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간의 유영(遊泳)
성병조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일반 사회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 선거의 세계에서는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겨진다. 낙선자는 전쟁에서 패한 것 같은 재기불능의 인간, 가산 탕진하고 사회로부터 무능한 사람으로 공인받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두터운 시골 정서의 벽을 어떻게 뛰어 넘는담?”
당선돼도 빈 털털이, 낙선돼도 빈 털털이가 된다는 전설 같은 길을 왜 택했느냐고 지역의 원로들이 안타깝게 물어 올 때마다 나는 적절한 답변 찾기에 분주하였다.
가진 재산 다 털어 넣고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두 가지 모두 잃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만 잃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큰 재산이랄 수는 없지만 성실하게 모아온 살림을 죄다 날리지 않는 게 현명한 처신일 거라 되뇌기도 했다. 그보다도 사회정의와 정직을 생명처럼 소중히 간직해온 50 평생 내 인생 철학을 하루아침에 뒤집어 버리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결과의 중요성만큼이나 수단과 방법, 즉 과정의 중요성을 망각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쩌면 이것은 당선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낙선을 자초하는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조그만 의지로 인해 오욕으로 점철된 지금의 선거 풍토를 조금이나마 되돌아보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누가 뭐라고 해도 돈 판으로 만든 최초의 원인 제공자는 출마자일 테니까.
유혹의 손짓들은 나를 혼돈과 갈등의 세계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존경의 대상으로 여겼던 어르신들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치러진 각종 선거를 통해 맛 들여진 이상 습관이 악취처럼 풍겨 나왔다. 지탱해 나갈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이쯤에서 포기해 버릴까도 생각했다. 호랑이를 잡겠다고 나선 사람이라면 호랑이 굴에까지 들어가는 것이 용기인 거지 지레 겁먹고 도중에 좌절해 버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끝까지 선의의 경쟁을 펼쳐야겠다고 이를 악물었지만 어려움은 한둘이 아니었다.
주로 친지나 마을 사람들을 통해 금품을 요청해 오거나, 어떤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내게 요구해 왔다. 거절하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한번 발 담그면 결코 헤어 나오기 힘든 길이다. 그것은 바로 득표를 포기하는 것과 진배없는, 후보자로서는 치명적인 길을 걷고 있는 것임을 뻔히 알기에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번민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만사를 팽개치고 싶은 심사에서 아내와 함께 비슬산 자락을 찾은 적도 있었다. 이쯤에서 접어 버릴까. 선거의 굴레에서 훌훌 벗어나 본래의 내 모습으로 되돌아가고픈 생각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의원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찾아서 고생하나? 그러나 끝까지 버텨보자.”
유권자들의 불합리한 유혹에도 망가지지 않고 현명하게 헤어나는 일도 경험할 만한 인생 체험이라 자위하면서 인내하고 또 인내하였다. 평소 돈으로 얼룩진 금권선거를 비판해온 사람이 그들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다는 것은 바로 내 인격을 송두리째 팽개쳐 버리는 일이라 생각하며 내 의지대로 끌고 가리라 마음먹고 또 먹었다. 정치나 선거도 잘만 하면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우리 축구선수들처럼 갈채도 받고 국민 축제로 승화시킬 수도 있을 텐데 우리의 현실은 너무도 먼 곳에서 허둥대고 있어 아쉽기만 하다.
나는 합동 유세 때 이렇게 외쳤다. 정치 세계에서 돈 하나 안 받아먹은 사람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을 만큼 희귀하게 돼버렸으니 지금이라도 그런 희귀종이 좀 나와야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청정지역의 청정 후보임을 과감히 내세웠고, 이번 선거에서 나를 뽑아 주어야만 우리 고장이 가장 주목받는 곳이 될 수 있다며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내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당선이 못 되었으니 그 가치가 전무 하다 고만 볼 것인가. 아니다. 결과에 이르는 과정의 중요성을 결과만큼이나 중시하는 세상이 되어야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 사회 문제의 뿌리도 캐어 보면 대부분이 수단과 방법으로 각론 지어지는 과정상의 일탈에서 빚어지고 있지 않은가. 의원이 되는 길도 법이 정한 테두리 내에서 찾아야지 당선으로 모든 문제가 합리화되어 버리고 마는 지금의 선거 풍토 속에서는 굳이 법을 준수하며 고행의 길을 택하려 하지 않는다.
금전 문제는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다. 돈 문제만 깨끗하면 매사에 자신감이 생기고 무서울 게 없어진다. 요즘의 혼탁한 사회에선 천연기념물만큼 희귀한 존재처럼 여겨지는 청렴결백이 제 가치를 발해야 한다.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분수를 지키면서 돈에 대한 투명성을 키워나갈 때 사회발전 에너지는 더욱 강하게 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출마자 본인은 물론 가족과 친지, 그리고 지인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던 6개월간의 유영을 통해 민초들의 가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값진 소득이었다. 하지만 순박하고 정감이 넘쳐야 할 농촌이 왜 이토록 양면성을 지니게 되었는지, 왜 세계화 개방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걸맞지 않게 보수적 폐쇄적 성향으로 흐르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다.
첫댓글 성병조 작가님께서 수필세계에서 자꾸 멀어진 이유는 "작가는 자기 가슴속에 가득한 이야기를 글로써 드러내야 하는데 마이크를 쥐고 자꾸 말로써 드러내려 한 때문"입니다. 글은 읽고 싶은 사람만 읽으면 되는 자기 선택권이 있는데, 마이크는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집단성이 있기 때문에 바른 말을 하면 할 수록 주변 사람으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경향이 매우 높아 집니다.
바른 말을 많이 하면 미움 받게 되어 있는 게 인간들이 사는 세상의 정확한 모습입니다. 바른 말을 말로 하지 말고 문장으로 하시면 그게 생명이 가득한 살아 있는 글이 됩니다. "나홀로 소송" 같은 살아 있는 글이 우리나라 법원의 재판 풍토를 변혁시켜냈던 것입니다. "6개월 간의 유영"도 나홀로 유영이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훌륭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