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시대의 형벌
쫓겨난 연산군·광해군,
가시덤불 안에 갇히는 형벌 받았죠
조선시대 감옥, 오늘날 구치소 해당
정약용도 "세상의 지옥"이라 할만큼 가혹 행위·전염병 등 환경 열악했죠
왕족·고위 관료는 유배형 많이 받아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기업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 등을 받고 구속됐어요. 이명박 전 대통령이 갇힌 곳은 서울동부구치소예요. 구치소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되는 사람(피의자)이 재판을 받고 형벌이 확정되기 전까지 갇혀 지내는 곳이지요. 고려·조선시대에는 옥(獄) 또는 전옥(典獄)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조선시대 옥살이는 오늘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힘들었다고 해요. 과연 어떠했을까요?
◇'옥(獄)은 밝은 세상의 지옥'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이 쓴 '목민심서' 중 '형전(刑典)'을 보면 '옥(獄)은 사람이 살고 있는 밝은 세상의 지옥'이라는 말이 나와요. 지옥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끔찍하다는 뜻이지요. 그러면서 형틀(죄수의 몸을 고정하는 도구)의 고통, 토색질당하는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갇혀 있는 고통 등 다섯 가지 고통이 있다고 말했어요.
먼저 형틀의 고통은 형틀에서 태형(엉덩이를 치는 형벌)을 당하거나 고문당하는 고통을 말하고, 토색질당하는 고통은 돈이나 물건 등을 억지로 바치는 데서 오는 고통을 말해요. 조선시대엔 옥에 갇힌 사람이 옥을 지키는 옥졸이나 옥에 먼저 들어와 있는 죄수들에게 '잘 봐달라'며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심한 가혹 행위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아프고 춥고 배고픈 고통은 옥살이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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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이런 글을 쓴 건 목민관(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이 죄수들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기를 당부하려는 것이었어요. 조선시대에는 각 도의 관찰사(오늘날 도지사)가 살고 있던 관청인 감영(監營)과 수령(오늘날 군수)이 다스리던 고을마다 죄수를 가두어두는 옥이 있었는데, 관찰사나 수령이 범죄자에게 형벌을 내리는 재판관 역할을 같이했기 때문이지요. 또 옥살이를 관리하는 최종 책임도 그들에게 있었어요.
◇형벌과 감옥에 대한 일을 맡아본 전옥서
조선시대에 죄인을 가두어두고 관리한 대표적 관청은 '전옥서(典獄署)'였어요. 조선 1대 임금인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관제(官制·국가 기관 제도)를 정할 때 고려의 '전옥서'를 본떠 만들었지요. 이 밖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중죄인을 다스리던 왕의 직속 기관인 의금부, 오늘날 경찰서에 해당하는 포도청, 왕실 재정 관리를 맡았던 내수사에도 옥이 따로 있어 죄인을 관리했답니다.
당시 옥은 오늘날로 보면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들이 머무는 곳이었어요. 판결이 확정된 죄수들이 지내는 '교도소'라기보단 '구치소'에 가까웠던 거지요. 조선시대엔 재판에 따라 형벌이 정해지면 신체에 형벌을 가하는 '신체형'이나 관아 등에 머물면서 힘든 일을 시키는 '도형(徒刑)', 외딴곳에서 귀양살이를 시키는 '유형(流刑)', 목숨을 앗는 '사형'을 선고했을 뿐 옥에 가둬 징역을 살게 하는 형벌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죄인으로 몰려 옥에 갇히면 재판까지 처리 과정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못된 관리나 수령이 일부러 죄인을 판결하지 않고 오랫동안 옥에 가두거나 범인의 가족을 옥에 가두는 경우도 있었지요.
당시 옥살이는 무척 고통스러웠어요. 추위와 전염병, 비위생적 환경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고 억울하게 옥에서 죽기도 했지요. 이에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은 죄수들이 더운 여름에 지내는 곳과 추운 겨울에 지내는 곳을 다르게 하고, 감옥 안을 청결하게 관리해서 전염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정비를 하기도 했어요.
◇외딴곳에서 쓸쓸하게 보내는 유배
조선시대 형벌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유형인데요. 유배(流配)라고도 하는 유형은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차마 사형에 처하지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었어요. 유형 중에는 왕족이나 고위 관리에게만 적용하는 안치(安置)라는 형벌이 있었는데 거주지를 강제로 제한한 것이었어요. 이 중 절도안치는 본인 혼자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살게 하는 것이었고, 위리안치는 집 둘레에 울타리를 둘러치거나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싸서 외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한 것이었지요. 천극안치는 죄인이 머무는 방 둘레를 탱자나무 가시로 둘러쳐서 아예 죄인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아주 무거운 형벌이었어요.
☞위리안치된 조선의 두 임금
위리안치(圍籬安置)라는 형벌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 때였어요.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권주라는 인물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 자식을 외딴섬에 위리안치하도록 명령했지요. 그러나 자신도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는 운명을 맞아요.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도 왕권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했는데 자신도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고 강화도에 위리안치됐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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