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노라면
김 난 석
글을 읽노라면 어떤 글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그러노라면 관심은 내 가슴으로 향해 성찰하게 된다. 어떤 글은 고양시켜 준다. 그러노라면 머리를 맑게 해 준다. 헛것들 들어내고 새것으로 채우게 된다. 또 어떤 글은 나를 붕 뜨게 한다. 그러면 도리도리 하다가 돌아서게 된다. 이런 게 글의 영향인 것 같다. 어제는 '풋과일 도둑'이란 제하의 글을 읽어봤다. 나의 먼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어린 시절 언젠가에 ‘조센징 민나 도로보 데스.’ 란 말을 들었다.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기억에 없지만 일제치하에서 일본 관리들이 우리 민족을 그렇게 불렀다는 정도로 연결이 된다. 성년이 되어서야 이 말이 조선 사람들은 모두 도둑이라는 뜻으로 알게 되었는데, 두고두고 언짢았던 기억이다.
어린 시절 학교에 가노라면 작은 고개 하나 넘어야 했다. 그 고개 위에 과수원이 있었다. 가며 오며 울타리 안으로 들여다보노라면 반들거리는 잎사귀들 사이로 작은 열매들이 매달려 커가고 있었다. 이윽고 따내어 상자에 담아내는 모습도 목격되었는데, 참 신기하고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농원이었다.
어느 날 열매들 다 따내고 울타리도 열려있던 날, 나는 집에 있던 군용 삽을 들고 그 과수원으로 가서 작은 나무 하나를 캐내어 집에 들고 왔다. 어머니가 보시고 그게 뭐냐 시기에 산에서 캐왔다고만 하고 채전 끝머리에 심었다. 아마도 이른 봄이었을 게다. 몇 년째 살긴 살아 커가고 있었지만 잎사귀에 벌레만 달라붙을 뿐 기다리던 열매는 열리지 않고 시들시들하다가 죽고 말았던 기억이다.
장발장은 배가 고파 남의 것을 훔쳐냈지만 나는 사과가 탐이 나 사과 대신 사과나무를 옮겨다 심어봤다. 허나,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건 도둑일까? 도둑이라면 기수(旣遂)일까? 미수(未遂)일까? 물론 도둑이요 기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나무를 옮겨 심었을 뿐이라고 자위하며 태연하게 지냈을 뿐이다. 물론 변명이지만 말이다.
엊그제 가까운 이웃들과 점심을 들며 옛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린 시절의 곤궁했던 때가 화제에 올랐다. 49 년생 소띠는 입이 고플 때면 바지의 대님 묶는 자리를 꼭꼭 묶고, 바지 안쪽으로 쌀을 들이부으면 서너 됫박은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면 태연하게 밖으로 나가 어찌어찌했다는 것이고, 58 년생 개띠는 무명 자루에 서너 됫박 넣어 들러 메고 나가 어찌어찌했다는 거였다. 입이 고프면 어찌할 수 없는 것일 게다.
나의 중학시절엔 용돈이란 개념이 없었다. 그저 밥 먹고 등교하고 하교하는 게 일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입이 고팠던지 달걀 두 개를 양쪽 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집을 나섰는데, 마침 광산물 싣고 달리는 화물차를 만나 뒤에 올라탔다. 그러노라니 주머니 안의 달걀이 깨질 수밖에.. 손수건도 없는 처지라서 손으로 훑어내고 말았다. 나머지는 그냥 마르기를 기다릴 수밖에..
일요일이 되면 어머니는 내 교복을 세탁하셨다. 우선 뜨거운 물에 교복을 담그니 거기 묻어있던 달걀이 하얗고 노랗게 익어서 눈에 띄었던 모양이었다. “얘야, 옷에 달걀이 묻었구나.” 어머니는 이 말씀을 하시고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아셨을까...? 모르셨을까...? 이젠 하늘에 계시니 여쭤볼 수도 없지만, 나는 그게 아직도 궁금하기만 하다. 한 번 야단치시고 용서해 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각자의 경제사정은 불균등하게 마련이다. 능력의 차이도 있겠지만 태생이 그렇다면 불균등은 대를 이어가게 마련이다. 경제적 능력뿐 아니라 신분이 경제적 불균등을 낳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그렇고, 일제강점기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그런 걸 낳았다. 그런 역학관계에서 불균등을 완화하려 도둑심리가 생기기도 하고, 때론 그걸 정당화하기도 했다. 사흘 굶으면 남의 담을 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은 그런 사정을 정당화하려는 심리가 아닐까? 시대는 많이 변했다. 이번엔 나라님이 굶든 굶지 않든 모든 국민들에게 돈을 조금씩 나눠준다 하더라. 여러 가지 사회정책이 불균등을 완화하기 위해 관심을 쏟는 현실도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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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황한 글 읽고 화답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저는 경제적 불균등을 해소하기위해서 나라에서도 관여하고있다는 이야기까지만 했습니다.
지금 관여하고있는게 합리적인지와 타당한지 등은 말하고싶지 않았습니다.
그걸 그렇게 말하면 정치이야기가 되니까요.
특히 이곳에선 정치이야기는 금기시하고 있으니까요.
이글을 읽고 각자 성찰하는거야 각자의 자유일테고요.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배고파하는 도둑질도 있지만,
먹고파 하는 도둑도 있지요.^^
따끈한 놋쇠 그릇의 아버지 밥에
생계란을 얹어 드시는 계란이 먹고파,
아침 일찍 닭울음 소리에 닭장으로 가서
계란을 살짝 숨겨 나왔다는 이야기,
계란이 깨어져서 책과 가방이 다 젖어버렸다네요.
겨울에 찬도시락에 올린 생달걀 맛은 전혀 아닌...
저야 집에 닭장이 없어서, 그 먹고픈 기분을 모르지요.
요즘 아이들은 모르지요.
아버지에게만 드리는 생계란을 어찌 알까요. ^^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있다니
고맙네요.
어린시절 배고픈거야
어른들 소관이었지만
먹고픈 건 어린이 당사자들 이야기였지요.
그게 커지면 도둑이 되는데
우린 그런 씨앗 하나씩 품고 자랐을 수도 있지요.
오래전 근대사 드라마에서 연기자 박규채씨가 극중 즐겨 쓰던 대사가 '민나 도로보 데스'였던 기억이 나네요.
엽전이니 도둑이니 우리를 천대하던 그 말들을 우리 스스로도 참 오래 썼던 것 같습니다. 이제 국민소득에서 그들을 조금 앞지르긴 했지만 세계정세가 워낙 요동을 치는 때라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닌 건강이 약한 작은형 밥에 계란을 넣어서 주곤했는데 입이 짜른 형은 그 밥을 자주 남기곤 했어요. 건강했던 저는 어머니 마음도 모르고 형이 남긴 그 밥까지 급히 다 먹고 학교를 달려가곤 했지요.
가난한 시절을 살아온 이야기들도 보따리를 풀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ㅎ
맞아요.
사실 그런이야기도 많이하면 식상하기도 하죠.
석촌님 다마고 도로부 이야기
추억 속 어머니를 소환하고. .
민나 어쩌구 데쓰~
아마 예전 드라마 대사 탓일 겁니다.
드라마는 잘모르지만
광복정국에서 일본말 많이 들었답니다.
그옛날 국민학교 다닐때 서울서 제일 못사는 동네인 금호동에서 살았습니다. 얘들과 어울려 고무신신고 뚝섬밭으로 가서 오이서리. 가지서리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어머니는 수박껍질,참외껍질을 그냥 안버리고 고추장찌개를 끓이셨습니다.
지금와 옛날 생각하면 불평할 건덕지가 없을 정도로 다들 잘살고 있으나 근심걱정은 더 늘어난것 같습니다.
저는 수박이야 맛도 못보고 참외는 껍질 까지 다 먹었어요.
이젠 하늘에 계시니 여쭤 볼수도 없지만 .....
그 굴귀가 마음을 적시네요.
부족한 제글이 석촌님의 귀한 글을 불러 오니
영광입니다 .
국민들에게 돈을 나누어 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왈가왈부 하는 소식도 있다고 하던데 ...
왈가왈부 하데요.
그거야 정치이야기니까요.