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모세의 마무리/ 신명기 34:1-8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raVOj7t-ydg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웰빙(Wellbeing)이라고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디서 보니 인간이 행복하려면 여섯 가지 뚜렷한 구성 요소가 필요합니다. ‘생명, 자유, 존엄성, 만족, 복지, 안정’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늙는 것을 웰에이징(Wellaging)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늙으려면 신앙과 꿈과 도전정신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너무 일찍 포기합니다. ‘내 나이에 뭐를 하겠어!’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의 35%는 60대에 성취되었고, 23%는 70대에, 6%는 80대에 성취되었답니다. 역사적 업적의 64%가 60세 이상의 인물들에 의하여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꿈과 도전으로 웰에이징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죽은 것을 웰다잉(Welldying)이라고 합니다. 죽음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죽음 후에 바로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역사관은 윤회입니다. 돌고 돈다고 말입니다. 기독교는 직선적 역사관입니다. 기독교는 시작이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시간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사람은 시작이 중요하지만 끝은 더 중요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보다 죽을 때가 더 중요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처음에 선두로 뛰는 것보다 마지막지점에서 선두로 뛰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이 중요합니다.
본문은 모세의 죽음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마지막으로 세 편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이 신명기입니다. 모세는 느보산 최정상인 비스가봉에 올랐습니다. 그는 느보산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본 후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느보산은 요르단에 있습니다. 느보산 꼭대기에는 높이가 근 10m 이상 되는 모세의 놋뱀 이야기를 연상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옆에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느보산은 민둥산인데 나무나 숲이 전혀 없어서 시계가 좋고 전망이 기가 막힙니다. 느보산에서 보면 모세가 소망했던 가나안 땅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사해, 요단강 건너편의 이스라엘 도시들이 내려다보입니다.
모세는 120세에 죽었습니다. 6절에 보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 때문에 모세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이 없게 하셨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다니엘의 무덤이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무슬림국가인데 이라크에서 다니엘의 무덤을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왔다고 주장합니다. 그곳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무덤을 돌면서 소원을 빌고 있다고 합니다. 왕하 18:4입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 시대까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이 있었는데, 히스기야가 부셔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으로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무덤을 알았다면 분명히 그곳에서 우상숭배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무덤을 숨기신 것입니다.
오늘은 송년 주일입니다. 202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설교는 모세가 느보산에서 인생을 마무리 하는 내용으로 우리가 2024년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감사로 마무리합시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 이야기입니다. 그는 말년에 자기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원인을 하나님의 은혜와 어머니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카네기가 13살 때, 영국 사는 그의 가족에게 미국에 사는 숙모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니 미국으로 오라.” 편지를 받은 그의 부모는 미국행을 준비했으나 돈이 20프랑 부족했습니다. 어머니는 친구인 핸더슨 부인에게 부탁했습니다. “핸더슨! 우리가 이번에 미국으로 이민 가는데 20프랑이 모자라. 내가 미국에 가면 언제 갚을지 약속할 수 없지만 그 돈을 빌려줄 수 있겠니?” 카네기 가족은 핸더슨 부인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 후 어머니는 열심히 일을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밖에서 돌아온 카네기의 손을 잡고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 참 기쁜 날이다. 아마 내 생애에 최고로 기쁜 날 같다.”, “엄마! 뭐가 그리 기뻐요?”, “핸더슨 부인에게 빌린 20프랑을 오늘에야 다 갚았다. 너는 앞으로도 핸더슨 부인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아라.” 그 때 카네기는 ‘어머니는 정직한 분이고 감사를 아는 분이구나!라고 생각 했습니다. 정직과 감사가 카네기의 성공비결이었습니다.
모세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감사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먼저 부르심을 생각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40세에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40년을 목자로 살다가 80세의 늙은 나이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그대로 늙어 죽었을 텐데, 하나님이 부르셔서 너무나 귀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비전을 주시고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의 과업을 이루셨고, 40년 간 광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놀랍고 위대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교회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누구도 스스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며 하나님므이 일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2024년도 교회 안에 거하고 믿음 안에 거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모세에게 감사의 제목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 떨기나무의 불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모세의 사역에 일어난 수많은 기적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홍해가 갈라졌고,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변했고, 반석에서 샘물이 났던 것입니다. 광야의 기적은 전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사원 안에는 영국을 빛낸 위대한 인물들이 잠들어있습니다. 그곳에는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존 웨슬리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의 동상에는 그분이 남긴 유명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아멘!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영국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 클럽이 있었습니다. ‘프란시스 뉴포트’라는 사람이 리더였습니다. 그가 죽을 때 자신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또한 분노하고 있는 하나님 앞에 내가 서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옥이 없다고도 하지 말라. 벌써 내 영혼이 그 불길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을 지금 나는 느끼고 있다. 가엾고 불쌍한 사람들아! 나에게 희망이 남아있다고 말하지 마라! 왜냐하면 나는 영원히 가망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하던 사람이 막상 죽음 앞에 놓이게 되자,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2024년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셨고, 보호하셨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모세가 자신이 살아온 길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했을 내용 중에 하나는 연단하심이었을 것입니다. 훌륭한 성도, 훌륭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르반테스는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루아침에 가나안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40년간 연단하시며 준비시키셨습니다.
모세도 하루아침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40년은 모세를 애굽의 궁궐에서 실력을 준비시키셨습니다. 40년은 광야에서 홀로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40년간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사용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지도자가 된 후에도 반복적인 훈련과 연단으로 모세를 세워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은 혈기가 충만해서 사람을 때려죽인 모세를 연단하셔서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셨고,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하는 신령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연단으로 인하여 성장하고 단단해지며 우리의 마음 밭은 옥토로 변해갑니다. 유대인들은 사막과 같은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땅은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시간이 걸립니다. 이스라엘은 키부츠가 유명합니다. 사해바다 옆에는 엔게디 광야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키부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 그곳에서 묵기도 했습니다. 그곳 키부츠는 1950년경에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몇 년 동안 농사를 하지 못하고, 물을 끌어들여서 계속 소금기를 씻어내는 일만 했습니다. 사해에서 유입된 염분으로 인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까 그 일만 한 것입니다. 그런 고생을 몇 년 동안 계속하고 난 후에 비로소 그 땅에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의 엔게디는 광야가 아닙니다. 옛날 버려진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우리가 옥토가 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신앙이 성장하기를 원하고, 하루아침에 축복을 받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갖고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연단을 받으며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 청년들은 지금이 자신의 미래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영국의 영웅 윈스턴 처칠의 회고록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총리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지식이 해박합니까? 어떻게 이렇게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처칠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깡패 짓을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서 때려고 있는 돈 빼앗았습니다. 하루는 책을 읽고 가는 옥스퍼드 대학생 놈을 붙잡고 때렸더니, 푹 쓰러져서 피를 토했습니다. 그래서 ”가라!“고 하니까 그 학생이 일어서더니, 책을 펴고 읽으면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너무 너무 도전을 받아 ‘아! 나도 공부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는 어머니를 졸라 책 800권을 사서 모조리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처칠이 영국의 영웅이 된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훈련하며 실력을 키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항상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다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잘 연단 받으시고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으로 준비 되어야 합니다.
2. 겸손으로 마무리합시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압니다. 자신은 완전하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세도 느보산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가졌을 것입니다. 몇 가지 한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시간의 한계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은 시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하루 24시간, 한 달 30일, 일 년 365일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일이 밀렸다고 하루의 시간을 늘릴 수 없습니다. 금년의 목표가 미달됐다고 내년이 오는 것을 연기시킬 수도 없습니다. 어느 원로목사님이 강문호목사님과 목욕탕에 가셨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강목사님! 늙으니까 시력도 약해지고, 의욕도 감소되고, 식욕도 없어지고, 성욕도 사라지고, 목욕만 남아.”
6절에 보면 ‘장사되었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의미는 ‘그가 장사하셨고’입니다. 모세를 죽이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모세를 장사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7절에 보면 모세가 죽을 때 나이 120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모세는 건강상으로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시간의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전 3:1,2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세상에 모든 일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시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느 집에 갔는데, 주인을 잘 따르는 개 한 마리가 있더랍니다. 그 개가 주인을 보더니 꼬리를 치며 달려와서 핥더랍니다. 그때 주인이 “유월아! 저리가”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궁금해서 “유월이가 무슨 뜻이에요?”라고 물었더니, 개 주인이 “6월에 잡아먹으려고요.”라고 하더랍니다. 유월이는 자기가 곧 죽게 될 것도 모르고 꼬리치며 좋아하더랍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겸손해야 합니다.
4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위대한 일을 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는 것도 시간이라는 한계를 실감케 합니다. 모세는 시간의 아쉬움을 실감하면서 노래했습니다. 시 90:9입니다.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20년도 순식간입니다. 시 90:12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간의 한계를 알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시간의 한계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강문호목사님의 장모님은 늘 “주말에 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정말 주말에 돌아가셨답니다. 저는 저의 부모님을 위하여 기도할 때 꼭 복된 소천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저는 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 잘 지키고 아름답게 죽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한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느보산에서 모세는 사명의 한계를 부딪쳤습니다. 역사는 마라톤도 아니고 단거리 경주도 아닙니다. 역사는 계주, 이어달리기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바톤을 받아서 달리고 있으며 때가 되면 누군가에게 바톤을 넘겨주어야 합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자신의 바톤을 넘겨주었습니다. 9절입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모세는 안수를 통해서 지도자의 사명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었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을 마무리해야 하고 가나안에도 들어가야 합니다. 가나안을 정복하여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도 세워야 합니다. 할 일이 잔뜩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사명이 다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주의 일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사명도 건강할 감당해야 합니다. 찬송가 330장 “어둔 밤 쉬 되리니”입니다. 1절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2절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 낮에는 수고하나 쉴 때도 오겠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3절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지는 해 비낀 볕에 힘써 일하고 그 빛이 다하여서 어둡게 되어도 할 수만 있는 대로 힘써 일하라” 1,2절 마지막 소절은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입니다. 3절 마지막 소절은 “할 수만 있는 대로 힘써 일하라”입니다. 사람은 시간의 한계가 있고 사명의 한계가 있습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힘써 일해야 합니다. 세상의 일도 그렇고 하나님의 일도 그렇습니다.
모세에게는 영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영성은 대단했습니다. 10절입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모세 이후에 모세 같은 선지자가 없었으며 모세는 하나님이 대면해 아시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대단한 영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출 33:11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친구와 대화하듯이 모세와 교제하셨습니다. 정말 대단한 영성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기도했습니다. 신 3:25입니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모세는 가나안에서 살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곳에 들어가서 그곳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 칼에 자르셨습니다. 신 3:26입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는 놀라운 영성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기도를 했습니다. 모세의 영성의 한계입니다.
민수기 20장에는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서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민 20:8입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흥분하여 마치 자기가 물을 내는 것처럼 말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역시 모세의 영성의 한계입니다. 민 20:12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민 14:30입니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가나안을 정탐한 사람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때 백성들도 그들에게 미혹 되어서 믿음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로 진노하셔서 그 당시 20세 이상의 장정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도 제외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모세 같은 영성가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기도를 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모세의 영성의 한계를 볼 수 있는 기도입니다.
모세 같이 위대한 사람도 영성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영성을 가지고 있어도 잘못 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의 체험이나 자기의 응답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영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보니 젊을 때는 절대 확신했던 일이 나이를 먹고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한계, 사명의 한계, 영성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 체험이나 내 판단이나 내 응답을 절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3. 소망으로 마무리합시다.
느보산에 선 모세는 두 가지 소망으로 인생을 마무리합니다. 먼저는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입니다. 모세가 느보산 비스가봉우리에서 가나안을 바라봅니다. 단까지 이르는 길르앗 지방 온 땅, 북쪽 경계입니다.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 서쪽 경계입니다. 그리고 온 유다 땅과 네겝과 여리고 골짜기에서 소알까지, 남쪽 경계의 땅을 바라봤습니다. 4절입니다.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이 땅은 조상들이 바라 본 땅이었습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모세는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셨고 후손들에게 주실 비전의 땅을 바라봤습니다. 놀라운 것은 모세가 본 그 땅의 경계가 수 백 년 후에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가 됩니다. 지금 모세는 그 땅을 단지 바라보기만 할 뿐이지만 후세에 그것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바라본 또 하나의 소망은 천국의 소망입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모세는 아쉽게도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하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당연히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수년전 뉴스위크 기자가 그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기독교의 기여한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첫째로 교육의 발전에 공헌했다. 둘째로 자선사업과 인도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셋째로 인간을 치유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는 이교도로써 기독교에 대해서 매우 후한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영생이고 천국입니다. 기독교는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도록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천국은 두 종류입니다. 먼저 이 땅에서 누려야 할 천국입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비록 눈물과 아픔이 있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천국의 영광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현세 천국입니다.
옛날, 어떤 부자가 아주 엄청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별로 웃을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여행을 했습니다. 어느 날 여행 중에 아주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형편없이 낡은 옷을 입은 한 거지가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 거지의 얼굴은 기쁨과 평안이 가득했습니다. 부자는 무엇이 그 거지로 하여금 그토록 행복하게 만드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기뻐서 춤을 춥니까?”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에 하등동물로 짓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다행히 한 다리만 불편하기 때문에 동서남북 어디든지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지금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언젠가 나는 죽어서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리라는 기대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생각하니, 저는 지금 너무나 즐겁고 기뻐서 춤을 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거지는 비록 가난하고 병들었지만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현세천국입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또 다른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내세천국, 영원천국입니다. 어느 은퇴목사님과 장로님이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였는데 늙어서도 좋은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가셨습니다. 얼마 후에 장로님 꿈에 친구 목사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이 사람아,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큰 상을 주려고 기다리고 계시네. 이제 빨리 정리하고 천당으로 오게.” 꿈이지만 마치 현실 같아서 주일 저녁 예배 때, 담임 목사님께 “목사님, 제게 시간을 좀 주세요. 교우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 마지막 유언이 될지 모릅니다.”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배 후에 장로님께서 앞에 나오셔서 말씀을 하셨답니다. “여러분, 교회는 이렇게 해야 되고, 우리 교우들은 목사님을 이렇게 섬겨야 됩니다. 장로님은 이렇게 해야 되고, 교우들은 이렇게 해야 되고...” 30분이 넘도록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조목조목 많은 말씀을 하시고 주무셨습니다. 그 다음 날 새벽, 장로님의 부인이 새벽기도 가려고 장로님을 깨우니 장로님께서 돌아가셨더랍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편의 설교를 하고 천국에 갔습니다. 그 장로님은 죽기 전에 교우들에게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고 천국에 갔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도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024년 송년 주일 예배를 드리며 두 가지 소망을 갖기를 바랍니다. 하나는 대망의 2025년입니다. 우리 앞에 새롭고 복된 해가 펼쳐질 것입니다. 2025년에는 주님 안에서 복된 일들이 충만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천국의 소망입니다. 우리에게는 현세천국도 있고 내세천국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행복한 것은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 소망이 가득한 2025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정리합시다. 저는 송년주일을 맞이하여 모세가 느보산에서 인생을 마무리 하는 내용으로 우리가 2024년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드렸습니다.
1. 감사로 마무리합시다.
모세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사합시다.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감사합시다. 비록 힘든 일들이 있어도 우리를 연단하셔서 순금으로 사용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고 감사합시다.
2. 겸손으로 마무리합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합시다. 우리에게도 모세처럼 시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사명의 한계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도 제한적입니다. 영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절대 자신을 신뢰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겸손합시다.
3. 소망으로 마무리합시다.
느보산에 선 모세는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과 천국의 소망이 이었습니다. 우리는 송년 주일 예배를 드리며, 우리 앞에 새롭고 복된 2025년이 펼쳐질 것을 소망합시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