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선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선사
靑山兮要 我以 無語 (청산혜요 아이 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 我以 無垢 (창공혜요 아이 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 而無憎兮 (료무애 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 如風 而終我 (여수 여풍 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 我以 無語 (청산혜요 아이 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 我以 無垢 (창공혜요 아이 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 而無 惜兮 (료무노 이무 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 如風 而終我 (여수 여풍 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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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선사
1320년 2월 24일-1376년 6월 2일 (향년 56세)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으로 공민왕(恭愍王)의 두 번째 왕사(王師)였다.
고려 말의 선풍(禪風)을 진작시킨 인물로, 지공(指空) · 무학(無學)과 함께
고려 말 3대 고승으로 손꼽힌다.
나옹의 속명(俗名)은 아원혜(牙元惠 → 牙元慧[2]),
법명은 혜근(惠勤)이며 법호(法號)가 나옹(懶翁)이다.
선승이기 때문에 법호에 '선사' 칭호를 덧붙여
나옹선사(懶翁禪師)라 알려졌다.
충숙왕 7년(1320) 2월 24일(음력 1월 15일)에 경상도(慶尙道)의
영해(寧海)에서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와 경상도 영산군(靈山郡)
출신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 鄭氏) 사이
외동아들(무녀독남)로 태어났다
아버지 아서구는 원나라 함양(咸陽)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고려로 귀화하여 하급관료로 살았는데, 나옹 또한 어린 시절에는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게 살았던 듯하다.
나옹이 아직 7살이던 충숙왕 13년(1326) 3월에 인도 승려
지공(指空, 1300년-1363년)이 원나라를 거쳐 고려로 왔는데,
회암사 자리를 보고는 "산수(山水)의 형세가 인도의 날란다
사원과 비슷하구나!" 하며 중창했다고 한다.
지공은 당시 고려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어서 부처나 다름없는
고승으로 추앙 받았다.
지공은 회암사뿐만 아니라 법기보살의 성지로 알려진
금강산을 참배하고 그 외에도 고려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임금부터 백성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설법을 듣고 무생계(無生戒)를 받았다.
지공은 고려에서 2년 6개월을 보내고는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는데,
나옹 또한 지공에게서 무생계를 받았다.
나옹은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21살이 되는 충혜왕 복위 1년(1340)에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 선사(了然 禪師)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충목왕 즉위년(1344, 25세)에 양주의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나옹은 고려 불교계에서 크게 추앙받은 지공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충목왕 3년(1347, 28세)에 원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지공은 연도(오늘날 북경)의 법원사(法源寺)에 있었는데,
나옹은 지공을 찾아가 그의 문하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
나옹은 지공의 제자가 되었지만 법원사에만 머물지 않고
원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중국의 다른 고승들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스승은 분명 지공이었다.
나옹이 원나라에 머물던 시절에 자초(自超)라는 승려를 만나
제자로 거두었는데, 자초가 바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친구이자
조선 왕조 시대의 유일한 왕사가 된 무학이었다.
무학은 지공과도 만나서 다시 그 문하에 들어갔다고 하므로, 무학의
사승관계가 좀 꼬였다. 여말선초 불교계에서는 지공과 나옹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기에, 무학은 스스로를 지공과
나옹의 법맥을 이은 자로 내세웠다.
1356년(37세)에 원나라 혜종이 나옹을 불러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를 맡겼다고 하므로, 당시 원나라 불교계에서도 나옹에게
명성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나옹은 얼마 안 있어 주지 직을 내려놓았다.
무학은 이 무렵에 차라리 고려로 돌아갔고, 나옹 또한 스승 지공과
상담한 뒤 1358년(39세)에 귀국하였다. 귀국하기 이전에 스승 지공은
나옹에게 회암사에서 불법을 일으키라는 유지를 남겼다.
공민왕 9년(1359)에 오대산에 들어갔다는데, 이듬해(1361)에
공민왕이 나옹을 불러 법문을 듣고 황해도의 신광사(神光寺)의
주지승으로 임명했다.
그가 주지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홍건적의 2차 침입이 일어났다.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할 정도로 고려군이
크게 몰렸는데, 나옹은 신광사에 계속 머무르며 절을 불태우려는
홍건적 무리들을 막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절을 지키려는 나옹의 태도에서 고승의 면이 보였는지,
홍건적들도 차마 신광사를 불태우거나 나옹을 해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고려군이 홍건적을 몰아내자 공민왕도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행적 덕분인지 나옹은 고려에서 고승으로 더욱 이름을 날렸다.
그는 2년간 신광사 주지로 있다가 주지 직을 내려놓고
공민왕 18년(1369, 50세)에는 다시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공민왕 19년(1370, 51세)에는 원나라에서 입적한
지공의 사리가 고려에 이운되었다.
나옹은 이를 계기로 회암사에 지공의 부도탑을 세우고 회암사를
중창하고자 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는 고려의 왕사로 임명되었고 공민왕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법호를 받았다.
나옹은 우왕 2년(1376, 57세)에 드디어 회암사 중창공사를 끝내고
낙성식을 열었으나 사대부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이런 비난 때문에 나옹은 유배를 떠났는데 유배길에 병이 나서
오늘날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에 도착한 뒤 입적하였다.
우왕은 나옹에게 선각(禪覺)이라는 시호를 추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