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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는 하루』 Ⅰ
- ▣윌리엄 호가스▣베르트 모리조▣피카소와 ‘도라 마르’▣얀 브뤼겔▣크리스토와 잔 클로드▣마티스▣요한 초파니▣툴루주 로트렉
1.윌리엄 호가스의 『선거 엔터테인먼트』, 『선거의 유머』 시리즈 (1755년)
- 옛날 선거는 이랬다…윌리엄 호가스 ‘선거의 유머’
선거의 계절이 지나갔습니다. 정당을 막론하고 모든 후보자는 ‘최후의 1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 하죠. 그 과정에서 각 후보자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경쟁의 장에 오르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네거티브 선전이나 인신공격도 벌어집니다. 그럴 때면 유권자들은 환멸을 느끼게 되죠.
그런데 지금보다 훨씬 더 ‘하드코어’한 선거 경쟁의 장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이 그림 속 선거 현장에서는 벽돌이 날아다니고, 검은 돈과 뻑적지근한 파티가 오고 가며, 거짓말도 난무합니다.
18세기 ‘막장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바로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의 ‘선거 시리즈’입니다. 함께 감상해 볼까요?
○ 최후의 만찬 패러디한 ‘선거 엔터테인먼트’
윌리엄 호가스, ‘선거 엔터테인먼트’(An Election Entertainment),
‘선거의 유머’(The Humours of an Election) 시리즈 중에서. 1755년.
우선 그림 전체의 구도를 볼까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떠오르지 않나요? 화면 가운데 식탁이 펼쳐져 있고, 그 식탁을 둘러싼 사람들과 뒤편의 창문. 이 그림은 정확히 ‘최후의 만찬’ 구도를 차용했습니다.
레오나드로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0년대
그런데 다빈치 그림 속에서는 예수와 성자들의 엄숙한 식사가 진행됐다면, 이 그림은 정말 어지럽고 복잡합니다. 하나하나 살펴보시죠.
그림의 배경은 선술집. 테이블 가장 왼쪽에 선거에 출마한 두 명의 후보자가 앉아 있습니다. 번듯하게 차려 입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것 같지만 그림 속 모습은 정 반대입니다. 젊은 후보자는 배가 나온 여인의 키스를 받고 있네요. 그런데 그 여인의 뒤로 이 후보자는 다른 여자와 손을 잡고 있습니다.
나이 든 후보자(그림2)를 볼까요? 술에 취한 두 명의 남성에게 붙잡혀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손을, 다른 사람에게는 귀를 붙잡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네요. 그렇지만 한 표라도 더 얻으려면 꾹 참고 견뎌야겠죠.
이 두 사람 맞은편에 앉은 인물은 시장입니다. 겉옷이 반쯤 벗겨져있고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있네요. 팔을 자세히 보면 천으로 묶고 피를 뽑아내는 중입니다. 시장의 앞에 굴 껍질이 잔뜩 놓여있는데, 굴을 너무 많이 먹어서 치료를 받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대접을 받아도 너무 과하게 받은 거죠.
클라이막스는 오른쪽 아래의 인물입니다. 책을 갖고 있던 붉은 의상의 인물이 의자 뒤로 넘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의회 도서관에 따르면 이 인물은 선거관리위원이라고 하네요. 창문 밖의 반대파 당원들이 던진 벽돌에 맞아 쓰러지는 중입니다. 그 왼쪽에는 취객의 머리 위로 도살업자가 진(술)을 퍼붓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자리를 차지한 3명의 음악가들입니다. 작가는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식은 물론 신체적 접대까지도 행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경멸을 어떠한 필터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 속 풍경은 다소 과장되었지만, 18세기 영국에서 이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투표를 할 수 있는 유권자가 상당한 자산을 가진 남성으로 한정되었다고 해요.
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후보자들이 각종 금품과 향응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그림과 같은 접대 자리가 열린 것은 물론, 투표일에는 거마비와 술을 제공하며 유권자들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 죽은 사람도 동원하는 ‘투표소’
호가스의 ‘선거의 유머(Humours of an Election)’ 시리즈는 총 4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는 그 중 가장 첫 번째인 ‘선거 엔터테인먼트’를 살펴보았는데요. 이번엔 세 번째 그림, ‘투표’를 한 번 감상해볼까요.
윌리엄 호가스, 투표(The Polling), ‘선거의 유머’ 시리즈 중에서. 1755년.
목조 건물의 좌우에 걸린 푸른색, 붉은색 깃발이 보입니다. 그 뒤로는 각 당 후보자들이 의자에 앉아 있고요. 투표날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인데, 21세기의 투표와는 완전히 다르죠?
계단 위로 올라가, 후보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표를 행사하게 됩니다. 비밀투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구조입니다. 투표하러 오는 유권자들을 당원들이 마치 호객행위 하듯이 붙들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더욱 가관인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중앙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의 눈을 볼까요. 초점이 흐린 모습입니다. 이 작품의 판화를 소장하고 있는 브루클린 뮤지엄 설명에 따르면 사리분별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억지로 투표를 시키고 있는 모습이라네요. 그 뒤의 사람은 얼굴에 핏기가 전혀 없고 창백합니다. 죽기 직전의, 혹은 죽은 사람을 끌고 와 투표를 시키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오른쪽 붉은 옷을 입은 남성도 한 번 보세요. 한 쪽 다리에 의족을 차고 있고, 손도 자세히 보면 갈고리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전쟁에서 다친 상이군인으로 추측이 되는데요. 이 사람이 성경 위에 갈고리를 올리자 선거 위원들이 뭔가 문제가 있는 듯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진짜 손이 아닌데 선서를 할 수 있느냐”고 논의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유권자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사람이든 누구든, 이 사람이 던진 표가 우리 편에 유리하냐 아니냐 만 따지려 드는 모습을 풍자했습니다.
호가스는 이 그림의 왼쪽에 자신의 의중을 넣어 두었습니다. 마부 두 명이 카드놀이에 흠뻑 심취해 있는 가운데, 영국 국기가 걸린 마차가 부서지고 있습니다. 정책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선거 과정 때문에 국가가 무너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 판화로 박리다매…중산층도 즐겼던 그림
호가스는 이런 신랄한 그림들을 어떻게 그리게 된 것일까요?
우선 이 시기 그려진 대다수의 그림은 주문자가 있다는 걸 먼저 짚어 봐야겠습니다. 섬나라인 영국은 유럽 다른 국가에 비해 그림을 늦게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자국 화가보다는 안토니 반 다이크 같은 플랜더스 출신의 화가들이 건너와 왕이나 귀족의 초상을 그려주면서 조금씩 그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윌리엄 호가스, 화가와 그의 반려동물(자화상), 1745년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나타난 호가스는 회화사에서 보면 굉장히 열려있는 마인드를 가졌던 인물입니다. 사실 이런 그림을 개인이 주문하기는 쉽지 않았겠죠. 그림 한 장을 그리는데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드는데, 이런 풍자적인 내용을 담은 그림이라면 배포가 큰 주문자가 아닌 이상 흔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호가스는 한 명의 의뢰인에게 커미션을 받는 대신, 판화를 찍어서 그림을 상대적 ‘박리다매’로 판매했습니다. 거기다 내용도 한 사람이 아닌 불특정 다수가 좋아할 시사성이 있거나 유머러스한 주제를 선정했죠. 때로는 아주 지독하다고 느껴지는 ‘영국식 유머’가 바로 호가스의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호가스의 유명한 그림 ‘현대식 결혼’을 비롯해 유사한 스타일의 그림들은 유럽으로까지 전해져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추었습니다. 영국 테이트미술관은 호가스가 “만평과 저널리즘적 비주얼의 창시자”라고 설명합니다.
더 놀라운 건 그림이 날이 갈수록 인기가 많아져 ‘짝퉁’이 생기자,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도 바로 호가스라는 점입니다. 어쩌면 19세기 이전 영국 밖으로 영향력을 미친 거 의 유일한 화가가 호가스일지도 모릅니다.
호가스가 남긴 ‘선거’ 시리즈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라는 인위적인 시스템에서 수많은 다양한 개인이 느끼는 허탈함과 약간의 분노를 그 중심에 담고 있죠. 그래서 지금의 사람들도 재밌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이고요.
이번 그림으로 ‘호가스’를 선정한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술’이 정말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걸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학교 교양수업이나, 곰브리치 미술사 같은 책에서 배우는 미술은 정말 오래된, 드넓은 예술의 세계에서 지극히 일부만 담은 이야기랍니다.
18세기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고 그것을 자랑도 했지만, 때로는 이렇게 즐겁고 유머러스한 그림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값에 구매하고 즐기기도 했다는 걸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지금 웹툰을 즐기는 것처럼 말이죠. 초상화는 그림이 귀한 시절 극소수만 가질 수 있었던 ‘셀피’라고도 할 수 있죠.
앞으로 이렇게 재밌고 쉬운 예술 작품 감상 이야기를 연재해보려고 합니다. 궁금한 그림이나 알고 싶은 예술가가 있다면 아래 이메일로 연락 주세요. 기사에 대한 의견도 환영합니다.
[출처] : 김민 동아일보 기자:<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 - 1.윌리엄 호가스의 『선거 엔터테인먼트』, 『선거의 유머』 시리즈 (1755년) - 옛날 선거는 이랬다 / 2021. 4. 7.
2.베르트 모리조 『부엌에서』 -미나리의 순자를 보고 이 그림이 생각났다
영화 ‘미나리’의 순자(윤여정)를 보며 저는 엄마와 부엌이 생각났습니다.
언젠가 엄마는 부엌에 커다란 원목 식탁을 놓고 싶어했습니다. 식구들이 다 모여 밥 먹을 일도 많지 않은데 말이죠. 한동안 온라인으로 식탁을 들여다보고, 또 중고 매물로 나온 테이블도 직접 보러 가보던 엄마는 이리저리 줄자로 치수를 재어보더니 결국 커다란 식탁은 포기했습니다. 그러기엔 부엌이 좁았거든요.
식탁뿐인가요. 수납공간, 화구 개수 등등 여러 가지가 성에 차지 않는 부엌입니다. 그래도 엄마는 포기 않고 그곳을 알뜰살뜰 싱싱한 활기가 넘치는 곳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부엌에 원래 있던 식탁은 어느 날 흰 페인트로 깨끗하게 칠하고 예쁜 식탁보를 깔았고요, 산책하다 주운 꽃도 화병에 꽃아 올려 두었습니다. 단정한 테이블 매트도 기분에 따라 바꿔 놓으시기도 합니다.
집 싱크대 앞 작은 창문엔 항상 새싹을 틔운 각종 씨앗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먹다 남은 조그만 씨앗도 버리기 아까워하는 엄마가,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물그릇 삼아 차린 작은 배양소입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작은 것들도 저버리지 않는 엄마의 애정에 놀라곤 합니다.
영화 속 순자는 낯선 미국 땅에 가서, 뱀이 나온다고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개울가에 겁 없이 들어가 미나리를 심습니다. 제이콥(스티븐 연)이 ‘안 되는 걸 되게 하라’는 막무가내 정신으로 척박한 땅에 덤벼들었다면, 지혜로운 순자는 흙과 물의 맥락을 읽고 미나리가 싹을 틔우게 했죠.
가족은 물론 말 못하는 대상에게도 늘 애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엄마의 생명력을 저는 영화 ‘미나리’에서 느꼈답니다. 그리고 미나리를 예쁘게 쓰다듬는 순자의 모습을 보면서 이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 미나리 속 ‘순자’와 베르트 모리조
베르트 모리조, 부엌에서(In the Dining Room), 1886, 미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오늘 감상할 그림은 프랑스 인상파 작품입니다. 여러분 인상파라고 하면 보통 모네나 마네, 고흐, 르누아르 같은 작가가 생각나시죠? 이 작품의 작가는 베르트 모리조(1841~1895)입니다.
작가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림부터 먼저 볼까요.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부엌 한 가운데 서 있는 모습입니다. 과감하게 그어 내린 강렬한 붓 터치가 아주 인상적인 그림이죠. 여성의 다소곳한 포즈를 보면 예쁜 그림이라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부엌이라는 공간을 휘어잡고 있는 당당한 여자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먼저 이 그림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이 뭔지 살펴볼게요. 보통 우리의 눈은 무의식 중에 가장 밝은 곳을 바라보게 되어 있는데요, 이 그림에서 가장 밝은 곳은 바로 여성의 앞치마입니다. 하얀 색채의 앞치마를 아주 힘 있는 붓질로 칠해 뻣뻣한 느낌이 들 정도죠.
이 앞치마를 중심으로 작가는 공간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왼쪽 캐비닛을 한 번 볼까요. 사이즈로만 보면 그림 중간의 여인보다 더 크죠? 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우선은 어둡게 색채를 죽였고 세부적인 묘사도 줄였습니다. 게다가 아래 부분 수납장을 열어 두고, 그 위에 흰 천을 걸어 가운데로 시선이 흐르도록 했습니다.
눈길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받침대가 보일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그려진 테이블이 보이시죠? 의자도 다리 하나가 없어서 움직이는 듯한 리듬을 자아냈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오른쪽 공간에 짧게 벽을 만들어 시선이 분산되지 않도록 하고 있지요.
하이라이트는 여성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강아지입니다. 바닥과 거의 한 몸이 될 정도로 흐릿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푸른색 선을 활용해 강아지 형체만 간신히 남겨두었구요,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만들어 역시 가운데 여인으로 시선이 쏠리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창문 밖 붉은 집과 여인의 왼쪽 흐릿하게 그려진 프라이팬 또한 이러한 균형을 맞춰주는 오브제들로 볼 수 있겠죠.
이 그림이 재밌는 이유를 눈치 채셨나요? 바로 여성이 모델이나 그림 속 오브제가 아닌 공간의 중심으로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서 여성은 그림을 위한 여러 대상 중 하나로 비춰진 경우가 많았어요. 대표적인 것이 드가의 무용수들이죠.
에드가 드가, 무대에서 리허설, 1874,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물론 드가 또한 발레리나의 신체적 요소를 활용해 절묘한 공간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남성이 여성을 바라볼 때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모리조의 그림은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부엌은 당시 남성의 시각에선 ‘여자가 일하는 곳’에 불과했겠지만, 모리조의 그림에선 마치 ‘미나리’속 순자와 어머니의 부엌처럼 활기찬 공간으로 살아나고 있지요. (물론 지금 세대에게 부엌은 여자만의 공간은 아닐 것입니다.)
모리조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던 걸까요?
○ “가장 인상파다운 작가”
모리조의 프로필에서 가장 재밌는 건 그녀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의 조카증손녀라는 사실입니다. 프라고나르는 로코코 시대 프랑스를 풍미했던 화가이고, ‘그네’라는 그림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성인 모리조가 19세기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도 특권층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드문 기회였습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67, 런던 왈라스컬렉션 소장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 셰르의 도지사였고, 어머니가 프라고나르의 조카 손녀였습니다. 당시 상류층 자녀들은 예술 교육을 받곤 했는데, 모리조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아버지의 생일에 드로잉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고 해요. 그러다 다른 자매들은 포기하는 중에도 꾸준히 그림을 그리면서 살롱전에 입상해 전업 화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모리조는 아카데미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인상파 작가와 교류하며 1876년부터 1886년까지 매년 인상파전에 출품하며 열정적으로 참여합니다.
당시 인상파 작가들은 아카데미에서 아주 무시하고, 비난 받는 아방가르드였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모리조가 얼마나 대담한 선택을 한 것인지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을 믿고 밀고 나간 그녀의 선택이 작품도 시대를 넘어 살아남게 만든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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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부채를 든 베르트 모리조, 1874년
그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공간을 휘어잡는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요? 모리조가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1796~1875)에게도 그림을 배웠다는 것을 하나의 근원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코로는 인체 드로잉에서 시작해 풍경으로 나아가 많은 수작을 남긴 작가로, 역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 그곳의 부는 바람과 기운까지 포착하는 공간을 읽는 작가입니다.
모리조의 그림에서도 단순히 사진을 찍듯 부엌을 남긴 게 아니라, 그 공간을 활기차게 휘어잡고 있는 당당한 여인감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의 근원이 이런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는 것입니다.
모리조 스스로도 자신의 능력을 알고 때론 답답함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1890년 그녀는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고 해요.
“나는 여자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내가 남자보다 못한 것이 없다는 걸 알기에,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동등한 대접일 뿐인데도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1888년, 예일대 미술관 소장.
미술사가 전하현은 저서 ‘인상주의’(생각의 나무)에서 베르트 모리조를 “사실적 느낌 그대로를 살린 가장 인상파적 기법에 충실했던 작가”라고 설명합니다.
“고흐나 고갱은 일본과 남태평양의 영향을 받은 과장된 표현을, 로트렉 드가 기요맹과 모네는 주관성을 강하게 드러낸 자기식의 표현을 했다면 마네와 피사로 모리조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정직한 인상파적 표현을 보여줬다”고 말이죠.
베르트 모리조, 빨래 말리기, 1875, 미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그러니, 자신을 억지로 내세우거나 인위적인 무언가를 더하기보다 공간을 읽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요소를 더하는 능력이 바로 모리조가 가졌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나리의 순자를 보고 이 그림이 생각이 났던 것이고요.
물론 때로는 자아를 강하게 내세우고 주장할 필요도 있지만, 지금처럼 온 지구가 시름시름 앓고 병들어가는 시대엔 주변을 돌아보는 여성의 섬세한 지도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것 같습니다.
또 그렇다고 모리조가 자신을 숨기거나 체제에 순응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구요. 그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강인한 힘은, 살롱전 입상을 포기하고 인상파의 가치를 믿고 나아갔던 줏대있는 자아에서 나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엌 한 가운데서 당당히 선 여자, 공간을 휘어잡고 가정의 중심을 세우며 사회의 뿌리가 되고있는 모든 엄마들에게 이 그림을 바칩니다.
[출처] : 김민 동아일보 기자:<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 - 2.베르트 모리조 『부엌에서』 -미나리의 순자를 보고 이 그림이 생각났다 / 2021. 4. 25.
3.‘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피카소와 연인 ‘도라 마르’ 이야기
피카소와 도라 마르, 1937년. 사진: 만 레이
‘한국에서의 학살’이 70년 만에 한국에서 전시되고, ‘이건희 컬렉션’의 국가 기증이 화제가 되면서 인기 작가였던 피카소의 이름이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건희 컬렉션’에는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과 ‘도라 마르의 초상’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도라 마르’는 바로 위 사진 오른쪽에 앉아 있는 여성의 이름입니다.
먼저 사진을 볼까요. 역시 20세기 유명 예술가인 만 레이가 찍어준 이 사진 속에서 피카소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두툼한 손가락 사이엔 담배가 끼워져 있네요. 렌즈를 잡아 먹을 듯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은 열정 넘치는 마초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오른쪽 여인은 심드렁한 듯 턱을 괴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네요. 1937년 당시 도라 마르는 피카소의 연인이었습니다. 순간 포착된 그녀의 모습은 연인의 옆이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동요하는 것 같은 분위기네요. 1년 전 한 전시로 그녀의 삶의 조각을 알게 된 저는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해보려고 합니다.
■ 피카소의 그늘에 가려진 여자
피카소, 도라 마르의 초상, 1937년. 프랑스 피카소미술관 소장. 사진출처: Flickr/Gautier Poupeau
촉망받는 사진가였던 도라 마르는 28살이던 1935년에 영화 촬영장에서 프로모션을 위한 스틸컷을 찍다가 피카소를 만납니다. 이 때 피카소는 마리-테레즈 월터와도 연인 관계였죠. 그럼에도 당돌한 도라 마르의 태도에 반한 피카소는 그녀와도 애정 관계를 이어갑니다. 이 관계는 8년 간 지속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피카소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우는 여자’가 탄생합니다. 이밖에 피카소는 도라 마르를 만나는 동안 그녀의 초상을 60여점 그렸다고 해요. 마르는 피카소의 초상에 대해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에 대한 모든 초상은 거짓이다. 그것은 피카소가 만들어낸 피카소의 모습이지, 단 한 점도 내 모습이 아니다.”
피카소, 우는 여인, 1937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 소장
그림 속에서 마르는 고통받고 불안한 모습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마치 만 레이가 찍은 사진 속 모습을 극대화한 것처럼 말이죠. 당시 스페인 내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피카소는, 전쟁 속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도라의 얼굴로 승화시키곤 했다고 합니다. 다만 이에 대해 도라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아 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녀의 작품을 다룬 영국의 현대 미술관 테이트모던 회고전을 작년 초에 보고 저는 피카소의 연인이자 모델인줄만 알았던 도라를 완전히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녀는 대담한 실험을 할 줄 알았던 사진가이자, 사회에 관한 관심을 잃지 않았던 넓은 시야를 갖고 있었으며, 피카소와 헤어진 뒤에는 조용히 자신의 길을 찾아갔던 주체적인 여자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피카소라는 거대한 그늘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 피카소에게 사회와 정치를 알려 준 여자
도라 마르, 무제(손-조개), 1934년. © ADAGP, Paris and DACS, London 2019
위 사진은 도라 마르의 1934년 작품입니다. 소라 껍데기에서 뻗어 나오는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이 감각적이죠. 구름과 빛이 휘몰아치는 배경과 모래 바닥까지.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진입니다.
이렇게 소라껍데기와 손처럼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대상을 조합해서 낯선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형적인 초현실주의 예술의 방법입니다.
지금은 합성 기술을 이용해 누구나 이것 저것 조합해 볼 수 있지만, 당시만해도 기술적인 부분에서나 개념적인 측면에서도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우선 카메라를 사용하게 된 것도 100년이 채 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게다가 프로이트의 ‘꿈의 분석’이 발간된 것을 비롯해 ‘무의식’의 발견이 유럽 지식인들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사고 속에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 우리가 늘 이성과 논리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과 본능에 좌우된다는 발견은 큰 사건이었죠. 이 때 받은 충격과 영감을 예술로 승화한 것이 초현실주의 예술이고, 앙드레 브르통이나 살바도르 달리 같은 예술가가 대표적이죠.
도라 역시 파리에서 이들 예술가와 어울리며 전시에도 참여하는 동등한 일원이었습니다. 만 레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그녀의 사진 작품을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짐작해볼 수 있지요.
도라 마르, 무제(패션 사진), 1935년 경.
도라는 상업 사진으로 전향해 스튜디오를 차리고 돈을 벌었습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도 함께 공부하며 알게 돼 평생 친구로 지냈지요. 상업 사진에서도 과감한 구도나 기술적인 시도를 통해 능력을 인정 받았습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완성되는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도 바로 도라입니다.
프랑스 파리 피카소미술관의 큐레이터 에밀 부바르는 2018년 아트넷 인터뷰에서 “도라의 초현실주의적 사진 작품이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영향을 주었다”는 가능성도 제기했습니다.
전시장엔 이런 감각적인 사진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현실주의 사진 이전에는 길거리를 다니며 사회 문제를 기록하는 성격의 사진도 남겼습니다. 1933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과 런던을 여행한 도라는 그곳의 줄 지어 선 실업자나 빈민가의 아이들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도라 마르, 무제(배급품을 기다리는 파리 노동자들), 1934년 경.
도라는 피카소와 만나기 전부터 파리 지성들과 교류하고, 사회적 이슈에도 활발히 참여했습니다. 특히 이 때 유럽은 글로벌 대공황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이로 인해 파시즘의 망령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는데요.
1934년에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성명 ‘Appel a la lutte’에 이름을 올렸고, 1935년에는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가 이끄는 반파시스트 그룹 ‘Contre-Attaque’에도 참여했습니다.
이런 도라를 만나면서 피카소도 스페인 내전 문제를 비롯한 당대 정치적 이슈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 시켰습니다. 또 피카소에게 사진과 판화를 결합하는 기술인 ‘클리셰 베르’를 알려준 것도 도라라고 합니다.
■ 도라는 왜 숨어들고 말았을까
1년 만에 다시 떠오른 이름 피카소와 도라, 특히 도라의 일생을 곰곰이 되새겨보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첫 번째 사진 속 얼굴처럼 그녀에게 피카소와의 관계는 그닥 행복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피카소와 결별하고 8년 뒤, 한 전기 작가와의 전화 통화에서 도라는 “나와 세상의 관계, 내 남은 삶의 관계는 내가 과거에 피카소를 만났다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라고 토로했다고 합니다.
도라와 만날 때도 피카소는 이미 첫 번째 부인 올가, 그리고 또 다른 연인 마리-테레즈 월터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던 상황이었죠.
어떤 글에서는 피카소가 도라가 그림을 그리려 하는 것을 은근히 방해하거나, 자신이 그리는 큐비즘을 강요했다는 추측도 나오는데요. 도라는 정말로 피카소와 결별한 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그림들을 세상에 내놓지 않아 그녀가 죽고 나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해요.
피카소를 지우고 싶어했던 도라는 왜 자신의 작품으로 더 활발히 활동하지 않고, 마치 소라처럼 안으로만 파고 들었던 걸까. 자신의 빛나는 재능을 더 펼쳐 보이지 못했던 걸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애정 관계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 함부로 추측할 수 없는 정말 복잡한 것이지만, 저는 과연 두 사람의 관계가 한쪽만 억압을 당하는 것이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은 여성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시대가 되고 있지만, 100년 전에는 확연히 달랐을 겁니다. 어쩌면 도라의 마음 한 켠엔 피카소라는 큰 그늘에 기대고 싶은 마음도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과거의 여자에게 남자란 자신을 보호해주는 울타리나 지붕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나 울타리 속 여자로만은 만족할 수 없었던 깨인 여성이었던 도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비록 먼 곳을 바라보지만 결국 피카소의 곁을 떠나지는 못하는 만 레이의 사진 같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자가 혼자서는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사회적인 분위기,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이겠지요.
도라 마르, 대화, 캔버스에 오일, 1937년.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무엇일까라는 질문까지 해보게됩니다.
인간은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말에 저는 공감합니다. 모든 사람은 늘 마음 한 켠의 허전한 곳을 누군가가 채워줄 때 기쁨을 느낀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누군가가 채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해질 수록 허전함이 더욱 커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스스로를 채우지 못하면, 영원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누군가를 위해 떠돌아 다니며 괴로워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거죠.
조금은 쓸쓸한 결말이지만,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를 사랑해줄 수 없다”는 지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그것에 슬퍼하지 말고 오늘만큼은 혼자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채워보자. 소라 껍데기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기 보다는 스스로를 사랑으로 채우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다짐해 봅니다.
[출처] : 김민 동아일보 기자:<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 - 3.‘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피카소와 연인 ‘도라 마르’ 이야기 / 2021. 5. 16.
4.얀 브뤼겔(the Younger)의 『튤립 광풍에 대한 풍자』 (1635/1645년)
- 투기 광풍의 시대…400년 전 화가의 눈에 비친 튤립 버블은?
얀 브뤼겔(the Younger), 튤립 광풍에 대한 풍자, 1635/1645년, 프란스할스뮤지엄 소장
‘억만장자 붐(The billionaire boom)’
약 2주 전인 1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주말판 특집 기사의 제목입니다.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가운데, 각 선진국에서는 이 시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새로운 억만장자가 생겨났다고 하네요. 이로 인해 빈부격차나 사회 불안정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진단까지 더해졌습니다.
쉽사리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은 준비된 사람에겐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피부에 와닿기 때문인지 요즘 사람들 사이에선 언제나 빠짐없이 주식과 코인 이야기가 화두에 오릅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는 공무원 한국사 강사인 전한길 선생님이 “일론 머스크가 하는 말을 왜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중요한 뉴스로 봐야 하느냐. 정상이 아니다”며 일갈하는 영상을 인상 깊게 보기도 했습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의견을 피력한다는 건 그만큼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겠죠.
그래서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과거의 이런 현상을 다룬 그림은 없을까? 호가스의 ‘선거’처럼 신랄하게 다뤄 준다면 재미있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을 뒤적였습니다.
그리고 400년 전 플랜더스의 화가가 그린 이 그림을 찾았습니다. 저는 찾고 나서 ‘오, 역시!’하고 반가운 탄성을 질렀는데요. 그림을 그린 화가 브뤼겔이 제가 평소에도 좋아했던 아주 매력적인 작가여서입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들려드리겠습니다.
● 튤립 줍는 원숭이들의 희노애락
얀 브뤼겔(the Younger), 튤립 광풍에 대한 풍자, 1635/1645년, 프란스할스뮤지엄 소장
우선 그림의 첫 인상부터 볼까요. 원숭이들이 폴짝 폴짝 뛰어 다니고, 뭔가를 종이에 끄적이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네요. 그림 뒷편으로 보이는 탁 트인 풍경도 인상적입니다. 그림 왼쪽 아래를 볼까요? 오늘 그림의 가장 중요한 소재인 튤립이 보입니다.
이미 그림 내용을 눈치 챈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바로 1640년을 전후해 있었던 튤립 버블을 풍자한 그림입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알뿌리가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집 한 채 값까지 치솟았죠.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가격만 오르고 거래는 이뤄지지 않았으며, 법원에서 튤립의 재산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순식간에 가격은 내려 앉습니다. 최고가에 비하면 수천분의 1 수준으로 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파산 했다고 전해집니다. ‘가만히 앉아 돈을 벌 수 있다’는 욕망과 허영심이 만들어 낸 독특한 자본주의적 현상이었던 것이죠.
브뤼겔은 이 현상에 동참한 사람들을 고약하게도 ‘원숭이’에 빗댑니다. 그림을 자세히 볼까요.
녹색 조끼를 입은 원숭이가 예쁘게 핀 튤립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푸른 띠를 두른 원숭이는 악수로 튤립 거래를 진행하네요. 오른쪽 뒤 원숭이는 돈 주머니와 튤립을 들고 싱글벙글 웃고 있습니다. 튤립으로 ‘익절’을 꿈꾸고 있는 걸까요?
그 앞 노란 원숭이의 어깨에는 하얀 올빼미가 앉아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올빼미는 ‘어두운 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올빼미는 야행성이기 때문에 낮에는 사물을 잘 식별할 수 없다고 하네요. 오로지 돈을 향해 질주하는 투기꾼의 마음을 풍자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 왼쪽을 볼까요. 긴 칼을 찬 원숭이가 튤립 뿌리들의 가격을 정리하고 있고 그 위로는 성대한 파티가 열리고 있습니다. 성공한 튤립 투자자들의 만찬인가 봅니다. SNL 방송을 기념해 일론 머스크가 열었다는 도지코인 파티가 떠오르네요.
오른쪽으로 가면 좀 더 다이나믹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버블이 터진 뒤의 모습입니다. 붉은 단상은 아마 법정인 듯합니다. 빚더미에 앉게 된 실패한 투기꾼 원숭이가 법정으로 끌려가고 있네요. 이 원숭이의 뒤로는 가치가 없어진 튤립을 들고 눈물을 훔치는 원숭이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쪽 구석을 보면 투기꾼 원숭이가 튤립을 바닥에 두고 소변을 보고 있습니다. 투자 실패에 화가 많이 난 모습입니다. 저 멀리 뒤편에는 칼싸움을 벌이는 원숭이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전체 그림의 더 멀리로는 장례식이 치러지는 장면도 표현되어 있답니다.
마냥 우습게만 볼 순 없는 신랄한 풍자입니다. 400년 전 유럽의 사람들도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성공한 자는 화려한 파티를 즐기고, 실패한 자는 극도의 분노에 휩싸이거나 극단적 고통을 겪게 됐다니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재밌는 건 이 상황을 지켜 본 화가는 사람들을 ‘원숭이’에 빗대었다는 부분이네요. 세상엔 돈 말고도 중요한 게 많다는 불만의 표현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네덜란드 황금기’를 이끈 화가, 브뤼겔
이쯤 되면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궁금해집니다.
이 그림을 그린 얀 브뤼겔은 ‘손자 브뤼겔’인데요, 아버지도 이름이 같은 얀 브뤼겔입니다. 그리고 얀 브뤼겔의 할아버지 피터 브뤼겔은 플랜더스를 대표하는 작품을 남겼고, 그 영향을 받은 브뤼겔 형제들도 수많은 흥미로운 작품을 그렸습니다. 말하자면 브뤼겔 가족이 남긴 회화가 16,17세기 플랜더스 예술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