로 된 물건의 지름) 67.2㎝로 고려시대 만들어진 종 가운데 풍채가 가장 우람하다. 통일신라 동종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몸체에 천인상(天人像) 대신 삼존상(三尊像)을 배치하는 등 고려기만의 특징을 보여준다.
내소사의 명물은 일주문부터 대웅전에 이르는 약 500m가량 이어진 전나무 숲길이다. 이 길은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 경기도 포천시 광릉수목원 숲길과 함께 ‘전국3대 전나무 숲길’로도 꼽히는데, 이곳의 전나무 숲은 조선 인조 11년(1633년)에 청민선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사찰을 중건하면서 사방이 너무 황량해 심은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30m가 넘는 울창한 전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에 숲을 걷기만 해도 마음속 걱정, 근심 잠시간 내려두고 평안을 얻는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
바다를 끼고 있는 부안은 낙조 여행지로도 이름 높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겼다는 중국 차이스지(采石磯)와 지형이 흡사해 같은 이름이 붙게 된 채석강은 격포항 인근 해안 절개지에 있다.
이름에 강이 있어 흔히들 한강이나 섬진강 같은 지형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바다를 마주한 해안 절벽 지대를 통칭하는 지명이다. 세월이 쌓아 올린 지형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이곳에서 맞는 낙조는 무척 아름답다.
부안 내소사의 동종
부안 내소사의 겨울 설경 우리나라 3번째 국보로 지정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국보 지정은 귀한 순서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딱 생각나는 순서가 중요한게 사람 마음이다. 우리나라에서 국보를 처음 정한 1962년, ‘1호’의 영광은 숭례문이 차지했고 2호는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선정됐다.
그 다음 차례는 북한산 꼭대기에 있던 진흥왕순수비가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상징적인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이 비석은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고구려와 백제에게서 빼앗은 후 그 영토를 선포하기 위해 세운 순수비이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북한산 비봉(560m) 정상에 위치해 있었다가 1972년 8월 17일 경복궁으로 옮겨진 후 1986년 8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 산 정상에서 볼 수 있는 비석은 2006년 다시 세워놓은 모조품이지만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 기상은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진품은 용산 국립박물관에 있지만 진흥왕순수비의 의미와 기상을 엿보려면 역시 현장을 가봐야 맛이다. 비봉탐방지원센터에서 금선사, 비봉에 이르는 탐방코스가 잘 정비돼 있다.
험준한 산봉우리 암반 정상에 있다 보니 신라 멸망 이후 잊혀졌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인근에 승가사라는 절이 있어 막연히 무학대사의 비라고 잘못 알려졌다.
그러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처음 10여 자를 판독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고, 순조때인 1817년 7월 21일에는 금석학으로 이름을 날리던 추사 김정희가 비문 해독에 성공해, 마침내 이 비석의 가치가 드러났다. 이때 김정희는 비석 옆면에 해설을 새겨놨다. 김정희는 경주 김씨의 후예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서울시와 경기도 고양시, 양주시, 의정부시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 있다. 도심에서 지척에 있지만 본격적인 겨울 산행과 함께 사찰, 산성 등 다양한 문화재 탐방을 곁들여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국보급 여행지로 손색 없는 곳이다.
북한산 정상에 자리한 진흥왕순수비
북한산 정상의 눈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