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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텃밭을 건너온 말씀☆]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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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을 건너온 말씀◎]
박성규 시집 / 시인동네시인선 110 / 문학의전당(2019.09.16)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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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을 건너온 말씀
빈 화단으로 두기 아까워
유채 씨를 뿌려
겨울 내내 나물을 해먹었지만
먹을 시기를 놓친 것들은
씨나 받자고 놔뒀는데
씨방이 생기고부터 찾아오던
되새 몇 마리가
며칠 지나니
제 식구 다 데리고 와
떼거리로 몰려들어 씨방을 쪼아댔다
씨나 받을 것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저들도 먹고 살자는데
필요한 만큼만 남겨줄 거라 믿으며
실컷 먹으라고 내버려둬 버렸다
가진 것 나누어주는 것이 보시가 아니라
보시는 필요한 만큼만 취하는 것
되새가 남겨둔 씨앗을 털어보니
생각보단 양이 많아
되새는 떠나버렸지만 고마웠다
새벽 이슬
하늘로 들어가는 입구는
새벽이슬 속에 숨어 있다
깨끗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아침은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입구를 파괴해버린다
더러는 영롱하다고도 하고
더러는 고운 구슬이라고도 하지만
꼭꼭 숨겨놓고 있는
하늘로 올라가는 입구
시(詩)
십수 권의 시집이
책상을 점령했다
단숨에 읽을 거라고
큰맘 먹고 밤을 새웠는데
겨우 몇 장 읽었을 뿐
詩는
벼락치기로 읽는 것이 아니다
사색의 창문을 통해
몰래 비밀스럽게 훔쳐보아야 하는 것
죽는 날까지
밤을 지새우며 음미할 시
온몸으로 쓰고 싶다
큰손
텃밭에서 일을 하는데
무리하게 농사를 짓지 말란다
가꾸고 싶은 것이 많다 보니
땅뙈기가 턱없이 부족하다
입 대는 사람들한테
손바닥만 한 땅뙈기라고 우겼더니
예쁘장한 내 손 방긋이 웃었다
내 손 크기
크긴
큰가보다
게으른 나팔꽃
여름 끄트머리에
나팔꽃 한 포기가 싹을 틔웠다
머지않아 가을이 오고
이내 서리가 내릴 터인데
이제야 싹틔운 저 나팔꽃
목청껏 나팔을 불 수 있으려나
새 동네로 자리 잡으면서
동네 어귀 담 너머로 고개 내민 씨앗을
몰래 따다 뿌렸어도
느지막이 싹틔운 심보는
알다 모를 일
서리 내리기 전에
아침이슬 머금은 나팔 하나
살림살이로 장만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으련만
몹쓸 약속
하얀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씨인가
노안이 오고 난시어서 그런지
책 읽을 때마다 글씨가 꼬물거렸다
오늘도 그랬다
활자 크기가 작다고 구시렁대다가
꼬물거리는 글씨들 때문에
짜증을 내며 덮고 말았는데
책은 계속 읽어야 하기에
덮었던 쪽을 다시 펄치니
파리 시체가 글씨를 덮고 있었다
꼬물거렸던 것이
파리였던가!
월급쟁이
월급쟁이를 그만두었다
구조조정 때문이었다
억지로 대가리 들이밀고 살기보다
다 때려치우고 낙향해서 사는 것이 좋다고 하여
월급쟁이를 그만두었다
-누런 봉투 속에서 짤랑거렸던 소리가 들려온다
-아내의 잔소리도 들려온다
-밀린 요금 납부 통지서가 우체통에서 고함친다
-무일푼으로 살다가는 제 명에도 못살 것 같다
국민연금 수령하는 날
다시 월급쟁이가 되겠지만
참회론
생활 쓰레기는
매립지에 묻거나
소각장에서 소각하지만
인간쓰레기인 나는
어찌 처리될까?
손님
귀뚜라미가 집 안에 들어와
풀쩍풀쩍 뛰어다녀요
고삐 풀린 망아지같이
놀라서 움찔했더니 이내 숨어버려요
어른들이 그랬어요
귀뚜라미는 건드리지 말라고
밥 먹을 때 건드리면
밥그릇 국그릇에도 마구 뛰어든다고
내심 괘씸했지요
파리채로 한 대 때려주고 싶었어요
가을밤에 울라고 태어났지 싶은데
울기는 커녕 온 집 안을 쏘다녀요
나도 어릴 적엔 귀뚜라미처럼
그랬을지도 몰라요
잠이 들어야 되돌아갈까요
무엇이 남았을까
상강 지나니
허드렛일이 늘어난다
서리가 오는 것은
기약조차 하지 못하는 일
한 해를 풍미했던 살가운 저것들
서리가 내리면 생을 마감하겠지만
늦기 전에 서둘러
끼니거리를 챙겨야 한다
서리란 것은
매몰차기 그지없는 것
차일피일하다간 남아도는 게 없다
서리 맞은 허연 머리를 보면
남은 생을 위해 정리해야 할 일
무엇이 남았을까
보리의 꿈
한때
노고지리들의 놀이터가 되어주기도 했고
숱한 사람들이 울고 넘을 고개도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청운의 꿈을 저버리고
잊혀져가는 설움의 시대에 몸 부비고 있다만
너른 들판의 푸석거림 씻어주기도 하고
양지바른 고셍서 젖은 몸 말려주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마사지도 해주다가
채이에 올려놓고 호시도 태워주니
서러운 건가
반가운 건가
꿈을 가지라고 하는 건가
뭔 일로 나를 요로콤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가
맥주가 되든지
단술이 되든지
조청이 되든지 간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한
희망이라는 단어를 껍질 속에 숨겨놓고
새 세상을 기다리고 있지
*채이:(키), 곡식 등을 까부르는 기구를 의미함
*호시:‘무엇을 타거나 어디에 얹혀 기분 좋아하다’의 경상도 사투리
해몽
기다림도 없다지만
궁금함도 없다지만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 때처럼
아픔은 없어도
아침바람 저녁공기처럼
살아 있어서 고맙다
해야
달아
별들아
살아 있어서 고맙다
상강(霜降)
새벽공기가 쌀쌀한 아침
산기슭 집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군불지피는 걸까
쇠죽을 끓이는 것일까
하늘로 퍼져나가는 연기는
아버지의 음성
“야아, 깼으면 밭에 가자”
아랫목을 빠져나왔던 그 시절이
연기 따라 피어올랐다
텃밭 수행론(修行論)
하안거 땐 텃밭에서 수행을 하고
동안거 땐 골방에서 수행을 한다
화두는 단 하나
입속에 들어올 것이
얼마나 되느냐이다
가물면 가물어서 수행에 방해되고
며칠 비 와도 수행에 방해되지만
아무리 게으름이 없다 해도
증득(證得)하는 것은 뻔한 일
자전과 공전 덕분으로
하루하루 수행의 시간을 보내지만
해제일이 지나도
게으름은 없어야 되는 법
동안거 때가 편하다 하지만
하안거 때라도 힘든 것이 아닌
내 텃밭의 수행론
노숙자
도회지에 가면
보이지 않는 별들
우리 동네 하늘에
죄다 모여 있다
덩치 큰 녀석부터
조무래기들까지
골고루 섞여 있는 저 하늘
사이좋게 모여서
한세상 살다 간다
저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오고
그런 광경 바라보다 잠드는 날은
어김없이
나도 노숙자
중년 일기
송홧가루가 날려 왔다
날려 와서는
장독대며 마당이며
모든 것을 뒤덮어버렸다
오늘밤에 뜰 삼월 보름달도
노랗게 뜨려나?
송홧가루 뒤덮어쓴 내 얼굴
메뚜기 한철보다 짧지만
천지간이 노란 세상
목욕부터 해야지
꿈
결 좋은 바람이었으면 좋겠네
무진장 세게 불어서
소문에는 똥바람이라 한다네
골이 깊어서가 아니라
그냥 길 따라 불어온 듯 싶은데
저리도 세차게 불어대면서도
이유는 따지지도 말라네
그냥 숙명인 양 받아들이고 살라네
제 분수껏 부는 바람을 어찌하겠냐만
종종 버티기도 힘겨운 날도 있다네
이젠
결 좋은 바람만 불어왔으면 좋겠네
무작정 불어대지는 않겠지만
바람도 그냥 바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네
하지만
바람을 피할 수 없음은 정해진 일
결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날은
야무진 꿈도 꾸고 싶다네
소주
뚜껑을 따고도
마시지 못한 소주
김 빠졌다고 버리지도 못해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취기가 머리까지 차오르고
자정이 지난 후부터는
공광규 시인의 소주병만 떠오르는데
소주 값을 계산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 오늘
김샜다
접시꽃
여인의 향기는 짜릿하다
편지지 속에 접힌 향기
맡아본 자가 언제였든가!
봄이 다 가도록
밋밋했던 핏줄 탱글탱글해졌다
살아 있음으로 얻은 대가일까
아침 햇살조차 따가운 날
그늘을 찾아다니는데
채 마르지 않은 여인
방긋이 웃는다
첫사랑의 흔적
내 바짓가랑이를 적셨다
하얀 나팔꽃
몇 해 전
동네어귀 담장 너머로 꽃씨 몇 개
슬쩍 따다가 뿌렸더니
두 해 만에 싹이 터서 꽃을 피웠을 땐
남보라색이었는데
올해는 하얀 꽃이 피었다
락스로 씻어 준 것도 아닌데
퇴색된 것도 아닌데
하얗게 핀 꽃을 보더니
메꽃도 신기한 듯 울타리를 넘어왔다
하얀 마음을 가지라는 계시일까
슬쩍 따온 마음이 부끄러웠다
틈
갈라진 콘크리트 틈에
제비꽃 한 포기
꽃을 피웠다
봄 마중 나왔나
제비를 기다리나
몇 며칠 보랏빛 등불을 켜고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상처투성이 몰골로 등불을 내려놓고는
끝에 일어나지 못했다
제비꽃이 머문 자리
생과 사의 앙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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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태풍이 지나간 후
쑥대밭이다
넘어지고 부러지고 뽑히고
바라보기 안쓰럽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자는
저들끼리 속삭이는 말을 듣자니
발걸음조차 떼기 버겁다
삶의 끈을 붙잡고
희망을 키우는 것들을 위헤
다시
희망을 가지고
2019년 여름
박성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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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詩集 [※텃밭을 건너온 바람※]
[ 발문 ] -
텃밭의 시학, 혹은 한 구도자求道者의 비망록
김성춘 시인
#
박성규 시인을 내가 처음 만났던 날이 2017년 가을이었던가. 토함산 자락, ‘동리목월문학관’이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대구의 공영구 시인한테서 <일일문학회>문인들과 함께 ‘동리목월문학관’을 답사하는 길에 ‘동리목월’ 선생 얘기나 좀 듣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난 후였을 것이다. 박성규 시인은 대구 <일일문학회>의 멤버로 경주에서 시를 쓰고 있다는 소개를 받았다. 그날 내가 만나본 박 시인은 이미 양산에서 나오는 시 전문 계간지 ≪주변인과 詩≫를 통해 오랫동안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해왔고, 2003년 등단 후 10권의 시집을 낸, 개성 있는 시인이었다. 그 후 나는 그가 최근에 운명적인 만남(?)을 하며 사랑의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는 경주 통일전 부근의 남산 자락, ‘들말’에서 진짜 목수로 착각할 정도로 집짓는 공구들이 가득한 박 시인의 집과 텃밭 구경도 했다.
하안거 땐 텃밭에서 수행을 하고
동안거 땐 골방에서 수행을 한다
화두는 단 하나
입속에 들어올 것이
얼마나 되느냐이다
가물면 가물어서 수행에 방해되고
며칠 비 와도 수행에 방해되지만
아무리 게으름이 없다 해도
증득(證得)하는 것은 뻔한 일
자전과 공전 덕분으로
하루하루 수행의 시간을 보내지만
해제일이 지나도
게으름은 없어야 되는 법
동안거 때가 편하다 하지만
하안거 때라도 힘든 것이 아닌
내 텃밭의 수행론
-「텃밭 수행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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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시인의 11번째 시집 『텃밭을 건너온 말씀』원고를 읽으며 내가 놀란 점은 박 시인은 머리만 안 깎고, 절 생활만 안 할 뿐이지 이미 ‘준 스님’(?) 수준의, 재가 불제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관과 시관은 불교 철학적인 생활에 깊은 뿌리를 두고 부처님 사상에 심취되어 있다. ‘들말’ 시골 텃밭에 날마다 출퇴근하다시피 하며 사는 그의 텃밭 체험은 사소하지만 그 사소함이 오히려 독특한 개성이 되어 잘 여문 알갱이처럼 시에 녹아 있다.
쪽박만 없다 뿐이지
백수란 칭호를 받고부터는
걸인 행세를 했다
봄부터 푸성귀 키워
겸손한 밥상을 차리지만
입에 풀칠한 하면 되는 거라고
욕심을 버리려 했다
주어진 삶이라고 해봐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지천에 널린 공기를
온전하게 마시는 것
늘 거기가 거기라
오늘도 허공에 이름을 새기며
소리를 질렀다
자연에게 얻어먹고 사는 내가
진짜 거지
-「허공에 이름을 새기며」 전문
“늘 거기서 거기라/오늘 허공에 이름을 새기며/소리를 질렀다//자연에게 얻어먹고 사는 내가/진짜 거지!”라니. 그렇다. 삶은 늘 거기서 거기다. 이러한 시인의 철저한 자기성찰에서 오는 울림이야말로 박성규 시인만의 진짜 육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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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서정시에는 시인의 체험과 깨달음은 물론, 시적 대상을 향한 끝없는 정진과 그리움이 압축되어 있다. 독자들은 이러한 시인의 독특한 경험들을 통하여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해보기도 하고 새로운 간접경험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서정시는 시인과 독자 사이의 경험적 소통을 전제로 하는 특수한 담화 양식이다.
또한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기보다 시를 찾는 사람이다. 시인은 언제나 암중모색한다. 이 암중모색은 시인이기를 그만 둘 때까지 되풀이된다. 그러므로 시는 본질적으로 끝까지 도전하는 영역, 새로운 시작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박성규 시인은 청소년 시절부터 경주의 고등학교 “불교 학생회‘ 멤버로 일찍부터 활동을 하면서 부처님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번 시집을 읽는 사람들은 벌써 눈치를 쉬이 챘으리라. 욕심 없이 맑고 소박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날마다 텃밭으로 출퇴근하는 시인의 수행자적 삶과 시정신을…….
불교의 이상적인 가치인 ‘중도(中道)’를 노래한 ‘넝쿨 이야기’라든지, 제피나무 두 그루를 심고 살아남은 한 그루 나무에 애정의 눈빛을 보내며, ‘도반’으로 함께 살고 싶다는 시「도반」등등, 곳곳에 불교의 핵심 철학인 ‘무상과 무아의 시편’들과 불교 분위기가 드러나는 ‘어휘群’들을 시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수행론, 동안거, 해제일, 중도(中道), 중생, 하안거, 증도(證道), 아라한, 도반, 참회론 등등이 그것이다.
넝쿨이 내게
말을 건네 왔다
삶이란 것은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가뭄이 들면
가뭄이라고 낙과시키고
장마 때면
분에 넘친다고 낙과시키며
매사 살아가는 것은
적당해야 된다고
넝쿨이 또 말을 건넨다
낙과 없이 육남매 키워주신 넝쿨이
또 한 말씀 건네 왔다
-「중도(中道)」 전문
얼핏, 부처님의 말씀 중 ‘소나의 거문고’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연상되는 이 시는 거문고 줄이 가장 좋은 소리를 낼 때는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은 적당한 줄의 긴장이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가 난다는 불교의 이상적인 ‘중도’ 철학 얘기를 담고 있다.
제피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똑같은 환경에
똑같은 방법으로 심었는데
생존율이 50%였다
이사를 한다는 것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사람들도 힘겨워 하는 일이라
제피나무도 그러했으리라
새로운 땅에 터 잡은 나처럼
살아남은 저 나무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같은 번지에서 살아갈
도반이 되어서
-「도반」 전문
어떻게 보면 시란 비루하기도 하고 덧없는 세상 존재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눈빛이나 어떤 위안인지도 모른다. “애당초 나이테가 없는 나/풀이었는지도 몰라”(「나이테」), “한 다리가 없는 불쌍한 길고양이에게 연민의 눈빛을 보내는”(「늘어나는 식솔」)등의 진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슬픔이나 기쁨이 없으면 느낄 수 없는 섬세한 감성을 소유한 박성규 시인만이 갖는 깨달음이다.
세월의 흔적을
나이테라 했는데
날마다 뽑혀 나가는 풀
나이테가 없다
나이를 먹어간다고
아우성치는 나
몸뚱이를 잘라보면
나이테가 나타날까
애당초 나이테가 없는
나
풀이었는지도 몰라
-「나이테」 전문
생활 쓰레기는
매립지에 묻거나
소각장에서 소각하지만
인간쓰레기인 나는
어찌 처리될까?
-「참회론」 전문
도회지에 가면
보이지 않는 별들
우리 동네 하늘에
죄다 모여 있다
덩치 큰 녀석부터
조무래기들까지
골고루 섞여 있는 저 하늘
사이좋게 모여서
한세상 살다 간다
저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오고
그런 광경 바라보다 잠드는 날은
어김없이
나도 노숙자
-「노숙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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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들어가는 입구가 새벽이슬 속에 숨어 있다니! “깨끗하지 않으면/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문을 발견한 시「새벽 이슬」은,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시로 큰 울림을 준다.
하늘로 들어가는 입구는
새벽이슬 속에 숨어 있다
깨끗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아침은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입구를 파괴해버린다
더러는 영롱하다고도 하고
더러는 고운 구슬이라고도 하지만
꼭꼭 숨겨놓고 있는
하늘로 올라가는 입구
-「새벽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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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릴케는 “내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유일한 것은 벗들의 마음속에 사라질 듯 남아 있을 ‘내 생전의 모습’일 것이다”라고 그의 여자 친구 사로메에게 적어 보낸 일이 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떠날 때 저마다 조그마한, 혹은 커다란 ‘심정(心情) 공간(空間)’을 남긴다
박성규 시인도 ‘들말’의 텃밭이라는 운명적인 하나의 사랑스런 ‘심정(心情) 공간(空間)’을 『텃밭을 건너온 말씀』이라는 시집으로 우리 앞에 섰다. 그는 이제 독특한 텃밭 시인으로써 우리 곁에 오래 오래 남아 잔잔한 그의 미소처럼, 깊은 울림을 주는 시인으로 거듭 태어나길 바란다.
새봄이 오면 하루 여덟 시간 이상 텃밭을 가꾸며 시를 쓰는 박성규 시인의 시에게도, 들말의 햇볕에게도, 바람이 불고, 새가 울고, 불타는 노을이 찾아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고뇌에 찬 그의 11번째 시집에 진심으로 축배를 보낸다.
시월 중순 하루 여덟 시간
오후 5시의 가을
버티며 일한다
-「오후 5시의 가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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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가을이란 책 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무심코 바라보았던 것들이
것들을 품고
기록으로 남았다
상처만 남기고 떠난 태풍은 몇 쪽에 들어 있을까
펼쳤던 쪽을 확 덮어버리고 싶어도 몇 쪽에 태룽이
들어 있었는지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가을이란 책을 읽어야만 하는 것을
나는 이제 인연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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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규 시인∥
∙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 2004년 [시인정신]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 시집으로 『꽃아』 『멍청한 뉴스』 『오래된 곁눈질』 『어떤 실험』 『이제 반딧불을 밝혀야겠다』외 다수가 있다.
∙ 현재 대구문인협회 회원과 [시와여백]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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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2004년 [시인정신]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박성규 시인의 신작 시집이 출간되었다.
지난 시집 『이제 반딧불을 밝혀야겠다』를 통해 자연과 자신을 덧대는 ‘맑은 눈’으로 들여다본 시편들을 선보였다면 이번 시집 『텃밭을 건너온 말씀』은, 시인의 11번째 시집이자 더욱 웅숭깊어진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시적 세계가 심화될수록 자연의 풍경에서 깊이를 시추하고, 대자연의 순리 앞에 인간의 작고 여린 삶을 돌보는 시인의 태도가 더욱 확고해 보인다. 또한, 불교적 성찰을 통해 세계로 통하는 모든 문을 열고 섬세한 시어로 그 믿음들을 돌올하게 새겨가는 과정이 이번 시편들에게서 느껴지기도 한다.
발문을 쓴 김성춘 시인은 “시골 텃밭에 날마다 출퇴근하다시피 하며 사는 그의 텃밭 체험은 사소하지만 그 사소함이 오히려 독특한 개성이 되어 잘 여문 알갱이처럼 시에 녹아 있다”라고 표현한다. 텃밭이라는 작은 터전은 곧 시인의 모든 생활이자 주어진 양식이다. 시인이 ‘텃밭’이 일궈온 시간을 건너와 시적인 장소로서 주소를 내밀 때, 우리는 아마 당도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깨달음들로 하여금 인간을 투명하게 되돌아볼 수 있도록 만드는 시편들이, 텃밭을 건너와 여린 잎을 무성하게 펼치고 있다.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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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달빛자락 / 명상음악
*출처: 이동활의 음악정원(http://cafe.daum.net/musicgarden/5r73/4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