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조정권-
보신각종이 깨져 있다는 사실은 시인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몇 해 전부터 나는 이 종을 시로 써 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왜 균열이
생겼는가 궁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원래 종은 깊은 산중에서 나무와 숲에
쌓여 사념의 테두리를 지으며 감은 가슴을 더욱 안으로 감아 버리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첩첩산중에 있는 종일수록 그 소리는 맑고 넓게 퍼져 갑니다.
구한말에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보신각종은 비록 낡기는 했지만 목조 건물에
싸여 있었습니다. 현재의 보신각 주변은 시멘트 건물로 둔갑해 버렸지요.
주변 종로 네거리 건물들이 한결같이 콘크리트 빌딩입니다. 가서 만져 보면
알겠지만 보신각 기둥들도 한결같이 콘크리트로 바뀌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저 종이 옛날과 같이 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콘크리트 기둥 때문이요 주변 빌딩 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놈의 종은 한 번 댕, 하고 울면 그 소리가 멀리 은은하게 퍼져 가기는커녕
사방 콘크리트 기둥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제가 낸 소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양으로 콘크리트에 부딪혀, 되받아 나오는 소리의 충격으로 인해
종은 균일이 갑니다. 즉 저놈의 종은 제가 낸 소리를 콘크리트 기둥에 의해 제 스스로
되받으며 그 충격으로 제 몸을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의 소리로 스스로를 처형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 처한 모습입니다.
아시겠지만, 내가 쓰고 있는 시도 이와 다름이 없는 것이지요.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산문적
◆ 특성
① 연설문 형식의 구성
② 대상이 지닌 역사적 사실을 밝힘으로써 사실성을 높임.
③ 화자가 관찰한 사물이 깨달음의 계기로 작용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보신각 종이 깨져 있다는 것은 시인 여러분도 익히 아시는 사실입니다. → 연설문적 어조
* 문제는 ~ 여기에 있습니다. → 시상의 전환(사실 확인→확신)
* 제가 낸 소리보다도 ~ 종은 균열이 갑니다. → 자연적 덕성을 잃어 버리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우리 문화의 황폐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 3연 → 균열이 생기는 보신각 종과 시인의 유사점을 언급한 부분이다. 세상을 향한 외침이
수용되지 않는 현실이 그것이다.
◆ 제재 : 보신각 종
◆ 주제 : 보신각 종의 균열을 통해 살펴본 시인의 운명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보신각 종의 균열에 대한 궁금증과 종의 본성
◆ 2연 : 보신각 종에 균열이 생기는 원인
◆ 3연 : 균열이 생기는 보신각 종과 시인의 유사점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균열'은 보신각 종의 균열을 보고 그 원인에 대해 연설문 형식을 빌어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보신각종의 균열과 자기가 쓰는 시가 별반 다름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떠한 측면에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나무와 기계의 마음'은 순수한 본성과 덕성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대리석 바닥에 심겨진 변색된 나무의 모습을 통해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가 지키고자 했던 나무의 마음, 화자가 벗어던지고자 했던 기계의 마음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그 날'은 병폐로 가득찬 모순 투성이의 현대 물질 문명 사회를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서로 무관심하고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모습과
한 단계 더 나아가 부조리와 모순, 삭막한 인간 관계가 드러나고 있는 사회의
단면을 통해 문제 가득한 사회 속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각조차 불가능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삶의 질량에 대한 것이다. 삶의 가벼움은
정신과 성실함의 가벼움을, 삶의 무거움은 정신과 성실함의 무거움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언한다. 안타깝게도, 경제적 조건으로 인해 소외당하고,
사고 방식이 위험하다고 의심 받는 쪽은 무거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작품은 삶의 방식을 대조하여 진정한 삶에 대해 노래한다.
◆ 더 읽을거리
<균열>은 보신각 종의 '균열'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신각 종은 현재 경복궁 내의
한쪽에 안치되어 있다. 보신각 종은 원래 정릉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원각사를
거쳐 보신각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경(二更)에 인정(人定)을 치고서,
다시 오경(五更)에 파루(罷漏)를 치면 사대문 안의 하루가 시작되곤 하였다.
그러나 종신에 금이 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종의 안전을 위하여 제야(除夜)의
종으로만 겨우 사용되었다. 이마저도 더 이상의 타종은 위험하다는 판단에 따라
1985년 이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경복궁에 가서 보시면 알겠지만
보신각 종은 매우 큰 종이다. 큰 거구의 종은 겨우 눈비를 피할 지붕을
머리에 이고서 용뉴(종고리)는 상량(마룻대)을 잃어 버린 채 콘크리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다.
조정권은 보신각 종의 균열에 대하여 나름대로 추리를 하고 있다. 산문적으로
쓰여진 이 시의 골격은 균열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종은 깊은 산중에 나무와 숲에 둘러싸여야 제격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은은하게 맑고 멀리 퍼져가는 소리를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 산속의 종을 '모시고' 있는 종각이 나무로 지어져 있다는 것은
그러한 환경과의 친화를 의미한다. 그러던 차에 시인은 한 장의 낡은
흑백사진을 보았다. 1900년대 한국에 온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사진이었는데,
보신각은 '비록 낡기는 했지만 자그마한 목조 건물의 모습'이었다.
그 후 보신각은 소실되었고, 전후에 다시 재건되었다. 재건축된 보신각의
겉모습은 목조 건물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재료는 나무에서 시멘트로 대부분 둔갑해 버렸다. 친절하게 시인은
보신각의 기둥을 만져 볼 것을 권하고 있다. 보신각의 기둥들은 나무가 아닌
한결같이 차가운 콘크리트 기둥인 것이다. 시인은 보신각 종의 균열 원인을
여기에서 찾고 있다. 종이 '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콘크리트 기둥 때문이요,
벽처럼 주위를 둘러싼 빌딩들 때문이다. 시인은 은연중에 확신을 하고 있다는 듯이
보신각 종을 일러 '저놈의 종'이라고 칭한다. '저놈의 종'을 칠 때, 그 소리는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 기둥과 주위의 빌딩에 부딪힌다.
콘크리트에 부딪혀 반향된 소리는 종에 충격으로 이어지고 서서히 종은 금이
가게 되었다. 시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종은 "제가 낸 소리를 콘크리트
기둥에 의해 제 스스로 받으며 그 충격으로 제몸을 깨뜨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면 이 시는 논리적인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그런데 보기에 따라서는 수긍할 수
없는 대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제가 낸 소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양'으로
보신각 종이 반사된 소리의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계측(계측)하기
쉽지 않은 노릇이다. 필자가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활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낭송을 통해서이다. 시인은 당시에 시내으 어느 시낭송회에서 상임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 저녁에 이어지던 낭송회에서 시인은
이 시를 읽어내려갔다. 평소에도 그의 목소리는 어눌했지만, 여느 날과는 다른
긴장감이 있었다고 기억이 되는데, 그날 시인은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고
평소보다도 어조는 어눌하였다. 이 시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 날의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즈음에 기억되는 그의 다른 시 하나는
「虛心10」이라는 작품이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어느 아는 분에게 드렸다.
그런데 며칠 후 시집은 겉장과 속장이 한 장 한 장 풀칠로 봉해지고 열십자에
노끈으로 묶여져서 되돌아왔다는 이야기.
<균열>이라는 시는 산문적이라는 형식 이외에도 연설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시가 '詩人 여러분'이라는 호명(呼名)으로 시작하고 있음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아울러 보신각 종의 균열을 통해서 시인이란 종과 같은 운명은 아닐까라는
그의 생각을 제시하고 있다. 종이 은은한 소리를 내어 멀리 퍼뜨리듯이,
시인도 자신을 스스로 공명(共鳴)시켜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를 테면
시인과 종은 비유의 관계에 놓여져 있다. 그런데 이 비유적 관계를 제시하는
시인의 태도는 친절하지 않다. 이 말은 시적이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산문적인 형식을 취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이 된다.
종을 모시는 종각의 성질이 '목성(木性)'이어야 함을 시인은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과 유비적인 관계에 있는 종의 본성은 무엇일까? 시인은 종의
본성을 "사념의 테두리를 짓고 감은 눈을 더 안으로 감아버르는" 것에 두고 있다.
종의 본성은 목성이 아니라, 안으로 감추려는 듯한, 아예 눈을 감아 버리는
강은(强隱)에 있다. 때로 쇠와 같고 금과 같은 시인은 때때로 공기의 흐름에도
스스로 울린다. 종과 같은 시인의 울림이 때때로 반향되지 못할 때 받는 상처에
대하여 시인은 이를 시와 시인의 운명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저버리지 못할 때, 그 형상은 '스스로의 소리로 스스로를 처형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 처한 모습'인 것이다. 즉 시인은 '균열'이다. 이 시는 마지막을
"아시겠지만 내가 쓰는 시도 이와 별다름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로 끝맺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말은 사족에 불과하다. 자신의 균열을 내보임으로써 스스로
균열을 확인하려는 행위의 소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곁다리처럼 말하면
그날 시낭송회에서 그토록 시뻘겋게 상기된 시인의 얼굴이 이해가 될 법도 하다.
◆ 수필인가 싶을 정도로 긴 산문적 진술로 이루어진 시다. 특이하고 독특한
서술이라는 느낌을 주는 시다. 연설조로 여러분도 익히 아는 사실이라고 해서
종로 보신각종의 균열의 원인을 추적하면서 그 궁금증을 자연의 본성을 잃은
보신각종의 균열은 필연적이라는 사실로 귀결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그 맑은
종소리가 나올 수 있는 목성의 환경이 없는 지금의 현실이 꼭 시인의 운명과도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시인의 사회에 대한 외침이 지금의 환경에서
보신각종처럼 상처가 되어 돌아올 것이고 그것은 시인의 운명을 좌절시킬 것이라는
말이 슬프게 느껴지는 시다.
[작가소개]
조정권 : 시인, 전 대학교수
출생-사망 : 1949년, 서울특별시 - 2017년 11월 8일
학력: 중앙대학교 영어교육학 학사
수상 : 2011년 제4회 목월문학상, 1994년 제39회 현대문학상 시부문
경력 :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1994 한국문화예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